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침부터 일찍 옆동네로 산책을 나섰다. 

얼마 전부터 화요일을 일종의 나만의 휴무로 정해두고 꼭 집앞 카페라도 가려고 마음먹고 있다.

 

이강하 미술관에 딸아이 사생대회 상장이 있어 받으러 갔다가 전시도 보고 차도 마시고 일대를 산책하기로 작정했다.

 

양림동에는 여러 미술관이 있는데 작고 소소하게 잘 운영되는 듯하다. 비엔날레 전시 기간이라 연계 작품을 잘 보고 점찍어둔 카페로 갔다.

 

다형다방 자리에 육각커피라는 곳인데 코코넛커피와 게이샤로 유명한 곳이다. 이 지역 20대 아가씨들 인스타에 많이 보이는 카페다.

 

 

들어가보니 타일, 테이블, 작은 소품 등등 죄다 육각이다.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생각나는.....그리고 어딘가 일본풍 인테리어

 

아 그런데 거기서 멈춰야만 했어.

 

갑자기 뜬금없이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막혀>가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

 

검색하니 95년이네

 

중독성 강한 아주 오래된 수능금지송 되시겠다.

 

간만에 코트도 차려입고 뭔가 우아하게 책 좀 읽다가려 했는데 ㅜ.ㅠ 창가에서 실실

 

 

 햇살 좋은 창가 같지만 실은 눈이 부시고 책 오래 볼  환경이 아님

 

게다가 거의 공사장 뷰

 

 

양림동도 젠트리피케이션이 빠르게 진행되어 오래된 가정집이 거의 식당, 카페로 변하는 중이라 늘 공사중이다.

 

한 달에 한번이나 자주 갈 때는 이주마다 가기도 하는데 갈 때마다 새로운 데가 보인다.

 

 

 

 

 

나만의 단풍 명소

양림미술관 하고 사직공원 샛길

호남신학대에서 복음성가가 흐르는데 나같은 죄인 살리신....

어쩐지 오늘은 별로 거북하지 않다.

하늘도 그렇고 초록과 빨강이 섞인 잎들이 나를 관대하게 만들었다.

 

조금더 힘을 내서 사직 전망대에도 올라보았다. 아이들 없이 혼자 온 건 처음이다.

올라가보니 노부부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계셨고 할아버지 한 분과 어떤 한국말 잘하는 청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본인이 다녀온 나라들, 세계사에 대한 여러 지식을 이야기하는 중이셨다. 한국 패치 완료되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는 청년이 인상 깊었다. 얼핏 우크라이나계라고 들은 것 같다. 청년은 한국말이 정말 능숙했고 공손했다, 우왕. 어서와 한국은 자주 이러지.

 

 

내려와서 산책길로 접어든다.

가을의 남산길이 그리워서 이렇게라도 가을에 걸어본다.

 

아직 단풍이 온전히 다 들기 전 초록 잎과 붉은 잎이 섞인 이 시기도 참 좋다.

 

 

한예리의 <최악의 하루>를 떠올리며 은희라도 되는 냥 걸어본다. 이십대에는 나도 저렇게 하늘거리는 치마 입고 남산도 걷고 그랬지. 설레고 삐치고 별별 드라마 다 찍었지.

 

 

 

 

미스터 션샤인 이완익이 들으면 "개나발 퉁소부니? 내 하도 기가 막혀서리 이 욕을 삼십 년만에 다 해본다. 니는 면경도 아이 보니? 언제적 일패를 들이미니" 할 소리 ㅋ

 

양림동에 오면 항상 들르는 이장우 가옥

 

혼자 조용히 멍 때리며 하늘 구름 흘러가는 것 보고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 듣다가 다른 혼자 오신 분이 있어 고요히 즐기시라고 자리를 내어드렸다. 딱 봐도 멀리 서울에서 오신 것 같아서.

 

 

 

아이들 저녁 주고 운동가야 하지만 체육관 사정으로 쉬게 되어 영화를 봤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고 이제야 제대로 본다.

 

이삼십대에 봤다면 연애사에 감정이입해서 짜증이 났겠지만

서로 속고 속이고 아파하고 상처주고 하는 모습이 그냥 다 안쓰럽기만 하다.

 

은희는 하루동안 옛날에 만나던 남자, 지금 만나는 남자, 오늘 처음 본 낯선 남자들을 만난다.

 

 

 

남자들과 만날 때마다 은희는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연예인병 걸린 현재의 남자친구에게는 질투도 하고 발랄하게 대하고 지지부진한 유부남인 전 남자친구와 우연히 만나서는 세상 제일 불행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낯선 일본인에게 은희는 순수하고 친절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이 작품 말미에 다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와 조우하여 밤길을 걸으며 은희가 춤사위를 펼칠 때 특히 정말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웠다. 한예리 씨 무용을 해서 그런지 참 선이 곱다. 진짜 그렇게 웃고 말하지 마요, 자꾸 반하니까. 

 

 

이와세 료의 연기도 자연스럽고 나지막하게 읊는 대사들, 어눌한 영어로 속삭이듯이 대화하는 장면들도 좋았다.

 

둘이 특별히 연인관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은희는 은희대로 배우로서, 료헤이도 그저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영화 초반에 은희가 연습하는 대사들이 다 은희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게 인상 깊었고 배우들이 다 캐릭터에 꼭 맞게 그 상황을 잘 표현해서 진짜 순식간에 영화가 끝난듯이 느껴졌다.

 

N각관계에 얽힌 모두가 항상 서로의 진정성 운운하지만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라는 은희의 말과 같이

순간순간 각자의 감정에 따라 살아낼 뿐이다.

 

다른 리뷰를 보니 은희나 남자들(한남이라 하며) 행태에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약하고 모지리들이 만나는 게 세상사다.

 

그냥 남자들 찌질함이 한없이 웃겼다.

헤어진 은희를 스토킹해 남산까지 찾아와 절절하게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나는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다며 부인과 재결합한다는 운철도 웃기고

데이트 중에 다른 여자 이름 부르고 딴눈도 팔았으면서 은희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현재의 남자친구 현오도 우습다.

 

그냥 대사 하나하나가 많이 웃겼다.

 

*

 

<나에게 다정한 하루>를 오전에 카페에서 볼 때 초반에는 전작과 별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후반에 이르니 이 땅에서 결혼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고달픔에 대한 이야기,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결혼초부터 명절에 시댁에 안 간다고 이야기하고 불화 없이 잘 살아간다.

요즘 새댁들은 이렇게 주체적으로 잘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함부로 내 경계를 넘는 사람들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데.

시부모님을 '몰랐던 중년부모'라고 표현한 부분만 딱 떨어뜨려두어 욕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틀린 표현은 아니다. 잘 몰랐던 분들이니 잘 알아가야 하고 서로 맞춰가야 한다. 억지로 관계속에 끌어 맞추려하지 말고.

 

생각보다 너무 길어진 포스팅.

 

그래도 책에서 본대로 나에게 다정했던 어떤 하루를 기억해둔다.

정말 힘들어질 앞으로의 어떤 날에 대비해 힘을 내려면

이런 풍경들 그때 그마음들 차곡차곡 저축해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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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자나 2018-10-3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에 양림동에 놀러 갔어요~ 좋았던 기억이 새록 나네요^^

뚜유 2018-11-01 06:24   좋아요 0 | URL
5월에도 참 좋았어요. 양림동.
옆 동네지만 여행가는 기분으로 종종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