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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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다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삶과 철학에 대해 알 수 있는데 소설과 삶이 일치하는듯해서 더 마음 아팠다.

 

잠시 살았던 강원도 한 면 소재지에서도, 지금 살고 있는 대도시의 공단 지역에서도 결혼 이민여성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문맹'이 되어 낯선 곳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며 살아낸다. 자신을 배척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어떻게든 듣고 읽고 말하고 쓰려고 한다.

 

나는 5시 반에 일어난다. 아기를 먹이고 옷을 입히고, 나 역시 옷을 입고 공장까지 나를 데려다주는 6시 반 버스를 타러 간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공장에 들어간다. 공장에서는 저녁 5시에 나온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찾고, 버스를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을의 작은 가게에서 장을 보고, 불을 피우고(아파트에는 중앙난방이 들어오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재우고, 설거지를 하고, 글을 조금 쓰고, 나 역시 잠을 잔다. 87-88쪽

 

힘겹고 치열했던 시기를 담담하게 서술해서 더 슬펐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 <어제>의 토비아스를 통해서도 이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거나 쓸 때에는 엄청난 제약이 따른다. 끝없이 문법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식어나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보이는 동사나 형용사를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은 사치이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52-53쪽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112쪽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3쪽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이런 상황에서 완성되었다. 또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써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충분한 성찰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전쟁의 경험과 이방인으로서의 절절한 외로움이 언제나 장황하지 않게 있는 그대로 표현된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쪽

 

아이와 함께 외국어를 배우고 장시간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썼다. 네살에 이미 글자를 배워 닥치는 대로 읽었고 어떤 언어로 쓰였든 간에 문장이 일으키는 감각에 매료된 사람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작가가 적은 문장들이 나에게 환기시키는 감각, 나는 그것에 일찌감치 매료되었다. 문장은 작가의 것이었지만 감각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으니까. 조용한 도서실의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면 활자들은 일렁이는 물결처럼 내 안을 흔들어놓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조그만 세계를 여지없이 부수었다.    116쪽

 

 

짧은 분량이고 그동안 그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읽고 나면 자꾸 질문을 하게 된다.

 

모국어 외에는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없지만 익히 알고 있는 그 모국어마저 제대로 쓰고 있는가, 하는 고민도 된다.

 

뜻도 모르고 장황하게 남들이 쓰는 상황에 의지해 쓰거나 시류에 편승하는 오염된 언어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염려가 든다.

 

사전에서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상황에 맞는 표현을 고르고 또 골라가며 정갈하고 단순하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삶이 곧 쓰기인 작가를 만나면 뭔가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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