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양림동에 새로 생긴 독립서점 <러브앤프리>에서
<잘 돼가? 무엇이든>을 드디어 샀다.
원래 피너츠 매트가 받고 싶어 이리저리 조합하다 그냥 독립서점에서 구매.
어딜 가든 민원이 심한 아들은 그냥 두고 딸하고만 가서 여유롭게 차도 마시고 독립서점에서 책 사고 2층 공간에서 책도 보다니.
감격. 진짜 이런 일이 가능하구나, 이제.
딸은 2층에 비치된 그림책을 엄청 보았고 난 남궁인의 서평집을 보았다.
바쁜 분이 참 책을 많이 보시는구나.
어제 <잘 돼가? 무엇이든> 다 읽고
지금 막 <미쓰 홍당무>를 보았다.
큰 아이 낳고 24개월 차이로 작은 아이 낳아 기르던 2007년-2012년 사이는 면 소재지에 있기도 했고 영화나 책을 보는 건 사치였던 시기다.
차라리 잠을 좀더 자는 것이 바른 선택이었던 시기.
그래서 놓친 영화나 책이 많고 요즘 찾아보는 중이다.
<미쓰 홍당무>를 블랙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웃기고 이렇게도 슬플 수도 있구나.
공효진과 이경미 감독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영화.
우유부단한 불륜 선생 서종철 역을 맡은 이조녁 아저씨도 정말 딱 들어맞는다. 비열하긴 한데 그냥 멍하고 나쁜 놈인데 아주 밉상은 아니다.
대사 하나하나가 다 주옥 같다.
사는 게 선악이 딱 갈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게 정말 내가 그렇게 원하는 것이었을지.
막 허접한 걸 목표로 해서 그냥 바쁘게만 살고 난 이렇게 엄청 힘든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진짜 불쌍한데 막 밉고 사실 알고보면 나도 참 나쁘고 그렇다.
이경미 감독 영화를 보고 혹자는 감독님이 한번도 (한국)남자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을 거 같다고 했다. 서로의 전제가 너무나 다르기에 실소가 터져나온다.
어떤 부류의 남자이며 어떤 형태의 사랑이 제대로 된 것인지.
또한 한? 남자에게 사랑받는 것이 여자의 행복한 삶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자신을 잃어가며 한 남자의 여자로 햄볶으며 사는 것보다 이경미 감독님같이 나를 지키며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릴 수 있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은 인생이 더 부럽다. 최근에는 한? 남자의 열렬한 사랑도 받고 꿈꾸던 결혼식도 무사히 치르셔서 이제는 더 이상 루저? 인생도 아니다.
그렇지만
에세이를 보니 영화를 선택하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역시 짐작대로 아니 짐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하나 망하면 되는 게 아니라 영화 한 편 잘못 되면 연관된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그 부담은 정말 엄청날 것이다.
나도 경미한 불면증을 잠시 겪어봤는데 72시간이나 잠들 수 없었다면 정말 지옥이었을 것이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건 정말 무섭구나.
애증이 얽힌 가족들과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간 것도
인간으로서의 부모를 솔직하게 그리려고 한 것도 좋았다.
나는 아직은 어디 가서 가족들 이야기를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얽히고 설킨 감정이 너무나 많아서.
아무튼 영화를 보고 최종적으로
하. 나처럼 살아온 분이 또 있네, 하는 생각에 한참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
또 남자들은 진짜 '그냥'이다.
남편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 '그냥'이 실감이 가지 않아
화도 참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했는데
아들을 키워보니 이 '그냥'은 진짜 '그냥'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요새는 중2병이 아니라 초5병이라고
아들이 그냥 사춘기를 직격으로 맞았다.
오전에 이천원 주고 도서관으로 쫓아보내고
웹툰을 보든 와이파이를 잡아 쓰든 좀 그냥 두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도 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았는데
해야만 하는 것에 매여서
양미숙 선생같이 그냥 밤에 잠도 못자고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하고
뭘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전혀 친해질 사이가 아닌데 부둥켜 안고 울기도 하고.
돌아보면 이불 뻥뻥 찰 사연 한가득이지만
잘 돼가? 무엇이든, 묻는다면
나도 예스.
평생 우울하면서도 우울 판정받는 건 또 지독히도 싫은 나.
어쩌면 엄청 의욕적인 인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