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장이식 24시간,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짤막한 기사를 봤다.

한 여인이 결혼식에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껴안고 울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기쁨에 겨우 함박웃음 지어야 할 결혼식과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 의아했다.

남편 아닌 다른 남자는 바로 자신의 아들의 심장을 이식 받은 사람.

남편이 아내 몰래 결혼 선물로 준비한 이벤트라 했다.

아들의 심장을 받아 들여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남자를 안고 여인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아들의 흔적을 더듬었으리라.

심장이식이라는 특별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인연이 만든 행복하고 가슴 찡한 장면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준비운동을 하려고 그랬는지, 며칠 전에는 대학병원 흉부외과 의사들의 3일을 근접촬영한 다큐멘터리도 보게 되었다.

쉴새없이 밀려오는 환자들은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고 의사들은 연이은 당직, 응급수술에 찌들어 피곤함을 감추지 못한다.

어떤 환자는 다행히 회복해서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하는데, 또 다른 환자는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환자의 죽음이라는 것은 가족들에게 뿐만 아니라 담당의사, 간호사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여러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게 있어 죽음이 흔한 것이어서는 안되기에,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에도 어떤 의미부여는 할 최소한의 시간은 있어야겠기에,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흉부외과의 침통한 표정은 예사로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바쁜 일상에 '죽음'이라는 것을 잠시 묻어둘 뿐, 그 죽음을 애도하고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의사에게도 주어져야 하는데...

애써 미소지으며 또 다른 환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의사의 모습에서, 보통 각오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아이에게 의사라는 직업을 권유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와 영혼 모두 건강한 상태에서 시작해도 언젠가는 피폐해지고 어딘가가 닳아 없어질 것 같은 것이 바로 의사의 삶인 것 같다.

 

흔한 외과의사, 흉부외과 의사, 심지어 북한에서 넘어온 천재의사 등을 다룬 의학 드라마가 한동안 봇물처럼 터져나왔었는데, 그 때는 드라마 구성상 흔한 대결구도나 애정전선 등에 신경을 쓰느라 의사와 환자라는 기본적인 관계를 등한시했던 것 같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독특한 제목은 체호프의 희곡 <플라토노프>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장기이식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그것도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펼쳐보인다.

서핑을 즐기던 청년이 주인공이라 그런가, 문장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드는 해일처럼 밀어닥친다.

극도로 감정을 붙잡아둔 채 건조하게 이어나가는가 싶다가도 래퍼들이 쏟아내는 랩처럼 힘차고 운율감 있게 흐른다.

스무 살 청년 시몽은 친구 둘과 새벽 서핑을 즐기고 돌아오는 도중, 자동차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다.

아직 등에는 여드름이 흩뿌려져 있고 어깨에는 당당하게 마오리 부족의 문신을 새긴, 앞날이 창창한 청년의 삶은 격렬한 서핑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달빛이 그대가 된다>라는 탐정 소설을 좋아하는 (영국의 흔한 장례풍습-땅에 묻힐 사람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풍습. 혹시라도 땅밑에 묻힌 사람이 깨어난다면 지표면에 놓인 종을 울릴 수 있게 끈과 묶어 놓은 반지임.)소생의학과 의사 레볼이 청년의 죽음을 부모 앞에 담담히 언도한다.

드라마였다면 의사의 무뚝뚝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는 가족들. 이라는 장면을 보여주고 끝이었을 텐데...

 

"시몽은 뇌사 상태예요. 사망했어요, 죽었습니다."-116

 

의사는 부모에게 자식의 죽음을 통고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쉼표를 찍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차갑고 푸르스름하고 꼼짝 않는 시신을 앞에 두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는 아직 따뜻하고 선명한 선홍색이었으며 움직이고 있으니까...라며 부모 앞에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의사의 역할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소상하게 나열한다.

 

공유할 수 없는 언어. 말 이전의, 문법 이전의 언어. 아마도 고통의 다른 이름일 언어. 그들은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들은 그 어떤 묘사로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어떤 이미지로도 그것을 재구축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로부터 단절된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세상으로부터도 단절된 상태다.-122

 

(의사) 레볼이 잔다. 잠에서 깨면 기록을 할 수 있도록, 꿈에서 얼핏 본 이미지, 행동, 맥락, 얼굴을 기술할 수 있도록 손 닿는 곳에 노트가 놓여 있다. 어쩌면 시몽의 얼굴(응고된 핏속에서 뻣뻣하게 굳은 검은색 머리 타래들, 거무스레하고 부어오른 피부, 하얀 돔 모양의 감은 눈꺼풀, 자줏빛 얼룩에 먹힌 이마와 오른쪽 관자놀이, 사후 반점)이나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머틸다의 어머니 비어트리스 헌스도퍼 역으로 출연한 조앤 우드워드의 얼굴이 거기에 묘사될지도 모른다. (...)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137

 

 

시몽의 심장이 이식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절차들이 필요했다.

의사의 입장, 부모의 입장.

그럭저럭 평온을 유지하며 사건의 흐름들을 따라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 쪽으로 감정이 이입되고 있었는지,

어느 순간 울음이 확 터져 버렸다.

 

침묵의 흐름. 그러다가 다시 마리안의 목소리. 얇은 막을 통과해서 나오는 듯 둔탁하다. 그러면 누가 시몽 곁에 있게 되나요? (돌멩이처럼 꾸밈없고 힘이 얹힌<누가>)-186

 

청년의 어머니 마리안이 이식을 권하는 의사에게 질문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곁에 있어 주나요?

의사가 선고를 내린 이후부터 땅에 묻힐 때까지 부모로서 언제까지고 함께 하고 싶은 간절함이 이식을 거부하는 마음과의 충돌에서 한걸음 비켜서는 순간, 부모가 쳐놓은 철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청년의 심장은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로 옮겨진다.

심장은 아들의 몸에서 떼어지고 분초를 다투며 장기 이식을 위해 이동핸다. 장기 이식 전문의들의 영예를 드높이려는 텔레비전 르포용의 긴급 상황 연출이나 방송에서 보이는 영웅적이고 인간적인 흔적은 하나도 없이 매끄럽게 운송된다.

방송용 연출 없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식 수술은 그래서 더욱 긴장감 넘치고 숭고하다.

심장의 수축, 경련, 미약한 박동, 좀 더 분명게 툭툭 튀는 움직임, 최초의 박동. 여명을 알리는 박동.

 

새벽 5: 50. 시몽의 휴대폰 알람이 울림으로써 시작한 이야기는 수술모를 벗고 마스크를 내리는 의사가 확인하는 시각 5시 49분에 막을 내린다.

 

드라마로 보았다면 스쳐 지나가듯 찍히고 말았을 다양한 인물들의 표정이 섬세하고 시적인 언어로 그려진다. 아들이 죽음을 맞이한 직후 장기 기증을 제안받는 부모, 기증을 제안하고 설득해야 하는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와 의사, 수혜자 선정, 운송을 담당하는 총괄국 담당자, 이식수술을 담당한 각지 병원에서 달려오는 적출 팀, 청춘이라 흔들리는 수술 간호사 등등...

쓸데없이 감정적인 드라마와는 달리 지극히 냉철하고 분석적인 장면장면들 틈에서 가끔씩 해일처럼 몰려드는 감정의 격랑.

심장이식 24시간 내내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과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동시에 느슨하게도 타이트하게도 만들면서 완급조절을 할 줄 아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열린책들,#살아있는자를수선하기,#프랑스소설,#심장이식,#빌게이츠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