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도 '애'로 끝난다. (어릴 때부터 너무 옛스럽고 착해 보여서 좀 별로였다) 성도 흔하디 흔한 성 중 하나이고 중간 글자까지 합하면 딱 교회 착실히 다니는 그런 인상의 이름이다. 학교 선생님들도 늘 교회 다니지 하고 묻곤 했다.

 

어쩐지 이름부터 답답해 보이는 경애.

 

그런 '경애'의 '마음'이 대체 어쨌다고.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하다. (무슨 00스러운 말투)

 

 

아무튼 답답한 방학 막바지를 지내며 이런저런 책을 읽고 아이들 개학하고 나서야 '경애의 마음'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어제 동네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서 읽다가 갑자기 울컥 했다. 책 소개로 1999년의 인현동 화재를 모티브 삼았다고 들었긴 했지만 경애를 통해 다시 듣고 나니 그 야만성에 치가 떨린다.

 

1999년 10월 30일 오후 6시 55분에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83번길 10(인현동 27-43)에 있는 '라이브2 호프집'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가 일어난 후 4개월밖에 안된 시점에서 일어난 사망 56명, 부상 78명의 대참사로 정부 수립 이래 3번째 규모의 대형 화재사고였다.

 

경애를 아예 견딜 수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은 건 화재의 전말이었다. 발화 지점은 건물 지하였고 불이 번지기까지 분명 시간이 있었는데도 그 많은 아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놀란 아이들이 출입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술값을 받지 못할까 걱정한 호프집 사장이 문을 잠갔기 때문이었다. 문을 잠갔기 때문이었다, 라고 신문에서 읽는 순간, 경애는 차가운 무언가가 와서 자신을 꽉 끌어안은 것 같았다. 몸체가 크고 체온이 아주 낮은 그것이 마치 등에 업히듯 자신에게 와서 붙은 것만 같았다.   71쪽   

 

검색해보니 그 화재 때 돈을 받지 못할 것 같아 문을 걸어 잠근 그 호프집 주인은 형을 살고 나와 복음성가 가수로 활동한다고. 하. 후.

 

이 대목에서 박차고 나와 집으로 왔다.

 

99년에 무기력한 대학 졸업반이던 나는 술 마신 동기를 데려다주던 동네가 인현동이라 어딘지 알고 있어 더 슬프고 무기력했던 기억이 난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에게 술을 팔고 불이 났는데도 문을 잠근 어른을 탓하기보다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그런 데서 남녀가 어울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제대로 추모하지 않던 세상이었다.

 

화재 규모에 비해 추모 대열은 초라했고 희생자들은 잊혀져 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또다른 모습으로 그 비극이 변주되었다는 것이 더욱더 기막히다.

 

 

 

*

경애는 화재 때 천운으로 살아남아 대학에 가고 연애도 한다. 그리고 이후로 쭈욱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지부진한 연애 끝에 남자는 배신을 하고 경애의 선배와 결혼한다. 미련하디 미련한 '마음'밖에는 가진 게 없는 경애는 변심한 애인의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을 50이나 하고도 모자라 계속 그 커플의 SNS를 염탐하기도 하고 어느 날 불쑥 연락한 그를 만나러 간다.

 

이 대목에 답답해서 잠시 쉬고 있다. 경애의 상사인 '상수'가 결혼한 옛 애인과 만나려는 경애에게 부러 삼천원짜리 우동 쿠폰을 내미는 부분에서 쉬고 있다. 이건 특유의 '눈치 없음'이 아니고 진짜 알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만. ㅋ

 

경애와는 계급적으로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상수'에게도 아픔은 있다. 내가 팔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서 손가락에 피가 흐르는 사람이 안 아픈 건 아니다.

 

국회의원을 지낸 부친은 '상수'에게 늘 모범답안을 제시하지만 상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아버지 입김으로 입사한 곳에서도 '상수'는 특유의 '눈치 없음'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다. 인생의 유일한 낙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연애 상담을 해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이다. 상수 특유의 '눈치 없음'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말로 다 설명이 된다.

 

상수는 그런 여자들을 잘 알았다. 그런 여자들은 상수가 운영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중략) 언니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해 아는 일이었다. 섹스하는 여자들, 원지 않았던 여자들, 이별해야 하는 여자들, 싸우는 여자들, 가족을 떠나려는 여자들, 우울한 여자들, 속은 여자들, 살이 찐 여자들, 소비하는 여자들,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여자들, 억울한 여자들, 죽은 혹은 죽으려는 여자들, 분노에 빠진 여자들, 어리거나 너무 나이 든 여자들, 기다리는 여자들.   33쪽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군미필자이자 낙하산인 상수는 이런 여자들과의 소통?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으려고 한다.  

 

상수와 경애의 연결 고리는 이 페이스북 페이지인데 아직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는듯하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

초반부에 경애가 중소기업에 입사해 농성에 참여하고 농성이 와해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파업일기>를 썼던 조선생이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미싱'이 머신의 일본식 발음인지 소설을 읽고야 알았다.

 

경애의 회사는 미싱을 취급하는 중소기업이다.

낙하산 '상수'와 불순분자였던 '경애'는 팀을 이루어 쇠락한 공장의 미수금 따위를 받으러 다닌다.

 

참으로 정직한 기계 '미싱'은 이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요즘도 미싱을 쓰기는 하지만 홈패션용 미싱은 에어프라이어같이 여겨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홈패션용 때깔 고운 미싱말고 차르차르차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방직공장의 그 금속성의 녹슨 미싱이 떠오른다.

 

더불어 때 묻은 발을 드리운 독한 파마 약품 냄새가 가득한 좁은 매장에서 정신없이 롯드를 말고 있는 미용사가 떠오른다. 바로 경애의 '엄마'

 

거센 세파와 맞섰던 '엄마들'과는 다르게 경애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던 엄마.

 

엄마를 따스하게 그린 것도 좋았다.

 

현실에서는 먹고 사느라 정신 없이 사느라 딸과 사이가 벌어지고 불화하기 마련인데.

 

***

 

강남에서만 나고 자란 강남 키드들을 대학 때 알고 지냈는데 '상수'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대개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실용적으로 사는 합리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는 나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너 역시 마찬가지라고 당당하게 선언했고 부모의 뜻을 받들어 수없이 맞선에 나가 자신에게 걸맞는 짝을 찾았다.

 

드라마나 소설과 달리 그들은 자신과 부모의 뜻, 즉 합리적 선택에 만족했고, 지지부진한 연애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말고 그 시간에 상식, 토익책이나 한번 더 보라고. 우리 부모님도 겨우 노후 준비나 하신 정도고 집안이 힘들어 내가 이렇게 분초를 다투며 열심히 사는 거라고.

 

왜 모임에 잘 오지 않냐고 묻는 내게 한 후배는 단지 동아리방이 깨끗하고 사람이 적어 여기에 적을 두었다고 하기도 했다. 동아리 모임에 오지는 않지만 늘 사람 없는 새벽시간에 동아리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후배는 바라던 시험에 합격했다.

 

'경애'와 달리 그들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그 한 조각, 마음에 연연하는 법 없이 정한 목표로만 나가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전반부부터 만만치 않은 여러 주제를 안고 시작하는 이 소설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저 '경애(敬愛)'의 마음으로 쭉 따라가보련다.

 

폭염도 지나가고 귀뚜라미 우는 이 계절에는 어쩐지 그래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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