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기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상상이 더해져서 온갖 근심에 마음이 짓눌리고 일상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딸아이는 엄마, 괜찮아, 라고 자주 묻고 난 감기가 덜 나았어, 피곤할 뿐이야, 라고 둘러대곤 했다.

 

<러빙 빈센트>를 보는데 애들은 역시 보다가 나가버린다. 어딘가 우울할 것 같다며.

너희들 진짜 눈치 빠르다. 그래도 순도의 우울은 아닌데

 

*

 

막연하게나마 그래도 고흐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 '천재'라는 수식에 가려진 진짜 일상의 고흐에 대해서 그동안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 마르크리트

 

 

고흐가 산책하고 그림을 그릴 때 함께한 사람들은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보다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고흐는 광기 서린 예술가가 아닌 더없이 조용하고 다감하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점심을 뺏어 먹는 까마귀를 보며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외롭다는 것을 알았죠.
- 뱃사공

 

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살아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리지도 못했고 늘 외롭고 빈곤했던 빈센트는 노란벌판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러 정황을 보면 자살이라기보다는 '사고사'에 가깝게 보인다.

 

오래 전에 서프라이즈에 나왔을 것이다. 아마도 동네 아이들이나 한량이 권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고흐를 향해 발사했을 것이다. 이때 고흐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싶지 않아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대의 부족한 의료기술로 고흐를 살리기 힘들었을 터.

 

서프라이즈 식의 해석이든 영화에서 나온 대로 테오에 대한 미안함과 현실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생을 저버린 것이든 죽음 자체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고흐의 실제 삶이지 않을까?  

 

고흐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가운데 고흐의 진짜 삶이 드러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묘미일 것이다.

 

영화 내내 시종 온화한 빈센트의 표정과 몸짓에 마음이 편해진다. 격정에 차서 기행을 일삼는 고흐가 아닌 자연과 이웃, 가족을 사랑했던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여러 화가들이 다시 그린 고흐는 음울하지 않고 온화하다.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길 바란다. 마음이 깊은 사람이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구나.
- 빈센트

 

아름다운 장면들이 모두 지나가고 영화 말미에 고흐의 말이 스쳐지나갈 때 다시 눈물이 살짝.

 

외롭고 그저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이었구나.

 

 

 

 

한참 어릴 때 싸이월드 대문에 한동안 걸어두었던 이 그림의 의미를

그때 진짜 알았나 싶다.

 

허세허세유치유치의 시절

 

누구나 그런 시절은 있었겠지.

 

 

 

*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삶을 살다 보면 무너질 수 있다.
- 조셉 룰랭

 

영화를 보고 가장 마음에 남는 말이다.

 

속절없이 몸과 정신이 무너지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정신력?이 마음?이 너무 약해져서 요즘 자주 놀라고 상황 대처력이 떨어지고 있으니.

 

 

그냥 이 새벽에 이런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 주어진 각자의 에너지 분량이 있어서 생애 초반에 미리 당겨 무리하게 그걸 다 써버리면 노년에는 아예 쓸 수 없지 않을까.

 

언제나 (남들이 보는) 최선을 다하려 하지 말고 이제 좀 적당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두고 기다리자.

 

그리고 '친절'만이 최대의 덕목.

 

최근에 따뜻했던 기억이 모두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에서 왔다.

 

남에게나

특히

나 자신에게 엄격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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