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노동 비범죄화의 의미

 

다방에서는 ‘뉴 페이스’의 존재가 매상을 좌지우지한다. “OO 다방에 새로 온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 동네 아저씨들은 ‘뉴 페이스’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차 배달을 시킨다. 이 아가씨 덕분에 이 다방은 한동안 매상이 오른다. 물론 이렇게 다방에 새로 온 아가씨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이내 ‘오래된 아가씨’가 되어 손님으로부터 “아직도 이 동네에 있냐? 지겹다”는 ‘농담’을 들어야 한다. 다방을 중심으로 남성은 ‘정주자’이면서 고객이고, 여성은 ‘이주자’이면서 서비스 제공자이다. 많은 여성들이 ‘뉴 페이스’가 되기 위해 지역을 자주 옮겨 다닌다.

하지만 내가 활동하던 지역에서 클럽 여성들은 ‘정주자’이고 남성 고객들이 ‘이주자’이다. 미군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남성들이 이용하는 이 지역은 성판매 여성들의 지역 이동이 비교적 적은 동네이다. 동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언니들도, 결혼해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언니들도, ‘문제’가 해결되면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실패’하면 이 동네를 다시 찾아온다. 이 동네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는 언니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좀처럼 동네를 이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면 “한국 남자보다 외국 남자가 낫다”, “나는 외국인 전문이다”, “경기가 죽어 있기는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다” 등의 다양한 답변을 내놓는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동네에서 터를 잡고 일하며 살아온 언니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법적인 존재들’이다. 이전 시대의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나 2004년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에 의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하지만 ‘불법적인 존재들’인 이 동네 언니들이 늘 주눅 들어 지내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나 구청의 단속을 피해 온 나름의 노하우도 있고, 심지어 간혹 클럽 골목을 지나가는 젊은 경찰들에게 “놀다 가”라며 농치는 말을 던지기도 한다. 동네에서 ‘진짜 꼴통’으로 불리는 한 언니는 동네에 경찰만 들이닥치면 길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오줌을 누면서 나름의 시위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한 동네에서 터를 잡고 삶을 지속하면서, 자신을 ‘불법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와 경찰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이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2004년에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일부 활동가들은, 성매매는 결국 가부장적 착취의 문제이므로 성매매에 연루된 여성들은 모두 강제적으로 연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캐슬린 배리의 “자유로운 노예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상징적이다. 성매매에 있어 강제냐 자발이냐의 구분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여성들도 결과적으로 가부장적으로 종속된 것이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는 이들의 일상에 너무 큰 편견의 무게를 부여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일상 속 자신의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평가, 보상을 통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에 대해 타인의 시선이나 자본주의에 너무 매몰되었다고 비판을 앞세우지는 않는다. 성판매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을 일상적으로 의미화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만족스러운 보상에 대해서 “좋은 기회였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었다”라며 자신의 역사를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매매방지법은 성산업에서의 노동을 종결하고자 하는 여성들, ‘배운 게 성매매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다른 노동의 기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산’을 배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강제’라는 (모호하기 때문에 느슨한)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성매매 여성’이라는 경험적이고 일시적인 정체성을 정책 대상 범주로 구성해내서 성적 위계의 하위에 있는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공감의 정서를 작동시켰다. 국가가 이 여성들의 어려움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법은 홍보가 잘되어 있다.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에서 인신매매적인 착취의 고리를 발견할 때, 그 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공식적으로’ SOS를 칠 수 있다는 정보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 역시 ‘예산’의 효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자발적인’ 성노동을 통해 생계를 지속하고 있는 여성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 노동을 피해로 이야기하거나 불법화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들은 피해자가 되거나 불법적인 존재가 되면서 이들이 노동으로 영위해가는 일상과 역사가 손쉽게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성매매 집결지로 대표되는, 이들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공간이 ‘없어져야 할 곳’, ‘정화되어야 할 곳’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이들은 일상에서 안정과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청, 경찰, 미군 당국 등으로부터의 감시의 눈길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일상과 노동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존된다. 언제 우연히 돈을 많이 벌게 될지, 언제 우연히 단속을 맞아 그 돈들을 다 날리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이 불법 노동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져도 상대방은 “경찰서에 가자”라며 호기를 부린다. 상대가 ‘저런 식으로’ 난동을 부릴 때면 ‘마음이 넓어서 져주는 게 아니라 더 손해 보기 싫어서 져주는 쪽’을 택하게 된다. 실제 성판매 여성들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공간 내에서 남성 손님과 문제가 발생할 때 그것에 직접 맞서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신이 ‘져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 손님을 끌고 경찰서 갔더니 이전의 다른 문제 때문에 오히려 이 여성이 구속되었다는 사례와 함께 “괜한 호기로 인생 그르치지는 말라”는 경고들이 성매매 집결지를 떠돈다. 이런 상황이 일상적이니 이들은 자신의 안전망을 사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계의 모양새를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기둥서방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리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성판매 여성들은 섹스 노동을 통해 수입을 벌어들이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입이 그녀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노동은 최소한 이들에게는 당분간은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 가치가 있는 노동이다. 이들은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노동 스킬을 더 계발해서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많은 혹은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이들은 단골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리적이고 감정적인 노력을 하며, 같은 수입이라면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자 한다.

이태원 클럽의 한 여성은 생리 중인데도 일수 빚을 갚기 위해 섹스 노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타인이 ‘성실하다’고 읽어내주길 바란다. 자신에 대한 동네의 평판을 무엇보다 신경 쓰는 이 언니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성실한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이며 실천이다. 우리가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평판에 신경을 쓰듯, 이 언니 역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좀 쉬면 안 되겠냐는 나의 질문에, 일수 빚은 신용을 담보 삼아 얻어 쓰는 것인데 그렇게 중요한 신용을 잃을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언니의 선택은 자신의 유일한 안전망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이는 차라리 일수업자에게 신용을 잃는 것을 택하기도 한다.)

이런 일화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높은 이자를 받는 불법 대부업은 신고하면 되지 않아?”라고 묻는다. 법대로라면 일수업자를 대부업법 위반으로 신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 동네 언니들에게 부당한 모든 것들에 대응해보겠다는 포부로 법전을 뒤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언니들에게 일수업자를 문제 삼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래도 나 힘들 때 돈 빌려준 사람은 일수업자뿐이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노동 수행에 있어 강제냐 자발이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개인을 둘러싼 여러 조건과 맥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정 노동이 여성의 지위를 개선해주었든 아니든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노동을 수행해왔고, 이들의 노동은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추동하는 동력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현재 성판매 여성들 역시 현실에서 성노동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성매매 현장에서의 통제권을 쥐어주기 위해서는 이들의 노동과 이들의 존재를 최소한 불법의 영역으로 내몰지는 말아야 한다. 착취와 폭력, 억압의 고리에는 젠더 권력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폭력에 각을 세우고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과, 법의 영역에서 이것들을 단죄하는 것은 다르다. 김은실은 외설성을 검찰에서 조사하는 것이나, 여성의 성과 관련한 문제를 모두 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떤 면에서 유사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1) 현재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 대중 일반과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정부 통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의 성을 법정으로 가져간다 하더라도, 그전에 이 이슈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에 대해 동의하고 다시금 질문하고자 한다. 일단 이들의 노동을 비범죄화하고, 이들의 역사와 일상에 기대어 우리는 어떤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하는가? 
 


 



1) 김은실, “지구화 시대 한국 사회 성문화와 성 연구 방법”, <섹슈얼리티 강의, 두번째>, 동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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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1-2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여자의 성거래는 매춘이라 불법이고, 어떤 주부의 성관계는 불륜이라 부도덕하고, 어떤 여성의 성접대는 출세의 지름길이라 묵인되면 돈낸 남자는 무능력하고 돈안낸 남자는 능력있는*인가요.
 


4. '여성 노동자' 되기

 

상대적으로 자원이 없는 여성들 중 성노동을 수행하지 않고 (육체노동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노동력을 이용한 여성들도 있다.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그러하고, 이전 시대 ‘식모’라 불리던 가사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노동은 성판매 여성의 노동과 달리 가족 전략의 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빠의 대학 뒷바라지를 위해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는 소녀 공장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노동자’가 되고자 분투했던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암울한 노동 환경 속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한, “우리는 노동자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공순이’라 불리며 천대받던 이들이 ‘노동자’가 되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은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이제 일만 잘하는 회사에 충성하는 모범생이 아니라, 아니다 싶은 것에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노동자가 되었다”1)고 묘사한다. 이총각에게 노동자는 “아니다 싶은 것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진실의 정체성이고, 변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희망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묻고 싶다. ‘노동자’가 아닌 여성들이 노동자가 된다는 것, ‘여성 노동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성 노동의 속성과 여성의 노동자성이 문제화되는 방식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 1970년대 여공들의 노동의 흔적을 기록한 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는 참고할만하다.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주된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동안 여공의 공장 입직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희생양 담론, 다락방 담론)은 여공의 익명적 지식을 통한 공장 동경의 욕망을 배제했다.
② 하지만 여성의 도시와 공장에 대한 동경은 가족과 가부장에서 벗어나려는 탈출 욕구와 가족을 실질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책임 사이의 불균등한 타협의 산물이다.
③ 여공의 욕망이 부재하다는 지배 담론은 여성 노동자의 육체를 ‘무성적’ 혹은 ‘생산적 육체’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다.

 
   

 

저자는 여성 노동자성을 구축한 지배 담론이 여성의 욕망을 삭제한 채 여성들을 과잉 신성화 혹은 무성화했다고 지적한다. 즉, “여공들의 공장 동경 욕망을 삭제한 희생양 담론 혹은 다락방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공들은 익명적 지식에 의해, 그리고 가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공장을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여공들이 노동자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이들의 여성성, 젠더화된 조건, 욕망 등이 가려졌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요구되었던 맥락에 대한 설명은 더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공장 입직은 ‘서울 살이’에 대한 동경과도 맞닿아 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무서운 서울”이지만, ‘시골’ 출신의 이들에게 ‘도시’ 혹은 ‘서울’은 설렘과 해방의 공간이다. 하지만 자신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도시 공간에서 홀로 이주한 하층 계급 여성은 ‘울타리가 없는’ 여자로 간주된다.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채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는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여자’로 분류된다. 이 책의 6장 "공순이 타락했나?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제목이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공순이’들은 위험한 욕망을 가진 존재들로 이야기되어 왔다. 저자도 “여성노동자들에게 천하고 막돼먹고, 노는 애들 혹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남자관계가 문란한 무식한 것들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여성 노동자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욕망의 기호를 배제하고 무성적인 노동자성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위험하지 않은, 안전한 범주’에 일단 위치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젠더화된 욕망을 들여다보아야 여성 노동자성의 특징이 드러난다고 할 때, 저자는 이런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누가, 왜 이런 욕망을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았어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서사는 가족 경제 전략의 한 축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젠더화된 가족 전략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언제 단절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책에는 이들이 어떤 가족(old family) 전략 속에서 공장에 입직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고,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이 결혼을 하고 다른 가족(new family) 환경에 놓이면서 공장 노동을 단절하는데 이 맥락 역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산업화 이후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만큼이나 강하게 작동되었음에도 저자는 산업체 학교가 기업의 인력 확보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지적하지 않는다. 물론 기업의 노동력 유치 노력을 간과했다고 여성들의 공장 입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에서 미혼의 젊은 여자들을 공장으로 대거 유치하고자 했던 의도와 전략을 살펴보면 ‘젊은 여공’들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린 여성들이 욕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무성화되었다는 여성 노동자성은 젠더화된 가족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노동 현장과 노동운동계 내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문제화해왔고 이를 은폐하려는 세력과 지난한 싸움을 해 온 역사가 있다. 이들의 섹슈얼리티가 어떤 경우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어떤 경우 과잉 재현되는 것일까?

저자는 산업화 시기 주변부 여성 노동을 둘러싼 담론들을 분석하기 위해 ‘식모’ 담론을 분석한다. 담론 생산자였던 중심부 여성들-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에 대해 식모들이 주변부 여성으로 어떻게 ‘타자화’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라고 한다. 최근 리메이크된 영화 <하녀>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성스러운 이성애 가족 울타리 내에서 식모의 존재는 위험한 존재이다. 이들은 홀로 도시로 이주한 ‘울타리가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당시 식모의 존재를 근대적 가족 형성의 장애물로 사고하며 한국부인회가 주축이 되어 ‘식모 폐지론’ 운동을 벌인 장면도 이와 같은 맥락과 겹쳐진다. 울타리 외부에 위치한 주변부 여성들이 잠재적 윤락여성으로 간주되는 것과 동일한 시선이다. 도시의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충원된 주변부 여성들은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노동과 별개로 질서를 균열 낼 수 있는 위험한 여자가 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잉여적인 존재로 과잉 성애화되었다.

하지만 중산층 핵가족,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보호되는 가운데 식모라는 주변부 여성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과정과, 여공이 산업화의 ‘타자’로 유배된 것을 등치시켜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기를 바라는가? 여공이나 식모들이 주변화되었던 이유는 노동계 내부에 그리고 이성애 핵가족에 내재한 균열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 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여성 지도자, 여대생, 중산층 가정주부 역시 언제든 또 다른 중심부가 있다면 주변화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주변부 여성들의 대립항으로 중심부 여성들을 다룰 것이 아니라 주변부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노동자성이 남성 노동자성의 형성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 노동의 역사를 가시화시키고 이들의 노동 서사를 발굴하는 문제와 이들의 노동자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일은 분리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노동자성은 남성들이 획득한 노동자 정체성과 다른 결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성적인 노동자성도 여성들에겐 해방적인 정체성이 될 수 있다. 비정규직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을 기록한 다큐 영화 <외박>에서 볼 수 있듯이, ‘아줌마’라 불리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해방감을 맛본다. 또한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다큐 영화에도 나오는 것처럼,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아직까지 복직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은 무엇보다 힘겹게 획득한 이들의 노동자 정체성이 내재한 힘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획득한 노동자성은 이들 자신이 과정 속에서 선택적으로 취한 자기 명명이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예제도 폐지론자 흑인 페미니스트인 소저너 트루스가 1851년 집회에서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것을 떠올려 보자. 
 

   
 

저기 앉으신 신사분은 여자들이 마차를 탈 때 도와주어야 하고, 도랑을 건널 때 번쩍 안아주어야 하고, 어디서든 가장 좋은 자리를 여자에게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제가 마차를 탈 때 도와주거나, 진흙 웅덩이를 건널 때 도와준 적이 없습니다. 제게 좋은 자리를 내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 절 보십시오! 제 팔을 보십시오! 저는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추수하여 창고에 나릅니다. 어떤 남자도 절 능가하지 못합니다! 저는 남자만큼 일하고, 남자만큼 먹습니다-먹을 게 있을 때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리고 채찍도 남자만큼 잘 참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2)

 
   



소저너 트루스는 청중들에게 자신의 몸, 흑인 여성의 몸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마차를 탈 때나 도랑을 건널 때 도움을 요청하는 몸을 갖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소저너 트루스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냐고 묻는 대신 ‘여자’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는 자신도 평등한 인간이라는 의미와 여성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는 지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트루스는 선택적으로 ‘여자’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획득하기를 욕망한다. 트루스에게 평등은 비균질적인 ‘여자’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면서 달성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비정규직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이나 산업화 시대 여성 공장 노동자 집단이 자신을 노동자라고 명명한 뒤 의식 고양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이들이 획득하고자 한 노동자 정체성은 균질적이고 완전한 정체성이 아니다. 투쟁을 위해 선택한 맥락적인 정체성을 사용하면서 여성들은 단일하게 여겨진 노동자 범주에 포섭되길 욕망하기도 하고, 노동자성의 단일함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     


1) 박수정, “이총각, 노동자 거짓됨 없이 세상을 일구어 온 사람”, <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 아름다운사람들, 2004, 22쪽.
2) 소저너 트루스,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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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단∂ 2010-09-2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비로그인 2011-01-2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노동자들이 위험한 욕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지배층 남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의 음흉한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존재,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대로 여긴 것 같습니다.
 


3. 여성, 노동, 가족, 그리고 성노동


 

인간의 활동을 노동이라고 명명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제이다. 일찍이 리카도는 인간의 노동이 교환가치의 척도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원천이자 기원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이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동물적인 존재 양식을 넘어서는 삶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었으며, 노동은 인간의 지위를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모든 지식과 언어는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분리될 수 없다. 성별 분업 구조가 뚜렷한 사회에서 노동은 남성의 영역으로 인지되기 쉽다. 이에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노동은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도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엥겔스는 그의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생산 수단이 공동 소유가 되어 노동이 갖는 사회적 가치가 평등해지면 여성의 지위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때 여성의 노동은 성별 노동 분업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단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가족이란 제도가 언제 기원했고 어떻게 지속되고 있으며 왜 문제라는 것인지 엥겔스의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 대해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특히 모오간의 저작 <고대 사회>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추적한다. 고대 사회의 씨족적 조직에 이어 자녀들의 재산 상속제를 수반하는 부권제가 등장하면서 한 가족에 의한 재화의 축적이 조장되었고 가족이 씨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어졌다. 이 가족은 사회의 성별 시스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국가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씨족 제도는 화폐경제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발전해가는 재산 획득의 새로운 형태를 승인할 제도로, 유산 계급이 무산 계급을 착취할 권리를 영구화할 국가가 만들어진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등장으로 여성의 필연적 종속이 예고되며 이러한 종속은 여성의 노동과 관련이 있다.

엥겔스의 논의는 개인의 사적 시간을 공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사회적 성인이 된다는 아이디어를 근간으로 한다. 문명사회에서 공적 영역은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가사 노동은 남성의 생필품 획득을 위한 노동에 비해 의미가 평가절하된다. 하지만 생산 수단이 공동 소유로 되면서 ‘사사로운 집안 살림’은 사회적 산업이 되고 아이들을 돌보며 교육시키는 것은 공공사업이 된다. 노동이 갖고 있는 사회적 가치가 평등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책 전반을 통해 가족 이전의 ‘완전한 일부일처’의 상태에 대한 엥겔스의 노스텔지어적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여성의 지위 상승은, 남성의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가족 내 관계가 ‘완전한 일부일처’로 회귀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고 설명된다. 쉽게 말해 남성이 성매매 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해야 부인으로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다는 말이다. 성매매가 젠더 불평등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일부일처’라는 이성애 중심적 매칭이 해방의 징표로 제시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개인이 차별 없는 평등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인류 해방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자칫 성판매 여성들의 존재에 반대하는, 그들이 없어져야 가정과 사회에 평화가 온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성매매에 기원을 문제 삼는 것과 성판매 여성의 존재를 반대하는 것은 다르다. 마치 빈곤을 문제화하는 것과 빈곤한 사람들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엥겔스는 성매매가 없어질 가능성에 대해 생산 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되면서 임금 노동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소멸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여자가 돈을 받고 몸을 팔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발전 과정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명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오류다. (성)문화의 효과를 예로 들어 반박이 가능하다. 저자의 논의에 동의하려면 매춘부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만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성판매 여성들의 노동 서사에는 경제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다양한 이유, 욕망의 역사가 공존한다. 또한 임금 노동자만이 성구매를 하는 주체는 아니다.

무엇보다 엥겔스의 아이디어에서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성매매를 문명 시대의 가족이 진정한 일부일처를 이룰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로 간주하면서 결과적으로 매춘 여성의 존재를 가족이라는 단위와 완전히 분리된 ‘위협적인 개인’으로 분류했다는 점이다. 성판매 여성들의 존재는 흔히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여자라고 상상된다. 하지만 실제 성매매 공간에서 많은 여성들은 가족들 때문에 노동하고,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고, 가족과 함께 노동한다.

성매매 공간에는 아이를 부양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으며, 그곳에서 이상적인 남편감을 만날 것을 꿈꾸는 여성들도 있다. 매춘 여성이 신화 속에만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듯 ‘기둥서방’도 문학 작품 속에만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활동하던 동네에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10명이라면 기둥서방은 9명이었다. 이들은 동네 언니들과 법률혼 관계에 있거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고 모두 언니들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왜 성판매 여성들이 ‘미혼’ 여성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일까?

관념적으로 가족 내 여성에게 허용된 섹슈얼리티는 오직 출산과 관련된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성판매 여성들은 흔히 ‘거리의 여자’라고 일컬어지며, ‘기둥서방’은 변변한 ‘서방 노릇’을 하지 않는다. 가족이 없을 것이라고 상상되기 때문에 이들의 가족은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없다. 가족과 관련된 서사는 성판매 여성 스스로 봉인하든, 가족이 은폐하든, 드러나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여성들의 존재를 ‘어머니’와 ‘창녀’라는 이분법에 의해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어머니로서 성노동을 지속하며, 어머니 때문에 성노동을 지속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피난 당시 중매로 현 남편을 알게 되어 교제 중 그냥 동거를 계속하여 3남매를 낳고 살고 있다. 남편은 도박이 심하여 직장에도 충실치 못했고 늘 외박이 잦고 어떤 때는 계속해서 10일간이나 외박하는 때도 있으며 아직도 그렇다. 직장을 그만두고는 장사를 하겠다고 하여 집의 가구와 제 옷을 팔아서 주었더니 그것도 도박을 했고 저의 가정은 형편없이 되어 애들까지 굶게 되어 살기 위해 저는 빠에 나가서 그날그날 살아왔다. 어떤 날은 수입이 많고 어떤 날은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손님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여 저는 매춘부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이 사실을 안 남편은 더러운 여자와 못 살겠다고 하기에 제가 집을 나갔으나 남편은 제게 생활책임을 지게 한 것이 미안했음인지 다시 들어오라기에 들어갔다. 제가 벌어온 돈은 도박장에서 흘리고 애들은 헐벗고 폭행과 욕설이 갈수록 심하니 도저히 그와 살 수가 없어 헤어지려는데 무슨 방법이 없는가.
―“법률상의”, <여원> 1963년 1월호, 379쪽; 이임하(2004), <여성, 전쟁을 넘어 일어서다> 148~149쪽에서 재인용

 
   



위 글은 1963년 1월, 여성지 <여원>의 상담 코너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머니, 아내이기 때문에 성노동을 했지만 이 때문에 남편에게 더욱 억압당한다. 60년대와 다를 바 없이 현재에도 많은 성판매 여성들은 ‘기둥서방’을 먹여 살리고 있지만 이들로부터 ‘더러운 여자’라며 모욕과 폭행에 시달린다. 이 여성들은 ‘기둥서방’에게 돈도 벌어주고, 화풀이의 대상도 되어준다.

여성, 노동, 가족이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가족 내 분업이라는 고리를 통해 서로 연결 되었다는 논의와 관련해서는 루이스 틸리와 조앤 스콧의 <여성, 노동, 가족>을 참고할 만하다. 역사가 전 산업화 시기의 가족경제에서 산업화 시기의 가족임금경제로, 그리고 또 가족소비경제로 변화하는 동안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들은 일생에 걸쳐 생산 활동과 재생산 활동을 번갈아가면서 한다. 낳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농사를 짓고, 다른 집의 하녀가 되고, 매춘을 하고, 장을 보고, 밥을 차리고, 방직 공장에서 일하고, 전화 교환수로 일하고, 타자를 친다. 책을 읽다 보면 쉴 새 없는 이들의 고된 노동에 숙연해질 정도이다.
 



책의 서문에서 스콧은 “우리는 임금소득이 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성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시민권 획득에 기여할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해방적 성격을 가질 것이라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들은 임노동이 여성의 지위를 개선해주었다는 1970년대 초반 주요 노동 연구 결과를 반박한다. 노동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안에 억압적으로 감금되고 가족에 종속되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의 노동 유형은 지배적인 가족 출산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다. 한 사회의 생산과 재생산 체계가 가구 안에서 상호 작용함으로써 취업 가능한 여성의 공급에 영향을 미치며, 경제와 생산 양식의 특성과 조직의 규모, 그리고 기술은 노동자로서 여성에 대한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 여성의 노동이 가구 생산 양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성노동의 경우에도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을 당연히 가족이 없는 ‘거리의 여자’로 간주하며 사회에서 배제시키려는 음모, 정치학이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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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qks 2010-09-0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이론과 현실에 대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성매매라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분, 그리고 그것이 비단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배우게 되네요.

서커스걸 2010-09-0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훔...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글이었어요..흥미롭기도 했구요..
저도 그들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왠지 생소햇었거든요...좀더 생각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11-01-2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노동을 하면 집안에서의 존재의 가치와 지위와 발언권이 향상된다는 것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2. 성노동, 성노동자 담론의 등장

  

   
 

남자는 내게 아프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주문했다. 내가 남자에게 상처를 입힐까봐 소심하게 만졌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한 매춘부 인생 첫날부터 사람을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고객이 그렇게 원하니 그저 해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달라는 대로 다 했고, 남자는 매우 만족해했다. 그 모든 짓을 다 하는 동안 남자는 내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을 만질 뿐이었다. 모든 것은 다 끝났다. 남자는 몸을 닦고 옷을 하나씩 꼼꼼히 입었다. 그러고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침착한 목소리로 이제 자신은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며, 오늘은 너무 즐거웠고,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 -소니아 로시, <퍼킹 베를린>(프로네시스, 2009), 59

 
   

  

 

  

 

이 글을 쓴 소니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독일로 유학을 온 학생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갓 부모로부터 독립한 고학생이 구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결국 성매매 업소(마사지 숍)에 취직하게 된다. 취직 첫날 첫 손님을 만난 소니아의 위 이야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성판매 여성들은 성구매 남성들과 성관계를 한다기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밀폐된 방 안에서 손님이 요구하는 다양한 일을 한다. 즉 성매매 현장에서는 여성의 시간, 몸, 성, 목소리, 노동력 등이 남성 구매자의 화폐와 교환된다.     

다방을 통해 커피를 시킨 남성들 중에 간혹 티켓을 끊어 자신의 집을 청소해달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여성의 시간에 가격을 매기는 티켓 거래의 특성상, 다방 종업원들은 제한된 시간 내 ‘무엇이든 다 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손님들은 이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고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일 중 주로 성을 이용한 노동, 성노동을 수행한다. 성판매 여성들은 손님이 없는 경우에도 노동을 하는데 가게 청소, 술 재고 파악 같은 일 외에 손님을 호객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다음 호에서 여성 노동의 속성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가사 노동, 감정 노동이란 말이 보편화된 요즘 이들의 노동을 노동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역사적으로 자원에서 소외된 많은 여성들이 성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해왔다. 차별적인 평가가 있어왔지만 이러한 역사를 부정하는 일은 여성들이 삶을 지속해온 생존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다. 타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직시하지 않을 경우 이들은 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박제화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담론과 이들의 삶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생겨서 이들은 점점 더 타자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들의 노동을 가시화하는 일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말하면 성노동을 지속하며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노동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공론화하지 못한 채 자신의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티켓 다방은 한국 성산업 내에서 매우 열악한 업종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웬만하면 그곳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티켓 다방에 십대 여성들이 대거 진입해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은 청소년 보호 담론에 의해 강하게 보호받으면서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는 열악한 환경에서 환영 받고 일을 지속하는 것이다.1) 이처럼 특정한 안전망이나 법적, 담론적 테두리 아래서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의 문제는 특정 사회에서 누가 주권자, 시민으로 상정되고 있는지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성매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타자화되어온 성노동을 지속하는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며,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로 개인의 노동이 유연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자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느슨해진 최근에 의아할 정도로 자주 목격된 일이 있다. 바로 이전에 비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보통 성매매 여성이라 부르던 사람들을 성노동자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만난 많은 대학생들이 ‘페미니스트인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진보적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성노동자라는 명명을 사용했다. 이러한 호명은 더 이상 ‘성소수자’들을 ‘호모’라고 지칭하지 않는 것처럼, 세련되고 진보적인 의식과 입장을 반영하는 말이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성매매는 페미니즘 내에서 성적 폭력, 여성 억압의 극단적 형태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여성이 전담해서 수행해온 일들을 노동이라고 정의해온 여성주의 정치학의 맥락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성노동(sex work)을 수행하는 성노동자(sex worker)”2)라는 논의가 등장한다. 이는 이제까지 낙인찍히고 대상화되어온 성매매 여성들을 담론의 주체로 등장시킨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입장의 사람들은 여성을 피해와 보호의 틀에 가두는 전략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매매를 합법적인 직업으로 옹호하고 성매매 여성들의 행위성을 설파한다. 나아가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명명하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같은 맥락에서 반성매매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를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라고 규정해왔던 점에 주목하고 무엇이 인권인지, 인권 개념에 천착하는 논의가 등장한다. 무엇이 불법인지는 법이 규정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인권 침해는 오히려 법에 의해 자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들은 먼저 성노동을 가시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조세핀 호와 같은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성노동자들을 성적 전문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평가하기 위해 이들 여성의 노동 수행 능력을 가시화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는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된 이후 성노동(자) 담론이 일군의 성판매 여성들과 이를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가시적으로 등장했고, 이로 인해 기존의 반성매매 담론과의 논쟁도 촉발되었다. 법 시행 이후 여의도 등지에서 자신들의 생존권, 노동권을 주장하며 대규모 집회를 가졌던 성판매 여성들의 집단행동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노동자’라는 단어를 강하게 각인시켰던 것 같다. 이들의 입장은 성노동자들의 자율의지를 고려하고, 노동 환경이 더욱 열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성구매자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아야 하며, 집결지 재개발 계획을 시정하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성노동자 담론은 성매매 정치학에서의 젠더 라인 외에, 노동자라는 호명을 통해 여기에 존재하는 계급 라인을 드러냈다. 성매매가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과 착취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성매매 현장에는 성구매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성판매 여성들에게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성노동(자)에 대한 불법화에 저항하고 그에 덧붙은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려는 입장”3)으로도 대변된다. 성노동자론 지지자들은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하는 데 기여한 반성매매 운동 진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이미 성판매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의 음모가 스며들어 있다며 이러한 용어, 실천들에 전선을 긋고 성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에 대한 강조를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 글을 통해 성노동자라는 호명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성매매 여성이나 성판매 여성 대신 성노동자라는 호명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를 더 보장해줄 수 있는 실천일까? 이들이 노동자라면 이들을 통제하는 권력은 누구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일까? 명예 자본으로서의 가부장적 국가인가? 혹시 이러한 명명이 오히려 무엇을 더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은 다양하고 복잡한 질문들을 동시에 제시하는 이유는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응당 ‘성노동자’라는 인식이 꽤 널리 퍼진 최근의 성매매 정치학, 페미니스트 정치학에서 나타나는 인식의 점핑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판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라고 자연스럽게 지칭할 때 동반되는 약간의 머뭇거림, 물음표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물론 나는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고백하는 여성들의 고백을 존중하고 그들의 용기와 씩씩함에 지지를 보낸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


1) 김주희, <성산업 공간인 티켓 영업 다방 내 십대 여성의 일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2) 1980년 무렵 캐롤 리는 ‘섹스 산업’이란 명명이 성매매 여성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성노동 산업’이란 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때 성노동이라는 명명이 처음 정치적으로 고안되었으며 이는 곧 성매매 여성들의 행위성을 드러내려는 또 다른 페미니스트 운동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Carol Leigh, “Inventing Sex Work”, ed. Jill Nagle, Whores and Other Feminists, London: Routledge, 1997.
3) 오김숙이, “집창촌 여성들의 하위문화는 존재하는가”, <여/성이론>, 제18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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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qks 2010-08-2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 호보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 같아요.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그리고 다양한 각도로 되짚어 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

조학선 2010-08-28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슴아픈심정으로잘일었습니다
생존을위하여인생관이다르거나또다른사정으로하는로동이기할가.......
아무던마음이너무아픈일입니다

비로그인 2011-01-2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어떤 노동에도, 타인의 성관리에도 전혀 마음은 없으나 그사람이 있으므로 내사람의 성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과 권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결혼한 아내라는 여자의 이름으로
 


 1. 성매매 하는 여자들에 대한 지칭과 여성주의 정치학

 

나는 성매매 하는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이러한 관심은 일차적으로 여성주의적 연대 의식의 발로일 수 있다. 나에게 여성주의적 세계관은 무엇보다 여자들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가부장적 정치학을 감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용한 색안경이다. ‘아버지의 질서’를 거부한 여성들에게 언제든 ‘창녀’의 낙인을 찍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세상에서 ‘창녀’는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곧 나 자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매매 하는 여자들은 이렇게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러한 관심은 내가 아는 언니들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내가 성매매 집결지에서 살지 않았다면, 그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면, 나는 그들의 이름에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마주친 적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성매매 하는 여자들은 야한 옷을 입고 붉은 불빛 아래 서 있는 ‘익명의 누군가’라기보다는, ‘텍사스라는 가게에서 장사하는 목소리 큰 제니 언니’, ‘남도의 한 티켓 다방에서 일했던 지영’, ‘동네 언니들 돈 떼어 먹고 도망가서 행방이 묘연한 진희 언니’같이 특정한 사람들이다. 일상 속에서 제니 언니, 은양, 마담 언니, 아가씨 등으로 불리는 이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불리는가 하는 문제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인 사람으로, 어떤 사람으로 재현되는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  


예를 들자면 요새는 이들을 성매매 여성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여기엔 ‘윤리가 땅에 떨어진(倫落) 여자들’로 문제화하지 말고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성(性)이 매매(賣買)되는 고리에 놓인 여자들’로 인식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윤락녀, 성매매 피해 여성, 성노동자와 같이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이론적, 실천적 입장에 따라 채택되거나 폐기되면서 경합해왔다. 
 

이 글에서 나는 인용의 맥락을 따르는 경우가 아니면 성매매 하는 여자들을 성판매 여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성판매 여성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성(섹슈얼리티)을 팔고 있는 여성이라는 의미다. 이들의 지칭에 대한 고민을 하는 글인 만큼 사고에 방해가 되지 않는 가장 사실적인 용어라 판단한다. 또한 그들의 저편에 그것을 사는 남성이 있다는, 젠더 역학 관계를 드러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이는 남성 젠더 권력이 남성 구매 권력(구매력)과 일치하는 성매매에 한정해서 다루겠다는 제한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정에 따라 성매매 집결지를 둘러싼 경제를 도식화해본다면, 최초의 돈은 남성 고객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성을 구매할 수 있는 권력은 남성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말단의 시장(end market)에서 이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들이다. 이러한 구매력을 중심으로 한 젠더 관계가 바로 성매매에서의 주요한 축이라고 상정한다. 하지만 이때 엔드 마켓이라는 연쇄의 의미를 암시하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 두 젠더를 둘러싼 또 다른 시장의 가능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성매매 집결지에는 이들 여성들의 소득과 소비에 의존한 여러 사람들이 살아간다. 예를 들어 업소의 업주나 손님을 호객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판매 여성의 수입을 나눈다. (물론 업주나 호객 일을 해주는 사람이 따로 없이 성판매 여성이 ‘독장사’를 하는 업소도 있다.) 또한 업소 주변에는 여성들에게 옷이나 화장품 등의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있고, 이들에게 담배를 파는 가게도 있으며, 밥을 파는 식당도 있다. 이 경우 성판매 여성들은 당연히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여성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 이들이 집결지 주변에서 무엇을 살 때나 택시를 탈 때,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이때마다 “왜 허튼 곳에 돈을 낭비 하느냐!”라며 따져 물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 언니들은 귀찮다는 듯 찡긋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어느 날 나이가 아주 많은 한 언니가 “우리 같은 여자들은 이래야 편해”라는 대답을 한 적이 있다. ‘몸을 파는 여자’라는 낙인이 ‘소비자’라는 비교적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정체성도 쉽게 따라붙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혹은 ‘쉽게 돈을 버는 여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무언의 압력일 수도 있다. 물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언니 스스로 몸을 낮춘 행위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성판매 여성들을 향한 낙인과 편견의 시선이 이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간혹 골치 아픈 사건, 사고에 연루되었을 때 나는 (혹은 나 역시) 이들을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고 전략적으로 호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는 범주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매매에,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고리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의도이다. 최소한 내가 만난 성판매 여성들은 신체가 구속되어 ‘강제로’ 일을 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오래전부터 성산업 주변에 산재한 불합리한 구조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피해는 성매매 하는 여자들에 대한 낙인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보호막이 없는 거리의 여자로 인식되어 크고 작은 범죄의 표적이 된다. 남성 구매자와 1대 1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폭력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몸을 파는 여성들에 대한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11명의 출장마사지사 여성을 살해한 후 암매장한 유명한 연쇄 살인범 소식에 당시 광주의 다방 골목이 들썩였던 기억이 난다. 여관으로 커피를 배달해달라는 전화가 오면 서로 “네가 나가라”며 몹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또 성매매 하는 여자들에 대한 낙인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은 아니나 성산업 주변에 널리 퍼진 불법 대부업으로 인한 피해도 일상적이다. 최근 성매매방지법 제정 이후 성매매를 조건으로 업주가 성판매 여성들에게 지급하던 선불금이 불법화되자 많은 일수업자들이 성매매 집결지 깊숙이 들어왔다. 업소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옷이나 화장품을 사거나, 방을 구하는 등 돈이 들어갈 곳이 많은데 이들은 동네 일수업자에게 돈을 빌려 이를 해결하고 있다. 일수업자들의 엄청난 고리대금으로 인한 피해는 성판매 여성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일수업자들에게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성적으로 모욕을 당하기 일쑤이다. 일수업자들은 자신의 돈을 빨리 갚으라고 ‘투잡을 뛸’ 또 다른 업소를 알선해서 여성들이 잠도 못 자고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피해는 대로변의 번듯한 은행에서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 ‘번듯하지 못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피해와 같은 종류의 것이기도 하다. 물론 성판매 여성들이 일수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꼭 경제적, 계급적 이유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성매매 집결지의 일상,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어떤 여성들은 특별히 돈이 필요하지 않아도 매일 번 돈을 허투루 써 버리지 않기 위해 목돈을 빌리고 매일 일수 돈을 갚아 나가기도 한다.  


최소한 나에게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는 명명은 성매매 깊숙이 자리한 구조적 피해나 상황적 피해를 지적하려는 실천이다. 이들 여성을 둘러싼 성적 낙인과 제도의 불합리성, 성매매 집결지 문화로 인해 이들은 상황적으로 피해자가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는 지칭은 상황적 피해를 강조하기보다 이들 존재 자체가 내재한 피해자성이 강조되는 방식으로 유통된 것이 보통이다. 성매매 하는 여성들은 빚을 갚지 못해 오지로 팔려가거나 감금된 채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인신매매된 여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인식이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었던 시기에 이들이 노동을 통해 꾸려나가는 삶의 실제 모습은 주목받을 수 없었다. 이들이 왜, 어떻게 노동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이들은 특정 경제장에서 중요한 소비자로서 소비의 경향성을 주도하기도 하며, 때로는 억척스럽게 아이를 교육시키는 극성 엄마이기도 하다. 
 

‘이들을 어떻게 지칭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들의 삶과 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경합의 역사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들의 행위를 어떻게 의미화하거나 문제화할지, 나아가 이들에게 어떤 권리를 부여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성매매는 여성의 성적 등급화에 대한 문제, 여성의 노동에 대한 문제, 여성 내부의 계급 차이에 대한 문제, 혹은 계급과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등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들을 둘러싼 현실의 무게를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담론을 다시금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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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qks 2010-08-2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판매 여성이라 지칭함이 가장 사실적인 표현이라는 것에 공감이 갑니다.
다음 글이 기대되네요. 일상과는 멀리 있다고 막연히 생각해 온 성판매 여성, 그리고 성노동에 대한 이해하고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햇볕냄새 2010-08-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성노동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이 가더라구요, 글쓴이가 던지는 질문이 궁금해서 긴 글을 읽게 됐습니다. 글에 쓰신 것처럼, 많은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현실인거 같아요...

서커스걸 2010-09-0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읽었어요 다음글이 기대되는군요 왠지 무섭고 멀리있다고 생각한 그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수있는 계기가 될수있었음 좋겠어요

청단∂ 2010-09-2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비로그인 2011-01-2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던 이슈였네요. 주어지는 글을 통해 배우고 생각해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