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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리라는 건 이미 각오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나누고 싶었다. 온화하게 얘기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는 관계를 그녀에게 청할지도 모른다. 미련퉁이 같은 짓이지만 최소한 끝이 아니라 당분간 관계의 중지라는 것으로라도 하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각자의 인생이 이 지점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무렵에 조용히 재회하는 그때까지, 잠시 동안의 관계의 중지…….(p.295)



















아직 쓰기전이라 어떤 글이 나올지 나도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스포일러 팡팡팡팡파바바방 터지지 않을까 싶으니, 피해가실 분들은 알아서 피해가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스포일러인지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고, 제가 할 말이 아주 많은데, 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 글은 쓰긴 쓸것인가...이만큼까지 쓰면서도 잘 모르겠고..... 


글..뭘까요?

인생 뭘까..

페이퍼 뭐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 후에, 자, 글 쓰러 갑니다. 슝-





천재 기타리스트 '마키노'는 그의 나이 서른여덟(38)에 일본에서 콘서트를 마치고, 그 콘서트에 왔던 관객중 한 명이자 업무차 아는 사람의 지인인, 기자 '요코'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 요코의 나이는 마흔. 요코는 마키노보다 두 살 많았다. 콘서트 뒷풀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와, 세상 편한 이야기 상대고 서로 어떤 말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는데 막 이 둘은 서로의 얘기를 이해한다. 밤이 깊어가지만, 뭐랄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그 날, 마키노는 요코에게 이미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밤, 그들이 처음 만나 이야기만 나누었던 밤, 그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밤인데, 그들은 서로에게 각별한 사람이 된다. 다시 만나서 이야기나눌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때 연락처 받은 걸 계기로 둘은 간혹 연락하게 된다. 요코는 이라크로 취재차 가있었는데, 일본에 있는 마키노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연락을 하고,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른 후에 그들은 파리에서 재회하게 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고 그들로서는 두 번째 만나는 것이며 또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인데, 그 만남에서 마키노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요코도 마키노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지만 자신에게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한 후, 스페인에 가 공연을 마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마키노에게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대답한 뒤에 약혼자와는 파혼했다 말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 밤, 사랑을 확인한 밤, 같은 사건을 공유한 밤을 보내게 되고, 그렇게 연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밤, 그 아름다운 밤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만 했던 사정으로 그들의 어떤 육체적 사랑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런 채로 마키노는 다시 일본으로 날아가고, 그들은 그렇게 스카이프로 매일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속삭인다. 그리고 다시 몇 개월 후에 일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자 그때 어떤 일이 생기냐면,



마키노를 아주 강하게 사랑했던 여자 '사나에'가 끼어든다. 사나에는 마키노의 매니저였고, 인생 목표가 마키노인 여자다. 그런 여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마키노가 잘되기만을 바라는 여자가, 갑자기 등장한 '요코' 때문에 모든게 틀어진다고 생각하고, 요코란 여자가 마키노에게 너무 특별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일본에서 요코와 마키노가 며칠간 함께 보낼거란 걸 알고 절망하고 우울해한다. 그러나 참,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려고 그러는지,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나에가 마키노의 핸드폰을 잠깐동안 가지고 있어야 했고, 사나에는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과 그렇지만 나는 마키노가 아니면 안돼,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만, 자신이 마키노인척, 마키노의 핸드폰으로 요코에게 긴 이별통보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내가 가장 싫어했던 건 베른하르트의 '끼어들기' 였다. 베른하르트는 에미의 남편이고, 그러니 아내가 흔들리는 걸 참을 수 없었을 거다. 그러므로 아내의 정신을 쏙 뺏어간 다른 남자에게 자신이 이메일을 보내는 거다. 나는 이걸 반칙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해서 내 사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게 베른하르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사나에는 마키노를 사랑했다. 마키노가 기타리스트로서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결같이 그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다 투자한다. 자신은 마키노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요코는 스스로 능력있는 여자다. 마키노가 아니어도 자신이 혼자서 뭐든 이룰 수 있는 여자. 몇개국어가 가능하며 사랑하는 남자도 있고 자신의 커리어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이미 너무 가진 게 많은 여자. 그런데 마키노까지...나는 마키노뿐인데... 그녀는 그 순간, 마키노의 핸드폰이 자기 손에 들어왔고, 그들이 만나서 며칠간 함께 보낼거란 걸 안 순간, 그러면 모든 게 끝나버린다고 직감한 순간, 그래서 스스로도 '해서는 안될 짓'이라고 생각한 짓을 해버리고 마는 거다. 헤어져, 헤어져, 헤어져, 내가 사랑해. 이게 사나에의 속마음이었는데, 이 간절한 사랑은 응답을 받는다. 사나에의 '간절한' 바람대로, 그래서 사나에가 쓴 방법으로 인해서 마키노와 요코는 헤어지게 되는 거다. 시간은 흐르고, 마키노는 사나에에게 프로포즈 했으며 사나에는 이제 그의 곁에서 그의 헌신적인 아내로 살면서 임신까지 하게 된다. 순간순간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을 느끼고,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 죄책감을 좀 없애보고자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이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건 요코'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고 자신과 결혼했으며 자신과 함께 살고 있지만 사나에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사이사이, 그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차에 사나에는 남편의 콘서트 티켓을 끊고 있는 요코를 발견하게 된다.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보고 그녀에게 오랜만이라며 잠깐만 얘기하자고 한다. 사나에로서는 너무나 불안했다. 여기까지 쌓아온 것, 이만큼 이뤄놓은 것, 이제 안정된 것이 그녀의 재등장으로 인해 다 부숴져버릴까봐. 아무도 모르게 객석에 앉아있다고 해도 남편이 한 순간에 요코를 알아볼 것임을 그녀는 안다. 그녀로서는 요코의 재등장이 너무 싫고 끔찍하다. 요코가 싫다. 그래서 그녀에게 콘서트 보지말고 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니까 '또' 끼어드는 거다. 남편과 요코 사이에. 이제는 자기가 아내니까, 그 사람이 자기 남편이니까, 남편을 흔들리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대화속에서 요코는 그때, 오래전에, 자신에게 이별통보를 보낸 사람이 마키노가 아니라 사나에 였다는 걸 알게 된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각자의 삶을 살게된 후에...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짓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뻔뻔함에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키노를 위해 나는 저토록 낮은 곳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하고 요코는 불안해졌다. 어쩌면 그런 방법을 동원할 것도 없이 마키노에게서 사랑을 받아버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복수인 것 같기도 했다. (p.407)




사랑을 잃고 아파할 때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봐, 라며 내가 온몸으로 이별을 막아내기를 조언했다. 그 방법들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낮은 곳까지 떨어지는' 행위였다. 그렇게 낮은 곳까지 떨어져서 이 사랑을 잡아야 하는걸까, 머릿속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 같았고, '그렇게 낮은 곳까지 떨어져봐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역시 그런가'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낮은 곳까지 나를 떨어뜨릴 수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너무 낮은곳까지 나를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내가 그렇게 하면, 내가 그렇게 낮은 곳까지 떨어지면,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를 내내 고민했지만, 내 고민의 끝에 나오는 답은 '아니'였다. 내가 낮은곳에 내려가야만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니, 거기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달아나지 않기를, 내 삶을 이루는 모든 과정에서 언제나 단단한 축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항상 사소하고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사양 않고 낮은 곳으로 떨어져야 하는 거라면.... 이미 한 쪽이 낮은 곳으로 떨어져야 둘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서로가 사랑한다'고 볼 수는 없는 거 아닐까. 바닥까지 떨어진 뒤에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면, 그게 ..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사나에를 보면서, 정말 사나에는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살게 되고 그의 아이를 낳게 되어서, 와 세상 행복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어, 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과 생각을 하는 틈틈이, 나도 그랬어야 했나, 나도 밑바닥까지 떨어져서 어떻게든 그에게 달려들어야 했나,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는 지금쯤 내 옆에 있을까? 그렇게 했어야 하는걸까? 지독하게 사랑한다면 역시 지독한 과정을 겪었어야 했나.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그리움에 허덕이지 않고 내 옆에 그를 세워둘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여전히 나와 다정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내가 그의 아이를 낳고, 매일 아침 함께 눈을 뜨고.....하는게 가능했을까? 그러면 나는 '내가 이렇게 처절하게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건져올린 위대한 사랑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매일을, 매순간을 살 수 있었을까? 나는,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내 옆에 두어야 했을까? 사랑하니까? 



나쁜 방법을 좀 쓰면 어때? 결국 사랑을 이뤘잖아?



이룬건가, 지금 이게??





나는,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생각하고 시계를 과거의 그때로 돌려봐도,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나는 내가 그와 같은 선, 같은 높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한 쪽이 기울어 훨씬 낮은 곳에 있다면, 다른 한 쪽은 당연히 훨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다. 나는, 상대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와 함께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하면서 내 옆에 있기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대가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진다면, 나는 그보다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내려다보면서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올려다보면서 사랑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마주보고,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하고 싶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어쩌면, 멀찌감치 떨어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나에처럼 할 수는 없을거다. 그런짓까지 하는 나를 나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런 한편, 



그렇다면, 사나에가 나보다 더 마키노를 사랑한 거 아닌가?



라는 당연한 의문을 갖게 된다. 나는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건 아닌건가? 그래서 '그렇게까지' 할 순 없는건가? 그렇다면 그 사랑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차지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내 사랑은, 충분히 크지 못했나?





그리고 운명에 대해 생각한다.

당신과 내가 만날 운명.

아무리 사나에게 끼어들어 긴 이별의 문자를 보냈다한들,

마키노와 요코가 그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서로에게 얘기했다면, 그러니까 조금 더 상대에게 '왜'냐고 묻고, 그러니까 뭔가 다른 식의 액션을 취했다면, 그랬다해도 그 사랑이 그대로 무너졌을까? 

분명 사나에가 중간에 끼어들긴 했지만, 사나에가 아니었어도 그들은 그 시점에서 무너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른 계기로 그들은 서로를 선택하지 못할, 그런 운명이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흘러 요코도 마키노도, '그 때 내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달라졌을까'를 생각한다. 왜 그 때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시간은 그들에게 '아직은 이만큼'만을 허락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만큼' 이라는 건, 그 다음을 기약한다.

그들은 그때 고작 그렇게밖에 하지 못해서 서로의 인생에 서로를 담지 못한 채로,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사람뿐이다 라는 걸 인식하고 있고, 그러면서 '그런 사람은 이제 다시는 못만나'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상대를 사랑한다. 이 남자랑 살고 애를 낳으면서 그를 그리워하고, 이 여자랑 살고 애를 낳으면서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때에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지금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아주 많은 대화들이 지금의 옆에 있는 사람보다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더 즐거울 거란 걸 안다. 그렇게 속으로, 상대에게 할 말을 쌓아둔다. 이젠 말할 수도 없는데. 



그는 왜 요코와 스카이프로 대화하던 무렵에 이 책을 잃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화제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었다. (p.353)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는 요코의 습관을 마키노는 알고 있었다. 사실 고작 그들의 '만남'은 세 번뿐이었지만. 마키노가 언제나 자기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요코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키노가 말을 꺼내면, 요코는 어떤 말인지 듣기도 전에 이미 웃음부터 지었다.



"꽤 오래된 지인 중에 텔레비전 프로듀서가 있는데 부하직원이 뭔가 좀 특이한 아가씨여서……."

단지 거기까지만 이야기했을 뿐인데 요코는 벌써 우습다는 듯 하얀 이를 내보였다.

"네에, 그래서요?" (p.125)




그래서 마키노는 요코와 함께라면 자신의 세상이 달라질거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와도 이만큼 가까이 얘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요코라면 아주 다양한 화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요코와 『베니스에서 죽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제는 무엇이라도 좋았다. 아무튼 무턱대고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번에는 단둘이서만,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함께하면서 그토록 평온함을 느끼고 지적으로 자극받고 무엇보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상대를 마키노는 그녀 말고는 결코 알지 못했다. (p.59-60) 




마키노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누구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코를 통해 자신은 다시 한 번 이 유럽이라는 세계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 앞으로 알게 될 것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녀와 늘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이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는, 애초에 그녀를 만날 일이 없었던 미래와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p.154)




나는 사나에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자신의 최대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것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므로 어쩌면 내 사랑을 이루어내지 못한채로 이 생을 지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사랑의 크기가 사나에보다 더 작은것처럼 여겨지게도 만들지만, 나는 내가 사나에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이런 면이 사랑을 유지하게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내가 밑바닥까지 떨어지려 하지 않는 면을 사랑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싶었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연애든 결혼이든 선택하고 나서 대체적으로 만족하기도 하지만 또 아주 많은 경우에는 일정부분의 체념을 안고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나의 선택에도 그런 체념은 끼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의 선택에는 체념이 없기를 바란다. '이럴 수밖에 없었지' 라는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내 남은 생을 채워나가고 싶진 않다. 만약 내가 누구를 선택해서 옆에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의 최선이길 바라고 나 역시 그 사람의 최선이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여야만 돼'가 우리가 서로를 선택한 이유이기를 바란다. 




다시 운명으로 돌아가서.

당신과 내가 운명이라면, 결국 만나게 될까?

내가 당신을 바라고 당신이 나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커서 우리가 운명이 된걸까?

아니면 우리는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그렇게나 바라고 바라는걸까?



마키노는 요코를 생각하고 요코도 마키노를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없어' 라고 생각하다보니,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 사람의 소식을 좇는다. 그러면 몸이 움직이기 마련.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게나 서로를 사랑하는데도, 만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돌고 돌고 돌아서, 숱한 돌부리들에 걸리고 넘어지면서, 그렇게 서로에게 닿기까지 아주 한참이 걸리고 힘이 들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작 몇 번의 만남에 서로를 깊이 사랑하기도 하고, 심지어 섹스도 없었는데 평생의 사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딥 럽....deep love.....



딥 럽..



딥 럽........ 




갑자기 블리딩 러브.. 생각나는 군.

킵 블리딩 킵킵 블리딩 럽~





그러나 최소한 이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그를 향한 사랑 안에 머물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깊이 사랑했던 사람……. 음악이 앞으로 내달려갔다. 이 한때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그녀는 기도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기를. (p.480)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연인으로서도 사랑하지만, 인간으로서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며 깨달았다. 그러보고니 정말 그랬다.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도 좋아해야 했다. 그게 가능해야 사랑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한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지, 당신은 알아야 한다.



그녀는 마키노를 사랑하고 있었다.

때때로 가슴이 미어질 만큼 고통스러운 사랑의 충동도 경험했지만 그것과 동시에 그녀는 마키노를 뭐랄까, 인간으로서 완전히 좋아하게 되었다.

그와 마주하면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대화가 인생의 기쁨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하다고 느껴질 만큼 기적 같은 일이었다. (p.267) 





그나저나 책 진짜 좋네. 이승우 소설도 그렇고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도 그렇고. 사랑에 대해 공부하고 알고싶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진짜 그 어떤 이론서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출근길부터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읽기 시작했는데, 몇 장 안읽었는데 너무 좋다. 뭣보다 리베카 솔닛이 얼마나 생각이 많고 또 깊은 사람인지 문장마다 느껴지는 거다. 게다가 겁나 똑똑해. 나는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의 글이 진짜 너무 좋은데, 그런 사람이 똑똑한 건 진짜 축복이다. 너무 멋져... 

나도 그런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한다.

성장하는 사람. 계속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계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싶다.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을 읽는 것도 너무 신나고, 생각이 많고 깊은 사람의 글을 읽는 것도 또 너무 신나서, 아아, 책은 정말로 좋은 것이구나, 한다.



그렇지만 마티네의 끝에서, 는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나서도 한동안 나를 쥐고 놔주질 않았어... 어휴, 되게 이 책에 휘둘린 느낌이다. 너무 사로잡혀서 좀처럼 다른 책을 읽을 생각을 못하겠더라. 이야기는 힘이 세구나, 절감한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계속계속 생각할 거다.

바닥까지 내려가 이루게 되는 사랑과, 돌고 돌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결국 당신에게 닿는 운명이란 것에 대해서.




그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에 대해 요코는 인생에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종류의 애착을 느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깨우침을 얻은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와 다른 어딘가에 있었을 때의 자신과는 다르게 기분 좋은 것이어서 집에서 혼자 있을 때조차 그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계속 그런 자신으로 남고 싶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앞으로 그런 자신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 단지 추억 속에만 있을 뿐.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듯'한 가슴속의 공백에는 이제 한없는 쓸쓸함만 스며들었다. (p.285)






마키노는 예전에는 당연한 듯 가득 채워졌던 창조적인 삶의 충실이 하필 지금 이런 때에 자신에게서 완전히 빠져나간 불우함을 저주했다. 만일 음악가로서의 행복과 요코의 존재가 가져다준 행복이 일치했다면 오늘 이 시간을 얼마나 환한 환희와 함게 보냈을 것인가.
그는 자신이 결코 후자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음악은 그의 삶의 근거이고 그가 자신에게서 찾아잴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것은 다른 무언가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고 보충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연주가로서 패기를 잃은 것이 너무도 창피스러운 요즘 같은 상태로는 언젠가 요코와의 사랑조차 결코 마음껏 누릴 수 없으리라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p.206-207)

자릴라는 왜 마키노에게 PTSD 에 관해 털어놓지 않느냐, 분명 기댈 곳이 되어줄 게 틀림없다고 몇 번이나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요코는 그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전에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 혹시라도 마음대로 마키노에게 그런 얘기를 전하기라도 한다면 너와의 신뢰 관계는 끝나버린다고 선언했다. (p.234-235)

요코와의 새 생활에 거는 마키노의 기대감은 막연하나마 이전보다 한층 부풀어 있었다. 그녀 앞에서 최소한 우울한 표정은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얼굴을 마주하면 스스로도 신기할 만큼 저절로 웃음이 났다.(p.238)

요코는 감은 눈꺼풀 틈으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떨면서 그것을 꾸욱 견뎠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왜일까?‘라고 다시금 물었다. 왜 자신은 그와 따로 떨어져 사는 인생을 걷게 되고 만 것일까…….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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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06-2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닥 끝까지 내려가는 사랑,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사랑은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 순간 자신의 선택이니까요. 사나에가 다른 사람, 특히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면서 함께 있을 때 행복했을지 어쩔지 모르겠어요. 불안함이, 항상 드리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예요. 그런 거 보면 사나에가, 너무나 미운 사나에가 불쌍하기도 하구요.

리뷰 읽다가 이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의 이 부분이 생각나더라구요.

우리는 지속되는 관계가 우리를 아무리 비참하게 만들지라도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우리는 지속되지 않는 관계는 아무리 즐겁다 해도 - 아무리 생기 있고, 활력이 넘치고, 자신을 탈바꿈시키는 경험이라 해도 - 실패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장기적인 안정과 결부시키는 성향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사람들은 감히 그 대안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250쪽)


< 마티네의 끝에서>를 너무나 읽고 싶지만, 그 책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다락방님의 이 리뷰만큼은 못할 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확실하게....

다락방 2017-06-23 14: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단발머리님. 그래서 요코도 사나에에게 물어요, 행복하냐고. 사나에는 행복하다고 답하죠. 그렇지만 실상, 그렇게 함께하는 삶에서 ‘혹시 알게되진 않을까‘ 걱정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이게 그래서가 아닐까‘ 생각하고 전전긍긍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함께 사는데 계속 초조해야 하다니. 아, 그런 삶은 진짜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이에요. 그렇게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싶다가, 그렇게라도 두고 싶었던걸까... 싶기도 하고요. 사랑은 가끔 사람을 못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사나에도 자신이 잘한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어쨌든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말이죠...


인용해주신 문장 읽으니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당장 읽고 싶네요. 마리 루티의 책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었나,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통해있기도 하고요. 아 똑똑한 여자들이 쓰는 책 진짜 너무 좋아요. 저는 지금 솔닛을 읽지만, 마리 루티도 꼭 읽을 거예요. 그걸 읽은 단발머리님이라니...아 너무 좋아... 단발머리님 사랑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17-06-23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3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7-06-2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서관에서 책을 기다리는중이니 책을 읽은후에 자세히 읽을 예정인지라 선공감 먼저 할께요~~^^

다락방 2017-06-23 22:33   좋아요 0 | URL
책 좋았어요, 보슬비님. 그리고 아팠구요 ㅜㅜㅜㅜㅜ

hellas 2017-06-2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끼어드는 순간마다 복장이 터져버려서. 매우 지쳐버린 독서였어요 ;ㅂ;

다락방 2017-06-26 15:44   좋아요 1 | URL
네네, 맞아요, 이해합니다. 저도 답답했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들에겐 왜 이런 끼어들기가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쩌면 이모든 것이 다 운명인 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 이 아니라 ‘나중‘이 이들이 만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일 처음 문자메세지도 그들이 적극적으로 ‘통화‘를 했다면 달라졌을거고, 나중에 콘서트때도 요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서트에 참석했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 를 생각해보니, 그 끼어들기에 대한 뒤의 행동도 역시 본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었던가..싶은거죠.

무엇보다 끼어들었던 당사자가 저는 내내 초조해했을 생각을 하니, 아아, 대체 이 관계란 무엇인가 싶고요. 역시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 혹은 뜻하고자 하는 바가 단 하나일 경우에는 망가지기 쉬운 것 같아요 ..
 
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퇴근길에 읽을 책을 챙겨왔는데 이 책에 사로잡혀 다른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자기 사랑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건.. 사랑이 맞나? 사랑이 절실하면 어떤 것에 가로막혀도 결국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좀 돌아서, 오래 걸리지만.....

사랑,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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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6-22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고 싶은데, 쓸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쓴다면 아주 많은 말을 해야할 것 같은데....

단발머리 2017-06-22 19:59   좋아요 1 | URL
그 많은 말을 여기에다 써 주시어요^^ 퇴근길에 생각하는 사랑이야기 💜

보슬비 2017-06-22 20: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락방님의 많은 말을 기다리겠습니다. ^^

다락방 2017-06-23 11:21   좋아요 0 | URL
쓰고 싶은 말을 더 많았지만 어쨌든 썼습니다.
엄청 길어요 ㅜㅜ
 

어제는 엄마와 둘이 와인을 마시면서 나의 페이버릿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지난 번에 엄마랑 둘이 체코편과 호주동부1편을 보았고, 이번에는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호주 동부2편을 보자, 하고는 틀어두었는데, 와, 동부1편을 보면서 나는 브리즈번에 꼭 가고야 말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동부2편 보고는 아아, 고립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말타는 거 너무 좋고, 말 너무 좋고..그냥 말 타고 드그락드그락 달리는 거 너무 좋고..이런 얘기 진짜 많이 했었는데, 아아, 호주 동부의 '레인보우 비치'는 말을 타고 달리는 해변인거다.. 아..어떡해.... 나 막 진짜 심장이 뛰었어. 말을,   타고,   해변을,   달리다니!!

보는 내내 잇힝, 읏흥, 므흣, 히융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어...





말을 타고 초원만 달리는 게 아니라 말을 타고 해변을 달리다니, 뭔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다. 그러나 환상적인 풍경은 이제 시작이었다. 마지막 코스가 산호섬인 '레이디 엘리엇 섬'이었는데, 이곳은 경비행기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 거다. 관광객들이 많아져서 레스토랑도 생기긴 했지만, 정말 작은, 외진 곳에 있는 섬. 그래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그런 섬. 새들이 진짜 많고 만타 가오리가 헤엄쳐다니는 섬!









바닷 속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인데 사실 내가 그렇다고해서 바닷속에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고..그렇지만 만타 가오리가 헤엄치는 걸 보노라니 나도 막 뭉클해지는 거다. 아 뭔가 감동적이야... 그리고 나는 거기 까페에서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아아, 조용하고 아름답고 외진 곳. 이런 곳에 단 며칠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곳에서 오랜 삶을 사는 건 아니어도, 단 며칠만, 그러니까 내 생각엔 하루나 이틀만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러다 나는 '이도우'의 소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생각이 났다. 마치 내가 그 소설속의 공진솔이 된 것 같았다.



라디오작가로 일하는 공진솔은 같은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라디오피디 '이건'을 좋아하게 된다. 그와 매일 일하면서 만나게 되고 또 따로 만나게 되기도 하면서 그와 친해지고, 그리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까지 하는데, 건은, 누가봐도 진솔을 사랑하는게 분명한데도, 진솔을 거절한다. 진솔은 딱히 그래서만은 아니고, 다른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서, 그간 자신이 늘 염원해왔던 삶을 살기로 하고 일을 정리한다. 조용한 시골에 가서 혼자 살면서 쓰고싶은 글을 쓰는 것. 진솔은 그러게 일을 정리하고 동료의 도움으로 시골에 있는 집을 얻게 되고, 그곳에 혼자 살면서 글을 쓴다. 그런데 거기에, 건이 찾아온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사이고(건은 뭐랄까, 잘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진솔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게(응? 이거 말고 다른 표현 없나?)되는데, 어쨌든 일을 마치고(응?) 마당에 나와보니, 오, 밖에 눈이 내리고 있는 거다. 그리고 많이. 그러니까 얼마나 많이냐면, 운전해서 서울로 돌아갈 수 없게끔!!! 꺅 >.<




진솔은 건에게 언제 출근해야 하느냐 묻고 건은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답한다.



"그럼 오늘 집에 가서 준비 좀 해야 할 텐데."

"글쎄. 하지만 이 지경인데 갈 수가 없잖아요."

시큰둥한 건의 표정에 진솔은 씨익 웃어 보였다.

"사실은 가고 싶지 않구나? 내가 너무 좋아서."

건이 고개를 젖히며 하하거렸다. 하지만 진솔이 짐짓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부들부들 물결치자 건은 당황해서 안색이 달라졌다.

"어, 왜 그래요? 내가 웃어서 화났어요? 그거 비웃은 거 아닌데. 당신 귀여워서."

고개를 드는 진솔의 얼굴에 웃음이 넘쳤다. 그녀는 두 팔을 치켜올려 와락 그의 목을 끌어안아 버렸다.

"드디어 고립됐다! 폭설에 좋은 사람하고!"

잠시 얼떨떨하던 건은 곧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구판, 401)


















그러니까 진솔에게는 그런 로망이 있었다. 좋은 사람하고 단 둘이 고립되는 로망. 그게 실현이 된 것이다. 자연이, 눈이 도와줬어! 게다가 함께 있는 사람이 건이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사람하고 고립됐다!! 눈은 녹을 것이고 그러니 고립되어 둘만 오롯이 함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하루쯤이겠지만, 아아, 세상에, 마치 당신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 느낌적 느낌은, 으응,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진솔의 마음이 되어 레이디 엘리엇 섬에 가고 싶어진거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레이디 엘리엇 섬에 가게 된다면, 아아, 나도 진솔처럼 두 팔을 치켜들고 소리칠거야.



"드디어 고립됐다! 아름다운 섬에 좋은 사람하고!"



그러나 ... 그 뒤는 진솔처럼 이어질 수 없을 것 같다. 누가 됐든 나를 번쩍 안아 들어올릴 순 없을테니까... (  ")

그래서 사람이 적게 먹는 삶을 실천해야 하는거야..

그치만...뭐 굳이 번쩍 나를 들어올리지 않아도, 내가 내 발로 우리의 침대로 걸어 들어가면 되잖아?

노 프라블럼.



레이디 엘리엇 섬이 나로하여금 공진솔 생각나게 했고, 아아, 고립되고 싶어졌다. 하루나 이틀만... 이 세상에 당신과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만타가오리하고.........




섬의 마지막에 해가 지는 풍경까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 피씨로 다시 보기하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또렷이 나오질 않는다. 어제 텔레비젼으로 봤을 때는 하늘에 진짜 별이 한가득이었어. 그러자 나는 '아만다 피트'와 '애쉬톤 커쳐'가 주연이었던 영화, 《우리, 사랑일까요?》가 떠올랐다.


















화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친구'다. 서로 다른 연애를 하기도 하면서 한 번은 남자가 사랑을 느껴 고백하기도 해보고 또 언젠가는 여자가 사랑을 느껴 고백해보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서로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고 해서 둘이 연인으로 지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둘은 계속 특별한 경험들을 만들어 가는데, 그중에 하나가 밤 하늘의 별을 보는 거였다. 이게 하도 오래전에 본 영화라서 별을 보러 갔던건지, 아니면 다른 일로 갔다가 별을 보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밤하늘에 별은 가득했고, 이 둘은 자동차 보닛 위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누며 그 별을 보았던 거다.





아마 이 별을 보러 갔을 때도, 저 대사를 보니, 그에게는 아마 애인이 있었던가 보다. 어쨌든 이 둘이 별을 함께 보러 갔던 이 장면이, 레이디 엘리엇 섬의 별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데 똭- 생각나는 거다. 아까 이 짤을 찾다가 보게된건데, 이들은 밤하늘 아래에서 서로 나체가 되어 마주보기도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네. 이 영화 다시 봐야겠다. (지금 네이버 굿다운로더 대여료 1,100원 입니다)



어쨌든 이 둘이 상대에게 사랑을 느껴 고백할 때는 항상 어긋나 있었다. 그러다 영화의 마지막, 여자가 지난번 자신이 거절했지만, 아아 그렇지만 나는 역시 이 남자여야 하는거였어, 하고 남자네 집으로 헐레벌떡 찾아갔을 때는 마침 결혼식이 올려지고 있었다.................................................................... 절망하는 아만다 피트....


스포일러 하지 않겠습니다.


아, 이 영화 다시 봐야겠네. 재밌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주 동부2 편을 다 보고나서는 술이 좀 남아, 피레네 산맥까지 내쳐 보았다. 작은 마을들이 보여졌는데 진짜 너무 아름다워서, 아, 가보고 싶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저렇게 외진 곳까지 가려면, 그냥 비행기 직항 열시간 쯤으로 되는 게 아니라, 프랑스에 갔다가 거기에서 또 뭘 타고 다시 몇 시간 들어가고...이런 식이어야 해서, 내가 휴가를 이용해서 갈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예 회사 때려치고 작정하고 여유롭게 가야지, 이대로는 안되겠어. 그렇지만, 내가 지금 회사를 때려치진 않으니까, 과연 내가 저렇게 아름답고 작은 마을까지 갈 수 있는 때는 과연 언제일까. 내가 언젠가는, 내가 가고 싶은 곳, 궁금한 곳을 다 찾아다닐 수 있게 될까? 나이들수룩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루라도 더 젊을 때 나는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최대한의 여행을 즐겨야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사무실에 있는 게 아니라 뛰쳐 나가야 하잖아!!!


조금 더 나이가 들어도 무리없이 여행을 즐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력을 만들어놔야 겠다는 생각을, 어제 피레네 산맥의 마을을 보면서 했다. 그래서 몇 년후가 되어도, 여기 내가 얼마나 오고 싶었다고, 이러면서 건강하게 세계 곳곳을 걸어다니고 싶다. 그야말로 걸어서 세계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먹고(!!) 더 열심히 운동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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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7-06-2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타는 거 보니 생각났는데 넷플릭스 ‘Anne‘ 보세요. 락방님이 좋아하실 거 같음 ㅎㅎ

다락방 2017-06-20 11:06   좋아요 0 | URL
그러면 또 넷플릭스 결제해야 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말타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 말타는 거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lavis 2017-06-2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좋아요♡
열심히 먹으려 도마질과 채칼질로 월남쌈 완료하고 몸 져 누웠는중요ㅋ

다락방 2017-06-20 11:28   좋아요 0 | URL
월남쌈, 제가 참 잘먹는데 말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lavis 2017-06-20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헷 댓글에 사진을 올리려했는데 그런 방도가 없어서 글을 하나 썼습니다♥점심 맛있게 드시옵소서 마니아 올림

다락방 2017-06-20 12:17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클래비스님. 후훗.

단발머리 2017-06-2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말을 좋아하시는군요. 말 타는 거랑, 말 달리는 거랑..... 저는 말이랑은 안 친해서... ㅎㅎㅎㅎ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를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너무 근사한 문장이예요.

˝드디어 고립됐다! 폭설에 좋은 사람하고!˝
뭐가 나을까요? 폭설이 나을까요? 외딴섬이 나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06-20 12:17   좋아요 0 | URL
저는 말이 참 좋아요. 뭔가 건강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폭설에 고립되는 거 너무 좋은데, 그건 곧 해결될 문제임을 알아서 그런 것 같아요. 만약 정말 ‘무인도‘ 같은데에 고립되면 마냥 좋아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한다!! 이런 생각 하느라고 말이지요. ㅎㅎ
외딴섬도,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여행가고 촬영가는 그런 곳이어야지, 진짜 외딴 섬이면 안돼요.. ㅋㅋㅋㅋㅋ
어디가 됐든 뭐가 됐든 저는 사랑하는 사람하고 좀 고립되어보고 싶네요. 딱 이틀만요. 고립된 장소에서의 음식 조달에는 한계가 있을테니까.....
그리고 고립도 좋지만 또 좋아하는 사람 손 붙잡고,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자랑하면서 다니는 것도 좋으니까요.


(아 댓글도 산으로 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7-06-20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0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0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06-20 14:42   좋아요 0 | URL
저는 진짜 맥북 그냥 집에 두려고 산 것 같아요 ㅠㅠ 그냥 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냥 있어 그냥 그냥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moonnight 2017-06-2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굳이 먼 여행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간 사람들과 일상사에서 고립된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ㅠㅠ;

다락방 2017-06-20 14:42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저도 종종 그런 생각합니다. 특히나 사람에 치일 때면 더요. 그러면 혼자라도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머물다 오고 싶은 마음이 커져요. 나는 자연인이다 찍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말이죠 ㅠㅠ

transient-guest 2017-06-2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과 함께 하는 상상의 여행이군요. 저는 소싯적에 술을 마시면서 무협지를 읽으며 주인공과 호형호제하는 놀이로 외로움을 달래곤 했지요.ㅎ 가끔 모든 걸 던지고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ㅎㅎ 적절한 외로움, 적절한 교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다락방 2017-06-22 08:57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아직까지도 소설속 남자 주인공들과 사랑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등장인물이 되어 폭풍울음을 울곤하죠 ㅠㅠㅠㅠㅠㅠㅠ 이루지 못한 사랑은 늘 너무 아파서 ㅠㅠ 조연이든 주연이든 너무 이입하게 돼요. 흙흙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사랑을 시작하려는 주인공들이 되기도 하지만,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조연이 되어서 또 슬프고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토요일에는 심규선 콘서트에 다녀왔다. 가기전부터 <아라리>들으면 아마 난 울어버리겠지, 싶었는데, <아라리>에서 손수건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은 것도 모자라, <Be Mine>에서도 손수건 꺼내 눈물 닦았고, 그 외에도 다른 몇 곡들에 눈물이 핑핑 거렸다. 아아, 어쩔... 영혼의 쌍둥이여... (라지만 심규선은 나를 모름)







노래는 세시간이나 이어졌는데, 와, 세시간씩 노래해도 여전히 잘하다니, 대단하다.


일전에 심규선의 콘서트에 갔을 때도 그 자리에 심규선의 아버지가 와있다는 얘기를 심규선이 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버지가 콘서트 자리에 와있는 것 같더라. 공연장은 빈틈 없이 꽉 차있었고, 노래가 끝나면 사람들은 심규선에게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훌쩍이기도 했다. 심규선의 아버지는 이걸 다 보고 있겠구나 싶으니, 아 딸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와준다는 것, 응원해준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큰 자랑스러움일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나 싶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 이게 세상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 아닌가 싶은 거다. 그래서 그런 장면을 보게 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심규선을 향한 환호가 이어질 때 심규선의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버지가 그 자리에 와있다는 건 심규선이 언급해서 알았지만, 아버지 말고도 다른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와있었다면 분명 심규선을 자랑스러워했을 것 같다.


일전에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서도 그런 걸 느꼈었다. 아담 리바인이 노래 부르는데 자신의 아내가 거기 모델로 섰을 때, 그들은 서로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을까. 자신의 일에서 인정을 받고 환호를 받는 걸 보여줄 수 있다니, 그걸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을 것 같은 거다. 감추고 싶은 게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사람. 아, 진짜 너무 좋지 않은가.



며칠전에 남자1이 내게 물었다. 혼자 지내는 거 좋지만, 혹시라도 외로울 때가 있진 않냐고. 나는 당연히 외로울 때가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게 언제냐고 물었고, 나는 '자랑할 수 없을 때' 라고 말했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한껏 자랑하고 칭찬 듣고 싶은데, 그걸 할 수 없다는 걸 알면 참 외롭다고. 그러자 그도 동의했다. 애인에게 칭찬 받는 건 정말 큰 기쁨이라고. 물론 각자 연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속상한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외로울 것이고, 어떤 이들은 좋은 영화가 나왔는데 같이 보러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외로울 것이다. 사실 이 모두가 다 복합적으로 조금씩 외로움에 관여하지만, 그중 어떤 게 가장 비중이 큰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속상할 때, 맛있는 거 먹을 때, 좋은 거 볼 때, 좋은 음악 들을 때, 자랑할 일 있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심규선의 콘서트를 보며, 자랑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콘서트를 보기 전에는 친구와 레스토랑에 갔다.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그냥 들어갔는데 세상 맛없는 스테이크를 먹었고, 그렇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아주 좋았다. 나는 최근에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읽었다고 말했는데, 친구는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오!! 이승우 책을 읽은 친구라니, 우리는 이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친구는 이승우의 소설이 처음이라 했는데 아주 잘 읽혀서 좋았다고 했다. 하나의 감정 혹은 관계에 대해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니 감탄했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 우리는 책 속에 나오는 커플에 대해 얘기하고 깔깔 웃다가, 이내 질투와 열등감에 대해 얘기를 했다. 친구에게 나는, 이승우가 질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열등감에서 비롯된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때 내 안에 열등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닌 게 아니었다, 라는 얘길 하면서 아팠던 거다.























책에서는 세 명의 관계에서 질투와 열등감이 비롯된다. 그리고 그 세명의 관계를 얘기하기 전에 너무도 유명한 오셀로와 이아고 얘기를 먼저 꺼낸다.



그의 진술 속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는다. 그는 자기가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며 한량들과는 달리 사교술이 없고 또 나이가 많다고 고백한다. 그의 질투망상 속에서 라이벌로 등장한 카시오와 비교할 때 그의 검은 피부와 비사교성과 상대적 늙음은 결정적인 약점이 된다. 그는 못생겼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 줄 모르고 거기다가 나이까지 많다. 카시오는 잘생겼고 사교적이며 거기다가 젊다. 의심을 부추기는 이아고의 술책에 쉽게 넘어가게 된 이유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셀로의 이런 약점이다. 약점에 대한 오셀로의 자의식이다. 그는 용맹한 전쟁 영웅이지만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사랑만이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인데, 이제 그 믿음이 허물어지자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그리하여 그는 좌절한다.

이성에게 어필할 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언제든 질투에 빠질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편파적이지 않다. 나이, 용모, 경제력, 건강, 사회적 위치와 평판 같은 조건들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이런 사람을 질투 속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목마를 사람에게 물을 먹이는 것만큼이나 쉽다는 사실을 '오셀로'는 알려준다. 이아고가 아무 수고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오셀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원인 아내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것만으로 그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질투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약점의 크기를 나타내 보인다. 사랑해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 있어서 질투하는 것이다. 맹렬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열등감을 느껴서 맹렬하게 질투하는 것이다. (p.227-228)




나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읽으면서 그는 왜 이아고에게 속절없이 당하는가, 왜 그의 말을 믿는가, 하며 답답해했었는데, 이렇게 듣고나니 모든 것들이 설명되는 것 같다. '약점의 크기'가 질투의 크기라니, 그럴 리 없다고 맹렬하게 고개를 젓고 싶지만 나도 모르게 끄덕이고 있다. 아, 나는 내 약점을 들여다보고 이내 절망한다. 아픈 순간이었다.



책 속에서 형배는 선희를 불러낸다. 2년10개월전에 선희가 형배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형배는 그때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선희를 거절한 적이 있다. 그런데 2년 10개월 후에 우연히 다시 보게된 선희에게 반하고 만다. 그는 그녀를 불러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선희는 이미 마음이 식어있고, 영석이라는 애인이 있다. 그러니 형배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을 뿐더러, 이놈이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야말로 형배에게 '아무 마음이 없다'. 선희가 형배를 만나고 있는 이 순간에 영석은 선희에게 전화한다. 부재중전화 12번이 뜰때까지 선희는 전화가 온 줄을 몰랐고, 그의 계속되는 질문에 '친구와 호프집에 있다'고 말한다. 그가 계속 의심하고 불안해하자 결국 '형배와 호프집에 있다'고 말하고 그의 의심과 불안을 풀어내기 위해 그에게 여기 오라고 말한다. 와서 자신과 그를 보면, 그리고 자기를 부를 정도라고 생각하면 그의 불안함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영석의 불같은 질투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사랑이 아니라 그의 열등감이다. 그는 오셀로가 그런것처럼 자기가 이성에게 어필할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잘생기지 않았고 사교적이지 않으며 나이도 많은 편이다. 오셀로가 가진 모든 약점을 그도 가지고 있다. 오셀로와 마찬가지로 의심과 질투를 부추기는 이아고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사랑의 열정이나 그녀의 품성에 대한 믿음은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의심의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피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자원이 선희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p.229)




영석은 자신의 애인인 선희와 형배의 만남의 자리에 가게 된다. 그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한 모든 말은 오히려 그의 의심을 부추긴다. 왜 '우리'라고 말하지? 왜 '이사람'이라고 말하지? 호칭조차 죄다 거슬린다. 게다가 영석은, 과거에 선희가 형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모든 것들은 의심과 불안의 원천이 된다. 그는 폭발할 듯 질투한다. 의심을 풀어주기 위한 모든 말들은 오히려 그 불을 크게 키운다. 선희가 다르게 말했다면, 형배가 다르게 말했다면, 그랬다면 영석의 기분이 나아졌을까? 뭐라고 어떻게 말했든 그것은 그 질투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더 큰 불을 만들었을 것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결코 실체를 보지 못한다. 그는 자세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실은 다른 것, 엉뚱한 것을 보고 있다(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것, 들여다보면 안 되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지나치게 배율이 높은 자기 내부의 현미경을 통해 영석이 본 것은 선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석은 자기가 보고 있는 사람이 선희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질투하는 사람이 질투하는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그, 또는 그녀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허상이기 때문에 꿈쩍하지 않고,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외부존재의 조종을 받지 않는다. 허상은 견고하다. 그는 불안이 현실화된 것에 좌절하고, 어쩔 줄 몰라서 소리 지르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운다. (p.232)




아아, 나는 이승우의 이 질투에 대한 글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이 책이 너무 힘들었다. 전체적으로 그동안의 이승우 책에 비하면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이렇게 곳곳에서 사랑에 대해 그리고 질투에 대해 얘기해주면서 아주 큰 칼로 내 배를 훅훅 찌르는 것만 같다. 너무 아파서 나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다. 피가 철철 나는 것 같다.


이 책을 이미 읽은 친구에게, 내가 몰랐던 들여다보지 않았던 열등감에 대해 얘기했다. 이 책을 읽고나니까, 내가 이 부분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질투 속으로 타들어갔던 것 같아, 라고.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친구가 말해주었다. 글쎄, 그 부분에 대한 열등감이 너에게 조금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보다는 이것과 이것이 네 큰 열등감이 되었을 것 같아, 라고. 그때, 친구가 '어쩌면 너의 열등감은 이것이었을 것 같아' 라고 해주었을 때, 와- 진짜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내가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늘 내가 괜찮다고 했던 것,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아니야, 라고 했던 부분에서 나는 언제나 내 약점을 모른척하고 있었던 거다. 그것은 내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인데, 나는 그것을 마치 약점이 아닌것마냥 행동했고, 다른 사람에겐 약점일 수 있겠지만 아니라고, 나에게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건데, 아니, 그것은 내 약점이었던 거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약점을, 내가 꼭꼭 숨겨두었던 약점을, 내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약점을, 아무도 모르게 하겠다고 생각했던 그 약점을, 친구가 이미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다. 아..쓰는데 눈물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이제 인정한다. 그것이 내 약점이었음을. 그리고 그 약점이 내게 극복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게됐다. 내가 그것을 약점이라고 인정해버린 이상, 나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그 큰 약점을 가지고 잘도 사랑하고 살았구나..... 하아-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외의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 때 발동된다. 자기에게(만) 속해 있다고 간주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관심을 보일 때 그는 연인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마음속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자, 즉 연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경쟁자는 사랑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경쟁자가 존재하는 한 그의 소유는 완전하지 않고 그의 사랑은 안정적일 수 없다. 그러니까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를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질투하는 자가 떠올릴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것이다. 이런 강박증은 강력한 에너지가 되어 그를 태운다. 연인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이다. (p.235)





그렇지만 나는 안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나의 약점으로 시작된 일이라면, 내가 제거해야 할 것은 나의 약점이지 경쟁자가 아니다. 경쟁자를 제거한다 한들 내 약점이 강해지는 게 아니니까. 내 약점은 온전히 그자리에 남아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킬 테니까. 경쟁자를 제거해도 경쟁자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계속 들어올 수 있다. 그때마다 어떻게 경쟁자를 제거하며 산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늙어갈 순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왜, 그 유명한 '야광토끼'도 자신의 노래 <can't stop thinkink about you>에서 말하지 않는가.



만약에 내가 너를 그녀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그래도 넌 그녀를 택했겠지 난 그냥 아닌거지








'누구 때문에' 가 아니라, '나 때문'이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이런 약점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아아 이 혹독한 아픔... 고통의 절정........





여러분, 책이 이렇게나 좋다. 아니, 소설이 이렇게나 좋다. 이승우가 쓴 '소설' 한 권으로 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질투에 대해 생각하며, 이 모든 감정을 갖고 있던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사랑을 공부하고 싶었고 그렇게 인문학 책도 사뒀는데, 잘 쓰여진 소설은 그 어떤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혹은 심리학 책보다 더 내게 큰 위로와 생각거리를 준다. 소설이 이렇게나 위대하다. 소설이 이렇게나 좋아. 소설을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폄하하는 사람에게 나는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 그건 당신이 '그렇게밖에' 읽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소설은 그 한 권에 담아낸 이야기와 인물 만으로 아주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알려주고 느끼게 해주고 생각하게 해준다. 나는 소설만 읽어도 진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소설 진짜 울트라캡숑 짱이다!!



게다가 그 소설을 함께 읽은 친구라니, 와, 진짜 어메이징한 축복 아닌가. 같은 책을 읽은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이렇게나 의미 있다. 내가 내 약점은 a 인가봐, 그래서 그런가봐, 라고 했을 때, 아니, 너의 약점은 b 도 작용했을 거고, 무엇보다 c 였을 것 같아, 라고 말해주다니. 여러분, 이런 친구 있는가... 진짜 짱이지 않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설 한 권 때문에 그리고 그 소설을 읽은 친구 때문에 나는 나의 약점을 마주하게 되었다.



건배!

(이게 아닌가?)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계속해서, 이렇게나 지속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데도 아직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많은 면들이 있다. 이제와 알아가는 나의 어떤 면들이 새롭고 좋기도 하지만, 이런식으로 약점을 마주할 때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어진다. 요즘에는 여러가지로 겸손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다. 



그래도 사랑은 계속된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8살 조카와 통화하는데 영상 속의 조카가 내게 익숙한 티셔츠를 입고 있다.



- 어? 타미야, 너 지금 이모가 미국에서 사다준 티셔츠 입고 있는거야?

- 응!

- 아 이모 기분이 너무 좋아. 타미가 그거 입고 있는 거 보니까 이모 행복해.

- 나 이거 매일입는데, 이모?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축복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해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제 전화끊고나서 나는 엄마와 남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타미가 진짜 제일 좋아. 나는 얘 진짜 너무 사랑해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뭔가 울고 싶을 정도로 사랑이 폭발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기 직전까지 가슴속에 사랑이 너무 넘쳐가지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혹여 앞으로 네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나는 그래도 끝까지 너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할거야, 내 사랑은 계속될거야,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가슴속에 사랑이 가득찬 채로 잠들었다. 아주 끝내주는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서, 아, 자기 전에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하고 대화하는 게 최고야!! 이백번 생각했다.



가슴 속에 사랑이 가득한 채 잠들 수 있다니!!!



감정의 변덕스러움 말고 그에 못지않게 치명적인 것이 또 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맺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관게를 보장해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일부만, 예컨대 마음에 드는 부분만 사랑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정말 참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버릴 것인가. 가슴은 취하고 다리는 버릴 것인가. 그럴 수 있는가. 가령 잠들기 전의 달콤한 키스는 취하고 그 사람이 코 고는 것을 버리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그 사람과의 키스를 즐기려면 그 사람의 코골이도 용납해야 한다. 키스의 달콤함을 제공한 사람과 코를 심하게 골아 잠을 방해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감정과 감각에만 의존할 때 사람은 키스의 달콤함만을 기대하고 바라게 된다. (p.106-107)

감정이나 감각이 아니라 그보다 강제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의지에 기반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의지에 입각하지 않는 사랑은 일관성 유지가 힘들다. 결혼 제도는 장치로서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키스의 달콤함을 제공하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고, 곁에서 코를 골아 잠을 방해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고 제외시켜버릴 수 있는 인간의 비겁하고 나약한 본성 때문에 사랑은 외부에서 강제된 결혼이라는 의지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p.107)

스스로 설 힘이 없어서 굳건히 서 있는 큰 나무를 의지하고 자라나야 했던 넝쿨식물이 어느 순간 나무를 꼼짝 못 하게 붙들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기이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넝쿨식물의 손이 나무의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무가 넝쿨손에 붙들려서 옴짝달싹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넝쿨식물의 넝쿨이 나무를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함을 앞세워 강한 나무를 꼼짝 못 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끌어안는 것이 장악의 방법이었다. 사랑이 지배의 수단이었다. (p.158)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기 안에만 있던 말들을 그녀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을.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 일어난 후 다른 세상을 겪고 있다는 것을. 그는 또 그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목소리를 캡슐에 싸인 것처럼 듣고 있다는 것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무엇에 홀린 것 같은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p.189)

잘 보이기 위해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점에서 우정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편하고 이상적인 관계이다. 보르헤스는, 사랑과는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정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는 증명해야 할 불편한 의무(우정에는 없는)가 사랑에는 주어져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증명할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의무를 당연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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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 2017-06-19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의생애 재밌게 감명깊게 보셨네요 저도 그랬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질투‘라는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습니다. 그 질투가 자기약점의 크기에 비례한다니.. ㅎㅎ

다락방 2017-06-20 08:25   좋아요 3 | URL
제가 이승우의 소설을 참 좋아하고, 국내 작가중에서 이승우를 제일 좋아하는데 말이죠, 이번 소설은 유독 저를 많이 건드리네요. 아주 가슴 아프게 읽었습니다, 자강님.
질투가 자기 약점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말이 정말 아팠어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요..
 
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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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는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는 데 정말 뛰어난데, 이번 책에서는 사랑에 대해 위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아, 질투에 대한 부분에서 나는 너무 아파지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리뷰를 쓸 수가 없을 것 같다.

아파 엉엉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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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s1211 2017-06-16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아픔 한번 느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17-06-19 11:36   좋아요 1 | URL
꼭 한 번 이승우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유부만두 2017-06-16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승우 소설 안읽어봤어요..... 미지의 세계. 그래서 궁금하지만 두렵기도해요

다락방 2017-06-19 11:36   좋아요 1 | URL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승우는 정말 사람의 내면을 잘 그려내요. 만나보세요!

책한엄마 2017-06-17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에 넣어 둡니다.

다락방 2017-06-19 11:37   좋아요 2 | URL
꿀꿀이님께도 좋은 책이 되어야 할텐데요. 훗.

유부만두 2017-06-2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을까했는데 이ㄷ진이 하도 지잘난 분석을 다다다 붙여놔서 읽기도 전에 정내미가 떨어졌어요;;;;

다락방 2017-06-23 10:02   좋아요 1 | URL
유부만두님, 제가 얼마나 똑똑하냐면요, 얼마나 현명하냐면,

이동진 책을 읽지 않으며 팟캐스트도 듣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17-06-2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어야해요! 난 멍충이야! 잉

다락방 2017-06-23 10:10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좋았어요, 유부만두님.
그래서 이동진으로 먼저 만나신 게 안타까워요 ㅠㅠ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저에 대해 엄청 돌아보게 됐고요.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책 ㅠㅠ


저 마티네의 끝에서 페이퍼 쓰고 있어요.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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