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트로(intro) - 누나의 은밀한 '문학' 폴더

 

인터넷을 떠도는 캡처가 있다. 이름 하야 ‘남매의 은밀한 폴더’. 정황은 이러하다. 남동생과 누나가 각기 상대의 낯선 폴더를 열고 깜작 놀란다. 그리고 곧 파일명을 바꾸는 것으로 서로에게 메시지를 남기는데…… “동생, 이런 거 너무 자주 보지 마. 동영상 강의를 보렴. 간호사가 주사 놓을 때 느끼지 마”라는 누나의 말에 동생이 남긴 메시지 내용은? “누나, 이런 거 너무 자주 보지 마. 동방신기는 연인이 아니라 가수라고. 차라리 남친을 만들어”였다.   

 


 

<남매의 은밀한 폴더: (위) 동생의 ‘야동’ 폴더, (아래) 누나의 ‘B․L’ 폴더>
 


“자, 그럼 이제 폴더를 닫도록 해봐”라고 권하며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는 보통 유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리얼리티는 결코 얕지 않다. 남학생의 ‘야동’ 폴더야 청소년기 혈기방장함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이에 반해 20대 누나들이 컴퓨터 앞에서 하악 대고 있는 모습은? 두렵기조차 하다. 화창한 날씨에 샤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미팅이나 데이트를 할 것이라 기대되는 그녀들이 나날이 다크 서클이 짙어져가며 보고 있는 이 ‘B․L’ 등속은 과연 무엇일까? 누나의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이 텍스트 파일들은 한마디로 소설이다. 그런데 남자들만의 사랑을 다룬다. 물론 때로 강도 높은 성애 장면도 포함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왜 여자들은 이러한 동성(同性) 서사를 욕망하는가. 다시 말해 ‘누나들의 문학’은 왜 ‘꽃미남 간의 동성애’에 대한 것인가. 왜 이런 주체와 대상 간의 젠더 간극이 생긴 것일까. 대체 여자들이 스스로가 완전히 소거된 이야기를 만들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들이 왜 이러한 동성 서사를 생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팬픽(fanfic)을 중심으로 몇 가지 갈래의 논의들이 제출된 바 있다. [혼란을 막기 위해, 이 글에서는 전반적인 패러디 창작은 팬픽션(fanfiction)으로, 아이돌 그룹을 위시한 연예인을 모델로 동성 서사를 만들어내는 실천은 팬픽으로 규정함을 밝혀둔다.] 간략히 정리하면, 하나는 무성적으로 여겨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문제 삼는 것이다. 이때 동성 서사 충동은 스스로의 동성 지향성을 발견하는 특정 계기로 위치된다. 또 하나는 한국적 아이돌 팬덤과 결합하여 ‘하필 동성애?’로 발흥된 여성들의 과도기적 징후, 따라서 곧 건전한 방향으로 수렴될 패러디 창작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에서는 ‘서사’가, 후자에서는 ‘동성’이라는 측면이 왜소화되면서 왜 여성이 동성 서사 욕망, 특히 남성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는 전면화되지 못했다.

최근 10대뿐 아니라 20~30대 여성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분석한 논의들에 따르면, 이를 인터넷이라는 매체 환경에서 여성들이 환상성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정체성을 시험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김민정, “팬픽의 환타지와 성정체성”, <여/성이론> 17,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3, 1; 박세정,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능력에 관한 연구”,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6; 한유림,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를 통해 본 젠더 트러블”, 서울대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8 등의 야오이, 팬픽 관련 분석을 대표적으로 참조할 수 있다.)

이 글은 여성들의 동성 서사 욕망의 저변을 역사적으로, 또 한편 이론적으로 확인해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여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욕망, 글쓰기를 향한 동경 등이 왜 하필 동성 서사에 살포시 자리하게 된 것일까. 여성이 지워진 연애 서사에서 여성 자신이 출몰하는 공간 혹은 그 방식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난 10여 년간 숨 가쁘게 쓰이고 읽혔던 이 이야기들이 과연 세상의 질서, 혹은 기존 성 규범과 맺는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필자의 머리에 내내 떠돌고 있는 하나의 장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0년 8월, 인터넷정보등급제 실행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발표되었다. 그러자 ‘인터넷 국가검열 반대를 위한 공통대책위’ 사이트에 난데없이 ‘소녀’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정보통신부를 비롯한 관련 홈페이지 게시판을 항의 글로 도배하다시피하고 ‘검열 반대를 위한 네티즌 대회’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10대 여학생을 행동하게 만든 것,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다름 아닌 팬픽이었다. 왜냐하면 이 낯선 소녀들의 창작물은 대부분 아이돌 그룹을 위시한 연예인들 사이, 그중 동성 관계를 제재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사회 통념상 허용될 수 없는 성관계의 일종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당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7조항이 청소년유해매체 지정의 근거가 된 것이 문제였다.
(오랜 논란과 투쟁 끝에 동성애 조항은 2004년이 되어서야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에서 제거되었다. 이를 고지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중 개정령안 ‘다’항은 다음과 같다. “현행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 기준에 있는 ‘동성애’가 동성애자에 대한 인권 침해의 우려가 있어 삭제하여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등에 따라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 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함.”)

그렇다면 소녀들이 그토록 읽고 쓰고 싶어 하는 팬픽을, 그들이 좋아 마지않는 스타와 나 사이의 ‘올바른(straight)’ 이성애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면 될 게 아닌가! 그렇지만 이 소녀들은 깜찍하게도 “팬픽도 문학이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라!”라고 외쳤다. 이 구호는 팬픽이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 걸음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편 표현의 자유에 근거한다면 동성의 이야기 역시 다룰 수 있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후술하겠으나 소녀들이 폭발적으로 그러한 문화적 능력을 세력화하게 된, 혹은 팬픽이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동성 서사 자체에 힘입음이 크다고 생각한다. 촛불 때 그 진가를 드러냈던 대한민국 유수한 대표 여성 커뮤니티에는 이 “팬픽만 몇 기가”라는 자조 혹은 자탄의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촛불 소녀들과 사생팬들은 단체적 기동성 등에서 꽤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기실 이들은 완전 다른 존재들이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팬클럽 등에서의 활동 및 운영에의 참여라는 일정 경험이 축적되어 촛불 소녀들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팬픽은 그 자체만으로도 ‘탈출구가 없는 10대 중‧고등학생’부터 ‘90년대 대중문화 키드의 귀환’으로 가세한 20~30대까지 아우를 정도의 광범위한 향유층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의 동성 서사 선호 실천은 보다 복잡하게 뻗어가고 있다. 일본발 B․L 표현물 및 야오이 패러디 텍스트에 대한 취향이 함께 시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부연하자면 야오이는 절정 없고[ヤマなし;야마나시], 완결 없고[落ちなし;오치나시], 의미 없다[意味なし;이미나시]의 첫 음절을 따서 여성 스스로 자조하듯 만들어진 말로 보통 남성 동성 표현물을 총칭한다. 야오이 패러디 텍스트는 모험이 중심인 소년 만화를 남자 캐릭터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바꾸어놓은 것을 말한다. 보통 ‘야오이 혹은 야오녀’와 중첩되어 쓰이는 ‘동인계 또는 동인녀’는 이러한 아마추어 작가들의 커뮤니티적 창작 실천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B․L은 Boys Love의 약자로 남성 동성 관계를 그리고 있는 야오이 중에서 미소년이 주축인 이야기들을 지칭한다. 여기에 장미물이라고도 하는 남남 관계 서사물에 대비해 여여 관계 서사물을 지칭하는 백합물, 그리고 B․L에 대응하는 G․L(Girls Love) 등에서 보듯, 동성 서사 관련 장르 명칭은 지금도 생성 중이다.

고백은 아니지만, 필자 역시 10대 소녀도 아닌 뒤늦은 나이에 모 그룹들의 정보를 섭렵하는 과정에서 팬픽에 접근하게 되었다. 문청(文靑)은 아니었으나, 나름 문학 및 그를 둘러싼 구조들을 더듬어왔던 세월은 순식간에 이 정신없는 이야기의 격류에 휩쓸려갔다. 분석하는 이성은 탐닉하는 주체 앞에 허둥거렸다. 그리고 이제 소녀들은 누나가 되었다. 공책에 써서 돌려 읽던 팬픽이 인터넷에 올려지고, 이제는 핸드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많은 여자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는 젠더를 교란, 교차하는 이야기가 잠깐 스쳐가는 열풍에 의한 것이 아니고, 무려 몇백 년에 걸쳐 형성된 욕망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여성-’, 혹은 ‘남성-’이라 일정하게 주조되었던 특정 젠더형을 비트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왔고, 거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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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ppo 2010-12-2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미 익히 재미있고 의문을 제기하는 글들로 가득찼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참으로 냉철한 비판이며 관찰력입니다. 부럽습니다. 자주 찾아 와 읽겠습니다. ^^

비로그인 2011-05-2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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