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그녀와 제대로 이별하려면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라 [환상의 여자]

 

이상하게도 가슴 시린 추리 소설이다.

한 남자의 순정이라고 할까. 그 순정의 끝이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파고드는 이야기였다.

과거에 얽매여 현실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아니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한 남자가

과거의 여자를 만났을 때.

잘 숨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 속의 뭔가가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

남자는 그녀를 잠깐 만났을 뿐인데, 그녀도 잠깐의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그 한 순간의 접점으로

여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자는 그 여자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아내와 이혼한 뒤, 장인 어른의 법률 회사에서 나와 스스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어느날 회의 참석차 길을 나섰다가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그녀, 료코를 만났다.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만났으나 가장 사랑하는 여자인 료코와는 5년 만의 재회였는데...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죽음을 알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28

 

변호사 사무실의 전화에 남겨진 그녀의 목소리는 무슨 일인가를 의뢰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그 의뢰건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그녀, 료코.

그녀는 '라오'라는 클럽의 마담이었다.

장례 절차를 의논하던 그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가 만났는데, 뜻밖의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료코는 "료코"가 아닐지도 모른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을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만일 그녀가 료코 본인이 아니라면 이것은 틀림없이 또다른 사건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형태로 범죄를 꾸며 료코로 행세하게 된 것이라면, 도대체 왜?

 

그가 그녀의 과거에 대해 확실히 물어봐두지 않은 것은 그 자신에게도 씻을 수없는 상처가 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그걸 후회하게 될 줄이야. 아니 애시당초 서로에게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기에 자석이 끌어당기듯 서로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자살 후 반년 동안 마음을 감추고 묵묵히 학교에 다녔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료코는 그런 그를 간파하고는 "괴로우니까 도망친다고 생각하겠지만, 도망치니까 괴로워지는 거야."라고 말해 주었다. 비슷한 짐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그걸 꿰뚫어보았다고,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그녀의 과거 행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라 좀 지리한 면이 있었다. 언젠가는 밝혀 질 일인데 뭐 이렇게 질질 끄나. 이 변호사란 양반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무실의 오래된 비서까지도 말리는, 불이 일고 있는 게 뻔한 곳에 섶을 지고 뛰어드나,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딱딱한 껍질 속에 너무나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닌 여자로 그녀를 회상하면서도 그 웃는 얼굴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했던 그가 이제 와서 그녀의 과거를 파헤쳐 본댔자, 뭐가 달라진다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야쿠자의 대모격인 가오루코는 진실을 알고 있을까. 가오루코는 자신의 선에서 덮을 테니 스모토에게는 이쯤해서 손을 떼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덮어두려, 덮어두려 해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이 시키는 일은, 석연치 않은 부분을 끝까지 추궁해야 한다며 그를 이끌었다. 야쿠자간의 세력 다툼, 22년 전 지역 개발에 얽힌 음모, 권력자들의 잇속 챙기기 등의 거대한 흐름 중 료코는 어느 대목에서 희생당한 것일까.

 

 

그 상태에서 며칠간 책을 덮었다.

'뻔하고 뻔한 결말로, 그녀의 과거는 드러나고 남자는 진짜 료코를 찾아낸 뒤 그녀의 "의뢰"를 해결해주었다며 마음 홀가분해 하겠지.'

그런데, 괜히 마지막 남은 몇 장이 굉장히 신경쓰였다.

역시 추리소설은 마지막 반전이 중요한데, 이걸 안 읽고서는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할 수 없지.

다시 그 마지막 반전을 확인하려고 책을 펼쳤다.

결론.

역시 추리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그녀가 끝내 밝히지 않은 과거에는 그녀가 '료코'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가 확실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섣불리 판단했던 것 이상의 얽히고 설킨 인생사가 반영된 것이었다.

변호사 스모토와 그녀가 서로를 한 눈에 알아보게 된 이유와도 서로 통한다고 할까.

어쩐지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즈음에는  내 눈꺼풀의 잔영에 오래 전 영화,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리빙 라스베라스>가 겹쳐졌다. 세라와 벤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지만 그 둘의 사랑은 보는 이를 전율하게 했었다.

음울함, 보고 있기 고통스러울 만큼의 좌절감, 하지만 끝끝내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둘만의 진하고 깊은 이해. 

스팅의 한없이 우울한 OST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인생의 겨우 몇 달을 함께 했을 뿐인데 생의 마지막을 예감하는 시점에서 생각나는 단 한 사람, 스모토 세이지에게 편지를 남겼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비밀까지도 고백하고 있는 편지를 읽고서야...

스모토는 그녀와 제대로 결별할 수 있었으리라.

 

처음 시작은 날카로운 칼의 베임으로 스스슥,

가운데는 하드 보일드한 과거 추격전으로 와다다닷, 

마지막은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는 순수 그 자체로 스르륵.

 

[환상의 여자]는 제목 그대로 환상적인 추리 소설로 기억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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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5-04-2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추리소설일 듯해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손을 뗄 수 없은 것 같아요.

남희돌이 2015-04-21 10:40   좋아요 0 | URL
네. 중반이 좀 지루하긴 했지만 마지막의 반전을 읽으면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