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량한 게이 시민이라는 환상

 

음란의 여부는 표현의 정도와 공개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권김현영에 의하면, 1950~60년대에 여성의 3인칭을 무엇으로 부를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중 ‘그녀’라는 말이 음란하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저잣거리에 주인 없이 여자가 혼자 서 있는 것이 상상되는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동성애=음란’의 공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웹사이트 ‘엑스존’이나 영화 <친구 사이?> 그리고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와 같은 동성애 표현물에 대한 음란 시비 역시 성적인 표현의 수위가 높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동성애자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그러니까 정신병자거나 남의 돈을 갈취하는 악당이 아닌 평범한 이웃과 가족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음란하다. 나쁜 존재를 미화하고, 청소년들이 보고 따라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음란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성애를 무조건 음란하다고 보는 주장은 오히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자면 쉽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음란하지 않다는 반박은 음란하지 않은 동성애자의 존재는 증명 가능하나, 한편으로 어쨌든 진짜 ‘음란한 동성애자’는 따로 있다는 여지를 슬쩍 남겨두게 된다. 실제로 이성애의 음란성과 같은 수준의 잣대를 적용하라는 동등함을 주장하게 되면서 대체 음란이란 무엇인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인지, 음란은 무조건 나쁜 것인지 등등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를 놓치기 쉬워진다.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곧 공평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실제로 ‘음란한’ 주체가 아니라 음란을 상상하는 주체가 훨씬 더 강자이기 마련이고, 상상하는 주체에 의해 무엇이 음란인지도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성애자는 음란하지 않다거나 혹은 동성애라는 행위를 변태적 성행위의 목록에서 빼라는 방식의 운동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이를 경고하는 대표적인 학자들이 데이비드 벨(David Bell)과 존 비니(Jon Binnle)다. 그들은 2000년도에 출간한 자신들의 저서를 통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동등이 자연스럽게 ‘정상’을 지향하게 되고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시민이 된다는 명목하에 이성애 중심의 규범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을 지적한다. 가령 ‘가족을 선택할 권리’라는 미명하에 동성애자도 결혼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사회적 다양성이 더욱 존중되는 것인 양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동성애자가 결혼한다고 해도 가족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 기반이며 바로 그 가족이 커플 중심의, 일부일처제를 기반으로 한 사적화된 결합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그 체계는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권에 대한 이런 협상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선량한 게이 시민(good gay citizen)’으로 길들인다는 것이다. 선량한 게이 시민이란, 이성애 규범적인 모델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동성애자를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나쁜 게이 시민(bad gay citizen)은 이에 동참할 의지나 능력이 없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 되고, 이들이 비시민의 영역 안에 놓이는 것도 당연시된다.  

 


 

선량한 게이 시민이란 없다

사실 성적시민권에 대한 국내의 논의는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닌데, 서동진이 쓴 몇 편의 글과 레즈비언 시민권에 대한 연구발표회 자료집이 나와 있고,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에서 계속 활동의 화두로 가져가고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모두 입을 모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서구에서 진척된 이런 논의들을 참고하여 한국에서도 동성애자를 탈성애화하여 ‘선량한 게이 시민’으로 만들고자 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산지석이 나쁘지는 않지만, 근래의 논의를 보면 너무 앞서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도 든다. 특히 최근의 서동진의 글이 그러한데 그는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이미 ‘좋은 게이 시민 되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처럼 지레 예단하고 있다. 그는 ‘좋은 게이 시민 되기’라는 기획을 경계하며 서구의 보수화된 성정치 운동이 한국에도 이식되었다는 단언 아래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 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라며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며 조롱을 던진다.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이들이 실제로 있는가라는 논의는 둘째 치더라도 융숭한 대접이 있다 해도 ‘시민’으로서 받는 것인지 또한 좀 더 치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레즈비언의 현실은 간과되어 있다. 일반적 논의에서 게이는 남녀 동성애자 모두를 총칭하는 단어임에도, 더 이상 남성 동성애자 중심의 논의를 지겹게 반복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서구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에 근거한 비판들을 살펴보자. 서구에서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와 함께 이성애자와 동등한 동성애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성정치가 부상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국가와 사회의 규제와 통치에서 벗어나 자율적 존재로서 발전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처럼 다룬다. 정상적 시민으로 인정받으려는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하위문화를 스스로 부정하고 건전한 커뮤니티로 가꾸면서 동성 결혼을 평등권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이성애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동성애자들의 결혼은 이성애 중심적인 결혼을 오히려 강화시켜줄 것이며, 동성애자는 저항적 주체가 아닌 기존 사회의 순응자가 될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물론 한국도 신자유주의의 예외는 아니니 이에 어느 정도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국에서의 성적시민권 논의가 그렇게 노파심과 비아냥거림으로 가득 차도 될 것인가.

가령 50~60년대에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라고 밝혀지면 직장에서 혹은 군대에서 그대로 쫓겨나는 망신을 당해야 했고, 게이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경찰들의 습격을 받으면 그대로 잡혀 다음 날 신문에 이름이 공개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심지어 남성 간의 섹스를 금지하는 법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도 2003년에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불법적 존재에서 합법적 존재로의 전환이 운동의 중요 과제였던 서구와 달리 유난히 동성 친밀성이 강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동성 간의 성애를 오히려 우정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한국에서, 그리고 가족 관계가 사회적 위치와 너무나도 밀접한 한국에서 동성애자가 사회적으로 ‘시민권’을 획득한다는 것이 같은 수순을 밟게 될까. 오히려 이런 시각이 한국 동성애자들의 일상을 하찮게 만들어버리고 억압도 어설프게 중화시켜버릴 가능성이 있지는 않은가.  

계급 문제와 정체성 문제가 헷갈리면 소수자를 단일화시킬 우려가 있다. 결혼, 가족, 군대, 시장, 세계화, 도시 공간, 그리고 친밀한 관계 등 모든 것이 역시 성적시민권과 관련된다. 이 모든 영역에서 동성애자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 벨과 비니는 동등한 권리 요구를 모두 동화주의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구분하고 있다. 동등한 권리 요구는 현재의 차별에 대한 저항의 계기를 표현하는 방식일 뿐, 어차피 선량하고 좋은 이성애자 시민이란 개념도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 역시 선량하고 좋은 게이 시민이 될 수 없다. 일등시민으로 지내다 삐끗 잘못 헛디뎌 이등 시민으로, 비시민으로, 나쁜 시민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애, 동성애를 조장하다

아무리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고 문화적 이해가 넓어진다고 해도, 다시 말해 좋은 게이 시민이라는 환상이 유포된다고 해도 다른 시민을 나쁘게 ‘조장’할 의심을 받는 한 동성애자는 ‘시민’이 될 수는 없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바로 이 ‘조장 가능성’인데―동성애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조차 끝까지 못미더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동성애는 조장하거나 조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방영에 항의해 두 번이나 신문에 방송 중단을 요구했던 광고의 요지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비단 청소년 보호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전국의 구금시설에 수감된 이들이 보는 방송은 ‘보라미 방송’이라 하여 법무부 교정방송센터에서 관리하고 있다. 보라미 방송은 4월부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녹화하여 제공했으나, 8월 9일에 높아진 동성애 비중이 교화방송의 목적에 맞지 않아 중간 종영한다는 자막과 함께 방송을 중단했다. 지난 10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인권 단체들이 질의서를 보내자 법무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성과 차단되어 동성을 집단으로 구금하고 있는 교정시설의 특수성에 비춰볼 때 수용질서 유지에 장애가 되며, 음란 등 미풍양속에 반한다고 판단되어 형집행법 시행규칙 제40조 제3항을 근거로 이를 중단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드라마에서 이성끼리는 흔히 나누는 키스신 하나도 동성 간에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임에도 미풍양속에 반하고 수용질서 유지에 장애가 된다는 것은 동성애가 매우 강력한 ‘조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나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구금시설 바깥의 사회가 이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는 건 이성 혼합 공간이기에 가능하다는 말일까. 금지의 사유로 내세운 ‘동성 집단 시설’이라는 특수성은 향후 동성애 관련 문화에 대한 검열 조치들을 군대와 학교 등 동성 집단 사회 전체에 적용시키는 잣대가 되지는 않을까. 공공시설에서 동성애 관련 드라마의 상영 중단은 우리의 공간이 얼마나 이성애 중심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제 공간의 성적시민권에 대한 논의와 분석으로 넘어가보자. 
 



 


참고문헌

Bell·David·Binnie·JON, The Sexual Citizen: Queer Politics and Beyon, London and New York: Polity Press, 2000.
서동진, “좋은 게이 시민이 되어버린 동성애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제22호, 2010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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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지도 못한 난제들이 수두룩하네요.
 


4. 이등 시민과 선량한 게이 시민 사이의 함정들

 

이등 시민, 음란과 싸우다

2001년 당시,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인터넷이 지나치게 개방되어 있는 것을 걱정하여 ‘인터넷내용등급제’를 실시하려 했다. 표면적으로는 불건전한 외국 사이트의 접속 차단 리스트일 뿐 국내 사이트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알 권리를 단속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이 법의 등급선정기준표에 의하면 동성애는 ‘퇴폐 2등급’의 자리를 배정받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음(DAUM)과 세이클럽의 동성애자 친목 모임 중 몇 곳이 음란성, 풍기문란 등을 이유로 1차의 경고도 없이 폐쇄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보통신검열반대 공동행동’이 꾸려져 대응책을 찾던 와중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터넷 사이트인 ‘엑스존(EXZONE)’이 ‘청소년유해사이트’ 목록에 올라 있었으며, 1년이 지나도록 사이트의 운영자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그 결정의 근거를 묻자,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 기준을 정해놓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7조의 ‘수간을 묘사하거나 혼음, 근친상간, 동성애, 가학·피학성 음란증 등 변태성 행위, 매춘 행위, 기타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한 성관계를 조장하는 것’이란 조항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이 조항에 의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심의당한 것은 1998년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버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자들로부터는 너무 건전하고 학술적인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야 할 정도였지만, <버디>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청소년보호법 10조 1항 1호의 ‘청소년에게 성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선정적인 것이거나 음란한 것’에 저촉되니 잡지를 전량 수거하라는 통지문을 매달 받고 있었다.

1997년에 제정된 청소년보호법 내에 포함된 심의 기준은 아마도 그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갖가지 공공 매체물에 관한 심의 기준을 참조했던 것 같다. 1997년에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란 영화가 동성애가 주제라는 이유로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수입 상영이 불허된 적이 있다. 이는 영화진흥법시행규칙 제6조 ‘근친상간, 윤간, 동성연애, 수간, 집단적 성행위, 기타 변태적 생행위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은 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규정에 근거한 조치였다. 이것은 단지 청소년을 보호하는 취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한국잡지자율윤리위원회의 성인·대중잡지 매체 심의 기준 1조 3항에 나와 있는 음란퇴폐물의 기준을 보면 ‘혼음, 수간, 동성연애, 가학·피가학성 등 변태적 성행위를 음탕하게 묘사하여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은 어떨까. 우선 그때의 엑스존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결정에 항의하여 사이트를 자진 폐쇄하고, 동성애자 인권을 침해하는 청소년보호법의 부당함을 알리는 캠페인과 함께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고시 철회 청구’ 행정 소송을 냈었다. 항소심까지 끈질기게 항의를 했지만 결과는 패소였다. 하지만 졌다고만 하기엔 얻은 것이 훨씬 많은 싸움이기도 했다. 2003년 12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에 이미 2003년 4월에 청소년보호위원회는 다음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개정 때 ‘동성애’라는 항목을 빼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고, 2004년 4월 30일자로 동성애 항목은 유해 심의 기준에서 제외되었다. 특히 이 엑스존 소송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보여준 분명한 태도 때문이다. ‘단지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헌법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인 행복추구권, 평등권, 인격권, 성적자기결정권 등을 침해한다’라며 청소년보호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성애자의 시민권을 법적으로 긍정하고 명시한 첫 번째 사례다.

두 번째 사례는 2009년에 김조광수 감독이 만든 20분짜리 단편영화 <친구 사이?>가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사건에서 비롯된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영상의 표현에 있어 성적 행위 등의 묘사가 노골적이며 자극적인 부분 등 청소년에게 유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그 사유를 밝혔다. 이에 제작사 청년필름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분류 취소 청구 소송을 냈고 2010년 9월 9일 마침내 승소하였다.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영화를 관람하는 청소년들에게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성적 자기정체성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교육적인 효과도 제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밝히면서 “동성애를 유해한 것으로 취급하여 그에 관한 정보의 생산과 유포를 규제하는 경우,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 속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및 알 권리, 표현의 자유, 평등권 및 헌법상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라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이등 시민, 음란의 길을 묻다

영화 <친구 사이?>의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취소하라는 판결의 내용은 7년 전의 엑스존이 청소년유해매체사이트 고시를 무효로 해달라고 낸 소송의 판결과 아주 흡사하다. 비록 엑스존은 패소했지만 <친구 사이?>의 승소는 엑스존이 남긴 유산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영상물등급위원회(전 공연윤리위원회)의 주장 역시 7년 전 정보통신윤리위원회(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했던 말들과 똑같다는 점이다. 또한 앞으로도 음란과 청소년 유해성을 연결하는 그 논리는 동성애를 다루는 드라마나 영화, 잡지 등의 모든 매체들을 계속 공격할 것이라는 점이다.

법원이 동성애자의 시민권을 헌법에 명시된 대로 짚어주는 것은 꽤 중요한 상징적 성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동성애자의 성적시민권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엑스존이 음란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재판부에 엑스존 홈페이지의 게시물들을 증거 자료로 제시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 자료를 나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솔직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스크랩한 게시물의 내용이 너무 음란하지 않아서였다. 고작해야 “어제 어떤 분과 섹스를 했는데, 에이즈에 걸릴까요?”라든지 “저와 사귈 의향이 있는 형을 찾습니다” 정도였고, 인터넷의 수많은 이성애를 다룬 사이트들에 올라온 글이나 사진들과 비교한다면 감히 ‘음란’을 다툴 정도도 되지 못했다. 이런 어이없음은 영화 <친구 사이?>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김조광수 감독은 영상물등급위원회의 결정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심의를 받았으나 무사히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불꽃처럼 나비처럼>과 <마린보이> 등을 보여주며, 심의 기준의 편파성을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일련의 흐름들을 지켜보며 내심 불안해진다. 그들이 너무나도 허술한 증거들로 음란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음란의 증거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두 개의 점을 찍고 줄을 그어 잇기만 하면 될 뿐이지 않았나.

만약 우리 스스로 동성애자가 음란하지 않다고 주장하려면 기존의 음란이 법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지, 일반적으로 어떤 기준이 적용되는지를 따지면 된다. 차별이 없으려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에게 그 음란의 정의와 기준이 동일하게 적용되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권리의 새로운 의미화이고 재해석이며 근본적인 저항일까. 그 누구도 감히 훼손시킬 수 없는 동성애자의 행복추구권, 평등권, 인격권 등이 주르륵 열거되어도 그와 같은 이유로 동성 간의 결혼이 인정되거나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또 다시 의심하며 따져볼 수밖에. 뭔가 한걸음 더 나아간 듯하지만, 어떻게 다시 동성애자는 타자가 되고, 이성애주의는 강화되고, 소외와 배제는 은밀하게 작동되는지 말이다.


*


참고문헌

정민·한채윤, “은밀하게, 조금씩... 그런 차별이 더 무섭다.” 2002년 봄호(통권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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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바이스 2010-10-1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고 있었는데, 승소했군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한채윤 2010-10-2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델바이스님. 감사합니다. ^^

비로그인 2011-05-2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혼한 여자가 사회생활하면서 차별 받는 것에서 아직도 못 벗어났습니다. 약자로서 사회의 냉대에서 벗어나려면 전문직, 고소득직으로의 사회진출과 정직하고 성실한 생활태도이겠지요.
 


3. 성적시민권과 섹슈얼리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던진 질문들

SBS에서 방송중인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드라마 안팎으로 소동을 겪고 있다. 드라마 내에서는 사랑에 빠진 두 명의 게이 커플이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해서 눈물을 쏙 빼놓더니 이젠 금방이라도 결혼식을 올릴 분위기이고, 드라마 밖에서는 동성애를 미화하는 드라마를 당장 중단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 나라의 청소년들을 게이로 만든다는 비난 광고가 일간지에 실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방송에서 게이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국민 드라마라고 불릴 만큼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주몽>에서도 게이로 의심되는 캐릭터가 등장했지만, 이렇게까지 논란이 되지는 않았다. <개인의 취향>에서는 아예 남자주인공이 게이인 척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를 오해한 다른 남자로부터 프러포즈를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리지는 않았다. 비록 여자가 남장을 했다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에게 사랑을 느낀 남자주인공들이 모두 자신이 동성애자인건 아닌지를 고민하다가 결국은 남자라도 좋다고 결론을 내리고야 마는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성균관 스캔들>과 같은 드라마도 있는데, 왜 유독 <인생은 아름다워>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전 드라마들과 <인생은 아름다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게이 커플인 태섭과 경수가 이미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이라는 점과 이 드라마가 가족드라마를 표방한다는 부분에 있다. 성정체성을 모호하게 에두르고 있거나 자신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단계도 아니다. 그들은 이미 결혼도 했다가 이혼을 택했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커밍아웃을 할 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확고하다. 이런 두 사람이 시청자들에게 들이미는 것은 단지 ‘나를 동성애자로 인정해주세요’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의 사랑을 인정하라’는 매우 구체적인 요구다. 이성애자 여성들의 친절한 게이 친구로서가 아니라, 예술적 재능과 지략이 넘치는 게이 보좌관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당신과 나란히 앉아 함께 숨 쉴 바로 그 옆자리를 요구한다. 이러니 김수현 작가에게 태섭과 경수가 나오면 순간 시청률이 떨어진다며 둘을 외국으로 보내면 안 되냐고 했다는 방송국의 요청은 농담이 아닐 것이다. 이들 게이 커플의 요구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저 조용히 채널을 돌려 회피할 수밖에. 아니면 입 닥치고 다시 얌전히 벽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하거나. 
 


그동안 우리 사회는 동성애를 재현하는 것 자체를 회피해왔다. 그렇기에 재현된 동성애를 회피하는 경험조차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허구임을 뻔히 아는 드라마에서의 설정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과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거리에서 오다가다 어깨를 부딪치고 집에서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현실 속 동성애자들을 대체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동성애자는 특정 순간에만 잠시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비루하게든 고상하게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 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몰랐던 것일까. 2010년, <인생은 아름다워>는 한국 사회에 성적시민권을 이렇듯 불쑥 던져 놓았다.


동성애자로서 시민이 된다는 것

성적시민권(Sexual Citizenship)이란 단어는 사실 좀 낯설다. 그리고 왜 시민권이란 말로 모두 포괄할 수 없는지 궁금할 수 있다. 이것을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장면을 떠올려보면 된다. 동성애자를 비난할 때 사람들이 가장 잘 쓰는 표현은 ‘이성애자답지 못하다’라든지 ‘이성애자가 되라’와 같은 말이 아니다. 흔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거나 ‘인간답게 행동해라’와 같은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이런 무의식적인 반응은 이성애를 동성애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정체성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음을 반영한다. 이성애는 철저한 자기 증명 없이도 안전하게 자신의 정상성 여부를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위치에 간단히 등극하고, 동성애는 처절하게 인간/비인간의 격전지로 내몰린다. 즉 시민권은 보편적 인간을 상정하고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다루는 외형을 취하고는 있지만, 동성애와 동성애자는 그 보편성에서 빗겨나가 있는 것이다.

앞서 시민권은 완전히 평등한 그리고 독립적인 개인이 (국민국가 안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가지는 권리와 의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일 뿐, 그냥 얻어지지는 않았다. 현실에서는 피부 색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출신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별의 차이, 좀 더 정확하게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훼손당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권리 주체임을 인정받기 위해 지난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성적시민권은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섹슈얼리티와 시민됨을 부각하고 더욱 본격적으로 연결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1993년에 데이비드 에반스(David T. Evans)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어왔다. 
 


게르트 헤크마(Gert Hekma)는 “성적시민권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이어주고, 성적 표현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성적인 프라이버시는 개방된 성문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동성애자에게 사귀는 애인이 있을 경우, (성관계는 분명 자신의 침실에서 갖겠지만) 그 애인을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인터넷과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나 술집과 거리 등의 공적 공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 몸의 자율성, 제도적 포함의 권리를 비롯한 공간에 대한 주제까지 모두 성적시민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로운 성적 표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 하면, 종종 그나마 (관용의 마음으로) 차이를 포용하려던 사회 주류의 인내심에 대한 도발로 오해하곤 한다. 특정 섹슈얼리티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특정 섹슈얼리티를 제외한 모든 섹슈얼리티는 사회적 범죄와 종교적 죄악 사이에 놓여 있다. 위험하거나 타락한 그 무엇으로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성전환 등이 언급되었고, 감시와 처벌, 통제와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성적 실천은 곧 사회적 무질서로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회적 윤리를 세우고, 건강한 이웃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 실천으로 명분을 쌓는다. 그런 까닭에 성적시민권에 대해 사회적으로 논의하는 일은 격렬한 논쟁의 미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성적시민권은 또한 매우 분명하게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성애의 가치를 믿는 것과 이성애 중심적인 규범을 세워 놓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공공연하게 모욕과 저주를 퍼붓는 일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는 어떤 가치관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살 것인가, 그 사회는 시민들의 어떤 삶의 결을 담아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성적시민권은 단지 성적 시민이 되기 위한 인정 투쟁이 아니다.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만큼의 시민이 되게 해달라는 주문도 아니다. 동성애자로서 시민이 된다는 것이 가장 먼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확실히 ‘이성애자로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성애자인 척해서 얻는 것은 필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시민됨에 있어 강력하게 작동하는 이성애 규범성에 대한 저항과 해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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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sac, <레즈비언은 시민인가-한국 사회의 성적시민권에 관한 논의>, 미간행자료집 Gert Hekma, Sexual Citizenship, 2007.
http://www.glbtq.com/social-sciences/sexual_citizenship.html (검색일: 2010년 10월 1일)
서동진, “성적 시민권과 비이성애적 주체”, <한국의 소수자, 실태와 전망>, 한울아카데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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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성애자 자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정의 고민은 이웃의 눈이 더 문제입니다.
 


2. 주권은 국민에게서, 국민은 이성애에서

 

레즈비언은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2008년의 여름, 거리가 온통 촛불로 뜨거웠을 때 나도 그곳에 있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그래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정치인으로서 국회의원에 도전했던 최현숙 선거운동본부 사람들과 함께 동성애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아래에 서 있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넋을 위로하기 위해, 거대 야당의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꼴이 너무 기가 막혀 몇 년 전에도 똑같이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었지만, 그날의 기분은 좀 달랐다. 눈앞을 거대하게 가로막은 ‘명박 산성’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외치던 구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그 외침.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에 대한 호령은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국가와 국민(시민)이 맺은 계약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듯했다. 이전의 집회에서 늘 사과하라, 철회하라, 중단하라 등의 끝말만 명령체일뿐, 내용상으론 오히려 읍소를 해야 했었다면, 지금은 국민이라는 자격에 기반을 둔 채 집합적 권리를 드러내고, 위정자의 문제를 지적하며, 정책의 시정을 명령하고 있지 않은가!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호가 반복될수록 나의 목소리는 도리어 점점 작아졌다. 문득 혼란스러움이 덮쳤다. 나는 정말 이 공간에서 국민인가. 얼마 전 선거를 치르면서 숱하게 받았던 ‘레즈비언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그 의심 가득했던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될 수 있을까. 광우병 우려가 있는 쇠고기 수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정부에 항의할 때는 정치적 주체로서 국민임이 틀림없으면서도,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내세워지면 갑자기 탈정치화 되고 마는 것일까.  

서울 종로구의 출마자였던 최현숙 후보의 선거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후보가 소속된 당의 자유게시판에 넘쳐나던 우려들, 또한 지역구 당원들이 내놓던 선거 전략들,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서 성 정체성에 관한 이슈가 선거 초반에 무명의 정치인에게 필요한 시선끌기용 이상의 것은 결코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동성애자도 끌어안는 진보정당의 이미지는 좋다. 하지만 동성애자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은 곤란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동성애자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좋다. 하지만 지역구 내 다수를 차지하는 주민들의 이익도 잘 챙길 통 큰 정치인이란 이미지도 가져야 한다는 식이었다. 가장 대처하기 어려웠던 입장은 레즈비언인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정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언뜻 이 말은 레즈비언이어도 괜찮다는 관용의 태도 같지만, 실상은 레즈비언이란 정체성은 아예 꺼내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섹슈얼리티는 후보자의 사생활이지 정치적 주제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상대편 남성 후보들이 “가족을 돌보는 가장의 마음으로 지역구를 챙기겠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쉽게 ‘모두를 위한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역구 선거인만큼 주민들이 낯설어하는 레즈비언 후보가 아니라 유일한 여성 후보임을 부각해라, 유일한 진보 진영 후보임을 내세워라 등의 주문도 있었다. 동성애자임이 드러날수록 후보가 얼마나 용기 있고 당당한 인물인지는 강조되지만, (아마도 이성애자일) 다수의 유권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할 정치적 대리자로서는 멀어질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정체성이란 그간 살아온 삶의 조각이련만, 불과 몇 달 앞서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대기업의 사장을 몇 년 동안 역임했다는 경험이 경제를 살릴 능력으로 해석되는 것과는 달랐다.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의 궤적은 억압과 차별받는 약자로서 재현되지 않는 한 별다른 사회적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하기 어렵다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각나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은가.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고 해서 특별히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대표하거나 대변해왔던 것도 아니었음을.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될 수도 없고, 마땅한 정치적 대리자도 가질 수 없는 모순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음을 이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시민권에 대한 다른 상상

시민이라고 하면 도시 거주자란 의미가 먼저 떠오르지만, 여기서 시민은 국민과 유사하다. 시민권은 곧 성원권(membership)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그곳에 등록된 사람들로 그 구성 요소를 삼는다. 모든 시민은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 평등한 개인임을 전제하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시민권이 중요한 결정적 이유는 그것이 분배, 즉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분배’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민과 비시민의 구별은 분배의 기준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시민권의 역사는 끊임없는 포함과 배제의 투쟁 과정이기도 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담았지만, 프랑스 여성들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은 1948년에 남녀 평등한 참정권을 인정한 한국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 1944년이다. 지독한 인종차별 국가였던 미국이 남북 전쟁을 통해 흑인 해방을 선언하고, 1870년에 흑인 남성들에게 형식적이나마 투표권을 인정한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백인 여성들의 참정권이 그보다 50년이나 늦은 1920년도에 법으로 제정된 것은 놀랍다. 물론 진정한 시민권 쟁취를 위한 흑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은 1960년대에야 어느 정도 결실을 맛보지만.

이쯤에서 문득 대한민국 시민의 자격 요건에 반드시 이성애자여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를 심사하거나 증명서를 발급받아 오라는 절차 따위는 없다. 단지 부모가 한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 영토 내에서 태어났다면, 시민권 획득은 어렵지 않다. 동성애자 시민을 환영하지도 않으면서 특별히 까다로운 선행 규정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애당초 동성애자의 존재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동성애자가 있을 줄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도 아닐 터이다. 만약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면, 이미 존재가 드러난 이상 뒤늦게라도 색출하거나 불법화했을 테니. 그렇다면 성별 차이나 인종의 차이, 출신 국가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은 다른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따져보자면 이는 존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다시 말해,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인식의 부인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를 부인하는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이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바로 아프리카 우간다와 같은 경우다. 우간다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자국에는 동성애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천명하면서도 또한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하면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외국에서 빗발치는 인권 침해라는 비난은 ‘내정 간섭’이라고 거부하고, 이것이 우간다의 민족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또 반대로 가장 교묘한 사례라면, 앞서 예를 들었던 미국 군대의 ‘묻지도 말고 답하지도 말라’는 정책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세 가지 사례를 통해 그 복잡성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 사례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본부 조직위원회가 발간하는 <민족의 진로> 2007년 3월호에 실린 “실용주의의 해약에 대하여”라는 기사다. 이 글은 “외국인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등을 언급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비롯되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진단해 큰 논란이 되었다. 즉 범민련은 민족성 안에 동성애자라는 존재는 없다고 전제한다. 지금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외부에서 수입된 가짜 국민인 셈이다.

두 번째는 2010년 8월, 고국으로 돌아가면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파키스탄 이주노동자가 제출한 난민 신청을 서울고등법원에서 인정한 사례다. 법무부에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강제 출국을 시키려 했으나, 사법부는 동성애 처벌에 대한 공포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 정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란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외국인 동성애자의 난민 신청을 인정함으로써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인권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우는 효과가 기대된다.

마지막 세 번째 사례는 차별금지법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특권과 차별을 없애는 실질적 법제도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출발했던 차별금지법은 입법 예고 과정에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일부 종교인의 반대에 부딪치자 성적 지향을 비롯한 7개 항목을 차별 금지 사유에서 삭제했다. 법무부는 차별조장법이 되어버렸다는 비난 속에서도 법 제정을 강행했으나, 17대 국회의 회기 만료로 법안은 자동 폐기되었다. 이 지점에서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법무부가 동성애자에 대한 명백한 혐오를 드러내는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뺀 것이 아니라 ‘기타 등등’으로 더욱 폭넓게 포함했다고 주장했지만, 입법 예고 당시의 법안이 거의 5년 가까이 준비하고 다듬어온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동성애자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것까지 처벌하는 우간다 정책도 아니고, 무엇이든 다 해도 좋지만 과시하지만 말라는 벽장 정책도 아니다. 이는 학교와 교회, 직장, 거리 등 공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민과 시민 사이의 차별에는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 표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시민권의 자유로운 행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모든 시민이 똑같은 시민권을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인식의 범위가 어디까지일 것인지,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다투게 될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와 포함의 잣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먼저 시민권의 외부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시민권이 확장되려면 뻗어나갈 바깥부터 있어야 가능할 테니 말이다. 이제 질문은 동성애자로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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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김현영,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한겨레21>, 제702호, 2008년 3월 20일.
진보적 성정치 연구모임, <진보적 성정치―성적 시민권과 ‘퀴어’운동>, 진보적 성정치 연구모임 워크숍, 2007.
이재영, “동성애 바라보는 민족사적 변태?”, <시민사회신문>, 제8호, 18면, 200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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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고 있어요 :)

이상중 2010-11-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별 금지법'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는 법안임에도. 종교인들의 반대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변해버렸죠. 종교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을수가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 가운데서도 이 법안을 온전히 통과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기억해주세요ㅋ

비로그인 2011-05-2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매매,성폭력,성추행,성상납등의 성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은 우리사회의 이성애자 지도층에 넘쳐납니다. 동성애자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면 시민이요, 군복무를 마쳤다면 국민이요.
 


1. 들어가며

 

어느 커밍아웃을 위한 변명

지상파 방송 못지않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인 <슈퍼스타 K>에서 한 명의 도전자가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자신의 나이와 이름을 밝힌 뒤 곧바로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했고 동성애도 똑같은 사랑일 뿐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가 합격했으면 사태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탈락을 했고 인터넷엔 그의 커밍아웃에 대한 온갖 반응으로 넘쳐났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 괜찮을지 걱정된다는 격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로 왜 오디션 자리에서 뜬금없이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냐, 동정표를 노린 것이냐, 관심을 끌고 싶냐 등의 비아냥거림이 많았다. 격려든 비난이든 그의 커밍아웃의 초점은 ‘굳이 먼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일을 말했다’는 것에 있었고, 자연스레 그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답한 입방아가 그 뒤를 따랐다.

솔직히 나 역시도 처음엔 그의 커밍아웃이 참으로 뜬금없게 느껴졌다. 그는 왜 커밍아웃을 한 걸까 궁금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슈퍼스타 K>에 동성애자도 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만의 비밀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방송에 출연한 셈이 된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고 밝혀내려 한 사람도 없는데 ‘숨긴다’는 것이 성립될까? 아무래도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흔하디흔한 이성애자로 별 의심 없이 간주되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쉽게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밝힌 것이라면 그런 ‘정확한’ 자기소개가 ‘굳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내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 일간지의 칼럼니스트는 <슈퍼스타 K>의 진짜 미덕은 긴장이 감도는 경쟁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시대의 결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출연자들의 감동적인 여러 뒷이야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말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는 출연자들이 부모님 생존 여부부터 학창 시절 왕따였는지는 물론이고 같은 출연자들 중에서 누굴 좋아하고 있는지까지 모두 다 고백하는 장면을 매주 지켜보고 있다. 그러므로 <슈퍼스타 K> 도전자의 커밍아웃에 대한 비난은 부당하다. 어쩌면 그가 매우 사적인 섹슈얼리티를 폭로한 것이므로 가족 관계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어떤 남자 도전자가 여자 친구에게 우승의 영광을 돌리겠다고 말함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이성애적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상형은 김태희라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성애 섹슈얼리티를 과시한다 해도 결코 ‘뜬금없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직접 말하기 전까지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선언도 없었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성애적인 욕망을 드러내면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를 이성애자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 역시 그렇게 간주될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성애자의 이성애자로서의 커밍아웃은 불필요하며 동시에 불가능하다.  


 

‘아무도 모를 일’이란 것의 정체

어느 도전자의 커밍아웃 소동을 되짚어보자. 사람들은 ‘네가 게이인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았다’라며 지적했지만, 핵심은 동성애자라고 불쑥 ‘밝힌’ 그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동성애’라는 특정 정체성이 밝혀진 데 있다. 또한 그의 고백이 충격적이었던 것도 그의 발언 자체가 지닌 폭발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좁디좁은 상상력의 한계 때문임도 자인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옆자리에 있는 친구가 갑자기 진지하게 “있잖아. 나 이성애자야”라고 한다면 우리는 얼결에 “누가 그걸 몰라?”라고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비해 동성애자는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 정말 맞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일이기에 마침내 발화(發話)는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알고 좋아하기는커녕 기겁을 한다면 그건 아마도 그 정보가 차라리 몰랐으면,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의 거부감은 다시 말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며 궁금하지 않은 것을 알려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어쩌면 그 도전자는 예의바르게 허락부터 구해야 했을지 모른다. “제가 저의 성 정체성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라고…….

곱씹어보면 ‘아무도 모를 일’이란 참 무서운 말이다. 미국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서 폐지하겠다고 약속한 정책으로 미국 군대 내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ADT: Don't Ask Don't Tell)’라는 법이 있다. 동성애자의 군입대와 군복무를 허용할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격렬해지자 당시 클린턴 정부는 이런 기발한(?) 타협안을 선택했다. 즉 동성애자인 것을 묻지도 말고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면 누가 동성애자인지 알 수가 없고, 그렇다면 동성애자의 근무 여부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부대 내의 누가 동성애자인지 대충 눈치로 알 수 있고 사적으로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그것은 절대로 ‘아무도 모를 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확실히 이 정책 이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복을 벗는 일은 감소했다. 이 법은 동성애자의 색출과 퇴출을 금지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일부러 드러내기 전까지는 안전하게 군생활을 원하는 만큼 지속할 수 있다. 그러니 확실히 예전보다 더 안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하다. 
 

 

1993년에 만들어진 이 국방부 지침이 매우 교묘한 차별이자 억압이란 점에서 그동안 이 지침이 헌법 정신을 어기고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소송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가 아니라 ‘묻고 말하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커밍아웃을 할 권리를 달라는 주장이 아니다. (사실 커밍아웃을 할 권리란 말은 참 이상한 말이다.)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군대 생활을 하게 해달라는 주장도 아니다. (이성애자와 동등해지는 것이 고작 동성애자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스스로를 부인하며 살지 않겠다는 것일 뿐이다. 미군 중위였으나 커밍아웃 후 최근 해임당한 한인 2세 댄 최(Dan Choi)는 자신의 행동을 ‘양심을 지키고 싶어서’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작금의 현실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동성애자가 군인이 될 수는 있지만 군인이 동성애자가 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슈퍼스타 K>의 커밍아웃을 떠올려본다. 그의 행동이 좀 엉뚱해 보일지는 몰라도 ‘말하기’를 택한 그의 행동은 분명 의미가 있다. 아무도 묻지 않는 건 아무도 듣지 않으려는 것이기에 그의 커밍아웃은 (그리고 본질적 속성상 모든 커밍아웃은) 저항적 행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을 못하고 안하는 것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못 듣고 안 들으려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바로 그 말을 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권력(power)은 고집불통 독불장군이 아니라 오히려 최첨단 유행을 이끄는 디자이너에 가깝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 차별의 논리를, 억압의 기제를 매우 유연하게 바꿔나간다. 그것이 너무 딱딱해서 짓눌려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말캉해서 질식사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10년, 20년과 비교한다면 많이 달라지긴 했다. 이제 커밍아웃한 연예인도 있고 게이 커플이 등장하는 가족드라마가 방송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현재 동성애자는 한국 사회의 시민인가? 섹슈얼리티는 시민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한 명의 동성애자가 한 명의 ‘시민’으로 살 수는 있지만, 한 명의 시민이 한 명의 ‘동성애자’로 살 수 있는가?

이 글은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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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몽 2010-10-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희망 2010-10-1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성애자로 살 권리... 미처 생각해보지 못햇는데 재미있네요^^

한채윤 2010-10-20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답글을 다는 것이 좋은건지...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댓글을 달아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라.. 감사의 마음은 표현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있겠지만 계속 재미있게 봐주세요.

비로그인 2011-05-2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자신의 일과 남의 일을 구분짓고 사는데 누구라도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타인의 제재를 원하지 않는다. 부부간의 어떤 형태라도... 시민으로 살 권리는 출생에 있지 성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