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어딘가를 오고 갈 때 꼭 이 잡지들을 사서 읽고 다니셨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명사들과 평범한 소시민의 글이 교차 편집되는 구성을 하고 있다. 

 

두 잡지의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한결같이 '감사'나 '봉사' 같은, 개인이나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와닿지 않는 가치와 논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지하철 역사 게시판에 짧게 올라오는 글들 혹은 교회나 성당의 주보에서 볼 수 있는 글들이 많지만 소박한 삶 속에 성찰이 보이는 글도 있고 진짜로 힘겨운 어느 날에는 아, 그 잡지에서 본대로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잠시 먹은 적도 있다.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같은 옛날 연습장에 조잡한 글씨체로 적힌 그 구절같이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날도 있다.

 

이렇게 단정한 잡지들을 들고 다녔던 엄마의 실제 생각과 말투는 이 잡지들의 논조와는 달랐다.

 

마음에 안 드는 딸들의 행실에 분개하여 말다툼 끝에는 내가 다시는 여기 오나봐라,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ㄴ 등등 저주의 말들로 이별을 맞곤 했다.

 

아주 요즘말로 영혼이 탈탈 털려 기진해서 동생에게 하소연을 하다보면 우리 엄마는 안 어울리게 왜 저런 잡지들을 들고 다니는 걸까, 월간 <나쁜 생각>이나 <하수처리장> 이런 잡지 발행인 되어서 찰지게 사회와 딸들에 대한 불만을 욕쟁이 할머니 욕으로 랩하듯이 토로하면 될 텐데라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엄마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고 코로나 19 사태로 언제 면회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간단한 간식과 두 잡지의 3월호를 큰글씨 판으로 사서 부쳐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도 잡지들을 새로 사서 정독해야겠다.

 

진짜 3월에는 감사하고 온유하게 살기로 다짐하며.

 

어제도 역시나 집 근처 학교에 면접을 가게 되었다. 인력시장 끝물이라서 시간강사뿐.

 

이 학교는 이 지역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 사학재단 중 하나로 특성화학교인데 대기 장소가 교내 카페이고 모르는 분이 커피도 내려주셔서 대기시간 중에 잘 마셨다.

 

면접장에 들어가니 진지하게 진짜로 이 자리 시간강사 자리인 줄 아느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이 학교에 왜 지원하냐고 물으셨는데 엄마도 여상을 나오셨고 나 역시 그 옛날에 서울여상을 갈 뻔한 적이 있다는 답을 했다. 장황하고도 뜬금없는 TMI.

 

그냥 이 지역 취업 명문이자 진학 명문인 이곳의 교육환경을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짧게 말할 것을.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냥 날이 좋아 걸었다. 코로나 19 영향인지 거리와 가게에 사람들이 진짜 드물었다.

 

집에 새로 필요한 가구가 있어 가구점에 들렀다가 가격에 크게 실망했다. 

 

당근마켓이나 뒤져보아야겠다.

 

그제인가는 딸아이 의자 바꾸고 남은 의자를 올렸다가 바로 팔아서 이 지역 말로 진짜 오졌다리.

이것저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주소 묻고 에누리 같은 것도 없이 바로 사간 아저씨 리스펙.

 

나름대로 의자를 깨끗하게 썼고 다시 매직스펀지로 닦고 해서 팔았지만

의자구매자 아저씨가 부인에게 이 지역 최고가로 사왔냐고 한소리 듣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나도 참 별 잔걱정이 많아 탈이다.     

 

 

 

 

 

 

 

 

 

 

 

 

 

 

 

 

 

코로나 19로 도서관도 오랫동안 휴관이라 있는 책들이나 다시 잘 읽어야겠다.

 

병원을 다니며 수면 패턴을 다시 잡는 중인데 여전히 많이 걷고 너무 일찍 잠들다 보니 새벽에 자꾸 깨게 된다. 스마트폰을 바닥에 진동으로 두고 새벽마다 일어나는 윗집 덕분에 강제 기상하게 되는 날도 많았다.

 

쉬는날이면 사람들 초대해 여러 집에서 모인 게 분명한 아이들은 마구 뛰고 부모들은 한켵에서 부어라 마셔라가 연상되는 윗집이 어제 이사를 나가서 수면의 질이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책에 나오는 대로 감사할 일들 찾기.

 

저녁에 어인 일인지 분리수거하러 나가고 싶어 나갔다가

중학교 가는 아들 자습서들 득템.

 

아이가 갈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는지 다행히도 출판사들이 꼭 맞아 좋았다. 역시 자유학기를 시행하는 1학년에는 자습서를 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불끈.

 

아들은 사실 문제집을 끝까지 푼 적이 거의 없고 딸에게 고이 물려주는 편이다.    

 

 

 

 

 

우리집도 <수학의 정석> 이렇게 쓸 판이다.

 

 

 

 

 

 

 

 

 

 

 

 

 

 

 

 

 

 

 

그래도 딸아이가 있으니 이 작품집은 구매해야겠다. 굽시니스트 팬인 아들이 몇 주 전에 이 책들을 사달라고 해서 사서  보여주는 중이다. 특유의 아재개그와 드립에 반해서 구석에서 깔깔거리며 보는 아들이 진짜 신기하다. 역사만 이렇게 좋아할 수 있는지.

 

날이 밝으면 올 시즌 마지막 면접을 보고 와서 엄마 병원에 계신 동안에 진행할 집 인테리어 일정을 짜야 한다.

 

보관이사 업체와 인테리어 업체를 선정하느라 전화 주고 받고 하다보니 한달치 말을 다한듯하다.

 

딸이 필통을 가지고 싶어 문제집들을 사달라고 했는데 아들이 물려준 문제집이 한 가득이라 금액을 채울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편집은 깔끔하지만 기본 내용이 아쉽다.

 

 

 

 

 

 

 

 

 

 

 

 

 

 

 

그냥 이런 구성으로 사야겠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일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시기이지만

어디까지나 좋은 생각 또 좋은 생각.

 

아니지 그보다는 생각을 비워내고 멍 때리며 자주 쉬고 또 쉬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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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요며칠 여전히 서류 제출과 면접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면접을 10시 반까지 오라고 해서 갔더니 지원자 전체를 부른데다가 다른 과목까지 섞어서 불러서 대기실이 인력시장 같았다. (사실 그렇지) 

 

대기실 한켵에 책이 꽂혀 있는데 의외로 읽을 만한 책이 가득했다. 특히 이 학교에 <정신병동 이야기>가 있어서 무지 반가웠다. 다른 지원자들이 흘끔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읽어나갔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 없는 경우가 많아서리.

 

책을 빨리 읽기는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내 차례가 거의 12시 가까워져 시작되어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린 셈이 되어 거의 다 읽었다.

 

대개 지원자끼리 말을 섞지 않는 편인데 하도 오래 기다려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어떤 과목이시고 어디서 일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 학교 성격상 인내심이 많아야 해서 그거 테스트 하느라 잡아두나보다 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여기는 지원자들.

 

역시나 이번에도 내가 최고령인듯하고 나머지 분들은 이 학교 지원자들 중 유독 어린분들이 많았다. 경력단절 여성과 각 졸업한 무경력 청년 지원자들. 공통된 삶의 경험이 없지만 이 인력시장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야지.

 

대릴 커닝엄은 정신병동에서 근무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병동 이야기>를 그렸다.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알고 두려워하는 질병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곁들이고 환자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목적으로 썼다. 장을 마칠 때마다 각각의 정신질환에 대한 전문의의 간략한 소개가 이어진다.

 

양극성장애라고 하는 조울병, 과거 정신분열병으로 통했던 조현병, 치매, 우울증, 경계성 인격장애 등 살아가면서 한번은 들어보았으나 가족이나 내 자신이 걸리고 싶지 않은 그런 질병들이 소개된다.  

 

대릴 커닝엄이나 다른 전문의들이 말하듯이 정신질환자가 강력범죄를 일으키는 비율은 일반인이 강력범죄를 일으키는 비율보다 낮지만 그들이 워낙 눈에 띄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평소 자주 해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 강화된다.

 

일상에서도 자신에게 조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정신병자'라고 하거나 나 '조증'이 올라오나봐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가까운 이들이 오래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았다면 함부로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리고 유명인들 중에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창작 활동을 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꽤 많다.

 

치매의 여러 종류에 대해 소개하고 가족들이 어떻게 도울지 이야기한 부분이 좋았다. 망상을 보일 때 무조건 교정하려고 하지 말고 망상이 나타난 배경을 이해하고 참을성 있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가족들이 돈을 가져갔다고 의심한다면 화내지 말고 돈이 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면 된다.

 

어제야 알았는데 책을 너무 열심히 봐서 면접을 망쳤는지 그 학교는 잘 안 되었다.

 

우리네 헛짚는 면접살이

한 세상 걱정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래도 책 한 권은 건졌잖소. 우하하하핳

 

다행히 다른 중학교가 하나 되어서 시간표를 조정해서 다른 학교 하나만 더 되면 일년 농사는 어찌될듯하다.

 

 

 

 

 

 

 

 

 

 

 

 

 

 

면접 마치고 병원에 가느라 아이에게 도서관에 가 있으라고 했다.

이때 누군가가 반납해서 눈에 들어와 읽어내려간 책.

 

서현진 팬이지만 기간제 교사를 소재로 한 <블랙독>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어쩌다 읽게 되었다. 15년차 중등 기간제 선생님이 세월호 때 순직한 기간제 교사 분이 순직 인정을 받는데만 한참이 걸린 현실을 알리려고 쓰신 책이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지금은 집안사정상 전일로 매이면 안 되어서 수업노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래도 학교에 내 자리라도 있던 시기의 일들이 그립고 부럽다.

 

익숙한 에피소드라서 그런지 술술 읽히면서도 어느 장에서는 막혔다.

 

그래도 대부분 잠시 있다가는 손님에게 친절하신 정규직 분이 더 많았는데 학생에게 받은 상처는 오래갔다.

 

당시에 동아리 축제 때 부스를 운영하던 중에 평소 좀 뺀질거렸던 친구가 부스 지키는 것을 이탈하고 다른 데로 놀러 가려고 했다. 아이들과 내가 뭐라고 힐난하자 난 내 시간 다 채우고 가는거다, 나도 기간제거덩.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잃고 대꾸를 못했다.

지금이라면 나는 기간은 잘 채우고 성실하게 일하는데 네가 이러면 시간 관념도 없고 일도 못하는 거야, 라고 웃으며 훈육했을 텐데.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기간제교사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보다는 사학법이 개정되어 사학재단도 공동으로 임용을 치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난 이제 임용과는 인연이 없고 그저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혹여나 사립 선생님들도 많으실 테니 노파심에서 한 말씀. 모든 재단이 다 비리로 얼룩져서 친인척만 뽑는 것도 아니고 재단에 맞는 인력을 뽑는 것이니 현직에 계신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국민정서상 교사가 수업노동자라는 개념도 없고, 기간제 교사들의 처우 개선 문제가 나오면 늘 민이든 관이든 억울하면 임용 통과하든가로 일관한다.

 

교원수급정책 실패, 출산율 저하 그리고 고교학점제 등 다양한 교육정책 변화로 임용으로 인원을 충원하기보다는 계속 수업노동자가 수업의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데 일반의 인식은 한참 떨어져서 그게 답답하다. 국가자격증도 있고 한번 계약하면 동일노동이거나 기피업무를 맡고 있는데도 실력 없는 잉여 취급하는 학부모나 관리자들이 종종 있다.

 

앞에서는 선생님은 기간제같지 않다는 요상한 칭찬을 하고 연말정산 기간에 모모는 6개월짜리였나 했던 어떤 감님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일부 아이들은 내가 어떤 신분이든 개의치 않고 다가와 쿠키도 주고 편지도 써주었다. 학교에는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이 있어 미숙한 사람도 가끔 어떤 아이들에게는 간택받아 사랑받기도 한다.

 

*

 

면접 일정을 마치고 금요일 아침

비장하게 마스크로 무장하고 본가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도착하여 힘들게 사설구급차를 불러 엄마를 다시 입원시켜드렸다. 작년 11월에 정형외과 통합간호병동에서 열흘 넘게 보내고 나서 다시 또 병원이라니 지긋지긋해 하시지만 연락도 안 되고 식사도 안 되어 할 수 없이 초강수로 입원을 했다.

 

여기저기 병원을 수배해 구로구의 한 병원으로 가는 길. 

이제 17개월이 된 조카가 손바닥보다 작은 마스크를 쓰고 함께 동행했다. 아기띠에 안겨 땀을 뻘뻘 흘리고 자는 모습을 보니 안스럽기만 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 시국에 이 어린아이가 왠말이냐며 빨리 수속하고 가라고 하셨다. 면회는 가능한데 코로나 19로 당분간은 병실에 아무도 가볼 수가 없다고 하니 안타깝다.

 

늘 입원할 때면 애틋해하다가 퇴원하면 잘 못해드렸다.

이번에는 언제 퇴원할지도 기약이 없고.

 

집에 가서 대기하는데 다음날 두유를 주고 가야고 한다고 해서 지하철로 병원에 가는데

주말에 사람이 없어 앉아가다니 충격.

 

막차로 집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기사님이 대구에서 온 신천지 환자가 유숙헤어 영풍문고점에서 쓰려져서 조선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빨리 귀가하라고 안내방송을 하셨다.

 

내리니 방역복을 입은 분들이 있고

다들 바쁘게 택시를 잡아 타러 가는 손님들이 약간 있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 기사님께 환자가 쓰러진 소풍 터미널에서 출발해 또 역시 환자가 쓰러진 유숙헤어에서 탔으니 기사님 여기저기 꼭 손소독제 쓰시라고 했다.

 

당분간은 미사 취소이니

이번 주일은 집에 콕 박혀서 밀린 예능이나 봐야겠다.

 

책이 있어 다행이라며 마무리는 예능이라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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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려고 나는 이런 제목들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것일까?

 

제목이 무시무시하지만 한번쯤 일독해보고 싶은 책들이다.

 

어제였는지 그제였는지 이런 시기의 어떤 날의 풍경.

 

원서를 내려고 들어보지도 못한 학교를 찾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도로명주소도 알고 구글 앱도 켰는데 길을 찾지 못하는 미스터리.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에게는 길을 잘 묻지 않는다. 언젠가 학교 근처에서 학생에게 길을 물었더니 귀에서 콩나물도 뽑지 않고 내 휴대폰을 가리킨 적이 있다. 

 

대개 길을 물을 때는 마스크 쓰고 목도리를 친친 감고 동네를 슬슬 다니시는 어르신에게 묻는 편이 낫다. 아니면 택배기사분들이 잘 알고 계신 때가 많다.

 

학교 근처에서 뱅뱅 돌다 근처 택배기사님에게 길을 묻고 그 방향으로 열심히 가는 중이었다. 빵빵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그분이 차에 타라고 하셨다. 죄송해서 망설이니 자기 이상한 사람 아니고 근처 가니 타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무려 학교 안으로 데려다 주셨다. 멀리 교문이 보이기 시작하자 내려달라고 했는데 어차피 차를 돌려야 하니 괜찮다고 하시며 아이들 가르치기 힘들지 않냐고 하신다. 아마 내 서울말?을 듣고 새로운 부임지로 가는 교사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친절에 감사하여 가방 안을 뒤지는데 거의 구비하고 다니는 마카다미아 초컬릿 하나 없어서 아쉬웠다.  

 

무사히 원서를 내고 전화벨이 울려서 받아보니 집에서 한참 먼 중학교에서 면접에 오라고 한다. 공립인 이 중학교는 면접 대상자를 선정한 지 두 시간만에 면접에 오라는 것이다. 아마도 열일 젖혀두고 올 의지가 투철한 사람만을 뽑겠다는 의지인 건지.

 

생각보다 환승버스가 일찍 와서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샀다. 삼십 분 이상을 있어야 할듯해서 투 플러스 원으로 묶인 과자를 나중에 애들 주려고 여러 뭉치 샀다. 학교 앞의 테이블이 많은 생각보다 큰 편의점 안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어 깜박 졸 수도 있었는데 흥미로운 사연이 들려와 잠이 깼다.

 

황혼 시기에 이르러 바람이 난 아버지 때문에 분노한 딸들과 사위가 엄마를 대동하고 늙은 상간녀의 가게를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상간녀에게 무려 이천만 원이나 빌려준(아니 그냥 준) 상태이고 상간녀인 아줌마는 외로운 사람끼리 의지하는 것이라며 방패막을 굳게 친다. 상간녀의 아들 역시 사연을 보낸 이의 말에 따르면 너희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외롭게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겠냐고 뻔뻔하게 항변한다. 

 

심각한 사연인데 딸이 이런 상간녀 모자의 행동에 화가 나서 너희 엄마는 꽃뱀이고 너는 그 뱀의 자식이라고 핏대를 올리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해버렸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아닌 편의점 사장님이 분명한 아주머님도 나랑 같은 부분에서 빵.

 

분명히 내용은 엄청 슬프고 비참한데 역시 타인의 불행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이런 정도인 것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년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소송을 진행하고 상간녀 소송도 진행해서 이천만 원을 돌려받았고 딸들 근처?인지 딸들과 함께인지 아무튼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소송 과정에서 상간녀 아줌마가 너무 지쳐서인지 그 아줌마와도 헤어져서 쓸쓸하게 산다고. 반면 어머니는 한 딸은 약사이고 다른 딸들이나 사위도 유복하고 다감해서 힘들지만 비교적 잘 버티고 있다고 한다.

 

이후로 한 아가씨가 파혼한 사연을 이야기한다고 하는 부분에서 아쉽게도 학교에 면접보러 갈 시간이 되었다. 목소리도 낯설고 해서 어느 주파수의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판 라디오판 사랑과 전쟁은 꽤 흥미율율했다.  

 

도착하니 방학 중의 한가한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또 무심한 척 소머즈급으로 엄청 귀기울여 들었다. 달리 이유가 없다. 그저 무료했으므로.

 

미취학 아동부터 초딩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를 기르는 서너 분의 선생님들이 방학중 육아의 고충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면접대상자 분과 어색한 미소를 주고 받고 내 차례가 되어 교장실에서 짧게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비슷비슷한 형식적인 질문이 오갔고 교감인 듯한 분이 대뜸 원서를 몇 장이나 내셨냐고 온다고 하시고는 못 오면 곤란하다고 희망 고문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살짝 기대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내 뒷 번호분이 워낙에 포쓰가 있어 보여서 큰 기대는 하지 않은 터였다.

 

면접을 마치고 집에 갈 시간을 계산하니 밥하기에 빠듯 밥도 하기 귀찮아서 미리 치킨 체인에 전화를 해두었다. 배다른민족 등 어플사용에 반감이 있어 그런지 서툴러 늘 전화를 하는 편이다.

 

정류장 근처 시장에서 귤과 내일 저녁에 먹일 목살, 가래떡 등등 아이들이 좋아할 먹거리를 사고 가방을 푸니 애들이 엄청 좋아한다. 가방 안에 아까 편의점에 산 과자까지 들어 있고 곧 취킨이 온다는 소식에 애들이 일제히 열광한다. 조삼모사 원숭이들같이.   

 

아침에 돌려둔 빨래를 깜박하고 널지 않아 널고 아이들끼리 점심 먹고 치우지 않은 것들 설거지하고 동생 전화를 받았다.

 

거의 일주일? 열흘간을 엄마가 전화도 받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아 입원이 필요한 시기인듯.

 

예상했던 패턴이기에 며칠 전에 미리 병원에 예약도 해두었는데 사실 그날 가봐야 아는 일이라서 갑갑하기만 했다.

치킨이 와서 애들과 <검사내전>을 다시보기로 보았다.

 

 

 

 

 

 

 

 

 

 

 

 

 

 

 

 

 

진짜 뜬금없이 4학년 딸아이 꿈이 검사여서 보기 시작했는데 저자의 현재 근황이나 검찰의 현실과는 별개로 나름 볼 만하다.

 

검사 미화가 양념같이 있지만 범죄와 수사, 재판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현실 도피하기엔 딱이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고 반장 모임에서 가끔 본 친구가 드라마의 배경인 통영에서 검사로 있던 적이 있다고 하자 딸이 놀란다.

 

엄마는 왜 그런데 공부 잘했다며 법대 갈 생각은 안 했어?

그러게 말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나도 사실은 막연하게 법조인이 꿈이기는 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미제 사건으로 남아 파헤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실은 모든 죽음이 약간은 미제 사건일 수도......

모든 죽음은 실제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르기도 하다.

 

황당한 에피소드에 깔깔 웃고 치우고 나서 핸드폰을 보니 그날 무려 10891보나 걸었다고.

이 시기에 뚜벅이인 나는 만보 선생이 되곤 한다.

어제는 엄마가 치료받고  광주로 내려오시면 살 집을 보러다니느라 거의 또 만보를 찍었다.

그래도 살은 빠지지 않는다는.

 

다음날 아침에 눈이 하도 빡빡해서 눈 온찜질팩을 했더니 진짜 포근했다. 

금요일에 본가 가는 버스 타기 전에 하나 사서 챙겨서 숙면을 취하며 집에 가야겠다.

 

 

*

 

참참,

 

월요일에는 눈구경 한번 못했던 이 남도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눈이 많이 와서 단지 근처와 공원에 눈이 쌓여 딸아이가 무척 좋아했다.

 

 

 

 

 

 

 

 

 

 

 

 

 

 

 

 

 

지난 겨울에 아껴가며 읽었던 에세이들

다시 꺼내보고 눈팩 수면안대 챙겨서 가야지

 

본가 가면 진짜 또 본격적인 간병? 투병이 시작될 예정이니 다시 마음 단단하게 먹고.

부디 엄마가 그날까지 잘 버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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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하반기에 정말 많은 일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읽고 쓰는 일이 안 되었다.

진짜 그런 상황인데 꾸역꾸역 일을 나가서 수업 노동을 하고 부천을 오가며 엄마 병원에도 갔다가 관공서나 여러 일을 처리하며 지쳤다.

 

발병이 처음도 아닌데 매번 수습할 때면 황망하기만 했다.

분명히 비슷한 패턴이기는 한데 약간 다르고

같은 고통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극심했다.

 

작년의 경험은 정말 강렬했다.

 

 

그래도 작년의 큰 소득이라면 나의 상태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엄마만 오래 환자라고 생각했지,

내가 환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에 나도 같은 병을 비슷하게

하지만 다소 약하게 앓으면서 환자의 심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나으려고 약도 먹고 상담도 받으려고 한다.

 

다행히 나에게는 병식이 있다.

 

환우 카페에 가서 병원 정보를 다시 묻고 고통을 토로하는 일을 하면서 한없이 심난했지만

그래도 병을 알고 내가 다소 덜 아프다는 것이 지나고 나니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중에도 책을 읽기는 했지만, 지금도 아프지만

<심신단련>을 읽고 다시 그래도 나도 더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신단련>을 읽고, 건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온건한 마음, 바른 상식에 위안 받았다.

 

가족 각자의 삶에 충실하면서 연결되어 있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나의 원가정, 엄마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니 한없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이제 내 가정에서 새로이 시작하면 되는 것이니

많이 배워가야겠다.

 

늘 병원에 가면 엄마의 삶이나 심리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아프고 나니 나도 내 삶을 정리하기 힘든데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환자가 환자를 돌본다며 서로 할퀴고 있었다.

 

뒤늦게 동네 병원을 찾아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다.

처방받은 약이 아직 잘 맞지 않고 의사 선생님에게 온전히 마음을 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엔 정기적으로 다녀보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지난한 내 삶의 조각(메모에 적힌 엄마의 투병기)을 보시고는

가족의 무게로 힘드셨군요.

힘든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오셨는데, 힘든 것이 당연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셨다.

 

추운 방(가정환경, 경제적 문제)에 있으면

감기가 들기 마련이고 감기가 들면 치료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묘하게 설득되어 다음 약속을 잡았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역시 방이 따뜻해지믄 많이 해결될 일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이력서를 쓰고 다니고

엄마 병원을 알아보고

처리해야 할 여러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만 쓰다 보니 엄청 고생만 한듯한데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이전에

아들 초등 졸업 기념으로 대만에도 갔었다.

 

자유여행 한다고 책 사고 카페 가입하고 난리치다

정신 없는 와중이라

결국은 패키지로 다녀왔는데

후회 반, 다행이었다는 느낌 반.

 

여행사의 관행과 가이드의 현실을 보고 여행 마무리엔 불편한 마음 가득이었다.

 

그리고 역시 나는 해외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정말 돈과 시간이 많아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때가 오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ㅎ

 

 

 

 

 

 

 

 

 

 

 

 

 

이 책에 장강명 씨 부인이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 석양에 감동하기보다 동네에서 일상 중 산책하는 데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도 공감한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HJ가 가난한 집 딸의 자세를 아직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즐거움을 맛볼 때도 늘 본전을 생각하는 습관이 그녀의 몸 속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토요일에 소파에 편히 앉아 컴퓨터로 <라디오 스타>를 보는 데에는 전기료밖에 들지 않는다. 샌드위치는 내가 전날 밤에 마트에 갔다가 사 온 떨이 상품이다"    202쪽

 

그래서 내가 해외 가면 불편했구나. ㅋ

 

 

그래도 아들이 간만에 의욕 있는 모습을 보였고

가족끼리 의견 충돌이 없이 마무리되었다는 데 의의를 두려 한다.

 

사춘기 아이들과는 패키지 여행을 추천함.

 

다행히 가이드와 일행이 있으니 본연의 모습이 나오지 않고 꽤 체면을 차리며 의젓하게 있어주어 고마웠다.

 

*

 

2020.

어릴 때 미래 상상화를 그릴 때면 늘 택시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컨베이어벨트 같은 데 서서 다니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그런 풍경을 그렸는데 체감상 달라진 것은 핸드폰뿐이다.

 

미세먼지 가득하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들이 자주 떠돌고

아이들은 이전보다 많이 태어나지 않는다.

 

평범한 청년들은 일할 기회를 얻기 힘들고

나이든 사람들은 오래 고통받으며 천천히 죽어가는 요즘.

 

이런저런 기사를 보며 아침에는

생각만 많다.

 

그저

입원할 지경에 이르지 않게 일도 줄여보고

올해에 처리할 일들을 천천히 해가야지.

 

꼭 해야하는 일이 많지만

내 쉴 자리는 남겨두면서 가야겠다.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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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20-02-1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뚜유님 글을 볼 수 있어 정말 좋네요.
병원 잘 다니세요. 저도 작년에 병을 앓게 되어 일상에서 멀어지게 되니 건강에 대해 내 몸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어요.
뚜유님 책 소개와 살아가는 이야기 올라오지 않아 많이 궁금했어요. 건강하세요!!

뚜유 2020-02-19 08:51   좋아요 0 | URL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흔한 말로 안물안궁 아닌가 하다가 그냥 올려봤어요.

로자님도 편찮으셨군요. 살아가면서 건강이 제일 중요한 듯해요.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더 절절이 깨닫고 있어요
책 덜 보고 일도 줄이고 많이 쉬고 웃고 걷고 그러려고요.
로자님도 건강 지키셔요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있어서 뒤늦게 이런저런 영화들을 보았다.

 

정말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벌새>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벌새의 움직임같이 오래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이 맞았다.  

 

나와 같은 세대인 현재 30대 후반-40대 초반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1994년 이야기이다.

기이하게 더웠고 하루하루가 특별할 것은 없는데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터졌던 1994년.

 

영생할 것 같았던 김일성의 사망 소식도 충격이었지만, 뉴스에서 두 동강 난 성수대교를 보고 엄청나게 충격받았던 것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부천에서 시청까지 지하철을 타고 통학 중이었는데, 내가 지나고 있는 이 다리도 어쩌면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리가 저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데

내신 유지한다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무슨 의미냐고 유치하게 끼적이기도 했다. 

 

*

 

막연하게 그래도 유년기를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서 보냈으면 유복하게 상처없이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게으른 버릇이 나에게 여전히 남아 있어 처음에는 몰입하기 힘들었다.

 

어릴 때 집이 아닌 방, 방이 아닌 칸에 다름 없는 공간에 살았던지라 은희의 가정환경, 경제적으로 중상층 이상에 양친 모두 살아 계시고 한문 서당을 다닐 수 있고 유행하는 컬러풀한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 보고 나니 그런 것보다는 어릴 때 윗학년 언니를 동경했던 기억,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균열, 중학교 시기의 막연한 불안은 누구나 같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폭력에 충격받았다. 그 시대에 여동생이 오빠에게 저 정도로 맞는 건 꽤 있었던 일이구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에게 부럽다고 하면 라면이나 끓여오게 하고 맞았고 놀림 받았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은희는 집안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고 있고 오빠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빠가 때렸다고 말하는데도 엄마는 싸우지 좀 말라고 일축해버리는 정도이다. 엄마 아빠는 생계로 바쁘고 학원 가는 오빠에게 밥을 차려주는 게 이상하게 은희의 몫이 되어버렸다.

 

은희의 아빠는 꽤 성실하게 가게를 꾸려 가족들이 경제적 불편 없이 생활하게 하지만 상가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며 겪는 스트레스를 가족들에게 거친 방식으로 토해내기도 한다.

 

아빠나 오빠에 대한 묘사가 이 수준에 그쳤으면 은희가 너무 가여웠을 것이다.

은희의 수술을 앞두고 아빠가 어린아이같이 펑펑 울어버린 장면이 좋았다.

 

그 당시의 아버지들은 적절하게 말로 위로해주는 방법을 잘 몰랐고, 너무나 걱정되면 감정이 극에 달해 저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

은희가 단지에서 엄마를 크게 부르는데 엄마는 듣지 못하고 허공을 응시하며 앞으로 앞으로 가던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은희는 이 정도 거리라면 들리겠거니 하고 엄마를 애타게 부르지만 엄마는 듣지 못한다. 어릴 때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법하다.

 

엄마가 외삼촌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와서 누워 있는데 발꿈치가 건조하고 갈라져서 스타킹 올이 다 나가 있는 것도 자주 봤던 장면이다. 중년이면 생계와 집안 대소사로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기에. 

 

 

***

은희가 작은 의원에서 나이든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을 때 관객들 중에는 혹시 은희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긴장했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 기사로 읽었다.

 

신기했다.

나 역시 그 장면에서 의사 선생님이 은희 목덜미로 손이 갈 때 긴장했으니까. 

 

나중에 그 의사 선생님은 은희가 오빠에게 맞아 고막이 찢어졌을 때 조심스럽게 진단서가 필요하면 말하라고 한다. 예전 동네에 있을 법한 적절하게 무심한 의사 선생님 연기도 좋았다. 어릴 때 자주 가던 동네 서점 아저씨 분위기였다. 아이들을 좋아하긴 하는데 과장되게 다정한 게 아니라 딱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는 분.

 

영지 선생님도 그런 분이라 좋았다. 아이와 다기를 앞에 두고 앉아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어른이 그 시대에는 많지 않았다.

 

영지 선생님은 수업을 할 때도 과도하게 열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건네듯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을 나누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였던가?

 

영화를 보고 잠시나마 마음을, 순간을 나눈 기억을 떠올려본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거의 그렇다고 할 정도이다.

 

연락처도 있고 SNS로 어느 나라에 다녀왔는지 어제 점심에 무얼 먹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쉽게 연락할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이 영화는 신기하게 누구에게 보라고 쉽게 권할 수는 없는데

혼자 있으면 자꾸만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엄청나게 더웠던 여름날

갑자기 생리가 시작되었는데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픈데도

같이 집에 갈 사람이 없었던 날이나

 

그 추운 겨울에 기말고사를 망치고 친구와

비를 엄청 맞고  걸어다녔던 날이 떠오른다.  

 

그냥 그 때를 떠올리고

마지막에 무리들 사이에서 초연하게 서 있던 은희같이

혼자 뿌듯하면 되는 거다.

 

사족이지만

영화음악도 엄청나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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