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매일매일 한참 뭔가를 하고 나서 시계를 보면 갓 정오를 넘겼을 뿐이었다.

 

어린이날에는 아시아문화전당 일대를 돌면서 아이들이 놀 뭔가를 찾다가 먹을 거 먹이고 전당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6일에는 다행히 비가 와서 성당 다녀오고 아들은 친구네 가고 딸과 동네 도서관에서 가서 딸아이는 저대로 책을 읽고 난 <마담 보바리>를 읽기 시작했다. 원래는 다른 고전을 읽어볼 참이었는데 전담육아 2일차 권태로운 일상이 마담 보바리를 원했다.

 

<마담 보바리>는 확실히 어릴 때 읽은 작품인데 아, 이런 장면도 있었구나 싶게 많이 새롭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길러본 경험이 없을 때에는 이 한심한 녀자, 된장녀 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마담 보바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2018년에도 마담 보바리는 현존한다. 세간에 스캔들로 유명세를 탄 파워블로거들이나 여성지에 이니셜로 등장하는 그녀들. 모두 마담 보바리의 후예이다.

 

여권이 신장되었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매일매일의 지난한 삶은 많은 여자아이들이 동경하는 열정이 가득하고 충만한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많은 소녀들이 책으로 접하는( 현재는 미디어에서 전파하는)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허울 좋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자본을 축적하는 부르조아들의 탐욕도 여전히 강하다. 보바리즘이라는 용어가 있기 이전부터 인간이란 자기가 가진 것을 넘어서서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는 사회 전반과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유일무이한 스타일로 작품을 공들여 썼기에 줄거리로 보자면 그저그런 통속적인 이야기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읽다가 몇해 전에 여성지에 실린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심한 남편과 지루한 결혼을 이어가던 중에 여자는 어린 남자(헬스트레이너인지 수영강사인지 가물가물)와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났다. 그런 허망한 도피의 끝은 결국 어린남자의 배신이었다.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인은 죽도록 일을 해서 다행히 큰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고 속죄의 의도로 비뚤고 엉망으로 자란 자녀들을 거둔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는 실화라 해도 그리 신빙성이 가지 않는다.

(실화를 기반으로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마담 보바리의 이야기 쪽이 훨씬 더 생생하다.

 

 

*

 

어릴 때는 아무런 내적 갈등 없이 보바리 부인이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엠마가 레옹을 처음 대했을 때는 많이 망설였고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보려고 했다는 게 이제야 보인다.

 

샤를르는 정말 거의 자거나 일하거나 그중 하나였고 엠마 보바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읽거나 남아도는 시간에 공상을 거듭하며 보바리 부인은 현실감을 온전히 상실한다. 그 당시에는 보바리 부인 같은 경우 얼마든지 유모를 둘 수 있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남았겠는가. 

 

영혼 없는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서 보바리 부인이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돌프는 전형적인 냉혹한 바람둥이, 공진회를 디데이로 잡고 엠마를 유혹해서 버릴 계획으로 만난다.

 

로돌프와의 혹독한 이별 후에 만난 레옹 역시 예전의 망설임, 순진을 간직한 청년이 아니었다 레옹은 결국 보바리 부인을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극심한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

 

이런 타락을 더욱 부추기는 건 돈밖에 몰랐던 교활한 뢰르. 해설을 읽어보니 '행복한 사람'에서 나온 작명이라고 한다. '행복'이라는 탈을 쓴 배금주의를 적절하게 나타냈다.

 

다시 읽어보니 풍경이며 주변의 자잘한 인물 모두 주제 구현을 위해 공들여 등장시킨 거네, 하는 생각이 들어 감탄 또 감탄하며 읽었다.  

 

특히 마지막에 장님 거지의 그로테스크함이 엠마의 비극을 더욱더 심화시켰고

비소 중독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장면이 이렇게나 길었나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역시 전에는 문자 해독만 하고 독해는 아니었다.

 

읽는 중에 딸아이가 물어봐서 대강 말해주니, 나쁜 엄마네, 하고 만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서 만약 읽기를 원하면 같이 읽고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타인은 나를 모른다>도 연휴에 읽었다. 

 

소노 아야코 책을 중간중간 읽었는데 역시나 일본 에세이구나, 싶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를 아주 오래 전에 잘 읽고

최근에 <약간의 거리를 둔다>도 읽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책들의 논조가 다 그렇다.

 

자신만의 속도로 살고 남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하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시이모님 같은 이야기만 한다. 시어머님이 약간 나서서 하긴 뭐한 이야기를 태연한 표정으로 아랫사람에게 늘어놓는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마스다 미리나 사노 요코 등도 예전에 자주 보았는데

이제는 시들하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 지나치게 초탈한 듯이 이야기하고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마음 수양 정도만 하면 된다, 서로 (자신만의 기준인) 예의를 차리면 된다는 식이다.

 

개인간의 에티켓에는 민감하면서 거대 악은 묵인하는 나라에서 책임지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게 습관이 된 듯하여서 이제는 읽고 있으면 힘이 빠진다. 이런 책을 자주 보다보니 사람이 자꾸 나른해진다.

 

확실히 국적을 초월해 널리 읽히는 고전의 힘을 실감하다 보니 이제 소소한 에세이는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오늘이 어버이날이기도 하고 해서 추천하는데

이 책들은 좋았다.

 

평생 엄마와 불화했으나 엄마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엄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가는

<나의 엄마 시즈코 상>은 몇 년 전에 참 잘 읽었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의 평범하고 다감한 부모님 이야기도 매우 잘 읽었다.

이렇게 자녀를 편하게 잘 대해주다보면

아마 비혼으로 남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이 좋은 부모님을 보고 좋은 가정을 꾸릴 사람들도 있지만

너무나 엉망인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경솔하게 결혼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록산 게이 책은 4월 말부터 계속 보고 있다. 록산 게이는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그들의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이후 폭식을 거듭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미리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는데 내 인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별로 깔끔하지 않지만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포’가 있고 ‘애프터’가 있다. 몸무게가 늘기 전. 몸무게가 늘어난 후. 강간을 당하기 이전. 강간을 당한 이후.    5쪽

 

그나마 다행인 건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긴 했지만 록산 게이의 집이 가난하지는 않아서 교육을 받고 일어설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록산 게이는 자주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폭식에 빠졌다. 남성들이 선호하지 않는 몸이 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현재 나는 ‘생존자’보다는 ‘피해자’를 선호한다. 일어난 일의 엄중함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희망의 여정을 걸어와 승리를 쟁취한 척 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무사한 척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난 채로 여기까지 걸어왔고 그 일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거나 내게 흉터가 남지 않은 척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도 않다. 40쪽

 

이 부분이 마음에 든다. '생존자'라는 표현이 쓰이기는 하지만 '피해자'라는 표현이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에 성폭행에 대한 독일의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소녀인 피해 여성의 몸에 뱀이 휘감기고 처녀가 되어서도 중년이 되어서도 그 뱀은 계속 여성의 몸을 휘감는다. 성폭력은 관에 들어가 묻힐 때까지 떨칠 수 없는 기억이다.

 

(ebs에서 오래 전에 보고 찾아보니 있어서 첨부)

 

 

어떤 남성들이 유희라고 여긴 것들(실상 범죄)이 피해자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크나큰 일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한 여성이 자신을, 자기 정체성을, 자신의 몸을 혐오하게 만든다. 살아가는 데 내어야 할 귀한 에너지를 다른 데에 낭비하도록 만든다.

 

 

 

 

 

 

 

 

 

 

 

 

 

 

 

 

 

5일에 문화전당에서  애들 책 사이로 꽂혀 있어 보았는데

전에 봤던 책들이다.

 

<엄마 냄새 참 좋다>에서는 미혼모 이야기가 눈물겹다.

<축하해>도 어린 나이에 쓰라린 경험이 많았던 소녀들의 이야기라 너무 마음 아팠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건 형식적인 성교육이 아니라

성적 주체성에 대한 교육이 먼저이어야 할 것 같다.

실제적인 기구 사용법에 앞서서 인성 교육. 진정한 인간적 교류에 대한 교육

 

 

*

가정의 달이라 온통 의무투성이라 답답한 가운데

이런저런 책들만 읽고

점점 본업을 놓고 있다.

 

변덕스러운 날씨라 긴팔 반팔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고

매일매일 해야 할 기본 가사만 해도 한가득인데 ㅜ.ㅠ

 

 

그래도 오늘 같은 날

어버이여서 잠시 흐뭇한 건

아이들의 카드

 

초등학교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살게요.

 

이런 드립은 어디서 배우는 건지.

그래도 참으로 갸륵하고 감사하다.

 

 

*

마담 보바리로 거창하게 시작해놓고는

참으로 소소한 마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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