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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1]

 

군인인 아빠는 많은 나라에 다녀왔다. 배를 타고 싱가포르나 하와이 같은 곳으로 ‘원양’이라는 것을 갈 때도 있었고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 1년씩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돌아올 때면 아빠는 까맣고 네모난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왔다. 번호로 잠그게 되어 있는 가방이었다. 아마 샘소나이트 가방이었을 것이다. 007가방이라 불리던 가방이었다.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데 가방 무게만으로도 무겁고, 어깨끈도 없어서 늘 손으로 들어야 하는 가방이었다. 기업의 비밀 서류나 돈다발이 차곡차곡 들어 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고, 액체 폭탄이 들어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다.


돌아온 아빠가 가방을 여는 순간을 나는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아빠도 보고 싶었지만 아빠가 가방 속에 담아온 외국의 물건들을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시장마다 수입품 가게라는 것이 있었는데 외국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곳이었다. 외국 물건들은 참으로 알록달록했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수입품 가게마다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커피를 타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저녁밥 짓는 시간이 다가오면 국자나 보온병이나 영양제나 스타킹 같은 것을 하나씩 사서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빠의 가방 속은 꼭 그 수입품 가게의 축소판 같았다. 가방 안에는 커다란 허쉬 초콜릿이라든지, 리바이스의 청바지,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사온 안네 프랑크의 일기, 런던의 2층 버스 모형, 네덜란드의 풍차 모형, 독일의 맥줏집에서 긁어온 종이로 만든 맥주받침, 그 외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식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꼭 요술 가방 같았다. 저 많은 것들을 하나씩 사들이고 모으면서, 귀국 전날 그것들을 저 가방 속에 꽉꽉 채워 넣으면서 아빠는 얼마나 들뜨고 뿌듯했을까.


다른 나라에 대한 아빠의 호기심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억누를 정도로 컸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는 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빠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행운이고 기회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쪼들리면서 살아가는, 외국 따위는 꿈도 못 꿀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아빠는 그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를 사고 모으면서 조금씩 떨쳤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산 사람이라서 좋았다. 내 기억에 아빠는 늘 즐거워보였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즐거운 일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하고 살았다. 혼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려고 했다. 그건 아빠가 특별히 가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남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돌아오면 아빠는 동네 사람들을 비좁은 우리 집에 초대해서 슬라이드 영사기에 찍어온 필름들을 넣고 벽에 쏘아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때의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풍경들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찍은 들판 위의 풍차와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와 런던의 새빨간 2층 버스와 깨끗한 지하철과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예쁜 집들과 푸짐한 미국식 식사와 노란 머리에 키도 크고 코도 큰 외국 사람들이. 사진 속 도시와 사람들과 심지어 사진 속 아빠조차도 같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요즘도 아빠는 우리가 친정에 갈 때마다 여행지에서 찍어온 디지털 사진들을 TV에 연결해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 사진 속의 나라들이 신기하지 않다. 나도 다 가봤으니까. 심지어 디지털 사진의 시대가 오면서 아빠의 사진 찍는 실력은 점점 더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진들이 태반이다. 대개 이런 식이다.


1. 도대체 누구를 찍은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사진
2.무언가를 하고 있는 엄마(대개 찍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성의 없는 구도로 카메라를 들이대 얼굴이 모아이 석상 부럽지 않게 크거나, 눈을 감고 있다.)
3.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 따위를 붙잡고 있는, 같은 표정의 사진 연작
4. 값싸고 맛 좋은 음식의 향연(과 기뻐하고 있는 아빠의 얼굴)
5. 사람은 블루스크린 앞에서 찍은 뒤 마치 배경만 합성한 것 같은 사진


우리는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하품을 한다. 딴 얘기를 한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한다.
“이제 그만 보면 안 돼?”
누구라도 1, 2, 3, 4, 5의 사진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면 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아빠는 어색하게 웃지만 기분이 상한 것이 전광판처럼 얼굴에 다 드러난다(그리고 나는 아빠를 닮았다). 아빠는 상영회를 조속히 마무리한 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엄마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애쓴다. 엄마가 10여 년 전에 암에 걸린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아무튼 대학생이 된 내가 고등학생인 남동생을 데리고 첫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본인이 더 흥분하고 들뜬 모양이었다(사실 우리 아빠는 잠잘 때 빼고는 늘 흥분하고 들떠 있다. 엄마의 진단으로는 성인 ADHD). 아빠는 우리를 끌고 백화점에 가서 배낭을 골랐다. 아빠는 50리터짜리 배낭을 권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에베레스트 등반에나 필요할 배낭이었다. 아빠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을 넣어 가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은 필요 없다고 했다. 밥은 사먹을 거라고 덧붙였다. 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 음식 체험이 아니던가.


아빠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빠의 경험상 호텔방에서 몰래 버너에 불을 붙여 코펠에 지은 밥에 통조림 깻잎이나 김치,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는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와 파리에 갔을 때도 코펠에 밥을 지어 먹거나 슈퍼마켓에서 산 빵과 맥도널드 햄버거로 연명했다고 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설득에 못 이겨 나는 50리터짜리 배낭을 샀다. 아빠가 권해서 복대도 샀다. 아빠는 늘 그러듯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복대의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바지 밖이 아니라 꼭 바지 안에 넣어야 한다. 여권과 항공권과 복사본과 귀중품은 꼭 여기에 넣어두어야 한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는 아빠의 말씀을 받들어 그 복대를 허리춤에, 그러니까 속옷과 바지 사이에 꼭 차고 다녔다. 원래도 아랫배가 나왔는데 이제는 거의 임신 5개월 수준으로 배가 나와 보였다. 복대에서 뭔가를 꺼낼 때마다 어린 시절 자주 보던 할머니들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거나 용돈을 줄 때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안에 달아둔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찾던 그런 할머니들 말이다(가끔은 손이 허리춤과 가랑이를 지나 거의 무릎 안쪽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열대의 기후에 복대까지 하고 다니려니 나중에는 허리춤에 땀이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의 경고대로 태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매치기인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내게 큰돈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복대를 풀어 배낭 안쪽에 고이 넣고 다녔다. 그 여행 이후로 수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운이 좋았다. 그 복대는 첫 여행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떠나기 전날 밤,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버너를, 한 손에는 부탄가스를 든 아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안 들고 갈 거냐?”


떠나는 날 아침, 김포 공항에서(그때는 인천 공항이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이런저런 상투적인 당부의 말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한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생수는 챙겼냐?”


그로부터 5년 후, 엄마와 둘이서 태국 여행을 갈 때 아빠는 500ml 생수병을 체류일의 수만큼 배낭 가득 채워갔다. 물은 역시 삼다수라면서. 다행히 버너와 부탄가스는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것까지 챙겼더라면 아빠는 테러범으로 검거되어 지금껏 귀국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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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2]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나는 머리에는 커다란 헤어밴드를 하고(신혼여행으로 간 일본의 편의점에서 산 무인양품 제품이다. 한마디로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목이 늘어난 회색 반팔 티셔츠에(남동생이 입다 버린 것) 역시 늘어진 미니스커트를 입고(산 지 10년은 더 된 것), 끈 달린 슬리퍼(이마트!)를 신은 채였다. 등에는 내 복덩이 배낭을 메고 어깨에는 잡동사니를 넣은 숄더백도 하나 더 멨다.


내 옆에 선 선남선녀의 인생이, 나는 부러웠다. 부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과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같은 거였다.


학창시절의 어떤 여자애들에 대한, 그 여자애들의 인생에 대한 감정이나 비슷했다. 말간 얼굴에 입을 가리고 웃는 여자애들. 조용히 말하고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여자애들. 교복에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셔츠의 목과 소매가 언제나 깨끗한 여자애들. 체육 수업을 마치고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난 후에는 손수건을 꺼내 찍어내듯 물기를 닦아내는 여자애들. 내 교복은 항상 구겨져 있었고 내가 수돗가에서 물을 틀기라도 하면 늘 옷이 흠뻑 젖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얼굴의 물기는 언제나 바람에 말렸다. 그런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자애들의 인생.


짐을 찾은 후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질 것이다. 나는 공항을 빠져나와 선착장으로 가장 싸게 가는 법을 찾아 헤맬 것이고,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급 리조트의 밴에 가볍게 올라탈 것이다. 내가 겨우 몸을 구겨 넣은 사설 셔틀 버스는 나를 끄라비 시내의 알 수 없는 장소에 내려줄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리둥절해 할 동안, 그들은 시 외곽의 리조트에 도착해 미소 띤 직원에게 방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을 것이다. 아름답고 청결한 방에 도착해서는 벨보이에게 팁을 좀 쥐어주고 방문을 닫을 것이다.

 

여자가 창 너머의 프라이빗 풀을 향해 걸어가면 에어켠을 켠 남자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를 것이다. 여자는 풀에 발끝을 담가볼 것이다. 남자는 “수영부터 먼저 할까?” 라고 물을 것이고 여자는 “수영은 나중에 하고 우선 구경부터 할까?” 라고 제안할 것이다. 둘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지금까지도 무거운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리조트를 산책할 것이다.


내가 겨우 피피행 페리 선착장에 도착해 떠나기 직전의 배를 잡아타기 위해 끝도 없이 긴 땡볕의 도크 위를 미친 듯이 달려 다이빙하듯 배에 뛰어들고, 커다란 몸집의 북유럽 남자들이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타기나 한 것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구겨져 있는 기름내 나는 지하 선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를 맛볼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인생이 나는 부러웠다. 그들의 인생 전반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을 운과 복이 부러웠다.


그때 내 인생의 운과 복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2주 동안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넘치고 복이 터져서가 아니라 남편이 실직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운과 복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이 정도면 내 주제에 과분할 정도로 운이 좋고 복이 넘치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씩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쓰셨던 일기장에서 훔쳐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참 박복하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내 일기장에 그런 문장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때 남편이 활주로를 걷는 나와 아이들을 뒤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나는 헤어밴드를 하고 배낭을 등에 메고 배낭에 운동화를 매달고 숄더백까지 어깨에 멘 채로 끈 달린 슬리퍼를 신고서 씩씩하게 걷고 있다. 늠름한 어깨와 탄탄한 허벅지와 단단한 종아리. 나의 뒤를 배낭을 멘 아이들이 쫓아오고 있다. 각각 헬로 키티와 도라에몽이다.

 

그리고 프레임 바깥쪽, 내 옆에 그 커플의 모습이 보인다. 팔짱을 낀 채로 단정한 차림으로 다정히 걷는 그 커플이. 나와 다른 인생을 사는 그 커플이. 어쩌다 우연히 같은 프레임 안에 담긴 사람들이. 그 사진을 통해 나는 내가 아닌 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옆에서 걷고 있는 그 커플의 뒷모습도 함께 본다. 둘은 한눈에도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처럼 살게 될 일도, 그들이 나처럼 살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운이고 복이고 상관없이, 그저 자기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우리는 잠시 끄라비라는 도시의 공항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고, 나도 거리에서 그들을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때때로, 나는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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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1]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한 커플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한국인들이었다. 단정한 머리 모양에 선글라스를 쓰고 바나나 리퍼블릭이나 클럽 모나코의 모델들처럼 차려 입고는 손에는 작은 가죽 가방을 든 커플이었다. 먼지도 흠집도 헝클어진 데도 없는 커플이었다. 순간 그들이 부러워졌다. 어쩌면 그들의 인생이.


방콕에서 며칠을 보내다 남부의 해안 도시 끄라비까지 비행기를 탔다. 끄라비에서는 아름다운 피피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비행기는 끄라비에 착륙하기 전 기류 불안정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고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한 중국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에게 동지의식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끄라비 공항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비행기가 기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기 시작했고, 구름을 통과할 때 복도를 걸어 다니며 승객들의 안전벨트를 체크하던 승무원들이 의자를 붙잡고 휘청거릴 정도로 기체가 흔들렸다. 아이들은 좋다고 깔깔대고 중국 아주머니는 괴성을 지르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목구멍 속에서 하느님과 알라와 부처님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면서 승무원들의 표정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일쯤이야 밥 먹듯이 일어나는 걸’ ‘기장님도 참!’ 의 얼굴로 생글거리며 복도 위를 협곡 사이에 놓인 흔들다리라도 되는 듯 위태롭게, 하지만 꿋꿋이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에 0.0002초 정도의 속도로 스쳐지나간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 비행기가 땅이나 바다를 향해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쳐 비행기 뒤편에 다다르면 커튼을 닫고 엎드려 울면서 기도를 하거나 부모나 애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산소마스크를 쓸 것이다. 하지만 땅 위에 추락할 때 구명조끼가 무슨 소용인가. 중국 아주머니를 끌어안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약 10분 후, 나는 살아서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서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할 만한 다짐(‘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따위는 늘 그렇듯 깡그리 잊어버린 내 곁에는 그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흰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여자는 구김 하나 없는 스커트를 입고 가벼운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 채로(이 더위에 스웨터라니!) 작은 귀걸이도 하고 엷은 화장까지 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열대의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단 한 번도 그들과 같은 차림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첫 여행 때는 집에서 입는 옷, 입다가 버릴 옷만 배낭 속에 잔뜩 쑤셔 넣어 갔다. 정말로 입다가 버릴 작정이었는데 집착이 심해서 양말 한 짝 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갖고 돌아왔다. 여행지에서의 구질구질한 내 모습에 짜증이 난 다음부터는 좋아하는 옷들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죄다 소매 없는 티셔츠, 소매 있는 티셔츠, 소매 대신 어깨끈이 달린 티셔츠였다. 허름한 청바지나 짧은 스커트나 핫팬츠를 가져가기도 했다. 내가 여행지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가볍고 얇고 잘 구겨지지 않고 빨았을 때 금방 마르는 것. 거기에 머리는 산발을 하거나(생각해 보니 머리를 빗지 않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 질끈 동여매거나 밀짚모자를 쓰거나 반다나, 또는 헤어밴드로 대충 가리고 다녔다.


게다가 나는 언제나 슈트케이스보다는 배낭을 선호한다. 나는 성큼성큼 걷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걷는 여자에게는 슈트케이스가 어울리지 않는다. 슈트케이스는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고 있어. 개처럼 질질’의 느낌으로 끌고 다녀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깨에 이고 다니는 쪽이다. 성큼성큼.


다만 내 여행용 배낭은 턱없이 작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호텔에서 열리는 유럽의 한 등산용품 브랜드 런칭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나도 한때는 그런 데 초대도 받고 그랬다.) 오로지 호텔 밥을 먹고 싶어 간 것인데, 그날의 메뉴는 감사하게도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스테이크보다는 납작하고 얇게 썬 노란색 버터가 얌전히 올려져 있던 작은 접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버터는 적당하게 물러져 있었고 나이프로 떠서 빵 위에 펴 발라 먹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버터의 맛은 참으로 호사스러웠다. 나는 빵 부스러기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비웠다.


곧 추첨 행사가 있었다. 입구에서 건넨 명함을 추첨해 선물을 주는 행사였다.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나는 원래 추첨이란 추첨에는 다 떨어지는 타입이다. 요행을 바래서는 안 되는 인생이다. 추첨장에서 나는 늘 남들이 펄쩍 펄쩍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나 지켜보다가 똥 씹은 얼굴로 집으로 향하는 인생이었다. 노력 없이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나도 이런 내 운명에 체념했다. 그래서 나는 복권도 사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본 적 없고 사볼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친구가 “복권이나 당첨됐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자존심이 있지, 난 복권 같은 건 안 사”라고 단호하고 매정하게 말한 적도 있다. 실은 자존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게 당첨 운이란 것이 있었다면 나도 매주 복권을 사댔을 것이다.


그런데 스테이크를 먹었으니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마음에 반쯤 넋을 놓고 여유롭게 배를 두드리고 있던 내 이름이 불렸다! 내가 당첨이 된 것이다! 나처럼 당첨 운이 없는 여자가 말이다!
운이나 복이란 건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걸까, 아니면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걸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어지는 걸까? 만일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거라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운과 복이 특정한 시기에 몰리기도 하고, 너무 일찍 찾아오기도 하고, 너무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운과 복을 제대로 누리지도못한 채 떠나기도 한다. 한 푼 한 푼 모아 방바닥 밑에 묻어둔 전 재산을 결국 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노랑이 영감처럼.


운과 복을 인생의 이 시기와 저 시기에 잘 배분해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정 플랜이라도 짜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내 운과 복들이 봄에 내리는 비처럼 인생의 모든 시기를 촉촉히 적시게 하고 싶다.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 행사장에서 나는 당첨 선물로 작은 등산용 배낭을 받았다.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살 배낭이었다. 하지만 튼튼한 배낭이라 여행 다닐 때 메고 다니기 좋다. 긴 여행에는 맞지 않지만 일주일 안쪽의 짧은 여행이나 짐이 가벼운 더운 나라를 여행할 때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여분의 신발까지 넣으면 가방이 터질 것 같아 신발은 주머니에 넣어서 가방 앞쪽에 끈으로 고정해 달아둔다. 그렇게 하면 그럭저럭 배낭여행자의 느낌이 난다. 그 배낭은 그 해 내게 주어진 운과 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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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2017-09-1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여행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chagall 2017-09-22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낭을 더 좋아해요. 질질 끄는 캐리어보다 등에 달라 붙어 나와 여행을 같이하겠다고 붙어 있는 배낭이 더 좋아요

ByulNuRy 2017-10-0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깨만 아프지 않다면 배낭이 백번 낫지요^^

선비 2017-10-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여행이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눈으로 발로 체험하는 감흥의 일기를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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