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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이유없이 기분이 좋았다.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좋았는데, 인연이란 것은 아주 작은 우연들이 겹쳐서 만들어낸 것이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출근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강동역에 내렸는데,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역까지 걷는 그 순간,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노래가 나오고 있고, 작은 눈이 내리고 있고, 아직 어둡고, 바람이 부는데, 혼자 걷는 그 순간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그래서 혼자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좋네, 했다. 좋다. 지금의 기온과 지금의 어둠 지금의 노래 지금의 분위기, 좋네. 좋아라, 하면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출근길이 이렇게 좋을 수 있다니, 그것도 누가 뭔가를 해준 게 아니라 그냥 스스로 이렇게 좋다고 느끼다니, 진짜 좋네, 하면서 정말 좋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듣고 있던 노래는 슬픈 노래였지만!!












어제는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였는데, 우리가 본 지 한 일 년 됐던가...  친구와 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했는데, 그중에는 시차에 관한 것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시차가 많이 나는 곳에 떨어져 지내고 있다면 그 관계가 유지되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얘기.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네, 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래. 사랑하는 마음으로 잠을 덜자고 연락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그렇게 자기 생활패턴을 깨면서 상대를 챙길 순 없는 노릇일거야, 같은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자, 김행숙의 시도 생각 났고.


 















당신이 지진이라면



여보세요,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이 나는 두려워요. 당신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 먼 곳에서 지진이란 무엇일까요? 호숫가의 오리들도 놀라지 않아요. 나는 낮잠을 깨지 않아요.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가요. 나의 낮잠은 비뚤어진 입을 틀어막고 한량없이 귀가 커져요. 펄럭이는 귀는 검은 밤에 젖어요. 귀가 커다래지니까 이곳이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알겠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옛날 전화기를 들고 있다면 검은 전화선을 따라 수억 개의 지붕 위를 건너 텔레파시의 화신처럼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옛날 연인들은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거나 목에 감았어요. 주술 같은 것이었어요. 허공을 만지는 일도 그런 걸까요? 허공에 대해 공부했다는 한의사는 내게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밥을 먹고 그리고 허공을 자꾸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했어요. 침을 맞으라고 했어요.



나의 아침에 당신은 저녁 8시예요. 당신의 새벽에 나는 오후 2시예요. 먼 곳, 먼 곳, 먼 곳을 향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오후 2시에 나는 또 손이 저려요. 오후 3시에 침을 맞아요. 식전 30분에 나는 한약을 먹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시차가 있는 곳에 있던 남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차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나의 저녁이 그의 저녁이었고 그의 아침이 나의 아침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에게 밤이 찾아오면 내게도 밤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그때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자고 당신은 고작 시차가 한 시간인 곳에 있었을까, 그랬으므로 내가 부를 때 응답이 가능하지 않았나,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 세상 모두가, 누구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에 있어서, 작은 우연들이 겹쳐져 생겨난 것이겠지만, 어제 먼 데서 온 친구를 만나고는 이 생각을 오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하게 된 거다. 그리고, 정말이지 '왜 하필, 여기서, 너였을까' 라는 문장을 담아낸, 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이 생각났다.



"행방불명 장병의 아내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운명의 장난이었다면, 왜 그게 꼭 당신 같은 모습의 여자여야 했을까? 왜 당신이어야 했을까?" (p.118)

















아, 진짜 너무 좋다.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그냥 막 좋다. 오늘이 너무 좋다. 금요일이라서 좋은건지, 아침에 가볍게 내리는 눈이 좋았던건지, 볼에 닿는 바람이 좋았던건지, 아침 출근길의 그 완벽함, 그 좋음이, 계속 내게 남아있다. 좋다. 




어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집 현관문이 안열린다. 안에서 아예 잠가버린 것. 얼라리여? 그래서 나는 이걸 잠갔을 남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화장실도 급한데 제기랄...그런데 남동생이 전화를 안받는다. 아이쿠야..나는 이제 어쩌나... 그래서 망설이다 이미 잠들어있을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아빠는 전날 밤을 새셔 일하셨고, 또 다음날 새벽에 일을 나가시므로 일찍 주무시는데, 이렇게 한참 주무실 시간에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집에 들어가야 하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추측하기론, 남동생이 내가 들어온 줄 알고 문을 잠그고 술취해 기절했나보다.. 했더랬다. 벨이 여러번 울려 아빠가 전화를 받았고, 아빠 문 좀 열어줘... 라고 해서 아빠가 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들어가서는 너무 다행이다 싶어, 아빠 문 열어줘서 고마워, 라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야, 그러면 내 딸인데 문을 왜 안열어주냐, 당연히 열어줘야지.



아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이쉐키는 뭐해!! 하고 버럭대자, 샤워중이라고 한다. 곧 남동생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 멀쩡한 남동생이 나와서는, 아 잠근 줄 몰랐다 진짜 미안해, 라고 하더라. 이쉐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화장실 가고 싶어서 미칠뻔 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화장실로 뛰어갔다 ㅋㅋㅋㅋㅋㅋㅋ사실 저거보다 더 노골적이고 극한 표현을 했지만, 이미지 관리라는 게 있으니까 이정도로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샤워 후에 텔레비젼 보는 남동생 옆에 앉았다가 잠깐 남동생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남동생은 술주정 하지말고 들어가서 자라고 나를 구박했지만,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사랑하는 존재의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게 너무 좋았다. 또 좋네... 했다. 

어제도 친구에게 얘기했지만, 이런 강한 사랑과 신뢰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이다. 완전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 곁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은,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다. 평소에 나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진 않지만, '언제나 내 편일거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든든하게 한다. 



오늘과 내일의 약속이 다 취소되어버려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잉? 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집에 혼자 가서 보낼 시간을 생각하니 막 씐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란 인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고보면 내가 신나는 건, 누가 나를 신나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혼자 알아서 신나는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금요일이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자정엔 키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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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양배추 2016-12-2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오늘은 정말 저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것 같네요 ㅋㅋ

1시간의 시차가 나는 곳에 소중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원래 홈타운은 훨씬 더 먼 곳이지만, 감사하게도 저와 1시간 차이만 나는 곳에 있네요.

그의 밤이 나의 밤이고, 그의 아침이 나의 아침이라는 말이 절절히 감사했습니다.

저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물론 제일 좋겠지만, 이렇게 함께 일어나고 잠드는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오늘 싸리눈도 오고 몹시 춥던데ㅜ 좋은하루 보내세요!

다락방 2016-12-23 09:41   좋아요 0 | URL
아, 사각양배추님!! 그러시군요. 한 시간 시차가 나는 곳에 소중한 사람이 살고 있다니. 아, 정말 남 얘기가 아니네요. 그의 밤이 나의 밤이라는 거, 정말 좋지요?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좋겠지만, 그 먼 데 있어도 같은 밤을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다행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자체로 좋고요. 멀리 있지만 또 같이 있는 느낌.

사각양배추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 지금의 그 소중한 마음을 뜨겁게 유지하시길 바랄게요. 응원합니다!
:)

Forgettable. 2016-12-2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수다로 이런 저런 책을 생각해내는 것도 참 능력이네 능력 ㅋㅋ 나는 치매라 ㅠㅠ

다락방 2016-12-23 13:5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ㅋㅋㅋㅋ 나도 참 능력자인듯? ㅋㅋㅋㅋㅋ

Forgettable. 2016-12-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유없이 기분 좋은게 아님 ㅋㅋㅋㅋㅋㅋㅋ 이유가 왜 없어요? 좋은 사람 많나서 에너지 팡팡 받아서 그런 것 같은데 딱 보니깐..

다락방 2016-12-23 14:33   좋아요 0 | URL
아 이게 그런거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사람 만나서 에너지 팡팡 받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몸은 좀 어때요? 아 유 오케이?

서니데이 2016-12-23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다락방 2016-12-26 07:5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크리스마스 끝나고 출근했습니다 ㅠㅠ
서니데이님, 남은 올 한 해도 잘 마무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재는재로 2016-12-23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크리스마스되세요 서재의달인 축하해요

다락방 2016-12-26 07: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미 지났지만, 재는재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6-12-24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6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 -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의 장편 에세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박정자 옮김 / 꾸리에 / 201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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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에 완전히 무지한데 이 책에 철학용어가 계속 등장해서, 몇 개 안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이해하기가 벅찼다. 네이버 검색창 띄워놓고 용어 검색하면서 읽었지만, 그럼에도 다 따라잡기에는 역부족. 오늘 아침에 친구에게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주려는데, 나 자체가 백프로 이해를 못해놓으니 친구에게 명징하게 설명을 할 수가 없더라. 약간 뜬구름 잡는 식으로 이해하고 또 맥락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지만, 그 정도 이해로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힘들다. 내가 완전히 이해해야 상대에게 설명을 잘 할 수 있는데! 책의 끝에 옮긴이의 용어 해설이 친절하게 나오지만, 용어 해설도 쉽지가 않아...


어렵게 읽어내고 어휴, 다 읽었네, 하고는 저리 치워놨는데, 오늘 친구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내가 좀 답답해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책들을 좀 더 읽어본 후에 다시 읽어 봐야겠다. 

그러나 고착되어 있는 순간은 결코 새롭지 않다.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순간은 새로워진다. 바로 지금 출현한 형태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배경이 뚜렷하고 분명해야만 자신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무 그늘의 시원함이 귀중한 것은 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대낮의 길가에서이다. 휴식은 고된 일과를 마친 뒤의 편안한 긴장 이완이다. 작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내가 돌아다녔던 길을 바라본다. 내 성취감의 기쁨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길 전체이다. 이 휴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보해이다. 그리고 이 한 잔의 물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갈증이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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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12-2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용어는 잘 모르신다 하셔도 자유롭게 생각을 적고 펼치는 능력은 단연 뛰어나신 듯 합니다. 저는 통통 튀는 글쓰기 능력이 부럽습니다.

다락방 2016-12-22 13:57   좋아요 0 | URL
오, 지친 목요일의 깨알칭찬 감사합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철학 서적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천천히요.

사각양배추 2016-12-2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학적, 인문학적 용어와 친하지 않아서, 네이버의 도움을 받으면서 봐요. 기초지식?을 조금이라고 쌓으려고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을 한두 꼭지씩 봅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책이라면, 추천!^^

다락방 2016-12-22 14:05   좋아요 0 | URL
우와- 전 이런 게 있는줄도 몰랐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아주 좋을 것 같아요. 게다가 평들도 좋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
 















션자이는 전교 1등의 학생이자 동시에 모든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인기인이다. 커징텅을 비롯한 반 남자아이들이 모두 션자이를 좋아한다. 늘 머리를 풀고 다니던 션쟈이가 머리를 묶고 왔을 때, 남자아이들 모두 그 빛나는 외모에 넋을 잃는다. 공부를 잘하는 남자아이도, 말썽장이 남자 아이도, 유치한 남자아이도 모두 션자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션자이는 어쩐일인지 공부를 못하고 유치한 커징텅에게 관심이 쏠리고, 너는 왜그렇게 공부를 안하는 거냐며 커징텅의 공부를 봐준다. 덕분에 커징텅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갈 수 있게 된다. '네가 나를 성적으로 앞서면 내가 니 소원을 들어주고, 내가 너를 앞서면 너는 머리를 묶고 와라' 고 약속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당연히 션자이가 이겼지만, 션자이는 머리를 묶고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션자이 머리 묶은 모습을 보고 다른 남자아이들 모두 넋을 잃었을 그 때, 거기, 머리를 묶어주길 바랐던 커징텅이 더 특별한 마음으로 션자이를 본다. 어? 자기가 이겨놓고도 왜 머리를 묶고 왔지?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없는 이 비밀스런 일이 그들 사이에 생긴다.



그렇게 이들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같이 바다에 놀러갔는데, 그때 공부를 잘하는 남자 아이 하나가 션자이에게 묻는다.


-너는 유치한 거 싫어하지?

-응.

-우리중에서 누가 제일 유치해?

-커징텅.



평소 '유치해'를 비난조로 사용했던 션자이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저 대화를 듣는다면 아마도 '션자이는 커징텅을 싫어한다'고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싫어하는 유치함을 잔뜩 가진 커징텅을, 션자이는 좋아하고 있다.



저 장면을 보다가 몇 해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막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있었다. 연애인지 아닌지 헷갈릴 무렵이었는데, 어쨌든 나는 가슴속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었더랬다. 그 와중에 그 전에 헤어진 전남친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전남친은 내게 '요즘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었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라고 물었고, 나는, '잘난척을 잘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의 헤어진 전남친은,


"너 잘난척 하는 남자 정말 싫다고 했잖아!"


라며 다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더라. 어? 내가 그랬던가? 나는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갸웃했는데, 전남친이 연달아 말했다. 내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 잘난척을 일삼는 남자를 보며 싫다고 했다고... 아... 내가 그랬었지....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잘난척 한다고 말하고 있는..............


나는 잘난척하는 남자가 싫다고 하면서 지구에서 가장 잘난척을 잘하는 한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션자이는 유치한 거 정말 싫다고 하면서 가장 유치한 커징텅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 좋아함이란 무엇인가...좋다는 건 뭔가........ 갑자기 그 생각도 난다. 그러니까 한 십오년도 넘은 일인데, 내가 이십대 중반이었을 때 삼십대 중반의 결혼한 언니가 그런 얘길 했었다. '내 남편은 모델처럼 날씬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평생 바라왔고, 뚱뚱한 여자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랑 결혼했어' 라고. 아.... 좋아함이란 무엇인가... 그 말을 하던 언니는 덩치가 꽤 큰 여자사람이었던 거다. 인생은 무엇인가. 고등학교 때 우리반에서 똑똑하기로 이름을 날린 아이가 수업시간에 무슨 발표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에이포용지 열 장을 채울 수 있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중에 하나도 매치가 안될 수가 있다'고. 크- 고등학생 때 이런 사실을 깨닫다니, 너무나 현명하지 않은가! 그래. 내가 어떤 타입을 좋다고 말하고 또 어떤 타입을 싫다고 말하는 건,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 다 무너지고 만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의 션자이...(응?). 션자이, 당신은 유치한 남자가 싫지만 유치한 커징텅을 좋아하고, 나는 잘난척 하는 남자가 싫지만 잘난척하는 이 남자를 좋아했어요. 당신은 대만의 다락방, 나는 한국의 션자이.... =3=3=3=3=3=3=3=3=3=3=3=3=3=3=3




커징텅은 고등학생인데도 집에서 홀딱 벗고 다닌다. 내가 진짜 깜짝 놀란 장면인데, 커징텅의 아빠도 벗고 다닌단다. 그런데, 엄마는 옷을 다 입고 다닌다. 이건..뭐여..... 커징텅도 커징텅의 아빠도 엄마가 '옷 좀 입고 다니라' 하는데도 그냥 다녔는데, 만약 커징텅의 엄마가 홀딱 벗고 다녔다면 뭐라 했을까. '우리도 벗고 다니니 당신도 벗고 다녀.' 라고 했을까?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그 장면을 보면서 했다.






커징텅은 자신이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션자이 앞에서는 거절당할까 두려워한다.





크- 몇 번 언급했었는데, 예전에 정일우가 나오는 시트콤에서, 정일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인 서민정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선생님은 왜이렇게 저한테 힘이 세죠?


물리적인 힘이야 정일우가 더 셌고 또 시트콤의 설정은 정일우가 싸움도 잘하는 거였다. 그런데 좋아하는 서민정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 되고야 만다.


커징텅은 그래서 두렵다.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지만, 션자이로부터 대답을 듣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대답을 듣고 나면 이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자기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고서는, '이건 묻는 게 아니니까 대답하지 말라'고 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커서 말은 해야겠고,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이 관계를 끝내기는 싫고. 만약 너를 좋아해, 라는 고백 앞에 '난 아니야' 를 듣는다거나,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 라는 걸 듣는다면, 그걸 알게된 이상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거니까. 아아, 커징텅, 그때의 너는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웠니. 얼마나 자신의 약함을 실감했니.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이유로 그들은 헤어진다. 그렇게 2년이 지났는데, 션자이가 학교를 다니는 타이베이에 지진이 일어나고,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 너 괜찮아? 거기 여관도 무너졌다는데? 2년동안 연락도 없던 커징텅은, 2년 내내 션자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타이베이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션자이에게 전화를 하니까. 2년간 그들은 연락없이 지냈고, 네가 없는 사이에 나는 네 친구이자 내 친구인 누군가와 잠깐 사귀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헤어졌다고. 


-왜 헤어졌어?

-걘 날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야, 걔가 널 얼마나 좋아했다고.

-누구도 너만큼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





크- 이것은 정말이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오지 않을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아는' 일. 그리고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일.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수시로 불안감은 찾아온다. 이 사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사랑할까? 이 사람 혹시 나한테 정떨어진 건 아닐까? 이 사람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랑은 언젠가 끝나지 않을까? 사랑을 한다고 속삭이는 와중에도 불안함은 슥슥 고개를 내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너만큼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 라고 알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 얼마나 행운인가! 앞으로 션자이가 다른 누구를 만나고 또 사랑을 한다고 해도, 이런 경험 만큼은 가슴 속에 깊게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로부터 오래, 깊이 사랑받았다는 느낌.




별 거 아닌 일로 그들이 서로 등졌을 때, 그래서 그 비가 오는데 서로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싸우며 돌아섰을 때, 그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 운다. 커징텅이 너무 엉엉 울어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마음이 너무 찢어지게 아팠다. 헤어지고 우는 건 정말 너무 고통이야... 엉엉 우는 커징텅을 보는 것은 갑자기 나로 하여금 커징텅이 되게 했다. 아아, 나는 션자이가 되었다가 커징텅도 되었다가....


그 장면에서 [지붕뚫고 하이킥] 이란 오래된 시트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지막회였는데, 신세경과 신신애가 떠나던 날, 고작 여덟살인 정해리는, 이 이별이 서러워 운다. 그때 나도 같이 울었는데, 나는 이 아이가, 고작 여덟살인 이 아이가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너무 아파서, 그 눈물이 너무 아파서 같이 울었다. 이별은, 성인에게도 힘든데, 이 나이 먹은 나도 아직 이별에 엉엉 우는데, 여덟살 아이가 정든 친구와 헤어지게 된다는 걸 대체 어떻게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아, 쓰다가 또 눈물 날라 그러네 ㅠㅠ, 그 아이에게는 생애 처음 맞닥뜨릴 그 이별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 힘들고 아픈 걸 눈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같이 울었다. 아, 진짜 이별하고 우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고통이야...




션자이와 커징텅은 서로 좋아했고 또 친하게 지냈었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헤어진다.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등을 보인다. 션자이는 커징텅의 등을 보면서 거기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냥 그때 뛰어가서 와락 안았으면, 그러면 다시 커징텅이 돌아서서 함께 안아주었을지 모르는데, 그런데 션자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 쉬어라, 청춘들이여.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좀 쉬어라.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

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

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

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

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

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

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

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

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

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이라는 구절이 생각나서 이 시를 가져왔는데, 또 이 시를 다시 읽다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내가 쉬긴 쉬겠지만,

다른 여자랑 잠자지마...




아아, 그나저나 이 영화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인데, 내가 비극으로 만들어버렸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쓰다보니 나의 의식의 흐름은 이 영화를 비극으로 만들어버렸어..... 자꾸 커징텅 울던 장면 생각나서 그래 ㅠㅠ



이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봉관을 찾으려다가, 굿다운로더로 700원 밖에 안한다는 걸 알게됐다. 그래서 굿 다운로더로 봤다. 님들, 저의 패이버릿 《리틀 포레스트》는 굿다운로더 1,000원이고요, 이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굿 다운로더 700원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아, 《노팅힐》은 굿다운로더 소장 5,000원이지만, 소장가치 충분하니 같이 결제.......




아메리카노를 그란데 사이즈로 마시고 있는 수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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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12-21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의 고단함을 단숨에 날려주는 너무 너무 좋은 글이예요.
다락방님~~ 베리 땡큐 앤 굿모닝! *^^*

다락방 2016-12-21 09:30   좋아요 1 | URL
어머 별말씀을요! 단발머리님, 안녕?
단발머리님의 댓글은 언제나 좋아요. 하트 뿅뿅이에요! ♡

사각양배추 2016-12-21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션자이가 느꼈던 저 감정을 저도 느껴보고 싶네요. 인생의 수많은 인연 중에서... 너만큼 날 좋아해주는 사람은 없었어!
사랑은 하고 싶기도 하고,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기도 하고...뭐 그래도 항상 사랑에 빠지는 선택을 하지만... 그리고 고통스러워 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영화 아직 못 봤는데, 봐봐야겠어요. 저번에도 노팅힐 오랜만에 다시 보니 너무 좋더라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다락방 님!

다락방 2016-12-21 09:40   좋아요 1 | URL
그치요, 사각양배추님. 미국 소설을 읽다보니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보다 사랑을 잃고 아파하는 게 낫다‘라는 격언이 있다고 나오던데, 저 역시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한 후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말은 이렇지만 ㅠㅠ 정작 아플 당시에는 사랑이고 뭐고 다 꺼져버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죠. 이렇게 아픈데 이걸 내가 왜했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러면서 폭풍울음 울고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서 나현희 노래를 떠올리게 되죠.

다시 사랑하지 않을거야~ ♪


이 영화는 다소 유치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공감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아마도 사랑이란 것 자체가 유치하기 때문인가봐요.
사각양배추님도 오늘 하루 잘 보내셔야 합니다!!

캐모마일 2016-12-21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코 클릭했다가 결국 다 읽었어요.

다락방 2016-12-21 09:42   좋아요 1 | URL
‘무심코‘가 정말 무서운겁니다, 캐모마일님. ㅋㅋㅋㅋㅋ

캐모마일 2016-12-21 09:43   좋아요 1 | URL
뭔가 사랑에 관해서 아.....하고 알고 있었던 것들은 아련하고 몰랐던 것들은 신기하게 다가오네오. 덕분에 아침부터 좋은 글 읽은 기분입니다.

다락방 2016-12-21 09:46   좋아요 1 | URL
좋은 글 읽은 기분이라 하시니 다행이네요. 흣 :)

[그장소] 2016-12-2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하나에서 시트콤으로 현실로 , 시로 마구 통통 튀네요!^^

다락방 2016-12-21 14:00   좋아요 1 | URL
제가 글쓰는 타입이 뭔가 정해놓고 쓰는 게 아니라 의식의 흐름대로 쓰거든요. 그러다보니 저도 제가 뭘 쓸지를 몰라요 ㅎㅎ 제 글은 그래서 제 손이 쓰는 것 같아요. 저도 이 영화 얘기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글쓰기 눌렀는데, 겨울휴관으로 마무리 할 줄은 전혀 몰랐네요. 하하하하하

[그장소] 2016-12-21 18:31   좋아요 0 | URL
아~ 프로필 바뀌셨네요! ^^
우오..저도 좀 의식 않코 손이 막 갔으면 좋겠어요! 부럽다는!

유월 2016-12-21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건데도 이 사람이 이 정도로 좋다면, 난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건가,그런게 아닐까요. 왠지 안 땡기는 영화였는데, 봐야겠네요.

다락방 2016-12-22 08:45   좋아요 0 | URL
저도 안땡기는 영화였는데 친구가 이 영화 얘기를 자주 하길래 보게 됐어요. 전체적으로 유치하지만 부분부분 공감하게 되어서 즐겁게 봤습니다. ㅎㅎ

푸른희망 2016-12-2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영화 볼 때는 그냥저냥이었는데 나주메 소록소록 생각나더군요 전커징팅처럼 재지않고 돌진하는 청춘이 부럽더군요 션자이는 왠지 어장관리녀같았다는 질투일까요?~^^

다락방 2016-12-22 13:56   좋아요 0 | URL
오! 돌진하는 청춘이라는 말이 커징텅에게 딱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저는 그 감정이 손에 잡힐 듯 하더라고요. 좋아한다, 좋아해서 이 마음을 알리고 싶은데, 상대가 나를 거절해서 이 관계가 깨어질까 두렵다, 하는 그 감정이요. 크-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또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실 그렇게 질주하는 청춘에게도 또 지금의 저처럼 중년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후훗

블랙겟타 2016-12-26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 안그래도 저도 지붕뚫고 하이킥을 최근에 다시 봤었거든요. 혜리의 신애와 이별을 맞이하는 모습은 정말 슬펐어요.ㅜㅜ 와 리틀포레스트가 1000원하는군요. 전 인디플러그에서 리틀포레스트2를 구매하면 레시피 북 엽서? 를 증정한다는 이벤트에 혹해서 작년에 다운받았었거든요. ㅎㅎ

다락방 2016-12-26 13:59   좋아요 1 | URL
그 엽서는 저도 받았어요. 2편은 극장에서 봤었는데 극장에서 주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애인에게 엽서 썼던 기억이 납니다. 후훗.

지붕뚫고 하이킥을 다시 보셨군요. 저는 최근에 노팅힐을 다시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 -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클레망틴 오탱 지음, 류은소라 옮김 / 미래의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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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입문서로 적당할 듯하다. 분량이 적고 애초에 십대 후반의 남성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거라, 기초적인 설명들이 나오니까. 그러나 여러권의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건너뛰어도 좋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에게 "그럼 왜 뛰쳐나오지 않고 같이 사는 거야?"라며 책임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장 확실하고 빠른 해겨책은 피해자가 집을 나오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식의 이런 판단은 너무 단순하고 미숙한 태도야.
어떠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의 전부인 가정을 박차고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의 생각은 정작 심리적 가해자가 가정 폭력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는 거지. 저마다의 개인이 마른 나뭇가지 꺾듯 단박에 가부장제 역사의 무게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p.17-18)

저널리스트 레베카 웨스트Rebecca West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야. "나는 한 번도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된 정의를 내려본 적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나는 사람들이 나를 흙이나 터는 발판 취급하는 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을 뿐인데, 그런 행동을 두고 나를 페미니스트로 대한다는 것이다." (p.100)

페미니스트가 원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지배 관계를 역전하는 것이 아니야. 여성들의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버리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권리를 가지는 것, 가증성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기를 바라는 거야. (p.101-103)

페미니스트들을 구별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매기는 일은 쉽지 않아. 페미니즘이 하나의 교리적 이론일거라는 선입견과는 반대로, 페미니즘이야말로 다양한 견해들 사이에 토론해야 할 주제이며,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해.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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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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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의 나의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산다고 상상했을 때, 그러니까 이성애자인 내가 다른 성인 남성과 함께 일상을 공유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때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의 나는 어떤 삶을 살게될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장점을 줄 것인가를 가끔 생각해본다. 최근에 몇차례 뉴스를 볼 때마다 누군가랑 함께 하고 싶어진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건 비교적 최근에 생각하게 된거고, 그 전에는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런 생각을 가끔 했다. 나는 깊게 자지 못하는 타입이고 새벽에 수시로 깬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 누워있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악몽을 꿨을 때도 그렇다. 나는 꿈을 아주 자주 꾸는 편인데, 그러다보면 종종 무서운 꿈도 찾아온다. 그럴 때 몸부림치다 눈을 떠서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걸 확인한다면 안정이 찾아오지 않을까.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아주 많은 불편함을 가져오겠지만, 때로는 혼자서는 결코 누리지 못할 안락함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밤에 잠들기전과 아침에 일어난 직후, 또 새벽에 잠에서 깨었거나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어느 깊은 밤에,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일상은 아름답지 않을까. 긍정적인 면들을 생각해보면 대체 왜 혼자 살아야하는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누구에게나 외로운 순간은 찾아들 것이고, 또 그 외로움을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든 견뎌내야 할 것이다. 이 외로움이 지긋지긋하고 싫다, 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스레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될테고. 



이 책, 《밤에 우리 영혼은》 속의 여자 '애디'는 남편과 사별한 지 오래되었고, 이제 혼자인 게 너무 싫은 일흔살 노인이다. 그녀는 이웃집 남자 노인 '루이스'를 찾아가,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그건 성적인 의미를 담은 게 아니다. 나랑 밤마다 섹스를 하자는 게 아니라, 나도 외롭고, 내 보기엔 너도 외로우니, 우리가 긴 밤 잠들기전에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이야기상대가 되자는 뜻이었다. 


이 제안은 루이스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었고, 그래서 루이스는 놀란다. 그렇지만 그 제안이 나쁘게 여겨지지 않아, 칫솔과 치약 그리고 잠옷을 챙겨들고는 옆 집 여자 애디에게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처음이니까 당연히 어색하게,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밤들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또 여러 날이 되면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점차로 알게 되고 또 더 다정해지게 되고, 그리고 그 밤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된다. '좋다'고 생각한다, 이 밤들이. 이제는 외롭지 않고 좋다고.


그리고 이 둘에게 '애디'의 여섯살 손자가 찾아든다. 부모의 이혼으로 당분간 혼자가 된, 쓸쓸하고 상처받은 소년이 이 노인들 사이에 끼게 되고, 이들은 이제 어떤 낮에도 함께 하게 되며, 캠핑을 가고, 함께 살 개를 데려오고, 정원을 함께 가꾸면서 조금 더 단단해진다. 매 순간순간이 이 노인들에게도 또 아이에게도 차곡차곡 쌓여 정이 더해간다. 외로운 각자의 삶이 모여서 다정한 여럿의 삶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과 또 이 노인들의 자식들은 이 삶을 부끄럽게 여긴다. 손가락질 받을 거라 여긴다. 왜 남부끄럽게 밤에 다른 이성을 만나냐, 아버지(혹은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뭐라 했겠냐, 며 이들이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처럼 여긴다. 정작 당사자들은 남들 눈 신경쓰지 않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데, 그 행복을 가지면 안되는 거라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말한다. 결국 애디의 아들은 '그와 이 관계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다시는 손자를 볼 수 없을 줄 알라'며 협박하고, 이에 애디는 루이스에게,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손자를 계속 보고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헤어진다.



상황으로만 보자면 달라진 건 없다. 처음 혼자였던 그들이 '다시' 혼자가 됐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삶은 이전의 삶과 같지 않다. 혼자가 다시 혼자가 된 것은 그 사이에 누군가와 함께 였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 다정했던 밤들을, 그 다정했던 순간들을, 그들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다시 서로의 옆에 머물고 싶다. 다시 서로의 곁에 찾아들고 싶고, 여전히 계속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차라리 함께였던 그 행복을 몰랐으면 모를까, 그걸 알면서 혼자가 되는 삶은 지나치게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너무 아프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별을 말하면서 상대가 고통스럽다 했을 때, '너 나 만나기 전에도 살았잖아' 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러자 상대는 '널 알기 전의 삶은 널 알고난 후의 삶과 다르다'고 했다. 나 역시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다는 것은, 다시 예전처럼 혼자가 된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했을 때 그것이 상대를 가졌다는 걸 의미하진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헤어졌을 때 우리는 상대를 '잃는' 것이다. 혼자였던 시간이 누군가를 '잃고' 혼자가 되는 것과 같을 리가 없다. 그건 고통이고 아픔이다. 하루하루 어떻게 버텨야할지 모르겠는 시간들이 찾아오고, 그 시간 틈틈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어 저 바닥으로 떨어진다. 혼자가 자유롭고 마냥 신난다고 생각했지만, 구속은 싫다고 외쳤지만, 사랑을 '잃고' 혼자가 되면, 그럴 때조차 혼자라고 박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익숙하고 다정한 상대가 내 곁을 떠나버리면, 그래서 내가 상대의 '부재'를 확인해버리면, 그 빈자리는, 이를 악물어도 참아내기가 몹시 힘들다. 나는 계속 혼자라 해도, 누군가 존재했다 부재하는 순간, 세상이 달라져버린다. 그건 함께 했던 시간이 정말 아름답고 다정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그렇다면 아주 간단한 답이 있다. 존재했다면, 부재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일단 찾아들었다면 떠나지 않으면 된다. 함께 했다면, 헤어지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 간단한 답이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답이 된다. 인간 사이에선 그렇다. 아니,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그렇다. '헤어지지 않으면 돼'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서, 우리는 헤어지고 나서도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하고, 함께 할때도 혹여 헤어지게 되진 않을까 불안해한다. <scientist> 란 노래에서 그런 가사가 나오지 않았던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내가 너를 잊는 방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나는 그렇게나 많은 책을 읽고 그렇게나 많은 영화를 보고 그렇게나 많은 음악을 듣고 또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나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아직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루이스와 애디는 서로에게 다시 닿고자 한다.

헤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마침내 그가 왔고 그녀는 그를 맞아들였다. 뭔가 달라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곧 말할게요. 먼저 술 한 잔 해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p.31)

고마워요. 하지만 그 사람들로 인해 나는 상처받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밤들을 즐길 거예요. 그것들이 지속되는 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말해요? 일전에 내가 그랬듯 말하네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를 원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말했듯, 난 더이상 그렇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잘 사는 길이 아니죠. 적어도 내겐 그래요.
좋아요. 내게도 당신 같은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말이 옳아요, 물론.
이제 괜찮은 거죠?
뭐, 거의.
맥주 한 병 더 마실래요?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이 와인을 더 하고 싶다면 함게 앉아 있어줄게요. 그냥 당신을 보면서요. (p.33)

초콜릿은 안 먹는 게 좋다지만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죽을 거예요. (p.40)

벌써 보고 싶어요. 애디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어찌될까요? (p.121)

하지만 당신도 내가 싫증나서 꺼져주기를 바라게 될지 모르죠.
그런 일이 생기면 몀추면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게 우리가 합의한 거잖아요. 정확히 말로 하진 않았지만요.
그래요. 내가 싫증나거든 말해요.
당신도요.
난 그럴 일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가진 이걸 다이앤은 한 번도 누리지 못했어요. 내가 모르는 다른 누가 있었다면 몰라도. 하지만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어요. (p.143)

난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잠들고요. (p.159)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알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그런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안 들어요.(p.163)

아, 이렇게 당신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니 벌써 기분이 좋아져요.
아직 별 이야기도 안 했는데요?
그래도 벌써 훨씬 좋아요. 당신 덕분이에요. 이 모든 것에 감사해요. 내가 아주 행복한 여자라는 느낌이 다시 들어요. (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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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6-12-2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운 각자의 삶이 모여서 다정한 여럿의 삶이 된다.˝

이 구절이 특히 좋아요. 다락방.
내가 소망하는 미래의 삶이 바로 이 삶이에요.

다락방 2016-12-21 11:29   좋아요 1 | URL
우리 오래오래 다함께 다정한 삶을 유지하도록 합시다. 다정한 관계로 오래 지내요.

단발머리 2022-08-29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 책을 이제 막 알게 되서요. 리뷰 찾아보는데.... 락방님 리뷰 2016년이네요.
어떤 원서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같이 읽는다고 하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르는 모임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08-29 16:24   좋아요 0 | URL
오오 이 책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도 같이읽기 할 때 이 책 후보에 넣어봅시다! 나쁘지 않을것 같아요. ㅋㅋㅋ 리뷰 읽어보기 전까지 내용 기억도 안났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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