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자원이 없는 여성들 중 성노동을 수행하지 않고 (육체노동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노동력을 이용한 여성들도 있다.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그러하고, 이전 시대 ‘식모’라 불리던 가사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노동은 성판매 여성의 노동과 달리 가족 전략의 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빠의 대학 뒷바라지를 위해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 공장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노동자’가 되고자 분투했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암울한 노동 환경 속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한, “우리는 노동자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공순이’라 불리며 천대받던 이들이 ‘노동자’가 되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은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이제 일만 잘하는 회사에 충성하는 모범생이 아니라, 아니다 싶은 것에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었다”1)고 묘사한다. 이총각에게 노동자는 “아니다 싶은 것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진실의 정체성이고, 변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희망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다. ‘노동자’가 아닌 여성들이 노동자가 된다는 것, ‘여성 노동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성 노동의 속성과 여성의 노동자성이 문제화되는 방식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 1970년대 여공들의 노동의 흔적을 기록한 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는 참고할만하다.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주된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
|
|
① 그동안 여공의 공장 입직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희생양 담론, 다락방 담론)은 여공의 익명적 지식을 통한 공장 동경의 욕망을 배제했다.
② 하지만 여성의 도시와 공장에 대한 동경은 가족과 가부장에서 벗어나려는 탈출 욕구와 가족을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책임 사이의 불균등한 타협의 산물이다.
③ 여공의 욕망이 부재하다는 지배 담론은 여성 노동자의 육체를 ‘무성적’ 혹은 ‘생산적 육체’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
|
|
|
|
저자는 여성 노동자성을 구축한 지배 담론이 여성의 욕망을 삭제한 채 여성들을 과잉 신성화 혹은 무성화했다고 지적한다. 즉, “여공들의 공장 동경 욕망을 삭제한 희생양 담론 혹은 다락방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공들은 익명적 지식에 의해, 그리고 가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공장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공들이 노동자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이들의 여성성, 젠더화된 조건, 욕망 등이 가려졌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요구되었던 맥락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공장 입직은 ‘서울 살이’에 대한 동경과도 맞닿아 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무서운 서울”이지만, ‘시골’ 출신의 이들에게 ‘도시’ 혹은 ‘서울’은 설렘과 해방의 공간이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도시 공간에서 홀로 이주한 하층 계급 여성은 ‘울타리가 없는’ 여자로 간주된다.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채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여자’로 분류된다. 이 책의 6장 "공순이 타락했나?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제목이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공순이’들은 위험한 욕망을 가진 존재들로 이야기되어 왔다. 저자도 “여성노동자들에게 천하고 막돼먹고, 노는 애들 혹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남자관계가 문란한 무식한 것들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여성 노동자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욕망의 기호를 배제하고 무성적인 노동자성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범주’에 일단 위치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젠더화된 욕망을 들여다보아야 여성 노동자성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할 때, 저자는 이런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누가, 왜 이런 욕망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았어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서사는 가족 경제 전략의 한 축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젠더화된 가족 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언제 단절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책에는 이들이 어떤 가족(old family) 전략 속에서 공장에 입직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고,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결혼을 하고 다른 가족(new family) 환경에 놓이면서 공장 노동을 단절하는데 이 맥락 역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산업화 이후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만큼이나 강하게 작동되었음에도 저자는 산업체 학교가 기업의 인력 확보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지적하지 않는다. 물론 기업의 노동력 유치 노력을 간과했다고 여성들의 공장 입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에서 미혼의 젊은 여자들을 공장으로 대거 유치하고자 했던 의도와 전략을 살펴보면 ‘젊은 여공’들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린 여성들이 욕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무성화되었다는 여성 노동자성은 젠더화된 가족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노동 현장과 노동운동계 내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문제화해왔고 이를 은폐하려는 세력과 지난한 싸움을 해 온 역사가 있다. 이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떤 경우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어떤 경우 과잉 재현되는 것일까?
저자는 산업화 시기 주변부 여성 노동을 둘러싼 담론들을 분석하기 위해 ‘식모’ 담론을 분석한다. 담론 생산자였던 중심부 여성들-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에 대해 식모들이 주변부 여성으로 어떻게 ‘타자화’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최근 리메이크된 영화 <하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성스러운 이성애 가족 울타리 내에서 식모의 존재는 위험한 존재이다. 이들은 홀로 도시로 이주한 ‘울타리가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당시 식모의 존재를 근대적 가족 형성의 장애물로 사고하며 한국부인회가 주축이 되어 ‘식모 폐지론’ 운동을 벌인 장면도 이와 같은 맥락과 겹쳐진다. 울타리 외부에 위치한 주변부 여성들이 잠재적 윤락여성으로 간주되는 것과 동일한 시선이다. 도시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충원된 주변부 여성들은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노동과 별개로 질서를 균열 낼 수 있는 위험한 여자가 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잉여적인 존재로 과잉 성애화되었다.
하지만 중산층 핵가족,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보호되는 가운데 식모라는 주변부 여성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과정과, 여공이 산업화의 ‘타자’로 유배된 것을 등치시켜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기를 바라는가? 여공이나 식모들이 주변화되었던 이유는 노동계 내부에 그리고 이성애 핵가족에 내재한 균열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 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 역시 언제든 또 다른 중심부가 있다면 주변화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주변부 여성들의 대립항으로 중심부 여성들을 다룰 것이 아니라 주변부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노동자성이 남성 노동자성의 형성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 노동의 역사를 가시화시키고 이들의 노동 서사를 발굴하는 문제와 이들의 노동자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일은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노동자성은 남성들이 획득한 노동자 정체성과 다른 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성적인 노동자성도 여성들에겐 해방적인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비정규직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을 기록한 다큐 영화 <외박>에서 볼 수 있듯이, ‘아줌마’라 불리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해방감을 맛본다. 또한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다큐 영화에도 나오는 것처럼,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아직까지 복직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은 무엇보다 힘겹게 획득한 이들의 노동자 정체성이 내재한 힘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획득한 노동자성은 이들 자신이 과정 속에서 선택적으로 취한 자기 명명이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예제도 폐지론자 흑인 페미니스트인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집회에서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것을 떠올려 보자.
|
|
|
|
저기 앉으신 신사분은 여자들이 마차를 탈 때 도와주어야 하고, 도랑을 건널 때 번쩍 안아주어야 하고, 어디서든 가장 좋은 자리를 여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제가 마차를 탈 때 도와주거나, 진흙 웅덩이를 건널 때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제게 좋은 자리를 내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 절 보십시오! 제 팔을 보십시오! 저는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추수하여 창고에 나릅니다. 어떤 남자도 절 능가하지 못합니다! 저는 남자만큼 일하고, 남자만큼 먹습니다-먹을 게 있을 때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리고 채찍도 남자만큼 잘 참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2)
|
|
|
|
|
소저너 트루스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몸, 흑인 여성의 몸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마차를 탈 때나 도랑을 건널 때 도움을 요청하는 몸을 갖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소저너 트루스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냐고 묻는 대신 ‘여자’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는 자신도 평등한 인간이라는 의미와 여성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는 지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트루스는 선택적으로 ‘여자’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하기를 욕망한다. 트루스에게 평등은 비균질적인 ‘여자’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면서 달성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비정규직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나 산업화 시대 여성 공장 노동자 집단이 자신을 노동자라고 명명한 뒤 의식 고양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이들이 획득하고자 한 노동자 정체성은 균질적이고 완전한 정체성이 아니다. 투쟁을 위해 선택한 맥락적인 정체성을 사용하면서 여성들은 단일하게 여겨진 노동자 범주에 포섭되길 욕망하기도 하고, 노동자성의 단일함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
주
1) 박수정, “이총각, 노동자 거짓됨 없이 세상을 일구어 온 사람”,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아름다운사람들, 2004, 22쪽.
2) 소저너 트루스,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