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6월 도서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입니다. 마침 제가 오늘 읽고 있는 책에서도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언급이 있었는데요, 자, 어디 한 번 6월에도 빡세게 읽어봅시다.


음, 사실 6월 한 달은 쉴까...라는 생각을 며칠간 했습니다. 함께 읽어주시는 분들 최선을 다해 읽어주시는데, 제가 너무 매달 빡세게 몰아붙이는 것 같아, 여러분에게도 한 달 쉴 시간을 드리고 나도 한 달 쉴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게 한 달 쉬다가 다시 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해보는데까지 해보는걸로..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은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자, 가봅시다! 빠샤!


















다시 한번,

같이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덕분에 힘이 됩니다.

그리고 힘내세요!!



덧붙임)

7월 도서도 안내합니다. 쟝쟝님의 의견을 받들어,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로 하겠습니다. 빠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쟝쟝 2019-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샤빠샤 ❤️

다락방 2019-05-23 15:28   좋아요 0 | URL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쟝쟝님 ♡

쟝쟝 2019-05-23 15:55   좋아요 0 | URL
호잇 저두요! 진지하게 주제잡고 책읽기는 평생 처음이네요! 비록 이핑계저핑계대면서 미루기 일쑤지만 ^.^ 올해들어 제일 잘한 일!

쟝쟝 2019-05-23 15:54   좋아요 1 | URL
참 다다음달에는 이 책 읽고 싶어요 (사실 1장까지 읽었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진도가 안나가는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예요.) 지금까지 읽은 책들 한번 정리도 할겸 ㅋ 고려해주세요 ㅎㅎ

다락방 2019-05-23 15:46   좋아요 0 | URL
고려고 뭐고 없어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7월 도서까지 정해진거네요. 7월에는 반드시 그 책으로 하겠습니다. 빠샤!

다락방 2019-05-23 15:48   좋아요 0 | URL
페이퍼 수정해서 올렸어요~~ >.<

쟝쟝 2019-05-23 15:54   좋아요 0 | URL
오예~~~~~~!!ㅋㅋㅋ 고려 감사합니다!! 부지런히 읽겠습니당🌹

다락방 2019-05-23 15:59   좋아요 2 | URL
혼자 읽기 힘든 도서 같이 읽으면 읽게 되더라고요. 쟝쟝님이 읽기 힘든 도서,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그렇게 진도 쭉쭉 빼봅시다. 빠샤!

블랙겟타 2019-05-23 18:42   좋아요 1 | URL
오. 혼자서 진도가 안난다면 함께!!٩(๑^o^๑)۶

다락방 2019-05-23 18:43   좋아요 2 | URL
함께함께!! 샤라라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5-23 18:48   좋아요 1 | URL
이것이 함께 읽는 이유겠죠? (V•̀ᴗ-)✰

레와 2019-05-23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힘들텐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다락방님, 응원합니다!!! 아자아자!!!!!

다락방 2019-05-23 15:33   좋아요 1 | URL
응원 고마워요, 레와님!
페미니즘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알고 싶더라고요. 페미니즘 공부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오늘도 책 한 권 또 읽으면서 계속 갈증이 났어요. 계속 할거야. 히힛.

고마워요!

syo 2019-05-24 11: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은 저도 같이 읽어요.
공부해야 되니까 안녕~ 그래놓고 지내보니 결국 읽을 건 다 읽습디다.....-_-

생각보다 별로 두껍지도 않네요.
6월 15일에 시험이니까 끝나고 나면 시작할게요.

그나저나 7월의 책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건데??

다락방 2019-05-24 11:26   좋아요 2 | URL
꺅 >.<
쇼님이 함께한다면 정말 좋지요, 좋다 좋다. 꺅 >.<
그래요, 쇼님. 일단은 시험을 잘 치릅시다. 합!격! ㅋㅋ

그쵸그쵸? 7월의 책도 좋아서 속으로 만세! 외쳤습니다 ㅋㅋ

쟝쟝 2019-05-24 11:37   좋아요 1 | URL
고고싱🙌🏻🙌🏻🙌🏻

다락방 2019-05-24 13:41   좋아요 0 | URL
궈궈~~

블랙겟타 2019-05-2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5월 책 읽고 6월도 계속 달려가보겠습니다. (•̀ᴗ•́)و

다락방 2019-05-24 13:41   좋아요 0 | URL
오예~ 컴온!
 
아들의 밤
한느 오스타빅 지음, 함연진 옮김 / 열아홉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이나 고요하고 적막하며 차가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비극.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테레사 2019-05-24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이런 평가를 한 책은 어떤 책인지...궁금해졌어요. 오늘 도착했네요. 가볍고, 표지가 양장인데 굳이 양장으로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난 양장 싫은데...했네요.

다락방 2019-05-24 15:04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속의 비극이 더 싫었어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서.
테레사님 이거 읽고 마음 무거워지시면 어쩌죠.. ㅠㅠ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테레사님! 안그래도 테레사님 서재에 새 글 뜬 거 보고 테레사님 오셨네, 했어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과 내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건지, 도대체 그 우연을 작동시키는 힘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갑자기 떠오른 생뚱맞은 기억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동명의 영화를 봤는데, 갑자기 그 영화의 한장면이 생각난 거다. 존(채닝 테이텀)이 사만다(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 집에 갔는데 라자냐를 대접하며 "우리 엄마가 만든 라자냐는 정말 알아주지" 라는 말을 하는 장면. 그런데 이 기억이 맞는 기억인지 아예 잘못된 기억인지 모르겠는거다. 갑자기 이 장면이 왜 생각났는지도 모를뿐더러, 그렇다면 이 장면은 정말 있는 장면인지, 기억의 왜곡인지.. 영화본지 오래되어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데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지는 건 왜 때문일까. 사람은 아주 가끔은 쓸데없는 동력으로 움직인다. 나는 이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이 기회에 원작을 읽어보자' 하게된 것. 그렇게 2010년에 발행된 책을 사서는 읽은 것이다. 네, 엄마가 만든 라자냐가 세계 최고인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책은 몇 장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내 기억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책 속에서 존은 돌도 되기 전에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을 언급한다. 스물셋이 된 지금까지 엄마랑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돌도 되기 전에 떠나버린 엄마라니, 엄마의 라자냐를 맛보았을 리가 없지. 내 기억이 잘못되었구나. 어쩌면 영화는 책과 아주 다르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작가 '니콜라스 스파크스'는 남자 작가인데, 남자라는 걸 알 수밖에 없게끔 쓰여진 로.맨.스. 소설이다. 로맨스 소설도 남자가 쓰면 여지없이 남자가 썼구먼, 하고 알 수 밖에 없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이 책은 멋진 남자 하나 그려놓으려고 작정한 책이랄까. 이 남자 '존'은 미국을 구하는 군인이며 게다가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멋지게 뒤돌아서는 남자..다. 남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를 그대로 그려냈달까. 후훗. 존과 사바나의 로맨스 자체에 할 말이 많아서 할 예정이고 나름대로 몰입하고 또 공감되는 부분들도 적잖이 있었지만, 남자가 그려내는 남자, 남자가 그려내는 여자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된 한국어 책 제목 위에는 '모든 걸 다 바쳐 날 지켜준 당신께... '라고 써있어. 네...




소설의 시작은 2006년. 존이 이미 사바나와 헤어진 지금, 군시절에 배운 위장술로 자신을 위장해 그녀가 행복한지 숨어서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말을 사랑하고 말과 함께 사는 사바나를 지켜보는 존.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에는 체구가 너무 가냘파 보이는 그녀. 하지만 늘 말과 편히 어울렸고, 그건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p.7)



사바나는 왜 가냘플까? 사바나는 왜 가냘퍼서 지켜주고 싶은 욕망이 들까? 사바나 덩치가 컸다면 어땠을까? 존과 사랑에 빠진 여자가 덩치 큰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존은 저 상황에서 말 사이에 있는 그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꼭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기에는 체구가 너무 가냘파 보이는' 을 써야 했을까? 말들 사이에서, 남자들 사이에서, 무슨무슨 사이에서 가냘파 보이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거, 지나치게 진부하지 않나?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맞장뜰만한 덩치의 그녀를 나는 사랑했다.'



이렇게 쓰면 어디가 덧나?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덩치로 녀석들을 제압하는 그녀와 나는 사랑에 빠졌었다.'


이건 어떤가?



'녀석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를 보노라니, 그녀의 어깨로 툭 쳐서 말들을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좋잖아?



뭐, 그렇다는 거다.



"음료수도 괜찮아."

"정말? 냉장 박스에 맥주는 많아. 그리고 군인들 얘기 들어 봤거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괜찮대도. 넌 술을 안 마시는구나."

나는 캔을 따면서 말했다.

"응."

그녀의 말투에는 방어적인 기색도 우쭐대는 기색도 없이 오직 진실만이 배어 나왔다. 그게 좋았다. (p.55)



어린 시절 존은 방황을 했고, 그 방황을 끝내고자 군에 들어갔다. 휴가를 나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에 머물면서 해변에 나와 서핑보드를 타다가, 가방을 해안에 빠뜨린 사바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저걸 건질 수 없다고 대수롭잖게 넘기려던 그녀의 일행들과 달리 존은 풍덩- 헤엄쳐서 그 가방을 건져냈고, 이 일을 계기로 사바나와 존은 아는 사이에서 좀 더 알고 싶은 사이로,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된다. 단 2주만의 일이었다. 둘 모두에게 서로는 너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 전에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 우연을 계기로 나중에 결혼하자고 말하는 사이가 된 것. 존은 사바나를 안 뒤로 늘 사바나를 만나고 싶고, 그러면서도 2주후에 다시 독일에 있는 군대로 돌아가게 되니 그녀와 더 깊은 사이가 되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한다해서 사람  마음이 어디 그대로 되던가. 마음은 언제나 제멋대로 흘러가는 법.


존은 진실로 말하는 사바나를 좋아한다. 저렇게 사바나와 함께 있는 동안 사바나와 대화하면서 그리고 지켜보면서 사바나의 '그게 좋았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자주 나오는데, 그게 바로 사랑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별 거 아닌데 그게 좋다고 말하는 거. 그간 살면서 진실된 사람을 본 적이 없었겠는가. 그리고 뭐 술 안마셔서 안마신다고 말한 걸 가지고 진실 어쩌고 운운하며 좋다고 하는 것도 너무 과장됐잖아.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뭐든 더 크게 보고 더 확장하고 더 과장하고 그러면서 '그게 좋아' 라고 하는 거. 사소한 거 하나에도 '그게 좋아' 라고 하는 거. 돌이켜보면 사랑은 늘 그런식으로 시작됐던 것 같다.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어, 너의 그런 면이 정말 좋아, 나는 그전에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어...



아마 사랑의 끝은 그것들이 딱히 특별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쭉쭉 진행되는 것 같다. 당신의 잘먹는 모습이 좋았다가 드럽게 식탐있네로 끝나게 되는 거....네, 경험담입니다.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 저렇게 시작할 때는 '그게 좋았다' 이 말을 수시로 하게 된다. 그 사람 왜 좋아? 그 사람 어디가 좋아? 이러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들을 들어보면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게 없거든. 술 안마셔서 술 안마시는구나? 라는 대답에 '응' 했는데, 뭘 그게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면 바로 그 순간에 '그게 좋았다'가 되는 것이다. 킁킁.




그러나 존은 군에 있고 사바나는 대학생이다. 그들이 처음 알고 사귀게 되기까지는 존이 휴가온 2주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 년을 기다려 휴가가 되어야만 존과 사바나는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상대의 사랑을 믿었고, 그래서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서로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하며 계속 사랑을 속삭인다. 그렇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데, 다시 만났는데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다. 모르는 사이가 2주간 열정을 불살랐는데, 그러고는 일상을 함께 하지 못한 채로 일 년을 보내다가 다시 2주를 함께 하게 됐다. 그 사이에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또 빼곡한 스케쥴도 있어. 존은 그녀와 2주간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사바나는 친구들 모임에 자꾸 존을 데리고 다니고, 그게 불만이었던 존과 사바나는 싸우게 된다. 처음 2주간의 열정과 만나지 못한 1년을 사이에 둔 다음의 2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행기 좌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사바나의 말이 진실이기를 빌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염려한다는 건 알지만, 사랑과 염려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었다. 사랑과 염려는 우리의 관계를 이루는 벽돌이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는 모르타르 없이는 언제 허물어질지 몰랐다. 당장이라도 갈라질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모르는 면이 많았다. 작년에 나를 떠나보낸 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고, 그 생각을 하며 몇 시간을 고민해 보아도 이번에는 또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한 우리의 관계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팽이의 회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으면 팽이를 계속 돌릴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결과 아름다움과 마법과 천진한 경이로움이 펼쳐졌다. 그런데 헤어지면 팽이의 회전 속도는 속절없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기우뚱기우뚱 휘청거리게 된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p.242-243)




여전히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둘만의 시간. 우리의 관계가 배터리라면, 그 배터리는 내가 타향에서 보내는 동안 줄곧 방전되어 있었다. 우리 둘에게는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한번은 아버지 옆에 앉아 심박수 측정 모니터의 뚜뚜 소리를 듣다가 문득, 사바나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은 지난 104주 중 4주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5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율이었다. 아무리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한다 해도, 언젠가는 허공을 바라보며 우리가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텨 왔을까 의아해할 것이다. (p.248)




존이 군대를 가기로 선택한 건 그의 결정이었고, 그건 사바나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사바나 역시 방학을 이용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가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됐는데, 그녀의 계획에도 역시 '멀리 떨어져서 자주 볼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기'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존이 사바나를 만나고 사바나가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그 당시, 그 순간의 그들이 처한 상황은, 상대를 의식하고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놓인 그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해야 했던 것들을 선택하며 따랐을 뿐. 그들의 삶을 그렇게 지속시켜오다가 갑자기 서로를 만나게 됐고, 그렇게 서로의 옆에 상대를 두려고 하니 오랜 시간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생각지 못한 장애를 만나게된 것이다.


그들은 편지와 전화 통화로 그것들을 굳건히 지켜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사바나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게 됐다.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 때 이미 그는 그 나라에 있고 살기를 결심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곳에 있고 그는 그곳에 있고, 게다가 그와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비행기로 열시간 이상이라, 우리가 매일 알콩달콩 속삭이며 행복하게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그걸 해? 나라면 못해."


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 그렇게 먼 데 살며 앞으로도 서로 먼 데 살 여자를 사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을 그도 그의 친구로부터 들어야했다. 그는 어느 날 내게 '우리가 먼 데 살기 때문에 이 만남이 의미가 없는거야?' 속상해하며 묻기도 했더랬다.


나는 '나라면 못해, 그걸 어떻게 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 때마다 '뭘 못해 닥치면 다 하는거지. 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다 하게 되어있어, 멀리 있으니까 헤어지자고 할거야?' 그러면 하나같이 다들 아니라고들 하면서 '그래도 그렇게 못해' 라고들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게 너무 싫었다.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 '나는 못해' 라고 말하는 게 도대체 이미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필요한 말이라고 그 말들을 그렇게나 해댔을까. 나는 이미 하고 있잖아, 그런데 거기다 대고 '나라면 못해' 라고 하는 거야?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대체? 너도 못하니까 나도 못할거란 말이야?



그러나 존과 사바나처럼 우리도 헤어졌다. 당연히 존과 같은 이유도 사바나와 같은 이유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헤어졌고, 헤어진 후 반 년이 지나 다시 연락했을 때, 그는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기쁨에 대해 얘기했다. 그 당시 데이트중인 사람이 있었던 그는, 멀리 있는 너를 만나러 가는 것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사소한 일상에 항상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 때 나에게 '너와는 그게 되지 않잖아'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그 때도 지금도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 정확히,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안다. 먼 거리, 롱 디스턴스가 사이에 있는 만남은, 일상의 로맨스라기 보다는 특별한 이벤트의 느낌이니까. 나는 그걸로 충족되는 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걸로 충족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의 공유. 함께 눈을 뜨고 손을 잡고 가까운 거리를 산책하고, 같이 아침을 준비하고, 서로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고, 옆집 아저씨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사소하게 얘기하고, 저녁 거리를 같이 고민하고, 오늘 퇴근후엔 어땠어를 표정만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것들이 일상의 작은 힘이 되어 오늘을 내일로 연결시켜줄 것이고. 가까운 거리에 산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 언제 어디서 만나자, 라고 반드시 정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예정에도 없이 '저녁 같이 먹을까?' 가 가능할 것이고, '오늘 치킨 사들고 우리집 가서 먹자'가 가능할 것이다. 서로의 집 욕실에 칫솔을 꽂아둘 수 있을 것이고, 귀찮은데 오늘 자고 갈까, 가 가능할 것이다. 다음날 직장에서 이메일을 보내 '당신 집에 핸드폰 두고온 것 같아, 이따 찾으러 갈게'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 이웃을 당신이 알게될 것이고 당신 직장 동료와 내가 인사하게 되기도 하겠지. 우리에겐 어떤 기나긴 설명 보다도 이제 아 그사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까운 곳에 사는 연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바나에게는 그렇게 '다른 사람' 이 있었다. 존이 멀리 있는 동안에 항상 사바나의 일상을 같이 할 사람. 같이 공부하고 같이 일하고 서로의 고민에 대해(심지어 존에 대한 고민까지도!) 말할 수 있는 친구. 상대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라, 상대에게 어려운 일이 있었을 때 사바나는 그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주고, 그렇게 그 일상들 속으로 사랑이 틈틈이 스며들었다. 스며들었다, 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바나에게 새로운 연인이, 새로운 연인에게 사바나가 해준 일은, 멀리 있는 존과 사바나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그리고 일상을 유지하는 데는, 사바나와 새로운 연인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더' 필요했을 테고.




나는 헤어진지 반년이 지나 연락된 나의 옛연인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그가 선택한 건 그 일상의 공유가 가능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일상의 공유라면, 나와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가 대화하고 함께 웃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더한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찾은 거였겠지. 무엇보다 그녀에겐 내가 가지지 못한 게 있었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 그와의 가까운 거리. 그녀는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나와는 몇 월 며칠을 따져가며 만나야 했지만, 그녀와는 언제든 전화나 문자로 만나는 게 가능했다. 낮에 만나 운동하는 게, 같이 마트를 가는 게, 저녁을 먹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이웃을 소개받기도 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상에 스며드는 사람을, 그는 찾았던 것이었겠지. 그가 나와 헤어진 후 찾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고 나 역시 그와 헤어진 후 찾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 지금 그 근처 가는데 잠깐 볼까? 가 가능한 사람. 그렇게 편한 옷을 입고 나갔다가 혹은 다른 목적으로 다른 곳을 향해 가다가도 불쑥 만날 수 있는 사람. 오늘은 우리 집앞에서 만나고 다음 날엔 너네 집앞에서 만나고가 가능한 사람.



이렇게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았던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래서 해피엔딩이 됐을까?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가까운 거리에 살아 언제든 아무때고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결국은 연애를 좋은 곳으로 향하게 했을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까운 거리가 과연, '일상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을까?



아니었다.


거리가 가깝다고 해서 일상의 공유가 가능한 게 아니었다. 자주 만나고 집앞에서 만나고 마트를 같이 가고 하는 일들만으로 충분한 게 아니었다. 일상의 공유란 그런 게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에 사는 걸로 일상의 공유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그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서 나랑 대화하는 걸 더 좋아했을까? 가까운 거리에 사는 걸로 일상의 공유가 가능했다면, 어째서 나는 데이트 중이면서도 '어서 집에 돌아가 그와 통화하고 싶다'를 생각했을까? 왜 우리는 더 많은 얘기를, 더 속깊은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잘 하지 못하는 얘기를, '지금 가까운 옆에 있는 사람' 이 아니라, 이토록이나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했을까? 왜 우리는 위로를, 격려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먼 데 있는 서로로부터 받았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바나와 헤어지고 2년이 지난 후, 존은 사바나를 찾아갔다. 사바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다. 2년간 사바나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존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사바나에게는 2년 전에, 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여전히 존은 사바나를 사랑했고, 그래서 사바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찾아왔다. 사바나 역시 존을 사랑했고,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현실의 힘든 얘기부터 마음속 고민까지 존에게 얘기한다. 2년간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웃고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현실을 망각할 정도로. 지금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이라는 걸 부러 기억해야 할 정도로, 그들에게는 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웃는 것까지. 이 모든 대화와 사랑은 여전히 존을 향한 것이었지만, 존이 돌아가고 나면 사바나는 매일 말에게 먹이를 주는 일상을 다른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게 사바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존 역시, 그런 사바나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하고. 그게 옳은 길일 테니까.




그렇다면

그 시절 우리가 바라본 건, 결국 허공이었나.



오늘 퇴근후엔 치즈와 와인해야지.
















처음 사바나 린 커티스를 만났을 때-그녀는 내게 늘 사바나 린 커티스다-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은, 군인이 일생의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만났고, 그 때문에 지금의 내 인생은 이토록 생경해졌다. 우리가 함께했을 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헤어진 지 몇 년이 흐르는 동안 그 마음은 되레 깊어졌다.- P9

˝난 그렇게……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좋아.˝
˝삶이 아니라 주화에 대한 열정이야.˝
나는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그게 그거지. 열정은 열정이니까. 열정은 지루한 공간들 사이의 흥분이라, 어디로 향하느냐는 중요치 않아.˝
그녀는 발을 모래 속에 넣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무튼 시간의 대부분을 쏟는 대상이라고. 난 지금 나쁜 습관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너와 카페인처럼.˝
그녀는 앞니 사이에 살짝 벌어진 틈을 드러내며 웃었다.- P83

˝맞아. 그 대상은 주화든 스포츠든 정치든 말이든 음악이든 신념이든, 뭐든 될 수 있어. 내가 만나 본 살마 중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어떤 것에도 깊이 빠지지 못하는 사람이야. 열정과 만족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고, 그것들이 없으면 어떤 행복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어. 행복을 지속시킬 연료가 없는 거니까. 너희 아버지가 주화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싶어. 그때가 어떤 사람이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때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은 보통 전염되거든.˝- P83

˝몇 년 전에 어떤 여자애랑 사귀었는데, 당시에는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돌이켜보면 정말 그랬던 걸까 회의가 들어. 걜 좋아했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는데, 떨어져 있으면 별로 생각이 안 나는 거야.사귀긴 했지만 연인은 아니었던 거지. 그게 말이 된다면 말이야. 그리고 헤어진 뒤에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지.˝ - P145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주말 기록
    from 마지막 키스 2019-05-27 09:02 
    라자냐 장면 확인하고 싶어 읽었던 책에서는, 이미 결론을 알고 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을 만나 동시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더랬다. 그 비극속에서 빠져나오기가 몹시도 힘들었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하면서 허우적허우적. 내친 김에 영화도 다시 보자 싶었다. 라자냐 장면도 확인할 겸.'존'의 아버지는 일요일마다 라자냐를 만들었다. 왜 이 장면에 내게 와서는 '우리 어머니 라자냐는 알아주지' 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영화랑 헷갈린건가..존과 사바나가
 
 
 















세상에 없는 이야기,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내가 쓰는 게 정답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는 캐릭터를 그간 읽으면서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캐릭터 역시 내가 만드는 게 답일 것이다. '앤 클리브스'는 그렇게 했다.



"나는 범죄소설 분야에서 강하고 그럴듯한 여주인공이 드물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현실적이고 진짜 살아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를 원했고 그래서 베라 스탠호프를 만들었습니다" -앤 클리브스




'베라'는 '나이 많고', '덩치 크고', '싱글인', '여자' 형사이다. 게다가 사건이 일어나면 그 안에 숨겨진 사연, 즉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호기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라 질문하게 되고 관심있게 듣게 되고 그리고,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추측해서 범인을 찾아내고자 한다. 게다가 먹는 것도 좋아하고 잘 먹는다. 이 책, 《하버 스트리트》에서 시간적 배경이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사건이 끝나고 집에 돌아고 혼자 즐겨야 하지만, 뭐, 익숙한 일이고 괜찮다. 덩치 크고 나이 많고 싱글이면서 잘 먹고 마시는 여자 형사인 거 너무 좋아서 혼자 막 이 캐릭터에 누가 어울릴까 생각해 봤는데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물론 이미 영국에서는 드라마로 만들어졌다지만.



여자 작가가 쓰는 이야기가 좋은 점은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성매수 돌려까기도 짚고 넘어갈 수 있겠다. 자신의 성매수 이야기를 고백하던 단역 등장인물이, 이런 고백을 한다.



"난 젊고 서툴렀고, 그녀는 연상이고 경험이 많았으니까요. 친절했어요.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는 자극도 있었습니다. 난 아무에게도, 전화번호를 알려준 친구에게조차 그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비밀이라는 게 좋았고, 전날 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 채 다음 날 책임감 있는 점잖으 교사로 학교에 나가는 게 좋았습니다." (p.231)



그렇다. 다음 날 책임감 있는 교사로 학교에 돌아오는 남자.. 책임감, 교사, 남자, 그리고 성매수... 예.......



아, 그렇지만 내가 지금 그 얘기를 하려는 건 나이고.



자, 이 책에는 살해당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에게는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 이야기도 있었다. 그녀의 젊은 시절 결혼했다 2년 지나 이혼한 이야기. 그녀가 남편과 단단히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남편은 바람펴서 헤어졌고, 그러나 그녀는 평생 그를 기다렸다는...


사랑 뭘까?

기다림 뭘까?




"마가렛 크루코스키. 폴란드 이름인가요?"

"네. 하지만 마가렛은 폴란드계가 아니에요. 동북부 출신, 번듯한 뉴캐슬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어렸을 때 폴란드 선원과 결혼했죠. 부모님은 노발대발했지만, 60년대였고 마가렛 말로는 아주 잘생긴 망명자여서 더욱 낭만적이었다고 했어요."

"그는 어떻게 됐습니까?" 베라는 피해자가, 그녀의 복잡미묘한 성격이 벌써 마음에 들었다. 조는 마가렛이 마들보다 고스포스 주민 같은 분위기였다고 했지만, 폴란드 망명자와 결혼해서 지저분한 셋방 신세가 된 노년. 그런데도 외모를 꾸몄다. 부츠와 빨간 립스틱으로 세련되게. 억만금을 들였을 긴 코트.

"남자는 고작 두어 해 뒤 떠났어요. 마가렛보다 돈이 많은 여자와 눈이 맞았죠. 가슴이 찢어졌지만, 자존심 때뭉네 부모님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고 했어요. 그녀는 회계 교육을 받고 이런저런 회사에서 일했어요. 내가 처음 알게 됐을 때는 이미 은퇴한 뒤였죠. 혹은 정리해고를 당했거나." 케이트는 다시 미소지었다. "숫자에 정말 밝아서 덕분에 몇 번이나 세무서를 피할 수 있었죠."

"그런데 남편의 이름을 계속 썼어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튀는 외국 이름, 멋에 대한 동경, 품위와 위엄을 지닌 독신 여성.

"늘 그를 사랑했다고 했어요. 말씀드렸듯, 항상 낭만적인 분이었죠." (p.29-30)




아.....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이였지만 감행했고, 잘생긴 망명자여서 더욱 낭만적이었다고 말했던 여자. 고작 두어해 뒤에, 그것도 다른 여자랑 산다고 떠난 남자이건만, 아아, 마가렛이여... 늘 그를 사랑했습니까. 사랑이 대체 뭐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래요, 어떻게... 그 어린 시절 그런 결혼을 하고, 그리고 지금 노년이 되어 살해당할 때까지 당신은 결혼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돌아오길 바란겁니까? 돌아오진 않더라도 내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삶을 버텨온 겁니까?




자, 이 슬픈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차라리 몰랐다면 모를까. 아아, 형사들이 추적하고 추적해 남편의 소식을 알아낸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그 남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는 크라코프에서 학생과 노동자에게 영국 여행을 주선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폴란드 여자와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고 다섯 손자가 있더군요."

.

.

.

"이야기를 해봤어요. 영어를 잘 하더군요. 그는 1970년에 폴란드를 떠났어요. 마가렛이 부자인 줄 알고 결혼했고요. 그녀에게 자기 재산이 없다는 걸 알고 혹시 부모가 누그러들어서 딸 부부를 가족의 품 안으로 맞아줄까 싶어 2년 기다렸는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고향으로 도망갔어요." (p.342)




아아, 마가렛이여, 마가렛이여. 당신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를 사랑했는데, 그는 당신의 돈을 보고 결혼한거였어요. 그 돈이 자기 돈이 될 줄 알았던거죠. 그나마 2년간 결혼 생활 유지한 것도, 혹시 모를 돈.. 때문이었습니다 ㅠㅠ



야 이 개새끼야...우리 마가렛 어떡하냐 ㅠㅠ 너를 평생 사랑한 우리 마가렛 어떡해 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너무 슬프다. 매우 슬프다.

'늘 그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나만의 사랑이라는 것이 슬프다. 상대는 돈 많은 줄 알고 나를 택했고, 내가 돈이 없어 보여 나를 떠났다. 만약 내가 돈이 많았다면 그는 내 옆에 잇었을까. 그러나 그렇다면, 그렇게 그를 붙잡아 두는 건 나에게 행복이었을까. 돈 때문에 날 선택한 놈이라면 내 옆에 있지 않는 것이 더 나았겠지만, 그러나 아아, 나는 그를 사랑했는 걸. 마가렛, 마가렛 ㅠㅠ 늘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다른 여자랑 살면서 아이를 낳고 손주까지 본 할아버지가 되었어, 게다가 나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돈 많은 줄 알고 결혼했는데 없더라구~~' 이렇게 말해. 아아. 슬픔의 새드니스. 개새끼 오브 개새끼. 나는 사랑인데 너는 돈이라니. 아아, 그런 식으로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돈이 없었던 나는 그렇다면 다행인 것인가.. 돈, 그게 뭐니. 머니가 도대체 머니 그게 뭔데 이리도 사람을 잡니.



머니

.

.

.

.




사랑인걸~ 사랑인걸~ 지워봐도 사랑인걸 ~ 아무리 비워내도 내 안에는 너만 살아~ ♩♪♬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너도 폴란드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 셋 낳고 살고 있니... 아아, 마가렛이여.... Orz

그를 사랑했고, 그러나 결혼후 2년뒤에 헤어지고는 만나지도 못한채 평생을 살았는데, 살해당했다. 삶 뭐지... 삶이 과연 아름답기는 한건가. 너무 부질없고 너무 슬픈 거 아닌가... 왜 누군가에겐 이렇게 비극적인 끝맺음이 오는거지? 게다가 그녀는 나름 잘 살아보고자 했던 사람인데. 왜, 왜.... ㅠㅠ









베라 이야기가 최근에 한 편 더 나왔다고 한다.


















이것도 읽어봐야지.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막 그렇다.




오늘 아침에는 불닭라볶이를 끓여먹고 왔다. 2인분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딱히 2인분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뭐랄까. 그간 부족했던 라면 1인분에, '그동안 부족한 거 다 알아, 조금 더 넣어줄게, 이젠 됐을거야'의 느낌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그렇다. 다 먹었단 얘기다. 아무튼 아침에 불닭라볶이 2인분(한 봉지가 2인분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을 다 먹고는, 흐음, 아침부터 너무 자극자극 해줬나, 달래주자 싶어서 출근 길에 캬라멜마끼아또를 사왔다. 그것도 다먹었다. 으이쿠, 이런.



그리고 오늘도 장바구니 넣었다 뺐다 놀이..를 해본다. 아니 에르노 신간 나온거 여러분 알고 있었어요? (그렁그렁)


















그녀는 언제나 남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그녀의 문제 중 하나였다. 로비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대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어쩌면 모든 일이 더 잘 풀렸을지도 모른다.- P81

˝내가 돌봐주겠다고 했소. 필요한 건 뭐든지.˝ 그는 거의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몇 가지 정리할 문제가 있다고 하더군. 바로잡을 일이. ‘그 문제를 당신이 좀 도와줬으면 해요, 말콤.‘ 이렇게 말했소.˝ 커는 미소지었다. ˝물론 난 그녀가 아프다는 게 싫었지만, 그녀가 날 다시 자기 인생에 끌어들여 주는 것이 좋았소. 오래가지 않았더라도, 어떤 면에서는 함께한다고 할 수 있으니까.˝- P16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21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5-21 13:55   좋아요 0 | URL
오케오케 접수접수 감사요! ㅋㅋㅋㅋㅋ
 
여자는 인질이다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민학교 시절, 해마다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가 있었다. 과학 서적 읽고 글쓰는 대회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있었고. 나는 과학상상화 그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도 내가 그리는 거라고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뿐이었다. 태양을 그리거나 지구를 그리고 옆에 날개 달린 자동차를 그리는 것. 나는 그것말고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적부터 나는, 스스로 상상력이 아주 부족한, 거의 전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삼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와 같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서 만났다.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는 상상력이 전무해'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그때 내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나는 너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내가, 상상력이라고?


친구의 말은 그랬다. 너처럼 책 한 권을 읽고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그려보려 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도 친구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상상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다른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노력이야말로 상상력이라고. 나는 그것을 그저 공감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에게 상상력이라는 것이 있는거구나, 생각했다. 그간 내가 생각해온 상상력이란 것은,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나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아예 내게 존재하지도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아, 내게도 상상력이 있는 거였어, 맞아, 그것은 상상력이지! 라고 생각했던 십 년전의 시절이 있었다면, 이 책, '디 그레이엄'의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고, 상상력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됐다.



여러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상황과 '다른' 상황을, '다른' 사람을, '다른' 순간을, '다른' 장소를!




디 그레이엄과 공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현재 이성애를 대부분 하고 있고, 여성성을 갖추려하고, 남성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는 상황들이 건강하거나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임을 반복해 드러내준다. 은행강도였던 인질범과 인질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만약 남자들로부터 생존위협을 당하는 게 아니었다면, 폭력과 강간에 노출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남자를 사랑하고, 아름답기 위해 애를 썼을까? 라는 질문을 반복해 던진다.


물론 지배와 피지배로 이루어지지 않은 수평적 사회라고 해도 우리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협이 없는 세상에서의 이성애는 그 전의 이성애와는 다를 것이다. 디 그레이엄과 공저자는 여러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이 논리적이고 똑똑한 문제 제기 앞에 어느것 하나 허투루 쓰여지질 않았다. 모든 면에서 디 그레이엄이 초기에 경고한 문구는 정확했다. 바로 그대로였다.



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이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자기 만족이라며 꾸밈 노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과연 자기 만족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이 이념적, 물리적으로 고립되는 것,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현상. 이 모든 심각한 문제들과 원인들에 대해 잔인하게 쑤셔놓고, 그런데 디 그레이엄은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답으로, 놀랍게도,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를 방법으로 내놓는다.


뭐라고?

뭐라는거야?

지금 한낱 소설읽기를 대안으로 내놓는거야?



나는 이 생뚱맞은 방법에 대해 당황스러워졌다. 이렇게 논리적이고 똑똑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책에서 갑자기 SF 소설 읽기가 왜나와?


그러나 여기서 바로 '상상력' 이 출현한다.



상상력과 용기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굳세게 사회적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해준다. (P.349)



디 그레이엄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허랜드 Herland》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들을 통해 그 안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녀들 스스로를 어떻게 지키는지에 대해 얘기해준다.



루스(팁트리 단편의 주인공)는 남성 폭력을 무시하지도 면죄부를 주지도 않는다. 본인의 인식만을 문제 삼지도 않고, 일이 잘못됐을 때 본인의 행동만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도 책임감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p.353)



길먼과 티트리의 작품에서 여자 등장인물들은 근거 없이 남자를 깎아 내리지도, 그렇다고 용납해서는 안 되는 남자의 행동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행동의 책임을 묻는다. 그렇기에 자신이 남자에게 느끼는 공포를 인정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자아 성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본인을 믿기에 적절한 순간에 타인을 불신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불신 덕분에 무력하게 변화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힘을 보탤 수 있게 된다. (p.354)



이밖에도 다른 소설들을 가져오며 우리가 분노할 수 있어야 하며, 공감하고 모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우리가 이런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있고, 상상할 수 있어야 거기까지 갈 힘도 생긴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거나 생뚱맞은 게 아니라, 당연히 밟아나가야 할 수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SF 소설을 읽고 지금과는 '다른' 것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이 이 책의 저자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의 편이 되어주어야 하고, 자신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비전을 갖고, 여성들끼리 모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돌보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알고 인식하고 반항하고 있으니까.



이 책에서 공저자가 내놓는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이 각자 깨달으며 서로 응원하는 방법들이기도 했다. 자, 우리 이렇게 하자,  이야기했던 방법들이 모두 디 그레이엄의 책 속에 있었다.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나는 어떻게 견뎌내고 또 탈출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이런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책과 이 책에서 언급됐던 《시녀이야기》까지. SNS 를 통해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추천해주었던 책들의 목록이다.



고립된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도 허다하겠지만, 아주 많은 여자들이 이제는 알고 있다. 알고 있고, 방법을 찾으려하고, 찾아낸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렇게 앞으로 가고 있다. 더 열심히 읽고 쓰고 더 열심히 잘 먹고 잘 살아서 나 역시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



오타가 많아 좀 거슬리긴 했다. '있다'를 '없다'로 오타내거나 '인질'을 '인질범'으로 오타를 내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표시를 해두지 않아 페이지를 적을 순 없는데, 이 책은 다시 한번 검토해 오타들을 좀 찾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책의 내용 자체로는 그동안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도서 중 가장 좋았다. 가장 후벼팠으며 가장 냉정하고 또 냉철한 책이었다. 완벽한 책이고, 그래서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책이다. 스티키 북마크를 엄청 붙였고, 무지개 색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책 한 권에 전부 밑줄 긋고 싶었다. 책장을 덮으며 분노와 의욕을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몇 번이나 거듭 다짐하게 되었다.


상상하자.

상상할 수 있어야 행동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어야 그곳에 닿을 수 있다.










모든 여자에게는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모든 여자가 단체에 가입해 본인이 겪는 문제를 토로하다가, 그게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깨닫고 나면 왜 모든 여자가 같은 특정 문제를 겪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고, 우리 문제의 근원인 사회의 여남 구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여자들끼리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정치화하며, 우리가 여자의 시각을 개발해 이념적 고립에서 탈피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여자의 시각이란 여자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자가 처한 상황의 분석에서 가지를 뻗는 시각이다. 그리고 이 시각이 우리가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이념의 재료다.- P204

여자가 본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이론이자 사회적 운동인 페미니즘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고립을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를 인질로 삼은 남자들의 시각만 접하도록 구조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여자가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두려워한다는 건 우리의 인권 투쟁을 남자들이 성공적으로 막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자로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남성 지배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204

여자라는 집단이 처한 상황은 머리에 총구를 겨눈 인질범에게 ˝도망치려고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는 인질과 유사하다. 인질에게 어떤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인질범을 통해 얻은 힘이다. 대리로 경험하는 힘이자, 인질범이 인질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힘이다. (˝잘만 하면 죽이지는 않겠어.˝ ˝말을 잘 들으면 오늘 밤엔 의자에 앉아서 자는 대신 바닥에 누워서 자게 해주지.˝) 이런 상황에서, 여자(인질)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은 단기적으로 볼 때 남자(인질범)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인질범)가 여자(인질)에게 폭력을 가할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고, 남자(인질범)가 보기에 ‘착한 행동‘을 하면 상을 받기도 한다.- P206

심리 치료사인 캐럴린 코워치Carolyn Kowatch에 따르면 남편이 크로스 드레서나 트랜스섹슈얼인 여자들이 와서 남편은 겁이 없어서 밤에 여자 옷을 입고 나갈 때도 전혀 조심하지 않는다고 호소할 때가 많다고 한다. 즉 남자는 남자로 자라왔기 때문에 여자로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여자처럼 차려입더라도 겁을 내지도 않고, 밤에 혼자 길거리를 걷지 않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 P223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유대감은 결코 건강한 사랑일 수 없다. 유대감을 조장하는 환경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가 공포 상황에 부닥쳐 자기 감각을 마비시키려는 환경에서 유대감이 생기는 만큼, 유대감은 중독적인 성격을 띤다. 여자가 절박하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주제는 5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건강한 사랑은 이렇게 절박한 성격을 띠지 않는다. - P239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나 ‘사랑 앞에 장사 없다‘ 같이 흔히 쓰이는 말에서는 여자가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런 문구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여자가 사랑과 영향력을 발휘해 남자를 길들일 수 있다면, 어떤 폭력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관계에 생기는 모든 문제는 여자의 잘못이 된다. 다 야만적인 파트너를 길들이는 기술이 부족했던 여자의 탓이다. 파트너에게 지속해서 맞고 살아온 여자들의 수기를 볼 때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 P241

여자는 화를 내면 개인 간 관계가 망가지거나 파탄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런 대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P255

여자는 절박하다. 남자의 친절을 붙들어 매야만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어떨 때 남자가 행복한지, 슬픈지, 화를 내는지, 우울한지, 만족스러워하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남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행태에 깃든 뉘앙스 하나하나를 해독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여자는 남자보다 대화 상대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루빈의 논문은 여자는 상대를 쳐다보면서 ˝우리가 적절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남성 파트너에게서 신호를 감지한다˝고 추측한다. 모든 나이대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를 해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여러 실험 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여자는 다른 여자의 감정과 생각보다 남장의 감정과 생각에 특히 예민하다.- P263

우리는 남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성격을 바꿀 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도 바꾼다. 여자가 그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도 성격적 변화보다는 신체적 변화일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신체를 얻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노력을 하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 우리는 식이를 조절하고, 운동하며, 변비약을 먹어 장을 비운다. 피부를 보기 좋게 태우기 위해 일광욕을 하거나 태닝 부스에 눕고, (항상 성적 흥분 상태인 것처럼 보이도록)화장을 하고, 눈썹을 뽑으며, 머리에 헤어롤을 만 채 잠자리에 든다. 코 수술을 받고, 가슴 확대 기구를 쓰고, 가슴 축소/확대 수술을 하거나 왁싱을 하거나 영구 제모 시술을 받고, 매직이나 파마를 하고, 머리를 고데기로 만다. 향수를 뿌리고, ‘여성청결제‘를 사용한다. 손톱을 칠하고, 젤로 연장하고, 인조손톱을 붙인다. 귀를 뚫고 코에 피어싱을 하며, 안경을 쓰지 않고 렌즈를 낀다. - P264

얼굴에 팩하고, 인조 속눈썹을 붙인다. 보정 속옷과 브래지어를 입고, 장신구를 걸치며, 하이힐을 신고, 갑갑한 옷을 입는다.
남자가 위의 행위를 하는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남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우리 몸을 바꾸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여자의 의지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P264

남자에게 매력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 신체 변형까지 감수하는 현상은 네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⑴ 여자는 남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⑵ 여자는 남자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⑶ 여자는 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⑷ 여자는 ‘있는 그대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로는)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을 받을 수 없다고 느낀다.- P265

여자는 남자보다 능력이 뛰어날 때조차 본인을 낮추고, 남자를 띄워주고, 본인의 성취를 입도 뻥긋하지 않으면서 남자의 기를 세워준다. 위기를 느끼는 남자야말로 여자에겐 위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266

여자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공한 남자보다 우리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 우리의 성공을 실력이 아닌 운 때문으로 돌리는 경향도 남자보다 강하다. 남자는 좀만 하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미치도록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276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여자가 일을 더 잘했는데도, 놀랍게도 본인의 업무 수행에 매긴 점수는 여자나 남자나 비슷했다. 여자의 노동이 남자의 노동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남성 문화적 시각을 여자가 체화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결과다. 여자의 자존감이 하락한 상태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P277

롤런드의 책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여자는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자와는 달리 개인으로서의 삶과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남자와 관계 맺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자는 대부분 남성 파트너가 없는 시기를 지날 때 공허한 감정이 든다고 토로한다. 이 공허함의 깊이가 바로 여자가 자아감을 잃어버린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P278

현재 시점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여남이 평등한 관계를 맺고 여자가 안전한 상황에서의 여성 심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P295

남자는 여자와 ‘떡 치는‘ 행위를 여자를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행위, 즉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의 본래 목적에 맞게 여자를 사용하는 행위로 여긴다. ‘떡 쳐진‘ 여자는 ‘값싼‘ 여자가 되어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남자는 더 마초 같고 강력해진다. 이성애 성관계가 남자를 남자로, 여자를 여자로 만든다고 여겨지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다시 말해 성관계를 정의할 권력도, 실행할 권력도 남자에게 있으며, 그 결과 성관계는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의되고 실시된다. 가해자에게 유대감이 샘솟을 가능성이 가장 큰 순간은 여성 종속과 남성 지배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본질적인 순간, 즉 이성애 행위를 할 때라는 것이 공저자로서 우리의 주장이다.- P333

가부장제는 여자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도록 남성 폭력이나 경제적 제약 등 장애물을 세워 여자가 의존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한다. 여자가 원래 의존적으로 태어났다면 우리가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온갖 장애물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믿어서는 안 되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는 남자가 선의를 발휘해 ‘우리에게 권리를 부여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여자가 자랑스럽게 내 남편은 이런 일(예를 들어 직장 출근)도 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건 남편이 본인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남편이 언제든 직장 출근을 그만두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 P355

피해자가 된 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우리의 억압 상태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우리의 책임이다. - P35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9-05-2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좋은 친구들 두셨네요. ㅎㅎ
이 포스팅 읽으면서 갑자기 이 책이 제시한 책 결말에 저도 ‘응?‘ 스러웠지만 곧 이해가 되는군요.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군요.

다락방 2019-05-20 17: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깜짝 놀라고 당황했었어요. 책의 내용이 어마어마한데 고작 소설읽기다 답이란 말이야? 라고 말이지요.물론 소설읽기만 답으로 내놓은건 아닙니다만.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어요. 갇혀있고 닫혀있어서 상상이 불가하면 한걸음 내딛기도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어떻게 닿을 시도를 하겠습니까. 불끈, 하고 뭔가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책 더 많이 읽어야겠어요!

단발머리 2019-05-2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자의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라는 해결책 또는 대안에 처음에는 그런가? 했지만,
점점 그 방법, ‘읽기‘라는 혁명적 방법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2년생 김지영>라는 밋밋한 소설이 우리의 현실과 현재를 강타했던 경험도 생각났구요.
페미니즘 소설 모음집 <혁명하는 여자들>의 ‘늑대여자‘도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저도 다락방님책과 비슷한 모습의 책인증샷 얼른 올리고 싶네요.... ㅠㅠ

다락방 2019-05-20 17:59   좋아요 0 | URL
저는 그간 SF 소설을 거의 안읽었거든요. 그점에 있어서 참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책도 sns 를 통해 많이 추천 받았는데 한 권 사두고 안읽었고요. 이 책에서 언급됐던 단편들이 체체파리.. 그 책에 있다니까 그 책도 사서 얼른 읽어야겠다 싶었어요. 너무 멋진거에요. 연구하고 생각하고 논문을 쓰면서 결론으로 책을 읽어라, 여자들아, 하는거요. 그것도 소설! 그런데 그게 생각과 달리 생뚱맞지 않은 합리적 결론이라는 게 너무 좋아요!!

단발머리 님의 책 인증샷 기다리고 있을게요! 울지마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