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인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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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세번째 단편은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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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9-10-1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그렇게 싫었나요ㅠㅠ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안나긴 하지만..

다락방 2019-10-11 09:20   좋아요 0 | URL
세번째 단편에서 킬러가 의뢰인에게 비용을 ‘몸으로 지불하라‘고 해요. 의뢰인이 배우였는데 성상납 해서 뜬 배우라며 ‘이미 처음도 아니고 여러차례 해봤으니‘ 자기한테도 그렇게 하라고요. 와 세상 토나왔어요.. 미친놈이다 싶고. 무엇보다 작가가 여배우와 성상납을 이렇게 다룬 게 너무 싫었어요. 그러면서 되게 성적인 시선으로 여자를 그려놓고요. 게다가 여배우의 의붓딸은 십대인데 이미 몸을 함부로 굴리는 캐릭터라며 킬러에게 자기 몸 줄 생각을 하죠. 와 진짜 미친 단편이에요. 이 단편에서 작가가 여자를 보고 그리는 시선이 그냥 이 작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대해 제대로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그림책으로 보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제대로된 이야기가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아는 거라고는, 마녀의 저주에 걸린 공주가 평생 잠만 자는데 왕자의 진정한 사랑이 담긴 키스를 받으면 그 저주에서 풀려난다..는거.


공주가 왜 저주에 걸렸는지, 왕자는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는 그 이야기를 떠올릴 틈도 없었으니까. 딱히 관심도 없었고. 그러다가 백설공주를 비롯해서 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까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어떻게 한 번 본 사람이, 처음 본 사람이 상대에게 '진정한 사랑'을 품을 수 있을까. 이게 말이 되나? 처음 본 사람에게 반할 수는 있지만, 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말레피센트'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봤다. 졸리가 나온다고 해서 봤다. 동화 같은 이야기, 마녀 이야기, 판타지 스러운 분위기일것 같아 관심도 없었는데, 마침 넷플릭스에 있더라. 오호라, 한 번 볼까, 하고 찜해두고 있었는데, 아아아아 일요일밤은 왜때문에 잠이 안오는걸까. 하긴 오후에 커피를 마셨지, 잠이 안오는 게 당연하다, 나는 말레피센트를 재생시켰다. 조금만 보다가 졸리면 자야지, 했는데 우후후훗 새벽 두시가 다 되도록 이 영화 다 보고 잤다. 나여...



'말레피센트'는 요정이었다. 다정하고 밝고 활기찬 요정. 어릴 적부터 마법의 숲에서 다른 마법의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게 살다가 그 숲에 몰래 들어온 인간 소년 스테판을 만나게 된다. 숲의 물건을 훔쳤다가 숲의 요정들에게 들킨 것. 말레피센트는 훔친 물건을 돌려달라 한 뒤에 인간 소년과 가까워진다. 열여섯살이 되었을 때 인간 소년은 말레피센트에게 입맞춤을 하며 진정한 사랑을 맹세하는데, 그러나 인간 스테판의 마음속에는 탐욕이 가득해, 점점 말레피센트를 잊어가고 어떻게든 왕이 있는 성에 들어가기를 꿈꾸며 권력을 갖고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던 차, 마법의 숲을 공격했던 인간 세상의 왕이 말레피센트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왕은 '가서 말레피센트를 죽이고 오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내 딸을 주겠다'고 한다. 이에 스테판은 오만년만에 말레피센트를 찾아가 '위험을 알려주려고 왔어'라며 다정하게 접근한 뒤 (아마도)술을 주고 그녀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한다. 하아- 오랜만에 찾아온 인간 스테판을 말레피센트는 다정하게 대해줬건만, 그러나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의 날개를 잘라서 훔친다. 제버릇 개 못준다더니...

잠에서 깨어 날개를 잃은 걸 알게된 말레피센트는 울부짖는다. 그녀는 애정을 품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다. 날개를 잃어서 고통스럽고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고통스럽다. 자신의 종인 까마귀를 시켜 알아보니, 스테판은 왕이 되고 싶어 이 일을 꾸민거였다. 하아- 왕이 되려고 내 날개를 잘라갔구나...


스테판은 정말 왕이 되었고 그리고 아기를 낳았다. 말레피센트는 스테판을 찾아가 아이가 예쁘고 우아하게 자라겠지만, 16살이 되기 전에 물레바늘에 찔려 깊은 잠에 들것이고, 진정한 사랑이 담긴 키스만이 그 잠에서 그녀를 깨울 수 있다고 저주를 내린다. 영원히, 영원히...



스테판은 이에 아기를 숲에 숨기는데, 그러나 말레피센트는 아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쭉 지켜보고 있다. '나는 네가 싫어'라고 말하지만, 아기가 말레피센트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다. 아기를 돌보던 요정 세 명은 아기를 본 적이 없어 너무 서툴고 아기를 굶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말레피센트는 나타나 아기를 돕는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말레피센트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말레피센트와 우정을 나눈다. 말레피센트의 남아있던 마음 한 조각은 이 아기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점점 더 움직이고 결국 이 저주를 풀고자 하지만, 애초에 '영원히'라는 단서를 달았던 터라 이 저주를 풀 수가 없다. 이것이 너무 괴로워... 그렇게 아기 오로라는 열여섯살이 되는데, 열여섯살을 하루 앞둔 날 이웃 나라 왕자를 숲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둘은 서로의 외모에 반하게 돼...



저주는 힘이 세서 공주는 성에 가 16년만에 아버지를 만나지만 결국 물레 바늘이 찔려 잠이 든다. 말레피센트도 오로라 공주를 지키던 요정들도 이웃나라 왕자를 헐레벌떡 공주가 잠든 침대 앞으로 데려간다. 그녀에게 키스해, 키스해!! 키스하란 말이야!! 왕자는 '그러면 안될 것 같아요, 우리는 한 번 밖에 안만났는데요' 라고 말한다.


이건 정말 중요한 지점 아닌가.

그래 한 번 밖에 안봤다. 게다가 그녀는 잠들어 있다. 그런데 키스라니, 말이 되는가. 잠들어 있는데 키스하면 어떡해!! 상대의 동의 없이 키스하면 어떡하냐고. 그리고 한 번 봤는데 무슨 진정한 사랑이야, 그게 말이 돼?

애초에 진정한 사랑 따위는 없기 때문에 그 저주에서 깨어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던 말레피센트지만, 그러나 혹시나 하며 몰래 지켜본다. 어쩌면 저 저주를 풀어줄지도 몰라..하면서. 요정들 셋은 키스하란 말이야!! 왕자에게 외치고, 왕자는 그렇게 공주에게 키스한다. 그러나 공주는 깨어나지 않는다. 왜? 처음 본 사이에 무슨 진정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있냐.



이 영화를 보다보면 왕자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어떤 왕자가 나타나도 키스로 그녀를 깨울 수는 없을 것이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아니, 말이 안되잖아. 한 번 보고, 처음 보고 무슨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 애시당초 말레피센트는 남자의 진정한 사랑 따위를 믿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공주는 저주에서 깨어날 수 없느냐? 아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 키스가 누구의 키스여야 하는지 다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스포일러를 팡팡팡팡 파바바바바바바바방 터뜨릴까말까, 그 키스는 누구의 키스일까요?




영화는 좋다. 안젤리나 졸리 너무 좋고 안젤리나 졸리가 실제로 저렇게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날개 너무 거대해서 좀 무섭기도 하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마지막에 스테판 왕과 싸운다. 스테판 왕은 .. 하아- 답이 없어. 말레피센트는 자신을 죽이려던 스테판 왕을 그래도 용서하고 돌아서려는데, 아아, 인간 남자여.. 왜그리 어리석은가, 왜 한 치 앞을 보지못해, 왜 네 생각만 하는가. 네 명을 네가 재촉하는구나, 스테판이여, 인간 남자여, 남자 왕이여....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생각이 났다. 제인 에어에서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결혼을 방해하던 '미친' 버사부인, 그 버사부인의 입장에서 쓰여졌던 소설. 그녀는 왜 미쳤는가, 그녀는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결혼을 방해하는 '악인'인가, 그녀가 왜 미쳤는지, 왜 거기에 갇혀있는지, 진 리스는 모든 이야기에는 다른 면이 있다면서 버사 부인의 입장이 되어 글을 써낸 것이다.

















말레피센트 역시 마찬가지. 공주는 왜 저주에 걸렸는가. 물론 말레피센트가 저주를 걸 대상은 냉정히 따지자면 오로라 공주가 아니라 스테판 왕이 되었어야 했다. 말레피센트를 고통에 놓이게 한 건 오로라가 한 게 아니라 스테판이 한 거니까. 어쨌든 말레피센트는 인간 남자로부터 고통을 당했다. 배신을 당했다. 인간 남자를 괴롭히기 위해 인간 남자의 딸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스테판이 딸에게 걸린 저주로 인해 남은 평생을 괴롭게 살았으니 복수에 성공했다 보여지지만, 사실 스테판이 괴로운 건 딸이 저주에 걸렸다는 것보다, 언제 말레피센트가 자신에게 찾아와 괴롭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말레피센트를 괴롭혔으니까. 누구보다 자신이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레피센트로 인한 두려움에 떠는 거다. 자기가 나쁜 짓을 안했으면 그토록 두려워할 일도 없는데.



말레피센트는 그러니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다른 이야기' 이다. 다른 버젼. 모든 이야기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라고 진 리스가 그랬다.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는 거예요. 항상."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183쪽




모든 일에는 항상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내용인 것도 좋았고, 그렇게 공주가 저주에 걸린 게 사실은 공주의 아빠 때문이라고 얘기해줘서 좋았다. 무엇보다, 한 번 봤는데 무슨 잠자는 여자에게 키스를 해, 그건 안될 말이고 왕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 남자의 진정한 사랑 따위..... 그 따위 것 없다고 말하는 것도 좋았고.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사랑' 자체가 없느냐?


아니요.


그런 이성애가 아닌 다른 사랑, 다른 방식으로의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그게 엄마나 아빠일 필요도 없는 거라고 말레피센트는 말해준다. 아무튼 짱좋네, 졸리. 날아다니고 힘도 세고 인간 남자의 진정한 사랑따위 없어!! 이러고. 졸리가 짱이다 진짜.


말레피센트2 보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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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10-0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에 말레피센트2 광고 많이 하더라구요. 다음에 1 부터 한번 봐야겠네요. ^^

다락방 2019-10-07 14:29   좋아요 0 | URL
찾아보니까 10월 중순에 개봉하더라고요. 개봉하면 2편은 극장 가서 봐야겠어요. 어휴 졸리 진짜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10-0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1도 안 궁금했었는데 이 글 보니까 좀 보고 싶어지네요. 왕자가 키스 망설인다는 설정도 재미나고 무엇보다 그 스포일러가 몹시 궁금하네요. 으으. 봐야 하나! ㅎㅎ

다락방 2019-10-07 14:30   좋아요 0 | URL
저도 진짜 1도 안궁금했는데 어쩌다 뭣 때문에 보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졸리 나와도 안궁금한 영화였거든요.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볼까? 이렇게 된것인지..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조금만 보려다가 내처 다 보았네요.
그치만.. 밤늦게 봤더니 자기 전에 초큼.. 무서웠어요... ㅜㅜ

단발머리 2019-10-0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투브에서 12분 영상으로 봤는데 결말이 완전! @@ 맘에 들더라구요.
저도 안젤리나 졸리 좋아요. 그녀 말고 다른 사람 누가 가능했을까 싶어요. 그걸 알고 캐스팅했겠지요.

다락방 2019-10-07 16:04   좋아요 0 | URL
결말도 마음에 들고 그간 알던 동화보다 완전 현실적이죠! 뭐랄까,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없다는 걸 바로 증명하는 것 같았어요. 후훗.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존재 형태도 너무 좋았고요.
저도 졸리여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 다 보고나서 졸리 말고 누가 가능했을까, 생각해봐도 다른 사람은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잘 웃지 않는 졸리가 영화 속에서 가끔 살짝 웃을 때, 진짜 너무 좋아요. 온몸이 짜릿해져요! >.<
 
















네스프레소 캡슐커피의 캡슐은 재활용이 가능하다. 커피를 마신 뒤에 빈 캡슐을 네스프레소 매장으로 가져가거나 택배로 커피를 주문하면서 캡슐 수거해달라고 요구를 하면 된다. 선선한 가을날, 나는 그간 마신 커피 캡슐을 들고 네스프레소 매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천호동으로 향하면서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교보문고에 가고 싶은데, 그러면 천호동에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잠실에 갔다가 잠실에서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와야 하나, 그 사이 어디쯤에 까페에 가 책을 읽고 싶은데... 내 가방 안에는 내 책장에 꽂힌지 오래된 '어슐러 르 귄'의 [세상의 생일]이 들어 있었다.


천호동 현대백화점에 도착해 네스프레소 매장에 가 캡슐을 반납했다. 그리고 커피 몇 개를 더 샀다. 자, 이제 잠실로 가야하나, 좀 귀찮네.. 하다가, 앗, 천호동에도 교보문고가 있었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만세!! 잠실까지 안가도 된다. 야호~ 아니, 이게 왜 지금 생각나? 아니, 이게 지금이라도 생각나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슬렁 슬렁 걸어가 교보문고 천호점에 도착했다. 마침 베스트셀러 코너에 [벌새] 가 꽂혀 있어, 그 책 안의 정희진과 최은영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책을 좀 훑어보았다. 흐음, 이정도면 됐다. 이제 세상의 생일을 읽으러 까페에 가자, 나 스벅카드에 잔고도 남아있고 텀블러도 있으니, 자, 가까운 스벅으로 갈까?


그러다가 나는 보았네. 교보문고 바로 앞의 까페를. 어? 여기 사람도 없고 조용한데? 책 읽기 딱 좋겠다! 그렇게 들어가려는데 이 까페에서 브런치를 팔고 있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다 예뻐.. 예쁜 브런치..나도 한 번 언젠가 먹어보고 싶었는데, 좋았어, 나는 이곳에 가서 브런치를 먹겠다! 사실 브런치 먹기에는 시간이..오후 세 시지만.. 뭐 어때, 나는 먹겠네, 브런치를. 그렇게 가장 예뻐보이는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다.





프런체 토스트는 13,500 원이고 이렇게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아메리카노는 2,000원 이었다. 그러니 위 상차림의 가격은 15,500원. 예뻤고 맛있었지만 너무 비싸... 나는 이 예쁜걸 보았고 먹었으니 아아, 이제 더는 안먹어도 되겠구나 했다. 비싸... 비싸다.. 아니 좀 비싸잖아요... ㅜㅜ


그리고 나는 어슐러 르 귄의 책을 읽는다. 서문 부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아아,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단편집이고 서문에는 각 단편에 대한 작가의 짧은 소개가 실려있다. 나는 이런 글을 읽게된다.



<세그리의 사정>은 세그리라는 세계의 사회에 관해 오랜 세월동안 온갖 관찰자들이 쓴 보고서들의 요약문이다. 이 문서들은, 보고서에 관해서라면 견과류를 본 다람쥐처럼 구는 헤인 역사가들의 문서보관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이야기가 처음 내 맘에 싹튼 때는, 세계,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인 지구의 일부 지역들에서 성별이 여자인 태아와 아기를 끊임없이 낙태하고 살해함으로써 성비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이런 곳들에서는 오직 남자들만이 온갖 수고를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불합리하고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에서, 나중에 이 이야기를 낳은 사고 실험에서, 나는 그 성비 불균형을 역전시킨 뒤 더욱 키우고 영구화시켰다. 세그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며 무척 즐겁긴 했지만, 실험 자체는 즐겁지 않았다. -서문, p.11




보고서라는 글의 형식은 쓰기도 읽기도 싫지만, 그러나 어슐러 르 귄은 이 보고서의 형식을 빌어 쓴 단편에 '여아들만 낙태하고 살해하는 사회'를 역전한 글을 실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이 두꺼운 단편집에서 이 단편을 당연히 가장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작가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불합리한 기사를 접하고 그것은 안되잖아,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다니. 그리고 그 글이 지금 이곳의 나에게 읽힌다. 



<세그리의 사정>은 세그리라는 행성, 세그리라는 사회의 이야기다. 작가가 예고한 대로 이곳에서는 여성의 성별이 훨씬, 훨씬 많다. 남자아이들은 잘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서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사는 일이 별로 없다. 일정 나이가 되면 성 안에 들어가 살게 되고, 성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다. 남자들에게는 대학 교육이 허락되지 않고 여자들과의 결혼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중에 우수한 남자들만이 '씹집'이란 곳에서 여자들에게 씨내리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결혼하고 어머니와 딸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며 아이를 갖고 싶어지면 씹집에 가서 임신할 수가 있다. 



남자아이가 열한 살이 되면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여자들에게서 떼어내 성으로 데려가고, 어엿한 남자로 교육시킨다. 우리는 아이가 그렇게 여러 의식과 축하 속에서 성으로 데려가지는 것을 보았다. 남자아이는 유산될 확률이 크다고 하며, 그렇게 태어나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고서도 많은 남자아이들이 유아기에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들, 진정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빛을 보지 못하는 완고한 불신앙자들이면 무릇 그러하듯, 이 종족이 '신'의 저주를 받았음을 본다.

여기 남자들은 예술에는 거의 무지해서 펄쩍거리는 춤을 추는 게 고작이며, 과학 지식은 야만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p.59-60)



비참한 삶처럼 들린다. 열한 살이 넘으면 해도 된다고 허락받는 일은 모두가 성 안의 게임과 스포츠에서 겨루는 일뿐이고, 열다섯 살 정도가 넘으면 돈과 씹하는 횟수 그리고 기타 등등을 놓고 씹집에서 경쟁하는 일이 전부다. 그 이상은 없다. 다른 선택권도 없다. 직업도 없다. 뭔가를 만드는 기술도 없다. 큰 게임에서 시합할 때가 아니면 여행도 없다. 그 어떤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 대학에 갈 수도 없다. 나는 지적인 남자가 대학에 와 공부하는 것조차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스코드르에게 물었고, 그녀는 그런 배움이 남자들에게 아주 해롭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배움은 남자의 명예에 대한 감각을 흐리고, 근육을 흐물거리게 하고, 성교 불능으로 만든다. 스코드르가 말했다. "'고환으로 갈 것이 뇌로 간다'라는 말이 있지요.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교육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해요." (p.71-72)



여자들은 걱정 말라고, 우린 남자들이 서로 죽이게 두지 않는다고, 우린 남자들을 보호한다고, 남자들은 우리의 보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술 시합 입체영상에서 남자들이 서로를 무시무시하게 이리저리 집어던지다가 뇌진탕으로 실려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숙련되지 않은 선수들만이 다칩니다." 참으로 안심되는 말씀이다. (p.73)








이 단편에는 '씹집' 과 '씹'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나오는데, 원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길래 씹집 이란 용어로 번역된걸까, 이 단어를 볼 때마다 거북했다. 돈을 주고 성관계를 맺는 장소이며 동시에 임신하기 위한 성관계를 맺는 장소인데 씹집.. 이라는 표현이라니. 이렇게밖에 번역할 수 없었던걸까? 어슐러 르 귄이 선택한 단어 자체가 씹집의 분위기를 주는 단어인건가? 씹집이라니... 이런 단어를 대체 누가 사용하나... 어쨌든.



건강하고 활기차고 대학에 가고 온갖 직업을 차지하는 게 모두 여자들의 몫이다. 씹집에 가 돈을주고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이고. 그러나 남자들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주지도 않고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으며 진지하게 아내를 맞이하고 싶을 때는 여자들과 결혼하는 여자들. 여자들은 아내를 맞이하고 아내가 되어준다. 그러니 결혼하면 아내에게 아내가 생기게 되는 것. 오, 이건 성반전이구나, 이 단편은 [이갈리아의 딸들]보다 먼저 쓰여진걸까? 싶어 찾아보니, 이 단편은 1994년에 발표된 단편이고 [이갈리아의 딸들]은 1975년 작품이다. 



이 단편에서 머리를 풍성하고 길게 길리는 것도 남자이고 여자에게 선택받기를 원하는 것도 남자이다. 모든 직업과 교육은 여자의 몫이라 대부분의 것이 지금 여기, 즉 지구(?)와 성별역할이 다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그리와 지구(혹은 대한민국)의 남자가 공통된 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중요한게 섹스라는 것과, 맞춤법에 무지하다는 거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남자들 맞춤법 잘 틀리는 거 너무 웃기다. 여자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친구가 맞춤법 너무 틀려서 스트레스 받는다고들 하는데,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같은 나라에서 교육을 받는데, 어째서 유독 한쪽 성별은 맞춤법에 약할까? 왜그럴까? 웃겨..

이 나라 남자들도 다 그냥 세그리 가서 살았으면........... 이 나라 남자들에 넘나 맞춤한 곳인데............




결국, 토드라의 감미로운 사랑의 말에도 불구하고, 토드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남자에게 씹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여자에게 씹은 사랑과 삶의 한 가지 요소일 뿐이었다. (p.97)

곧장 토드라에게서 답장이 왔다. 제발 와서 함께 얘기하자고 간청하는 편지였다. 편지는 철자법이 엉망이고 글자마저 읽기 힘들었지만, 변함없는 사랑의 공언으로 가득했다. (p.98)


너무나 날카로운 작품이다. 단순히 모든 역할을 역전시킨 게 아니라 중요한 특성은 또 가져가게 두었으니. 그러나 이 소설을 쓰면서 '실험 자체는 즐겁지 않았다'고 한 르 귄 님의 말이 계속 맴돈다. 그래, 어느 한 쪽에게 더 많은 권력이 실려있는 일이 유쾌하고 즐거운 일은 아니지.


표제작인 <세상의 생일>도 내처 읽고 싶지만, 오늘 어슐러 르 귄은 이만큼만 읽어야겠다. 왜냐하면 읽기 욕망에 휩싸인 나는 또 이만큼의 책을 꺼내가지고 책상 위에 쌓아뒀기 때문이다. 나의 육체가 다섯개라면 이 다섯 권을 동시 읽기로 진행할 수 있을텐데, 아, 너무 안타깝다..






책상 위에 이만큼의 책을 쌓아뒀는데 벌써 일요일밤 아홉시반이라니 너무 슬프다.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나는 과연 이중에서 얼마만큼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흙 ㅜㅜ 

시도 외워야 되는데 ... 시집은 꺼내오지도 못했네. ㅜㅜㅜ



굿나잇.




아자크는 흐늘흐늘한 남근에 심하게 거부감을 느꼈고, 그래서 하룻저녁에 서너 번씩 자신을 궤뚫지 못하는 남자는 주저없이 쫓아버렸다.- P90

그 사람은 제드르라는 젊은 여자였는데, 제조소에서 기계 수리 전문가로 일했다. 제드르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 아자크는 제드르가 자유롭고 힘차게 걸으며 서 있는 자세도 당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96

에마드르는 나처럼 씹집의 전문성을 혐오했고, 우리는 언제나 수줍고 짧게 사랑을 나눴다. 그 점이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게 욕망의 달성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증거라서였다.
우리가 함께 누워 얘기하고, 서로에게 자기 삶이 어땠는지를 말하고, 우리가 남자와 여자에 대해, 서로에 대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했고, 자신의 악몽에 대해, 꿈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진짜 열정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끝없이 얘기했고, 그 영적 교감을 나는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기릴 것이다. 두 젊은 영혼이 자신들의 날개를 찾고, 오래는 아니어도 높이 함께 날았던 일을.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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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9-10-0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호께이 책이 나왔나요! 우째.. 아까 주문 완료.. 다시 주문을 해야하는 것인가요..으헝~

다락방 2019-10-07 07:42   좋아요 0 | URL
저는 찬호께이 를 원래 안좋아하긴 하지만, 이 책은 특히 더 안사고 안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비연님... 킁킁. 저는 1/3쯤 읽었는데 별 두 개.. ( ˝)

비연 2019-10-07 08:11   좋아요 0 | URL
켁.. 그럼 패스....

다락방 2019-10-07 08:38   좋아요 0 | URL
게다가 겁나 쪼꼬만데 비싸요. -_-

syo 2019-10-06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구에서 한아뿐>에 그런 대목이 나와요. 어슐러 르 귄이랑 몇 년 같은 행성에 산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끝내 노벨상 안 준 ㅅㄲ들 끄지라고.....

다락방 2019-10-07 07:44   좋아요 1 | URL
크-
[제인 오스틴 북클럽]에서 유일한 남자멤버가 어슐러 르 귄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자신이 호감 가진 여성 때문에 제인 오스틴을 읽게 되고 그래서 자기도 그 여성에게 어슐러 르 귄을 추천하는데요. 그 여자는 참 지독히도 르 귄을 안읽는거에요. 책을 빌려줘도... 그래서 남자가 서운해하고 빡치는데, 나중에 여자가 읽다가 밤을 새고는 르 귄 책 빌리러 남자네 집 앞에 가게 됩니다, 네... 제가 그래서 르 귄을 시작했어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19-10-07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07 14:31   좋아요 0 | URL
오오, 비오는 날 별다방 1+1 쿠폰!!!!!!
저도 그거 있는데요!!!!!!!!!! 있을걸요? 그거 다이어리 사면 주는 거잖아요, 그쵸? 저 있을텐데요! 흐미..
어쩔... 올해가 가기 전에 써야할텐데 쿠폰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요. 어쩌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19-10-07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07 14:3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래도 저게 다 제 책이라서, 제가 가진 책들이라서 반납의 걱정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안그래도 주말에 도서관 가고 싶었는데 가서 또 빌려오면 저 책들은 다 어쩌나 싶어서.. 당분간 스스로에게 도서관 금지령 내렸어요. ㅠㅠ

심술 2019-10-1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씹집‘이 fuckery네요. 굽다bake에서 빵집bakery이 나온 것과 같은 발상입니다.

en.wikipedia.org/wiki/The_Matter_of_Seggri 참조했어요.

다락방 2019-10-10 17:4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씹집이란 용어 자체가 너무 불편한데 그렇다면 뭐로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해봐도 저는 딱히 좋은 단어가 생각나질 않네요. 흐음..

심술 2019-10-12 12:08   좋아요 0 | URL
불편하긴 하지만 정확하고 알맞게 옮겼다고 생각해요.

마태우스 2019-10-10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이 눈에 띄네요. 저거 시작하시는군요. 너무 힘들었단 기억만 나네요 그래도 지나고 보면 좋은 말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완독하시길 빕니다! 화이팅.

다락방 2019-10-11 07:51   좋아요 0 | URL
네, 저 책 읽기 힘들더라고요. 1권만 간신히 읽었다가 미뤄뒀었는데 이번에 다시 도전해야겠어요. 저도 꼭 완독하겠습니다. 화이팅!!
 
말하기 독서법 - 마음과 생각을 함께 키우는 독서 교육
김소영 지음 / 다산에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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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유독 독서기록장이나 독후감 쓰기를 어려워합니다. 글쓰기라는 건 많은 생각과 집중력, 물리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부모님께서 직접 해보면 더 쉽게 이해되실 겁니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연필로 독후감을 적어보세요. 짐작으로만 하지 말고 실제로 해보셔야 합니다. 다 쓴 독후감을 '윗사람'에게 검사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됩니다. 어른보다 글쓰기 경험이 적은 아이들이 마주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p.17-18)





국민학교 2학년(어쩌면 3학년? 4학년?)이었나, 방학 숙제로 독후감 쓰기가 있었다. 당시 내 모든 숙제는 엄마가 봐주셨는데, 엄마도 독후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셨던 것 같다. 친척언니에게 놀러오라고 해서 나에게 독후감을 가르쳐주라 하셨다. 친척 언니는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는데, 나는 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줄거리를 요약하고 내 감상을 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줄거리 요약'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거다. 다만 그 당시 내가 이해한바로는, 책 한 권을 읽고 책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요약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요약.. 요약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진짜 모르겠는거다. 언니는 나한테 몇 번이나 반복해 설명한 것 같은데, 결국 나는 언니 없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책 한 권을 통째로 베껴냈다. 나름 똑같이 베끼면 안되고 어쨌든 분량은 달라져야 하니 내가 요약할 수 있는 건 문장의 맺음말과 접속어를 하나로 만드는 거였다. 이를테면, 


'~ 한 것이다. 그러나~'


라는 문장이 있다면 '~ 했으나' 라고 바꾼것. 내가 할 수 있는 '요약'은 그게 전부였다. 결국 내 독후감의 원고지 매수는 매우 많았다. 나에게 독후감은 그렇게 매우 어려운 숙제였다. 이게 나한테는 잊을 수 없는 일로 남아있고 또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한데, 이 책, '김소영'의 [말하기 독서법]을 읽으면서 그 때의 내가 생각나 매우 안타까웠다. 그 때의 내게 김소영 선생님이 있었다면, 김소영의 독서교실에 다녔다면 나는 독후감 숙제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았을텐데, 김소영 선생님은 나를 잘 지도해주었을텐데... 그리고 그 어린 시절 그런 독서지도를 받았다면 지금의 나는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 너무 슬프다. 김소영 선생님, 선생님은 왜 지금 거기에 계신건가요? 과거의 내게 선생님으로 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책, [말하기 독서법]은 김소영의 전작 [어린이책 읽는 법] 처럼 어른들에게도 매우매우매우매우 유용하다. 읽으면서 '글쓰기는 너무 어려워서 쓸 수가 없어' 라고 말했던 내 주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예 글 쓰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어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시도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제법 잘 써낼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다. 물론 이미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이라 해도 이 책을 읽는 것은 읽지 않는 것보다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거의 매일 글을 쓰는 나같은 사람도 이 책의 어느만큼에는 '으음, 내가 잘하고 있군' 하였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앗, 이런 방법이!' 하면서 온 몸으로 새로운 배움을 흡수한것이다. 김소영 독서교실에 성인반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반이 있다면 제가 먼 곳에 있어도 다닐 의향이 있습니다, 김소영 선생님.



이 책은 책을 읽고 감상을 얘기하고 글쓰기를 진행해가는 과정에 대해 아주 좋은 방법들이 들어가있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 책의 장점이 아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소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몇 번이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독서지도 혹은 글쓰기 지도를 하는 게 김소영 선생님이 독서교실에서 맡은 역할이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선생님은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사람. '이렇게 좋은 어른이 저기 숨겨져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렇게 좋은 어른, 좋은 선생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나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어른이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좋은 일 아닌가. 



'기욤 뮈소'의 책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렇긴 해도 이 불안한 세상에서 제시를 돌봐주는  어른이 셋이라면 그리 많은 게 아니잖아." (기욤 뮈소,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 p.367)



김소영 선생님 혼자서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을 상대할 순 없으니, 또다른 김소영 선생님들이 여기에도 또 저기에도 숨겨져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친구로 대화상대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뉴스를 보면 온갖 나쁜 어른들이 경쟁하듯 내가 더 나빠 내가 더 나쁘지 튀어나오지만, 이렇게 좋은 어른들이 있구나, 저기 어디에 자신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지 않은 채로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어. 김소영 선생님이 하는 일은 글쓰기와 말하기, 책읽기에 관련된 지도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도 있었어. 예로 드는 많은 책들을 읽고 싶어져서 장바구니에 넣지만, 또 예로 드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 같다. 그 어느 소설을 읽을 때보다 김소영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에 마음을 빼앗긴다. 훌륭한 이야기들이 이 책 안에 가득하다.




나는 몇 번이고 이 공간을 통해 언급했지만 시를 읽는 것이 어렵다. 시를 읽는 것이 어렵고 어쩌다 좋은 시에 감탄하면서도 외우기가 잘 안됐다. 나는 사람들 전화번호는 기가 막히게 잘외우는데, 어째서 시는 외우지 못할까. 좋아하는 소설속의 문장들은 기가 막히게 잘 외우는데{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났다, 뚫어지게 보시구랴, 프라납 삼촌은 엄마에게 순전한 기쁨이었다), 어째서 좋아하는 시는 한 편도 외우지 못하는걸까.


이 책의 <언어의 힘을 배우는 동시 말하기>는 그래서 내게 매우 유용한 부분이었다. 시를 잘 읽지 못하고 외우지 못하는 내가 이 책을 읽고나니 다시 시집을 읽기를 시도하고 싶고 또 좋아하는 시 몇 편은(겨울 휴관, 많은 물, 오십 미터) 외우고 싶은 욕망이 '다시' 생겼다. 머릿속에 갑자기 시 세 편쯤은 외우는 내가 그려지면서 멋있어졌다. 아 시 외워서 암송하는 나 짱 멋져! 나중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서 불쑥, 시 한 편을 읊어야지. 아, 짱멋져...



필사에 대해서라면 사실 좀 심드렁했다. 그게 책 읽거나 글 쓰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필사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꾹꾹 눌러쓰는 아름다운 문장들은 나에게 어떤 것들을 가져다줄까?



나는 이미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는 사람이니까, 하면서 한껏 잘난척 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읽기와 쓰는 것에대해 더 나은 방법들을 알아간다. 무엇보다 시에 대해 다시 무언가 해보고 싶어진 게 너무 좋았다. 보리국어사전도 살까, 지금 계속 고민중이다. 국어사전을 새로 사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가끔 펼쳐보는 일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필요하며 또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국어사전 조금 비싸지만......(내적갈등중)


물론 이 책은,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가 어려워서 좀처럼 쓸 수 없는 어른들에게도 매우 좋다. 진짜 좋다. 내 말 믿고 한 번 이 책을 읽어봐, 쓰지 못했던 사람들이 쓰게 될것이다. 




뜻과 활용을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 수준보다 조금 어려운 어휘를 섞어서 씁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일일이 그 말들을 가르치기보다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었을 때 칭찬하고 뜻을 알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르쳐줄 기회는 늘 있으니까 조바심 내지 안아도 됩니다. 아이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중간중간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표현 좋다˝, ˝그 부분 잘 못 들었어. 미안하지만 다시 얘기해줘˝ 같은 말로 지금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것은 듣는 태도를 가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 P57

앞에서 작가는 어떤 장면을 그리고 어떤 장면을 그리지 않을지 결정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다면 그려지지 않은 장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대부분 독자의 머릿속에 있습니다. 스무 장면의 그림들이 서로 연속적이지 않더라도 독자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채워 넣습니다.
그림책 독자는 누구나 능동적인 참여자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와 나눈 대화가 특별하지 않아도 실망할 것 없습니다. 읽는 일 자체가 창조적인 일임을 잊지 마세요. - P83

동화가 어른에게는 단순해 보일지라도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동화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제를 파악하는 건 더더욱 더딜 수 있고요. 어른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겪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입니다. 아이가 서툴다는 것은 경험이 적다는 것이지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를 채근해서도 얕잡아 봐서도 안 됩니다.- P138

독서가 마음과 생각을 살찌운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즐겁게 하고 세상으로 안내하는 콘텐츠는 너무나 다양하지만 책만큼 자기 마음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자기 힘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에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몰입하는 시간은 귀하기까지 합니다. 독서가 그 시간을 만들어내고요.- P207

아이들이 유행어나 비속어를 사용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서 금방 떠오르고, 상대(주로 친구)도 잘 알아듣죠. 물론 언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그러면서 사회의 어휘가 풍부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은 감정이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 때가 더 많습니다. 말의 품위도 떨어집니다. 비속어를 종종 사용하던 아이가 글을 쓸 때 만큼은 되도록 다른 표현을 찾으려고 애쓰는 걸 보면 스스로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듯합니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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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9-10-06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소영 선생님 죠아요!

다락방 2019-10-07 07:44   좋아요 1 | URL
저는 김소영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단발머리 2019-10-06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만 믿고 읽기는 하겠지만, 그렇게해서 읽게 된 책이 너무 많.....ㅠㅠ

다락방 2019-10-07 07:44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그래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책읽기를 권장하고 뽐뿌받고...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단발머리님, 출판계를 우리가 먹여 살립시다!! 불끈!!!

syo 2019-10-06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독후감을 쓴 적이 있었어요. 생명공학과를 가서 인간복제 기술을 연구할 걸, 그럼 김소영 쌤을 복제해서 각급 초등교육기관에 배치할텐데- 이런 거요 ㅎㅎㅎ

다락방 2019-10-07 07:4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제 인생의 흑역사에요, 그 독후감은. 그것도 반공독후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용은 생각 안나고 진짜 열심히 옮겨 적은 기억만이...(눈물이 그렁그렁)
김소영 쌤같은 쌤은 세계의 모든 어린이에게 필요합니다!!

네꼬 2019-10-07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편애... 감사 드리며 뻔뻔하게 댓글마다 하트를 찍고 갑니다. 사람은 편애를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으허허헝 저는 그만 웁니다.

다락방 2019-10-07 14:33   좋아요 1 | URL
편애.. 하면 또 다락방 아니겠습니까. 편애에 살고 또 편애에 사는 다락방인 것입니다.
그리고 책 정말 좋아요, 네꼬님.
이런 책을 쓴 스스로를 아주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이런 책을 커리어에 한 줄 더 하다니.. 인생 진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네꼬님...

블랙겟타 2019-10-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놨습니ㄷ....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9-10-07 14:33   좋아요 1 | URL
열심히 읽고 쓰며 살아갑시다, 블랙겟타님!!

심술 2019-10-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봐야겠군요. 좋은 책 소개 고마워요.

하나 맞춰볼게요. 다락방님은 타미에게 김소영 선생님 어린이 독서교실 수강권을 선물했어요, 맞죠?

비누 냄새랑 프라납 삼촌은 저도 아는데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뚫어지게 보시구랴.

이 셋은 금시초문이(거나 제가 읽었는데 잊은 거)네요.
어디서 나온 문장이죠?

다락방 2019-10-10 17:44   좋아요 0 | URL
타미에게 김소영 선생님 독서교실 수강권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다닐 수가 없답니다 ㅠㅠㅠㅠ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이 두 문장은 모두 비누냄새와 같이 <젊은 느티나무> 이고요,
뚫어지게 보시구랴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입니다. ㅋㅋㅋ 에미가 레오에게 가슴 큰 여자 좋아하지 않냐고 해서, 가슴 큰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자기가 뭘 어쩌겠냐고 했더니 에미가 답하는 거에요. 뚫어지게 보시구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술 2019-10-11 14:55   좋아요 0 | URL
인용문 5분의3이 <젊은 느티나무>네요. 락방님이 이 책을 참 인상깊게 읽으셨군요.

요즘 에미 충고대로 했다가는 ‘시선 강간‘에 걸려서 된통 고생하죠.

기억하시나 작은 시험 하나 볼게요.

리아의 젖꼭지는 ‘분노의 포도‘처럼 뽈딱 솟았다.

어디서 나왔죠?

다락방 2019-10-11 14:57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때 <젊은 느티나무> 읽고 너무 좋았거든요. 여러차례 읽었었어요. 크- 비누냄새에 대한 환상도 그 때 생겼죠. 지금은 사라졌지만... ㅋㅋ

말씀하신 문장은.. 모르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아는 책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술 2019-10-12 12:18   좋아요 0 | URL
blog.aladin.co.kr/fallen77/9592337 가셔서 복습하시고 오세요. 댓글에 나와요.

저도 락방님 덕분에 오랜만에 어제 <젊은 느티나무> 다시 읽어봤어요. 결과적으로 어제만 두 번 읽었네요.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랑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둘 다 나오는군요.

‘아아,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다.‘ 는 ‘그에게는 항상 비누 냄새가 났다.‘ 처럼 위치 때문에 기억하기 쉬운데 왜 잊었을까 스스로 의아했어요.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는 첨 읽을 땐 놓치고 이 문장만 찾아 다시 읽으며 찾아냈죠.

근데 이현규가 이야기 속 ‘나‘인 윤숙희 뺨 때리는 대목이 있더군요. 옛날 작품은 옛날 작품이다 싶어요.

2019-10-14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14 15:10   좋아요 0 | URL
링크해주신 글 들어가서 댓글 봤는데, 댓글 완전 기억도 안나네요. ㅎㅎ 게다가 제가 읽은 게 아니라 심술 님이 읽은 작품에서 나온 거였으니 더 기억안날 밖에요. ㅎㅎ

네, 젊은 느티나무는 나이 들어 읽고 깜짝 놀랐어요. 그게 오빠 친구한테 받은 편지를 오빠가 보고나서 ‘그 편지를 거기 둔것은 날 보라는 건가?‘ 이런 뉘앙스로 얘기하다가 뺨 때리는 거였죠? 으으 맞아요, 제가 그 장면 읽으면서, 아니 그게 이 여자가 뺨 먖을 일인가 하면서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작가는 그 때 요즘말로 하면 츤데레...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절레절레.

전 모르겠어요. 자기도 좋아했잖아요, 여동생을. 그리고 좋아하고, 계속 좋아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미국엘 가든지‘ 이렇게 얘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때릴까요? 전 그게 너무 이해가 안돼요..

심술 2019-10-17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딱 그 대목에서 옛날 작품이라 느꼈어요.
 
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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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02 세의 할머니 '베르트'는 옆집 남자를 총으로 쏘아 부상을 입힌다. 이 일로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형사와 마주 보고 앉아 그를 왜 쏘았는지를 얘기하다가 결국 자기네집 지하실에 몇 구의 시체가 있음을  자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왜 거기에 쌓이게 된건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자신의 어린시절부터의 인생 얘기를 시작한다.


한 여자가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나쁜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혹은 좋은 남자의 총량은 얼마일까? 과연, 있기는 있을까?


 


베르트는 젊은 시절부터 숱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여러차례 결혼하게 된다. 여러차례 결혼한다는 건 여러차례 남편과 헤어졌다는 걸 뜻하는데, 놀랍게도 아니 놀랍지 않게도 그 남편들 모두는 괴물이었고, 베르트는 괴물 앞에 참지 않았다. 그들을 그냥 다 죽여버렸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에 감탄해 결혼한 남자는, 결혼 후에는 그 몸매 때문에 그녀가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걸레라고 욕을 하며 함부로 대한다. 춤을 잘 추어서 그녀를 매혹시켰던 다른 남편은, 자신의 작은 고추로 만족하지 않는  아내에게 화를 내며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녀를 뮤즈라며 따라다녔던 한 화가는 돈벌이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팔리지 않는)예술에 도취되어 그녀가 번 돈으로 먹고 마시며 그녀의 집에서 산다. 그런 주제에 그녀를 가르치려 들어(흥, 니가 보부아르 읽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녀의 옆집 남자는 미성년자만 골라서 성매수를 하고, 전쟁이 한창일 때 그녀의 집에 찾아온 나치는 그녀를 강간한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브누아 필리퐁'이 써낸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이구나, 했다. 김지영이 살면서 겪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그냥 읊기만 했을 뿐인데 거기에는 한심한 한국 남자들이 등장한다. 베르트 할머니 역시 그저 자신의 삶을 얘기했을 뿐인데 거기엔 지독한 괴물들이 가득했다. 김지영은 체념과 울분으로 살아가 영혼이 아픈 고백을 시작했다면,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않고 그냥 다 쏴죽여버렸다. 


그녀가 직접 총으로 그 나쁜 짓을 응징한 건 비단 전남편이나 자신을 강간한 강간범에게만 향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흑인을 집단린치한 남자들에게도 자신의 총을 꺼내들었다. 필요한 상황에서 그녀 곁에 없었던 혹은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경찰이나 형사들 때문에 그녀는 혼자서 이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한다. 그녀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마음이 가득하다. 아이와 여자들에겐 한없이 다정하며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그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소녀들의 편이 되어준다. 역시 그녀들 곁에 의사가 있어주지 않기 때문에.




"설마 세상이 공평하다는 헛소리를 주절거릴 만큼 바보는 아니겠지?"

"네, 물론이에요. 그런 흰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도 법은 믿는다?"

"법을 수호하며 살아온 지 삼십 년입니다. 네, 전 법을 믿어요."

"그럼 날 지켜줘야 할 순간엔 어디 있었니?"

베르트의 두 눈에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멀리 지나가는 구조선에 필사적인 신호를 보내는 표류자의 씁쓸함이 어렸다.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 걸요."

"능청 떨래? 너나 다른 경찰, 네가 죽고 못 사는 그 헌법을 지키는 모든 자들, 정작 행동해야 할 땐 눈을 씻고 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어. 오래오래 천천히 죽이는 건 살인으로 치지들 않지.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증거만 있다면, 처벌받습니다."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정의와 법은 정략 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p.197)







그녀가 겪었던 그 괴물같은 남자들은 그녀가 유독 운이 나빴기 때문에 그녀의 인생이 끼어들었던걸까?


김지영이 겪었던 삶이 유별난 게 아니었듯, 베르트가 지내온 삶 역시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늘 만나던 바로 그런 남자들을 만났다. 결혼 전에는 달콤하고 다정했으나 결혼 후에는 돌변하는 그런 남자들. 대화보다는 주먹을 쓰면서 여자를 쥐고 살려던 남자들. 여자의 섹스에, 가사노동에, 감정 노동에 기생하면서 여자를 소유하려던 남자들.



그 와중에 만난 잊지 못할 사랑, 인생 남자, 102세가 되어서도 눈물 흘리는 사랑. 이건 작가가 그녀의 삶이 안쓰러워 보내준건지 혹은 모든 남자가 나쁜 건 아니라는 변명을 하기 위함인건지는 모르겠다.



프랑스판 82년생 김지영 베르트 할머니의 이야기를 쓴 작가는 남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남편들을 죄다 쏴죽여버린 이 이야기에 프랑스 남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했다. 이 나라에서 그렇듯이 작가의 SNS 에 달려가서 득달같이 댓글을 달았을까? 모든 남자가 이런건 아닌데 남자를 나쁘게 그려놨다고, 페미 묻었다고 작가를 욕했을까? 이 책을 읽은 연예인들을 가혹하게 비난했을까? 이런 남자들이 어딨냐며 과장됐다고 야유했을까? 설사 그렇게 욕했다한들 이 남자 작가의 커리어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책은 특별할 게 없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이 이 책 역시 큰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특별할 건 없는 내용,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로부터든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나열일 뿐. 

벤투라 형사가 그랬듯 베르트 할머니의 살인에도 할머니에게 감정적 동의와 공감을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처벌한 남자들은 사실 누군가 대신 처벌해줬어야 할 나쁜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참지 않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은가.

별다른 상상력 없이 그저 여자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 썼다해도 충분할 소설이라 별은 셋을 주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베르트가 서른한살에 인생 남자를 만나서 3.5가 됐는데, 알라딘 별점에는 반개짜리가 없으므로 넷을 준다. 



어쨌든,

베르트 할머니는 참지 않긔!!


˝내가 그렇게까지 역겨운데 왜 나랑 결혼한 거야?˝
자신의 위선에 말문이 막힌 뤼시엥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붕 위에 올라갔을 때 이 굴곡진 몸매에 반했잖아, 아니야? 충분히 당신 취향이었으니까 나한테 청혼까지 한 거 아냐? 그런데 왜 지금은 이걸 감추길 바라는 거야? 내가 당신을 창피하게 하는 거야, 아니면 이런 날 바라보는 당신이 창피한 거야?˝
베르트는 당대를 뒤흔드는, 최소한 대화 상대를 뒤흔드는 현대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뤼시엥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즉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이었다.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P101

˝휴! 드디어 자유군!˝
베르트는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상반신이 나체인 채로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삽질에 따라 덜렁거리는 젖가슴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음산해보일 수 있는 순간이 어떻게 이토록 도발적일 수 있는 것일까?
˝자, 이제 알겠지? 아내에게 응당 자상하게 대하는 대신 구타를 일삼으면, 아내가 당신 무덤을 파면서 신바람이 난다는 걸? 이래도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남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야.˝- P111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라니. 베르트는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그 믿음을 위해 루이지애나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독일군의 융단폭격에서 살아남은 남자, 그것도 흑인이 필요했다. 루터는 그녀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심어주는 중이었다. 서른한 살에, 생각지도 못한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발견은 받아들이는 것이 이롭다. 특히 그것이 폭넓고 탄탄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 루터의 품처럼 우리를 단단하게 감싸준다면, 그것은 매우 이로웠다- P145

수프 맛이 고약했다. 베르트가 회복하려고 애쓰며 침대에 못박혀 있던 나흘 이레로 마르셀이 그녀에게 음식을 떠먹이고 있었다. 마르셀은 형편없는 요리사였으나 강력한 주먹꾼이었다. 베르트는 뤼시엥에게 당했던 폭력을 되씹으며 조용히 클클거렸다. 만만치 않은 선수. 마르셀은 상위 그룹에 속했다. 후유증을 남기는 그룹. 베르트는 질이 부어오른 것도 모자라 꽁무니뼈도 부러졌다. 의사에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르셀은 계단 추락사고라고 둘러대며 잘도 빠져나갔다.
‘아니, 아랫도리는 브로콜리가 되고 엉덩이는 두 동강이 났는데, 계단을 헛디뎠기 때문이라니. 그런데 그 핑계가 먹혔어. 다들 한패인거지.‘
베르트는 불만이었고 속단했다. 지폐 몇 장과 칼바도스가 진단서 작성에 힘을 보탰다.- P220

˝어, 그래, 우리 여자들은 말이야, 선택의 호사를 누리지 못해. 우린 무엇보다 애 낳는 기계라고. 물론 그곳도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얘기지만! 출산과 살림, 우린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하지만 난 달라, 이젠 시대가 바뀌었고 난 평등을 원해. 그러니 당신도 집세를 분담해.˝
˝이 집은 당신 거잖아.˝
˝상징적인 제스처를 하란 거야.˝
˝난 도무지 당신네 여자들이 이해가 안 가. 여자들이 살기가 얼마나 편하냐고. 먹여줘, 입혀줘, 재워줘. 책임은 죄다 남편들이 지고. 거기에 발목엔 어떤 족쇄도 없는데도 오늘날 평등을 떠들어대니.˝
˝은행에 계좌를 트고 자기 돈을 자기가 쓰려고 해도 남편의 동의가 필수적인 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발목의 족쇄가 아니면 뭐야? 투표권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했던 건, 그건 자유야? 바지를 입으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래? 예술가라고 해서 꼭 바보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달에 당신 주기가 언제지?˝- P284

베르트가 목제 식탁에 포크를 꽂았다. 열이 올랐다.
˝아, 젠장! 나한테 생리 핑계 갖다 붙이지 마. 당신만은 제발!˝
˝그게 당신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인정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신의 너절함이야.˝
˝천박하게 굴어서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여자가 권리만 주장했다 하면 그 즉시 생리대를 들고 나오니, 이거 원. 저질에, 비루하고, 생산적이지 못하기 짝이 없네.˝
˝생산적이지 못한 건, 당신이 잘 알겠구나.˝
궁지에 몰렸다고 느낀 노르베르가 비겁한 무기를 선택했다.
˝그 부분은 건드리지 마, 노르베르, 특히 그건 하지 마.˝
˝난 그저 당신이 보부아르를 읽고서 들떴을지 모르겠지만, 단신은 크게 불평할 처지가 아니란 얘기를 하는 거야. 이렇게 아늑한 집도 있고, 가게도 잘 굴러가잖아. 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내 예술을 팔고 있어. 누가 더 불평을 해야겠어?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생존자와 그 밖의 사람들의 문제야.˝- P285

˝왜, 당신이 보기에 난 생존자가 아닌 것 같아서?˝
방 안의 온도가 핵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당신은 그리 고생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해.˝- P285

˝지금 저 협박하러 온 거예요?˝
어조가 매서워졌다.
˝그럴 리가,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럼요?˝
˝제 좋은 평판으로 당신의 나쁜 평판을 희석해주고 싶어요.˝
‘남자들이란. 죄다 똑같아. 우리의 구세주들. 내가 또 황홀해해야 하는 걸까.‘
˝전 당신의 좋은 평판이 필요 없어요, 밥티스트. 전 지금의 제가 부끄럽지 않거든요.˝-- P308

˝너흰 그를 죽여서 얻은 게 하나도 없어. 그런데 난 ……난 모든 걸 잃었지.˝
그녀의 입에서 말들이 새나왔다. 공허하고 싸늘한, 유령의 말들이었다.
탕!-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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