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팬픽을 즐기는 여성들은 왜? ― 남성 동성사회에 대한 반발, 그리고 전유

   

앞서 거의 10여 년 동안 그 어떤 이야기보다 활발하게 생산, 공유되었던 팬픽이 제도 시장으로 결코 진입하지 못했던 핵심 이유가 스타를 매개로 한, 그래서 명예훼손이 상존하는 동성 서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남 스타의 이야기를 남-녀 일반의 것으로 바꾸고 일정 정도 서사를 조정한 이후 출판된 경우는 있다고 하는데, 이는 동성과 이성의 서사가 그 자체로는 별 차이가 없는 한편, 핵심은 또한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글은 줄곧 팬픽이 지금-여기에서 흥성하는 이유의 핵심 또한 동성 서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당장에 남장여자를 비롯하여, 남-녀 육체교환 컨셉 등이 드라마에서 흥성하고, 동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가 흥행하는 등의 배후에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팬픽은 무엇보다 작가와 독자가 모두 여성이 절대 다수라는 점에서 순정만화만큼이나 남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순정만화가 이성애적 문법 속에서 여성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그려낸다는 데 반해, 팬픽이 동성애, 그것도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차이는, 그 장르를 둘러싼 주체의 위치 및 의미를 달리 물을 필요를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팬픽의 이중 젠더화, 즉 오로지 여성이 그 향유 주체라는 측면 뿐 아니라 그들이 주로 다루는 소재가 남성이라는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대상과 주체의 확연한 구분, 특히 여성 스스로 자신을 자발적으로 소거하고 남성으로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극단적 실천은 무엇 때문일까. 

가장 평이하게 이유를 찾자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자신의 실제 상황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것이 용이하다는 식이 있다. 여성으로서 남성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능청스럽게 말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보편적인 전략에 다름없다. 다시 말해 이야기의 중심에 여성이 설정되어 있으면, 어떤 서사적 흐름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 상황 자체는 여성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관련되어 이해하기 쉽다. 읽고 쓰는 주체라는 측면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 팬픽이라는 양식이 오히려 남성만을 가지고 서사를 구축하게 된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효율성 측면에서 이해 가능하다. 이를 여성들의 ‘인형 조종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초월적 입장에 선 작가가 작품 전반에 전면 개입하여 여성이라는 자연화된 동일시적 대상을 제거해두는 것을 말한다. 팬픽의 다수가 소위 ‘전지적 시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이점에서 상통한다. (안선주의 조사는 팬픽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이 27건(35.1%)인데 반해 전지적 시점이 49건(63.6%)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련 내용은 “인기남성댄스그룹의 팬픽 현상에 대한 연구:‘g.o.d'와 ‘신화’를 중심으로”,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석사논문, 2003 참고.)

팬픽의 이러한 남성인물 선호는 내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여성의 ‘타고난 질투심’ 덕으로 돌려져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혹은 그렇다 해도 그 남자를 사이에 둔 여자들 관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선 남성 인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이 서사들이 여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읽혀지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행위성과 관련해 보다 세심한 논의를 위해서 동성사회성이라는 개념에 주의부터 환기하고 싶다. 이 단어는 원래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들만의 구조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여성 행위성을 논한다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여성은 대개 상품으로 존재했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밝혀진 거개의 사회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범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는 오직 여성의 교환으로 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 지평 속에서 남성 동성사회를 지탱하는 최종심급인 여성 스스로 의미 있는 사회적 거래의 주체가 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여성을 교환하면서 남성이 주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팬픽 이야기 속의 여성 부재에 뒤집어 적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팬픽은 여성으로써 가능해지는 시장이 아닌, 여성들 스스로의 시장이 도래하는 양상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고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이리가라이가 말한 ‘여자들의 시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는 ‘비록 여자들과 남자들이 수적으로 같다 해도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은 욕망을 품을 수 없고 결정적으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여자들은 극히 소수이다’라는 전제 아래 여성의 교환으로 가능해진 친족의 구조를 설명하고자 한 ‘정직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를 조롱한다. 그러면서 ‘(만일) 여자들이 상품이라는 그들의 조건, 오로지 남성에 의한 생산 활동과 소비, 가치화, 유통에 굴복하는 데에서 벗어난다면, 그리고 그러한 교환 작업과 기능에 참여한다면 이 사회 질서는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까’라고 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시장”, <하나이지 않은 성>, 이은민 역, 동문선, 2000 참고.)   


  

뤼스 이리가라이의 <하나이지 않은 성>
 


논의를 조금 더 밀어본다면, 팬픽의 여성 부재는 여성이 철저히 배제된 남성 동성사회(Homo-sociality)를 남성동성애, 그것도 성애적(Homo-eroticism) 모습으로 패러디한 결과이지 않을까. 이 관음적 쾌락은 기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권력을 재배열하는 데 잇닿게 된다. (박세정은 야오이패러디물을 중심으로 이에 관해서 심도 깊은 논의를 끌어내었다.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능력에 관한 연구”, 이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6 참고.)  

다음 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겠지만, 남성에게 침범당하기를 두려워할 것으로 위치되었던 여성은, 여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로서의 남성의 육체는 그를 둘러싼, 서사의 구조 바깥에서 그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대는 여성들에 의해, 그러니까 찬미됨과 동시에 침범되고, 또 한편 희롱되기조차 한다. 이 쾌락을 통해 권력을 재배치하는 능력으로 여성은, 실제 남성 동성애는 철저히 금지한 그 팔루스적 상징 법칙에 불응하는 이상한 주체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여성 교환을 통해 성립한 남성 동성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남성 동성애이다. 반면 여성 동성애는 그에 비해 이성애로 가는 도중의 보다 미숙하고, 교정되어야 할 어떤 태도라고 여겨진다. 물론 이것이 남성 동성애자와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금지 및 차별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팬픽을 즐기는 여성은 족외혼에 입각한 남성 사회를 짊어질 강박에서는 한발 비껴나 있다. 이들은 오히려 남성들 간 쾌락에 몰입하면서, 남성 동성애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서사를 진정 향유하게 되기 어려운 남성들과 완전히 다른 위치를 가지게 된다. 여성향은 있어도 남성향이란 말은 없고, 야오녀과 달리 야오남은 희귀하다. 혹은 있더라도 남성은 여성보다 더욱, 자신이 그러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발화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취향 자체가 어쩌면 대사회적 커밍아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 동성애물인 백합(白合)의 독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 이 흥미로운 차이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팬픽을 읽고 쓰는 여자들은 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자를 매개로 여성으로서 스스로 그 유희적 교환의 주체가 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여성들만의 관계가 가능한, 그 공감의 시장을 형성해간다고 볼만한, 이러한 팬픽의 사회적 의미와 더불어, 어떻게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팬픽을 즐기고 있는지의 의미가 남았다. 그 욕망의 내용을 다음 회에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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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