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우연히 <오만과 편견>을 이틀에 걸쳐 읽었고 오늘 낮에는 급하게 무려 비티비로 결제까지 해서 영화를 봤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내 연애와 결혼을 돌아볼 의도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결혼기념일 즈음, 그리고 중년에 이르러 읽으니 더 재미난 텍스트였다.

 

아...내가 그간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에 대해 오만했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학부 4학년에 영문과 수업에서 소개받고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읽어 다행이다.

 

이렇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까닭은 '짝짓기와 그에 따른 재산과 지위 이동'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못해 심화되고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전을 읽을 때 늘 그렇듯 초반을 극복하고 중반에 이르다보니 아침드라마나 흔한 막장드라마 설정과 유사하나 대사들이 뭔가 더 찰지고 고풍스럽고 시원하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이어지는 걸 막으려고 캐서린 영부인이 엘리자베스를 방문하는 건 재벌사모님들이 돈봉투를 들고 가난한 처자를 찾아와 모욕하는 설정으로 여전히 이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고 심리묘사가 치밀해 인물들 감정, 상황이 다 납득이 가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대한 연민이 든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첫 청혼을 거절하며 속사포로 퍼부은 말들은 숱한 드라마에서 실장님, 사장님, 대표님에게 맞섰던 가난하지만 줏대 잇고 생기 있는 처자들의 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요약하자면 네 감정은 알겠다만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임.

 

한때 온라인에서 유행하던 재벌남자와 결혼하는 법이라는 글과 맥을 같이한다.

 

일단 따귀부터 때리고 나서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일사천리.

 

웃자고 하는 말이고 19세기 영국 사교계나 21세기 대한민국 사교계? 연애의 장도 다를 바 없다.

결혼을 통해 신분과 재산을 공고히 지키는 건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하다. 다만 제인 오스틴은 개별화된 인간, 한 인간의 매력적인 품성에 의해 근대적인 낡은 관습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미약한 희망을 품은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모두의 속물적인 욕망을 비웃는다. 하지만 인간이니 다 그렇지 하고 가엾고 귀엽게 여기는듯도 하다.

 

"얘, 얘, 제발 좀 진지해 봐. 아주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어. 딴소리 말고 내가 알아야 할 걸 모두 얘기해 줘, 어서. 언제부터 그분을 사랑하게 된 거니?" 

"아주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 나도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펨벌리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영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가 아닌가 해."   512쪽

 

언니 제인이 다아시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냐고 묻자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그밖에도 절묘한 상황과 대사가 많아서 포스트잇을 여기저기 붙여두었다.

 

"제 미모는 처음부터 인정 안 하셨고, 태도에 대해서라면,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이야 가까스로 늘 무례를 면했다고나 할까요. 말을 건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당신께 고통을 주려고 했지요. 이제 속내를 털어놓아 보세요. 제 건방진 점 때문에 제가 마음이 드셨나요?"

"당신의 마음이 생기 있었기 때문이지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 독립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상이 다시 확인된다. 근대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기가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외양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생기만 있는 오징어는 뭘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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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이어서 영화를 보고 나니 제인과 엘리자베스, 콜린스 , 리디아, 베넷 부인 등은 소설 속 이미지와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데 빙리와 다아시는 사실 많이 부족하게 여겨졌다.

 

빙리는 작품 속에서 우유부단하다고는 하나 영화에선 너무 ㅂ ㅅ 같이 그렸고(프로포즈마저 친구에게 지도받는 것으로 나오고 표정도 멍하고 ㅜ.ㅠ) 차갑고 오만하지만 사려 깊은 소설속의 다아시는 영화에서는 너무 어둡고 느끼했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거의 남성 주인공은 맘에 안 드는 전철을 그대로 밟는 영화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느낌이긴 하다. 포털을 보니 영화 속 다아시가 원작 주인공과 딱 이라는 의견도 간혹 있다.)

 

아무튼 그 방대한 원작을 온전히 살리기는 힘들 것이고 그냥 그 시대 분위기, 사극 분위기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특히 키이나 나이틀리 정말 사랑스럽다. 오동진 님이 소개한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키이나 나이틀리가 무려 일곱 살에 오디오북으로 오만과 편견을 접하고 난 후 내내 제인 오스틴 팬이라서 열과 성을 다해 엘리자베스 역을 연기했다고 하니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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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되어 주변의 이런저런 결혼을 보니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이 택한 결혼이나 리디아가 충동적으로 망나니와 맺어지는 상황 등이 현실에서도 가끔 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용이해졌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지고 재산이 변동을 보이는 것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제인이나 엘리자베스의 결혼과 같이 조건?과 사랑이 일치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에서 극히 드물다.

 

그래도 아주 없는 일이 아니기에 이렇게 소비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자면 하지원이 엘리자베스 같은 역할을 많이 한듯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는 너무 애절하고 슬펐고  <시크릿 가든>에서는 참 밝고 경쾌했다.

 

그리고 <시크릿 가든>으로까지 생각이 치닫자 드라마속 현빈을 사모한 조용한 데 계시는 어떤 분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곳은 참 이런 고전 읽기 좋은 곳인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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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5-0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을 영상화 한 것이라면 BBC 드라마를 추천드려요. 미스터 다아시역의 콜린 퍼스는 진리입니다.^^

뚜유 2018-05-05 08:23   좋아요 0 | URL
전에 EBS에서 방영한 것이 BBC 판인가요? 제대로 보지는 못 했지만 콜린 퍼스는 진정 미스터 다아시입니다 ^ ^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키이나 나이틀리 쪽이 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