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마도 6학년 쯤이었던 것 같은데, 학교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단독주택이 모여있는 동네에 살았는데, 학원에서 우리 집으로 좀 더 가깝게 가기 위해서는 바보골목 이라는 곳을 지나야 했다. 좁은 골목이었는데, 그 골목의 집에 바보가 살아서 사람들이 바보 골목이라고 불렀던 곳이었다. 환한 낮이었지만 그 골목엔 인적이 드물었는데,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집에 가고 있는데, 저기 더 작은 골목 벽에 친구의 여동생이 기대어 서있었다. 친구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여동생과 더 차이 많이 나는 아주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당시에 그 여동생은 6-7살 정도로 기억한다. 이 어린아이가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거다. 나는 저 어린애가 왜 혼자서 저기에 기대어 서있지? 하고는 아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친구와 나도 친했고 그 가족 모두와도 아는 사이었다. "**아!" 하고 부르니 아이가 고개를 들고는 나를 봤다. 그리고는 "언니!" 하더라. (여기까지 쓰는데 또 울컥한다) 나는 "너 거기서 뭐해?" 하고 가까이 갔는데, 아이가 서있던 맞은편 벽에 당시에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오빠가 똑같이 기대어 있더라. 저 사람은 누구지, 하고는, 그런데 저 사람하고 이 아이가 볼 일은 무엇인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 아이의 손을 잡고 '가자' 했다. 아니는 내 손을 잡고 나를 따라왔고, 나는 어쩐지 그 오빠가 나를 따라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그냥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나는 아이랑 걸어가면서, 너 저기서 뭐했어, 했더니, 오빠가... 고기 준다고 따라오라 그래서.... 갔는데..... 천천히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바지를 벗으라고 했어... 라고 하는 거다. 아이는 그 어린 마음에 어쩐지 안될 것 같은 생각 때문인지 그걸 행동에 옮기지 않은 채 있었던 거고, 내가 그 참에 아이를 본것이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스무살이었고 아직 핸드폰을 쓰지 않았던 때였는데, 밤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는데 내가 지나치는 길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렸다. 옆은 공사현장이었고 어두웠다. 나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일일지 짐작이 되어 누군가 어른 남자를 발견하게 되면 도와달라 말할 생각으로 앞을 향해 뛰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뛰다가 저 여자에겐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뒤를 돌아 여자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어쩌면 그 남자가 나까지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당시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달리면서 나는 내가 간다는 걸 알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달렸다. 여자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도착해보니 남자는 없고 여자 혼자였다. 여자는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물으며 밝은 곳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여자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같은 반 이기도했다. 몇 년 후 친구와 까페에 들러 차를 마시려는데, 그 때 그 동창이 까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더라. 그 때 그 동창이 내게 말했다. 그 당시에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너였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정말 고마웠다고. 사실 그 일이 있은 후,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혼자 떨면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얼마간 학교를 가지 못했다.




내가 직장인이었을 때, 이건 몇 년전의 일이다. 다른 부서에서 성추행이 있었다. 나보다 직급 높은 남자가 가해자였다. 그 남자가 그러는 것을 여러차례 들었는데 이번엔 더 정도가 심한 거였다고 했다. 나는 그 부서의 가장 직급 높은 여자에게 인터폰을 해서 '그것을 하지말라고 다같이 말해라'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본인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해야죠.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면 안해요' 이러는거다. 하는수없이 나는 그 부서로 내려가 직급있는 여직원들을 임원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임원에게 가해자를 불러달라 했다. 임원은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황. 나는 가해자가 들어오고나자, 이 사람들 앞에서 확실히 말하겠다, 한 번만 더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일 그만두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는 내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내가 잘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계속 떨려나왔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내 자리에 돌아왔는데 그 후에도 계속 떨렸다. 손이, 몸이 떨렸다. 떨면서, 내가 왜 떠는지를 모르겠더라. 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떠는거지?






어제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를 뉴스룸에서 보았다. 평소에 그 시간에 집에 잘 있지도 않고 뉴스도 잘 보지 않는 요즘이었는데,  보게 됐다. 피해자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왔다고 말하는 서지현 검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엄마, 저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서지현 검사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우리의 목소리가 떨려야 하는걸까.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그 검사 정말 얼마나 용기를 냈을까'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안다.



나는 이것말고도 무수히 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의 경험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어쩔 수 없이 연인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몇 번이나 숨을 참아야 하는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당신이 그 자리에서 말하기까지 그 긴 시간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말하는 그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야 했을지 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어 고맙다.

서지현 검사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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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1-30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뉴스룸 봤는데, 이어폰으로 설거지하며 듣다가 울컥해서는 설거지를 멈쳤어요.
검사라는 자리에서도, 여자는 여자일 뿐이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고,
오히려 불이익을 받아왔던 걸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왔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는데.......

다락방님의 오늘 글, 고마워요.

서지현 검사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용기를 내 줘서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어요.

다락방 2018-01-30 10:45   좋아요 2 | URL
지금은 책에 쓰긴 했지만, 제가 이 공간에 제 성추행 피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죠. 그 때 그 글을 저녁에 적어두고는 밤에 한 숨도 못잤어요.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그 글을 감췄었어요. 저도 그 글을 쓴 이유가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를 말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말을 하는 게 왜그렇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저는 잠깐 공개했다 감췄는데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 서지현 검사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끌어모았을까요. 그리고 지금 또 얼마나 많은 말들에 시달릴까요. 떨리던 목소리가 내내 귀에 남아 있어요.


2018-01-30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공개 2018-01-30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지현 검사님과 다락방님께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고마운 마음도 함께 보냅니다.
다른 모든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도 항상 지지하고 연대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락방 2018-01-30 11:04   좋아요 0 | URL
지난번 만남에서 jsshin 님이 하신 말씀도 생각났어요. 그 때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 다음에 들어오는 여직원들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했던 말이요. 왜, 가해자가 아닌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더 잘해야 한다고 계속 다짐하게 되는걸까요? 너무 속상합니다. 하아-

별이랑 2018-01-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데 왜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위로인것 같아요. 잘못한게 아닌데 청심환을 먹어도 멈출 수 없는 떨리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플지...네, 우리는 알고 있죠. 공감합니다.

다락방 2018-01-30 11:11   좋아요 1 | URL
저도 어제부터 여러차례 계속 눈물이 나려고 해요. 잘못한 게 아닌 피해자가 계속 떨어야 되는 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사실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텐데요. 왜 잘못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떨려야 할까요. 가해자들에게 벌을 주는 게 피해자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가해자에게 벌을 주어야 피해자가 ‘저 사람이 나쁜 거다‘라는 걸 알 수 있을테니까요. 그게 안되고 있어서 피해자들이 여전히 계속 아프고 힘든 것 같습니다. 세상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요?

꿈꾸는섬 2018-01-3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울컥하게 돼요.
좋은 글 감사해요.
저도 지지와 연대를 보냅니다.

다락방 2018-01-30 14:05   좋아요 0 | URL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오기는 할까요. 언제나 더 나쁜 소식들이 터져나와서 끔찍해요.

비연 2018-01-3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고...
그래서 이 모든 악몽들이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없어져야 해요. 그 때까지 끝없이 끝없이 애써야 한다고,
그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이제 얘기가 터져 나왔으니 밀어붙여야 한다고
부들부들 떨면서 결의를 다지게 되네요.

락방님의 글 너무 감사요. 그 결의가 바래지지 않도록 우리 서로 서로 공감하고 노력하고 얘기하고 그래요.

근데, 참 속상합니다. 이런 얘기를 피해자가 직접 방송에 나와서 애기하는 어려움을 겪을 때까지 놔두다니.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을. 그래야 이런 일들에 대한 인식이 깨이고 차츰이라도 없어질 것 같아요. 불끈.

다락방 2018-01-31 09:01   좋아요 0 | URL
법에 호소하고 그 법이 피해자의 얘기에 귀 기울여줬다면 피해자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얘기하는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텐데요. 너무나 가해자 위주의 판결들이라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비연님 말씀대로 참 속상하네요. 반드시 처벌을 내려서,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기 마련이라는 걸 반드시 알려서, 피해자를 위로하고 앞으로 일어날 범죄도 예방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머큐리 2018-01-3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지현검사가 중간에 사퇴하는 일 없도록 해야죠
피해입은 자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요...
락방님과 같은 마음으로 지지하고 연대합니다

다락방 2018-01-31 09:03   좋아요 0 | URL
중간에 사퇴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들까, 저도 어제 하루종일 생각했어요. 이런 일에 있어서 사실 자기 조직을 떠나는 게 지키는 것보다는 덜어렵겠죠. 저도 서지현 검사가 중간에 사퇴하는 일 없이 잘 지켜내기를 바라고, 멀리서나마 힘을 보내고 싶어요. 제 힘이 닿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시이소오 2018-01-3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입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힘입어 이땅에서도 미투 운동으로 활활 번지기를.

다락방 2018-01-31 09:05   좋아요 0 | URL
해시태그를 달고 문단내 성폭력과 공연예술계 성폭력, 오타쿠내 성폭력등이 SNS 에서 이미 활발하게 운동하고 있었고 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어요. 이제 검찰내 성폭력고발도 여기에 함께하게 되겠죠. 아무쪼록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많이 힘들겠지요...

카스피 2018-01-3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저도 서지현 검사의 용기에 지지를 보냅니다^^

다락방 2018-01-31 09:06   좋아요 0 | URL
네!

2018-02-10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혹시 당신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행복하지 않다든지요."

"잭슨, 대프니 이야기를 옮기고 싶지는 않아요."

잭슨이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러니까 뭔가 이야기를 하긴 한 모양이군요."

"부탁이에요. 대프니가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그건 두 사람이 의논할 일이에요."

"행복하지 않다고 하던가요?"

"음, 별말 안 했어요. 전 몰라요.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요."

잭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앰버,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줘요. 부탁이에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거예요."

"그래도 말해봐요."

앰버는 한숨을 쉬었고 가운을 느슨하게 해 가슴골이 슬쩍 보이도록 했다. "대프니 말이 부부관계가 지루하고 너무 뻔하대요. 그리고 매달 생리가 시작돼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알 때면 너무 기쁘대요." 앰버는 초조한 척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대프니에게 말하지 말아요. 대프니가 그러는데 당신은 아들을 간절히 원한다면서요? 그녀는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을 거예요."

잭슨은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신 말이 옳아요. 당신에게는 대프니의 감정을 알 권리가 있어요. 부탁이니 ……대프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그는 계속 말이 없었다. 얼굴이 시뻘겠고 앰버가 그동안 보지 못한 암울한 표정이었다.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중략)


잭슨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프니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기뻤다고?"

"네, 그랬어요. 정말 유감이에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아이가 또 생기면 얼마나 좋을지 이야기했는데." 잭슨은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앰버는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걸 대프니에게 말하지 말아줘요. 비밀 지키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고는 끝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거 알아요?"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대프니는 이 이야기를 할 때 비웃으며 즐거워했어요. 당신을 속이는 일과 당신이 그걸 때닫지 못한다는 게 즐겁다는 듯이요." 앰버는 눈앞에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어쨌든 이 게임을 진전시켜야 했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잭슨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고통이 가득했다.

"비웃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p.209-211)



















잭슨은 대프니를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에겐 관심도 없이 온통 신경이 대프니에게 쏠려 있으면서, 어째서 대프니가 하지 않은 말을 듣고 괴로워하는걸까. 앰버가 최근에 대프니랑 가장 친한사람이고 또 대프니가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왜 대프니가 아닌 다른 여자가 전한 말을 듣고 괴로워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이에 신뢰는 기본일텐데, 불행하다면 뭔가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직접 했어야 되는 게 아닐까. 저 부분을 읽는데 너무나 괴로워졌다. 이봐요 잭슨, 대프니의 말을 들어요, 대프니가 하는 말만 들어요, 당신의 아내는 대프니잖아요, 나는 여러차례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앰버의 말을 들었다. 앰버가 대프니와의 사이를 떼놓기로 결심하고 한 거짓말들을 듣고 괴로워하고 그렇게 앰버랑 자버린다. 자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고 또 자고, 그렇게 아내를 속이는 거다.


물론 이 책은 뒤로 갈수록 잭슨과 대프니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아니란 것이 명백해지므로 저 상황 모두가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딱 저부분까지 읽었을 때, 내가 그 뒤의 이야기들과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했을 때, 저 장면은 그저 내게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다른사람이 전한 말만 듣고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야기인 거다. 너무 가슴이 아픈 거다. 왜? 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입으로부터 그 말을 직접 듣지도 않았는데, 왜 전달되는 말만 믿고 괴로워하고 그 다음 행동까지 결정하는거지?



앰버와 잭슨, 잭슨과 대프니에게 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정이 아니더라도 저런 일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나에 대한 말을 전해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저런 상황이 내게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거다.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전하면서, 사실은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 나는 전달하는 사람에게 이 관계를 깨기 위한 악의가 있었던 것은 비난할 일이지만, 그 전달되는 말을 믿고 나를 판단하는 상대에 대해서 더 실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잖아, 나도 당신을 사랑하잖아. 그런데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 감정, 기분에 대해서 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내가 당신에게 실망한 일이 있다면 당신에게 직접 말할게, 내가 당신에게 감정이 식어버렸다면 당신에게 직접 말할게, 당신 역시 우리 관계가 행복하지 않다면 나한테 직접 말해야지, 그걸 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그걸로 이 관계를 정리하려는 거야? 한없이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간질은 나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건 더 나쁘잖아. 아 너무 속상한 거다. 속상해... 속상했어. ㅜㅜ



당신과 나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말만 믿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말은, 우리 서로만의 것이어야 해. 그것이 특히나 우리의 관계 우리의 감정에 관한 것이라면 특히 더.





주말에는 친구와 불국사에 다녀왔다. 늦지 않게 불국사를 걷기 위해 이른 시간 기차를 예약한 터라, 주말에도 늦잠을 자지 못하게 됐고, 그렇게 친구와 아침 일찍 서울역에서 만나서 기차를 기다리면서는 너무 추워, 아휴, 우리가 또 왜 이러고 있는거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러면서 기차에 탔다. 친구랑 기차 안에서 수다수다 떨다가 불국사 역에 도착했는데, 아아, 추운데 우리 걸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오오, 안추운거다! 여긴 날씨가 좋아! 그래서 우와 다행이다, 하고는 불국사역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도 2분 후에 도착했고, 이거 불국사 가나요? 물으니 터프한 여자기사님께서 네, 라고 답해주셔서 버스를 탔는데, 너무 기분이 좋은 거다. 또 실실 웃게 되고 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불국사 앞에 내려서는 어디가서 점심을 먹을까, 하고 손칼국수 집을 선택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은 작은 곳이었고 여자 사장님 혼자 일하시는 곳이었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서인지 가게는 조금 추웠지만 국수랑 해물파전이 맛있었어. 이걸 시켜두고 내가 막 갈등하다가 소주도 한 병 주문했더니, 사장님은 엄청난 사투리로, 그래 여행왔으면 낮술 한잔 해야지, 하면서 소주도 주시고, 그게 여행이라고 하시면서 막 말씀하시는데, 그냥 이런 것도 다 넘나 좋았고. 낮술 한 잔 걸치고 점심으로 배 채우고 불국사에 오르니,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놀랐다. 그리고 일전에 왔을 때랑은 다른 풍경이어서(겨울 불국사는 처음이다) 그냥 그것대로 좋고, 날도 좋고 하늘도 맑고 그래서 친구랑 걸으면서 오길 잘했다고, 역시 이래서 와야 한다고 계속 호들갑을 떨었던 거다. 그렇게 불국사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방이 생각보다 좋아서 둘다 신나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 오 좋다좋다 ㅋㅋㅋㅋㅋㅋ 여행은 역시 숙소가 좋아야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면서 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우리 낮잠 한 시간 잘까? 이러고 피곤을 풀었다. 전날 둘다 빡센 일정이었는데 다음날 일찍 일어나기까지 해서 고단했던 터다. 그렇게 우리는 낮잠을 잤어. 낮술, 낮잠... 세상 좋은 것....


그렇게 저녁에 일어나서 우리는 콘도에 위치한 소고기집에 가서 소고기 시켜 묵고 ㅋㅋㅋㅋㅋㅋㅋ 구워서 묵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다좋다 와인도 시켜 마시고, 공기밥에 된장찌개에 냉면도 먹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갈비도 추가로 먹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러다가 야 배터져서 미치겠다, 이러고 콘도 주변을 산책했다. 그렇게 산책하다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숙소로 들어와서는 씻고, 장봐온 와인과 안주를 꺼내서 나란히 침대에 앉아 그것들을 먹고 마시면서 텔레비젼을 틀었다. 친구랑 나는 똑같이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해서 그런거 뭐하나, 하고 채널을 돌리다가 국제부부들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게됐다. 하필이면 패널이 ㅈㅇㅎ 이어서, 우리 둘다 너무 싫어해서, 꼴도 보기 싫다고 돌리자고 했지만, 나는 멜버른에 사는 부부를 끝까지 보고 싶은 거다. 멜버른만 보고 돌리자, 하고는 보는데, 이 부부가 휴가 마지막날 와이너리에 가는 게 나온 거다. 와이너리 가서 와인 시음하고 같이 피자 한 판씩(각자!!) 시켜서 식사를 하는데, 아아, 이상적인 삶이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 막 이렇게 된거다. 게다가 잔디밭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넘나 부러운 것.... 나도 와이너리 가면서 살고 싶다. 매일 가는 건 아니어도 어쩌다 한 번씩 와이너리 가서 시음해보고, 우리 이 와인 살까? 이러면서 차 트렁크 가득 와인 싣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와인 차곡차곡 와인 냉장고에 넣고 사는 삶.....너무 아름다워. 뷰티풀 라이프. 저것이 내가 바라는 삶. 나는 요트 안타도 되고, 유람선 안타도 되는데, 와이너리는 가끔 가면서 살고 싶어. 우리도 각자 피자 한 판씩 시켜서 먹으면서, 그렇게 살자.. 피자.. 내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각자 한 판씩 시켜먹는 아름다운 삶.... 뷰티풀 원더풀 라이프. 와. 와이너리 가는 부부라니... 멜버른... 세상 좋네....... 부부가 와이너리를 갈 수 있다니,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와이너리 가는 부부라니. 와 완전 나의 로망인 것이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멋져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나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이너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멜버르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이너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당신이 운전을 하면 내가 와인을 살게요..............트렁크 가득 내 돈줄게 와인 채워! 크- 멋지구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름다워 원더풀 라이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이런거 보고 감탄하다가, 그다음 콜롬비아 부부 나오는데, 우리는 ㅈㅇㅎ 참을 수 없다!! 이래서 다른데 돌리다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영국편]을 보게 됐다. 친구는 이미 본건데, 이거 같이 보자면서, 이거 진짜 니가 좋아할거라고, 이거 보고 너랑 한우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그래서 같이 보는데 오와 나도 한우먹으러 가자가자, 가자가자 했다. 너무 좋아. 이 영국 남자들이 한국에 와서 한우를 먹는데 여태 자기가 먹어본 소고기 중에 최고라고 막 그러는 거다. 친구는 이 영국 남자들이 말도 되게 정중하게 하고 되게 매너있다고 하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도 되게 매너있는 말투와 억양이어서 너무 보기가 좋은 거다. 오, 좋은데? 게다가 장교가 되겠다는 멤버 한 명은 내 타입이기도 했어. 약간 재이슨 스태덤 삘이야... 어쨌든 그러다 우리 런던 갔던 얘기 하면서, 우리 영국 다시 가자, 다시 꼭 가고싶어, 그 때 못간 레스토랑도 가보고 싶고, 뭔가 아쉬웠어 다시가자, 이런 얘기 하면서 보는데, 아, 우리가 같은 거에 재미를 느끼고 같은 걸 보면서 대화를 나누니까 세상 좋구나 싶은 거다. 그렇게 준비해온 와인과 맥주를 다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올 친구를 기다리며 음악틀 블루투스 스피커로 켜두었는데, 샤워를 마친 친구가 나와서는, 지금이 너무 좋다고 하는 거다. 늦잠, 좋은 음악, 여유로운 분이기라면서, 지금이 너무 좋다고 계속 그래서 덩달아 나도 너무 좋았다. 좋구먼....우리는 그렇게 컵라면에 물을 부어서 먹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 노래 좋네, 이 노래도 좋다, 했다. 다, 내가 틀어둔 음악이었다. 크.



그렇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친구는 영국에 다시 가자는 내 말을 기억하고는, 또 혼자 어떻게 갈까, 생각하면서, 우리 이번에는 영국에 다시 가면 폴란드에도 들를까, 막 이런 얘기하고, 아니야 그러면 폴란드랑 영국은 좀 멀어서 별로인 것 같아, 이런 얘기 하면서, 또 다음 여행 계획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번 여름엔 어디 갈거야? 친구가 물었고, 글쎄 하와이를 가고 싶은데, 막 이러면서 얘기하는데, 뭔가 같은 걸 좋아하고 같은 걸 즐길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좋구나 싶었다. 소고기 먹을 때도 너무 비싼가? 하고 내가 멈칫하니까 친구는 먹어먹어 먹자먹자 이래가지고 걍 소고기에 돈을 퍼붓고 왔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친구랑 말레이시아도 한 번 가야하는데. 거기 공항에서 파는 스테이크가 저렴해....그거 먹으러 가야하는데....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 조만간 한우 먹으러 강원도에 갈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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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굉장히 똑똑한 소설이다. 1장은 빼앗는 여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2장은 빼앗기는 여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 1장만 읽어나갈 때 이 소설은 별다를 바 없는, 그저 뻔한 내용으로 진행이 되는 거다. 가난하게 자란 여자 그래서 부자가 되고 싶은 여자. 그런데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될 수 없으니, 이미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의 자리를 뺏어 부자가 되려는 여자. 너무 뻔한 내용이라 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진행되려는가 싶어지려는 찰나, 나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빼앗기는 여자의 시점에서도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나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고, 착한 사람일 것이고(이건 좀 아닌가...),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일 테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오만하고 잘난척하고 재수없고 다시는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흠없는 사람이 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다른 사람은 싫어할 수도 있고, 내가 다정하다고 보는 사람을 누군가는 쌀쌀맞다고 볼 수도 있다. 저 사람은 정말 완벽한 것 같아, 라는 누군가의 평가에 나는 '그 사람은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말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친구가 결혼할 남자를 내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친구가 만나지 말라는 남자를 내가 좋아하기도 하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나. 우리 모두가 한 사람만 같은 크기로 같은 식으로 보게된다면 세상은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훨씬 부조리해졌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바로 그걸 자연스레 보여준다. 한 사람에 대해 엇갈린 평가. 물론 한 쪽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완벽하다고 평하는 남자를, 다른 쪽에서는 처음부터 '어쩐지 뭔가 어딘가는 찜찜한' 사람이라 생각했었고, 주변에서도 '그 새낀 좀 이상한데... 어딘가 찜찜한데' 하고 생각했었다는 것. 이것들은 아마도 사람이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 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게 화려한 생활과 넉넉한 돈이라면, 그걸 이미 갖추고 있는 잘생긴 남자가 완벽해 보이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내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게 돈이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잘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에게 잘 대해줄 것인가' 에 있다면, 우리가 보는 방향은 아예 달라질 테니까, 한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엇갈린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강한 촉이 있다. 어? 이 사람은 좀... 아닌 것 같은데? 그간 살아본 내 경험에 의하면, 나는 이 촉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촉이 생겼다면, 그 촉을 무시하거나 깊이 눌러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옆에 두고, 왜 내가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 왜 내 촉이 내게 이런 말을 했는지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렇게 한 사람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하게 되는 두 사람의 입장에 대해 자연스레 보여주는 소설이 나는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1장을 읽을 때는 뻔했던 것이 2장을 읽으면서 오호라- 하게 됐달까. 잘했는데? 싶어진 거다. 그런데,



이 결말이 이런 식으로 흐른 것에 대해서는 '꼭 이래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을 나보다 먼저 읽은 친구와 토요일에 만나 이 책에 대한 얘길 했는데, 친구 역시 나처럼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 여자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미 화려한 생활에 깊이 들어가있는 여자의 자리를 '빼앗고자' 했다. 그녀가 가진 집이며 자리 재산 그녀의 남편까지도.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쁜 일이고, 그 나쁜일에 이르기까지 또 여러가지 나쁜짓들을 한 여자는 계속 저지른다. 물론 그전에도 그녀가 나쁜 짓을 했다고 나온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악녀'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또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여자라면 그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그 벌의 성질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나 역시 그녀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쁘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가 받은 그 벌이란 것은, 그러니까, '그래도 그 벌은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 벌 속으로 그녀를 밀어넣기 위해 부러 그녀를 악녀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싶어진 거다. 그러니까, 이 상황으로 밀어 넣은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것. 그 벌에 대해 쓰면 이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말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이야기가 뭔가 애매모호해지는데, 빼앗긴 여자가 빼앗는 여자를 응징한다는 이야기가 , 이 책에서는 속시원하지 않은 거다. 게다가 결말에 이르고 나면, 빼앗은 여자에 대해서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그랬어'라는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너무 과하게 풀어내버리는군' 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얘기까지 가진 않았어도 됐을텐데, 하는 것.



그래서 끝나고나서도 찜찜하다. 어느 순간 분명히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책장을 덮고 나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게다가 말끔히 해결된걸까, 감옥에 평생 갇히는 게 아닌데 모두가 다 괜찮아지는 걸까, 생각하게 되는 거다.



자, 빼앗긴 여자는 사실 나쁜 상황에 처해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빼앗는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했다. 알고보니 자기에게 접근한 그녀는 나쁜 여자였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데 이용해도 괜찮았다. 그래서 빼앗기는 여자는 자신의 나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상황에 빼앗는 여자를 밀어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쁜 여자니까, 그녀가 원했던 것이 어떤 일로 닥쳐올지, 빼앗은 뒤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는 후련할 수 있는 이야긴데, 이 책은 후련하지가 않다.



이 후련하지 않음은, 빼앗으려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이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진 육체적 힘도 센 남자'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남자가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그 남자가 힘을 가진 사람이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까.



빼앗는 여자에게 내려진 벌은 너무 가혹했고, 힘이 센 남자에게 내려진 벌은 너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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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29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포일 하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리뷰가 망했네... 제기랄......
추리 소설 리뷰는 앞으로 쓰지 않는 걸로....
에잇.....

다락방 2018-01-29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이것은 추리 소설인가? 잘 모르겠다. 친구는 로맨스 소설같다고 했다.

다락방 2018-01-29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면 스포일 해도 되지 않나?

다락방 2018-01-29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됐어..이미 등록을 마친 글이니 내버려두자...

비연 2018-01-29 10:1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이걸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시점요

다락방 2018-01-29 10:55   좋아요 1 | URL
전 무조건 경험주의라, 읽어보고 판단하는 게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또 이 책을 굳이 읽어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리뷰 보니까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 ˝)

(역시 도움 안되는 댓글 죄송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1-29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지 위의 이 4다락방토론회는......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8-01-29 10:55   좋아요 1 | URL
자아분열 일어났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lavis 2018-01-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의 실시간 의식의 흐름 대탐구♡흥미로바요

다락방 2018-01-29 17:21   좋아요 1 | URL
실시간 의식의 흐름 대탐구.... 라니. 자아분열을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며칠전에 한 친구가 일어로 세줄짜리 일기를 쓴 걸 보여줬다. 일어를 모르는 나는 친구의 일기를 읽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히라가나부터 시작한 친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발전이 놀라웠다. 이 친구는 한국어 말고도 2개국어를 더 하고 있는데 이제 거기에 하나의 외국어를 더하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히라가나부터 착실히 노력해서 일기까지 쓰게 되다니, 그간의 시간과 노력의 투자란 얼마나 값진것인가! 구몬영어 하다가 몇 개월 안되어 때려친 나를 반성한다...

 

또다른 한 친구는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간다는데, 커피를 좋아하고 더 잘 알고 싶어서 재미로 그리고 취미로 공부하러 다니는 거라 했지만, 지금의 직장이 혹여라도 위태롭다면 배운 커피로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갖고 있다고 했다.

 

또다른 한 친구는 그동안 되게 공부하고 싶었던 걸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살면서 지금이 제일 행복해, 행복해서 밤에 잠이 안와' 라고 말한다. 아, 나는 그 친구를 만나고 온 날 얼마나 에너지를 받았던지!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너무 매력을 느낀다. 하고 싶은 걸 하려는 사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보려는 사람,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하는 사람. 진짜 너무 좋고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친구가 세줄짜리 일어로 쓴 일기를 보여줬을 때도 나는 호들갑을 떨며 칭찬칭찬 했는데, 정말이지,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절로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다. 이런 거 진짜 너무 좋아!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게 바로 내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내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니까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게 되는 게 아닐까. 진짜 너무 좋으다... 나는 이렇게 뭔가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고 공부하고 이러는 사람들이 정말 너무나 좋아!! 좋다....

 

 

 

그래서 '엠버'가 좀 안타깝다.

 

 

 

 

 

 

 

 

 

 

 

 

 

 

 

아직 이 책의 절반밖에 안읽어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절반정도 읽는 걸로 추측했을 때는 가난하게 살았던 엠버가 호화롭게 사는 대프니의 삶을 빼앗고 싶어하는 걸로 보인다. 점심 사먹을 돈도 아껴야 해서 과일을 싸가지고 다니는 판에, 개인 요트를 가지고 옷방 하나에 명품 드레스를 꽉 채우고 커다란 기업의 오너인 남편을 가진 대프니의 삶이 너무 갖고 싶은 거다. 그래서 엠버는 대프니 부부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궁리한 뒤에 그들에게 접근해서는 그들과 친해진다. 대프니의 여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걸 알고, 자신 역시 여동생을 똑같은 병으로 잃었다고 하며 같은 상황에 대한 공감과 이해로 대프니의 절친이 되는 거다.

 

 

나머지 절반에 남은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아마도 다 읽고 아주 다른 얘기를 하게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엠버가 그러지 않았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자꾸만 했다. 물론, 내 생각대로의 삶을 엠버가 살게 된다면 사실, 이 책이 나올 의미가 없고, 이미 나온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그러지 말아요' 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웃었다. 일단 엠버가 내가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소설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엠버는 가난한 동네에서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자라서 스스로 가진 자원이 별로 없다. 그런데 대프니에게 접근하고 그녀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에 대해 공부하는 거다. 그 공부하는 부분은 이 책의 초반, 제2장에 나오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의 엠버, 공부하고 노력하고 외우고 계속 더 알려고 하는 엠버가 정말 너무 좋았다.

 

 

 

 

 

 

 

 

 

 

(위의 인용문은 이 책의 16-19 페이지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엠버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사람이고, 습득한 지식을 자신의 능력으로 발현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더 잘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검색하는 사람이라, 직장에서도 인정받는다. 그렇지만 엠버의 야망은 아주 커서 굳이 대프니의 자리에 자기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꾸미고 계략을 짜고....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이다. 주인이 없는 방에서 옷장을 훑어보고 혹시나 자기 신분이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데, 내게 그것은 지독한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거다. 그러니까, '나라면' 선택하지 않을 삶인거다. 이렇게나 열심히 공부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는 능력까지 키웠는데, 이렇게나 책을 많이 읽고 머리를 잘 쓰는 사람인데, 그래서 이미 가진 직업으로도(나중엔 대프니 부부의 회사에 취직해서 연봉도 오른다)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 이렇게만 살아도 이미 많은 걸 성취했는데, 그런데 왜 굳이 그렇게 대프니의 자리에 앉아서 모두가 우러러보고 호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하는 걸까.... 하고 자꾸 안타까운 마음이 되는 거다. 거짓말이 들킬까봐 신경을 곤두 세우고 누군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까 계속해서 긴장하고, 어떻게 저 남자를 유혹해야 하나 머리를 쓰는 그런 삶이 내게는 너무나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걱정과 안타까움은, 다시 말하지만, 부질없다. 왜냐하면 나는 엠버가 아니고 엠버 역시 내가 아니니까. 엠버가 엠버의 야망을 가지고 엠버의 삶을 사는데, 거기에 굳이 '나라면...'을 넣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거짓말을 꽤 피곤한 일이다.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이 거짓말인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내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하고. 그건 너무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나는 그게 너무나 싫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가도 결국 다시 진실을 말하게 되는데, 진실을 말하면 언제 누가 물어도 한결같은 답이 나오지만, 거짓을 말하면 언제 누가 물었을 때 답이 달라질 확률이 높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이럴 땐 이렇게 답하자'가 되어버려야 하는데, 그러면 진짜 개피곤한 일이지...

 

내가 열흘동안 집을 나와 남자랑 지내다가 결국 엄마한테 '사실 그 때 남자랑 있었어' 라고 고백 한 것도, 계속해서 그 여름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집에 안들어갈라고 며칠은 지방에서 친구들이 왔는데 함께 있어야 된다고 말했고 또 며칠은 회사 워크샵이 있는데 호텔 빌렸다고 말했어. 우리 회사 워크샵 내가 16년간 다니면서 한 번도 한 적 없고, 당시에도 엄마가 '너네 회사 워크샵 같은 거 안하잖아?????????????????' 이랬었는데, 내가 거기다대고, '그러니까 미쳤나봐, 이번엔 왜 하는건지 원...' 이딴 말 씨부리고.....집에 안들어갔다고 한다....나란 녀자...... 그런데 엄마가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 내가 혹여 외박이라도 할라치면 '회사 워크샵이니?' 물어보는 것이야.... 안되겠다 싶어서 일년 정도 거짓말을 유지하다 고백해버렸다. 엄마 너무 충격 받으셨고.....(비혼의 딸...남자랑 함께.....) 뭐 어쨌든 고백해서 나야 속이 시원한데...... 그렇지만 나중에 여행갈라 치면, '남자랑 가니?'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인생 뭐지. 역시 사람은 늘상 진실을 말하고 살아야 된다 .거짓말하면 세상 피곤해. 진실을 말해야 늘 한결같은 답을 할 수 있어...그게 내가 편하게 사는 길이야....

 

 

음....

 

 

아무튼지간에, 나는 엠버가, 그렇게 책도 열심히 읽고 그림 보는 것도 좋아하고 그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까지 알게 되는 게 너무 좋은데, 굳이 대프니의 자리에 내가 가겠다, 하지 말고...그냥 지금처럼 직장 다니면서 계속 공부하는 게 어떨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게 오구오구 우쭈쭈 뿜뿜 이야.... 내가 그걸 해줄 수 있는데. 좀 더 나은 네가 되어가고 있잖아, 이미 많은 걸 가진 사람이 되었잖아(돈 말고), 그러면 너에게는 충분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좋은 식으로 나타나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대체, 왜, 어째서, 그렇게 가장 호화로운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야........ 하아. 그러나 나는 엠버가 아니고 엠버도 내가 아니다. 엠버의 과거를 내가 살지 않았으므로, 나는 엠버에게 그러지말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간 살아온 엠버의 인생이 지금 엠버를 그런 야망을 실현하게끔 한것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아 인생..... 알 수 없는 것이 인생..... 그리고 우리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 내가 이것으로 충분하고 이것으로 행복하다 하는 삶을 어찌 엠버에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엠버가 지금 진행하는 삶의 과정 역시 나라면 선택하지 않을 삶이다. 너무 피곤해... 너무 에너지 소모가 커.... 나는 그냥 책 읽고 공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걸로 만족할거야. 주변에 계속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옆에 둔 채로... 그렇게 살래.......  역시 사람은 그냥 자기 깜냥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나는 아마도 호화로운 요트에 타보는 삶, 디올과 샤넬의 드레스를 옷장 가득 채우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음..그런데, 뭐 딱히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네. 굳이 선택한다면 나는 자연인......

 

곤드레밥 양념장에 비벼먹고 싶다..

자연인들 자꾸 밥에 뭐 넣고 해먹어. 그거 너무 맛있겠어.

예전엔 그런 밥에 대해 별 관심 없었는데, 요즘엔 막 밥에 뭐 잔뜩 넣고 해가지고 양념장 만들어 슥슥 비벼먹는 게 세상 맛있어 보인단 말야? 나는 요트보다는 곤드레밥과 양념장.... 소주를 냉장고에 가득 채워넣고, 아, 와인도 잔뜩 쌓아두고, 새들이 지저귀는 푸르른 숲에서 곤드레밥에 양념장 넣어 슥슥 비벼 먹으면서 와인 한 잔 따라서 크- 하는거지. 어떤 날은 삼겹살을 구워 먹을거야. 이제 파절이쯤은 문제없지! 그렇게 쳐묵쳐묵 하다가 배 두드리면서 잠들고..... 일어나서 동태찌개로 해장하는 삶...... 그런데 술 먹고 자다 일어났으니 잠이 안오겠지. 그러면 잔뜩 쌓아둔 책을 읽는 거야......아름답다........ 곤드레밥과 삼겹살을 굳이 분리할 필요도 없어. 삼겹살 지글지글 구우면서 익으면 한 점 집어다가 곤드레밥 위에 놓고 한 입 가득 넣으면 또 거기가 천국 아닐까.....나는 왜 엠버같은 야망이 없지...호화로운 요트, 누구나 나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컨트리클럽... 은 별로 관심이가 없다고 한다...... 나는 이미 내 단골 레스토랑에서 '늘 드시던 거요?' 하는 걸로 충분해. 지나번에는 머리 자른 것도 알아봐주고, 잘 어울려요! 도 해줬어. 움화화화핫.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게다가 그 레스토랑은, 또 그 날따라,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잔뜩 틀어줬지. <say something>, <a thousand years> 같은 걸 어떻게 연속해서 틀어줄 수 있지? 대박... 또 <everglow>도 틀어줬어. 친구랑 아니, 오늘 노래 다 왜이래? 막 이러고..... 아 나 진짜 소박하구나.... 하는 거짓말이라야 남자랑 외박한 게 전부인 나여... 그런데 이제는 거짓말 안해도 된다. 이미 나이가 이렇게 되어버려가지고, 무슨 말을 하고 나가든 아무 상관이가 없다........ 심지어 남동생 결혼해서 남동생 방 비면 거기에 남자 데려다 놔도 된다고 했어... 인생...나이란 무엇인가........그리고

 

 

이 페이퍼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끝나려는가.

이렇게 끝내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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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1-2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네요

다락방 2018-01-26 14:11   좋아요 0 | URL
저는 절반정도를 남겨놓고 있는데 이 뒤의 얘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요. 뭔가 반전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후훗.

moonnight 2018-01-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사랑스러운 다락방님^^ 맞아요. 거짓말은 정말 피곤하죠ㅜㅜ 저는 혼자서 하루 이틀 지내는 걸 좋아하는데 부모님은 이 나이에도 걱정하시며 안 된다고 하시는 바람에 친구랑 간다고 거짓말 하게 돼요. 근데 이게 자꾸 말이 꼬여서 거짓말에 거짓말이 쌓이니 불안ㅜㅜ
엠버는 똑똑하고 근성도 있고 아름다운 여성일 것 같은데, 다락방님 말씀처럼 안타깝네요. 대프니가 되려하지 말고 더 나은 엠버가 되면 좋을텐데. 저도 대프니처럼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은 없거든요. 맥주 와인 살 돈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호호^^

다락방 2018-01-26 15:22   좋아요 1 | URL
지금까지 나온 걸로도 엠버는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앞으로는 범죄를 저지를 것 같아요. 아아, 그냥 지금처럼만 살아도 앞으로 좋은일 많을 것 같은데, 꼭 범죄를 저지르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걸까... 읽으면서 좀 스트레스 받더라고요. 이게 행복한 삶인가,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 가면 그러면 정말 편안하고 행복할 것인가.. 싶어서 말이지요. 이럴 필요까진 없었잖아... 하는 생각이 읽으면서 수시로 들었어요.


저도 아직도 거짓말하는 것들이 좀 있고 말입니다. 흐흣. 그렇지만 거짓말을 진짜 피곤해요. 진실된 삶을 사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휴우-

clavis 2018-01-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겹살 지글지글과 자연인이 밥에 뭐 넣고 양념장과 함께 비벼 먹는 대목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저도 오늘 부실한 점심을 먹고 간식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왠지 다락방님이 된 듯 하였습니다♡♡오늘 너무 기부니가 저조해서 나에게 영차영차 잘 해 주고 싶어서 치즈 얹은 라며니를 끓이는데 아아 그리던 락방님 페이퍼도 읽고♡♡쉰나쉰나했어요

다락방 2018-01-29 09:27   좋아요 1 | URL
저는 이 글을 쓰고 집에 가면서 혼자 식당에 들러 곤드레밥을 주문했어요. 소불고기와 함께요. 그래서 소불고기 끌여서 먹으면서 곤드레밥도 양념장에 비벼 슥슥 먹었지요. 많이 먹지 말아야지, 좀 남겨야지, 했지만, 남기지 못하고 밥도 불고기도 싹 다 비워버렸어요. 그리고 배를 두드리면서 기분 좋게 집에 갔지요. 사람은 잘 먹어야 해요. 클래비스님, 기분이 저조할수록 잘 먹읍시다. 맛있게 먹고 배 두드리면서 우리 마음속 평화를 찾읍시다!!

단발머리 2018-01-26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책은 전에 책광고 봤는데, 너무 뻔한듯 하면서도 재밌어 보여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락방님 방에서 만나네요.
저도 엠버 같이 살고 싶지는 않는데, 그 좋은 걸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또 다른 것들을... 하는 생각에요.
빼앗아야만 제맛인지 그걸 좀 묻고 싶어요.

아.... 다락방님 글 읽으니까 좋네요.
엠버 이야기도, 곤드레밥도, 워크샵도 좋구요. 삼겹살도 와인도요~~ ㅎㅎㅎㅎ
즐건 불금 되세요^^

다락방 2018-01-29 09:28   좋아요 0 | URL
이미 주말이 끝난 거... 실화입니까 ㅠㅠ
주말이 가버렸어요, 단발머리님. 흙흘.

아니, 그런데 그동안 왜이렇게 뜸하셨어요? 얼마나 보고싶었다구욧!! 엉엉 ㅠㅠㅠ

이 책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마지막에 내용이 좀 찜찜해져버려서, 이 찜찜함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지 않나 싶네요. 재미있게 막 책장을 넘기다가, 어어??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하핫.

우리 열심히 읽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먹고... 그럽시다요, 단발머리님. 후훗.

transient-guest 2018-01-27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학교 땐 한국에 있던 여자동기들이 왜 다들 그리 MT를 자주 많이 오래 가는지 그 비밀을 우연한 기회에 알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워크샵과 함께 돌아왔네요.ㅎ

다락방 2018-01-29 09:2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네, 워크샵도 가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뭐 그런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선한 거짓말인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고요. (응?)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잠자냥 2018-01-29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어느 시기가 지나면 엄마가 ˝제발 남자랑 여행 좀 가라˝ 말하는 때가 온다던데요? (응?) ㅋㅋㅋㅋ

다락방 2018-01-29 13:26   좋아요 0 | URL
어디 그뿐입니까. 애 낳아오면 키워주시겠대요, 저희 엄마는. -0-

clavis 2018-01-29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는 한강님의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요 소년, 이 후의 다른 어떤 책이었어요. 그 책을 읽는 중에 늘 그렇듯이 북플에 접속하여 바코드로 읽고있는 책이라고 등록했는데. . . 하아. . 락방님이 이 책의 첫 번째 마니아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ㄲ ㅑㄱ

다락방 2018-01-29 17:22   좋아요 1 | URL
한강 ... 이라. 한강.... 소년이 온다 말고 제가 뭘 읽었을까요?
희랍어 시간 읽었고...채식주의자 읽었는데.... 이거말고 뭐 또 있던가? 제가 딱히 한강을 좋아하진 않는데 첫번째 마니아가 되어버렸군요. 아하하하핫
 

요며칠 '과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는 무엇일까. 오늘은 한 알라디너의 《나니아 연대기》를 아이와 함께 읽는다는 페이퍼를 보았는데, 나니아 연대기로 말하자면 나에게는 대표적인 과거 아이템이다. 나의 과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과거. 그러니까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에서 함께 걷던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내가 어릴 때 나니아연대기를 읽었다면 더 좋았을거야' 라는 얘길 하는 거다. 나는 그 책을 읽다가 '대체 나니아 연대기가 어떻길래?' 하고 당시에 합본으로 나온 두꺼운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완독하지 못하고 팔아버렸다. 내가 어릴 때 읽었으면 다 읽었을까? 그리고 뭔가 달라졌을까?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등장인물의 그 말은 내내 떠올린다. 나 역시 내가 어릴 적에 전시회에 다녔었더라면 어땠을까에 대해 생각하니까. 그림을 보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들이 어릴 때부터 꾸준히 이어졌더라면, 지금쯤 나는 힘들 때 그림을 보며 위로 받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여행을 다니는 아이었다면? 그러니까 부모님이 휴가때면 계곡으로 데려가긴 했었지만, 그게 아니라 며칠을 자고 오는 그런 여행을 했었다면, 나는 여행의 재미를 일찍부터 깨닫는 사람이 되었을까?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김신영'이 나온 <영수증>을 보았다. 나는 이 프로를 텔레비젼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딱히 내가 볼 것 같진 않지만, 김신영이 나온다길래 봤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사람이 김신영인것 같아서. 뭐만 해도 빵빵 터뜨리기 때문에 김신영이라면 보겠다!! 하고 보게 된거다. 작년에 말레이시아에 가서 하룻밤을 혼자 자야 했는데, 나는 좋은 호텔에 묵었고 그래서 룸이 엄청 넓었다. 혼자 묵게 되는 밤에 그 넓은 방에 있는 수납장이 무섭게 느껴지는 거다. 저길 열면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지고, 그냥 열어서 확인하면 오히려 속이 편해질텐데, '그냥 열기'를 도무지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텔레비젼도 틀어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했지만 도무지 무서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아아 나는 어쩌지, 어차피 잠도 못잔다면 뭐라도 해서 이 시간을 잘 넘겨야 할텐데, 할 때, 김신영 생각이 난거다. 그래서 유튭을 틀고 김신영을 검색해서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기억이 있던 터다. 그러니까 김신영은 봐야해!!



영수증 속 김신영은 여전히 재미있었는데, 또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셀럽파이브를 결성하기 전에 일본까지 찾아가는 그 열정, 게다가 그 열정을(춤추는 고등학생들을 향한!!) 송은이에게도 그대로 전달하는 거다. 그 열정이 얼마나 좋아 보였으면 거기에 동화되어 함께 일본으로 떠날까. 게다가 당일치기였어. 나는 김신영의 그 열정을 보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까지 동화시키고, 결국 그렇게 셀럽파이브로 데뷔하게 되어서, 저 사람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너무 좋았던 거다. 나는 그렇게 뭔가 원하는 바가 있고, 에너지를 쏟고, 결국 그 길로 나아가는 사람에 대해 무한 존경을 보내는 거다. 그런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거다. 아, 다른 얘기로 샐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김신영이 관리비를 많이 내고 피규어랑 신발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더라.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돈을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김신영은 그것이 자신의 어릴 적 가난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더위와 지독한 추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어린 시절, 그 시절 때문에 자기는 따뜻하게 지내고 싶고 시원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고. 



김신영이 벌어서 김신영이 즐기고 김신영이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내 집 마련'을 하고 싶다고 의뢰한 것이니, 김생민은 솔루션을 제시해야 하고, 나를 포함에 다른 엠시들이 김신영의 그 가난하고 아팠던 과거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때, 김생민은 그 가난이 불러왔던 지금의 소비패턴을 이해하지만, 계속 과거에 붙들린 채로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거다. 나는 그게 너무 인상 깊었다. 너무 인상 깊은 말이라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과거에 붙들린 채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 과거가 나를 너무 붙들어서 외려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자꾸 과거를 소환해내는가, 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과거를 소환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만 붙들려 있는 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었던 과거를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을 되돌려 수정할 수 있다면 수정하고 싶은 과거가 여럿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그 과거가 분명히 나에게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나의 지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락스칠까지 하고 싶은 과거들이 있다. 그 일이 내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되었는걸.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제일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밤의 피크닉 속 등장인물이 '내가 어릴 때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다면 좋았을거야' 라고 말한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로, '그러나 어릴 때 읽었다면 달라졌을까?'를 의심하기도 한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면, 나는 그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러나 오히려 편견 속에서만 판단하고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도 다르게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거다. 그러니 어쩌면 모든 것은 타이밍일 것이다. 내가 나니아 연대기를 만나야 했던 때,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야 했던 때는, 내가 만난 바로 그 때였던 거다. 



나니아 연대기와 김신영에 대해서까지 이 과거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하게 된 건, 사실 이 책 때문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저자의 말>이 나오는데, 그 저자의 말은 '이 회고록을 쓴 이유' 이기도 하다. 거기에 이런 부분이 있다.



어느 날 벽장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상자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제2차 세게대전 때, 군 복무 중인 아버지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들이 그때의 기억들을 되살릴 열쇠가 되어 주었으면 싶었다. 워낙 어머니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 탓에 내 기억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러고 보면 그 편지 상자가 요술 램프였더 모양이다. 램프 속 요정 지니가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내 예술을 위한 가장 강력한 연료는 바로 내 과거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셈이니. -책 속, 저자의 말 中




그래, 바로 저 한 문장 때문이었다. 


'내 예술을 위한 가장 강력한 연료는 바로 내 과거라는 사실' 이라는 문장.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계속해서 이 문장을 떠올렸다. 아, 너무 좋다! 좋고, 그리고 옳다. 옳다는 건 적절한 표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내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많은 영감들이 다 나의 과거로부터 오는 게 아닌가. 어떤 것들은 과거라 불리고 어떤 것들은 추억이라 불릴 테지만, 나 역시 과거를 나의 가장 강력한 연료로 쓰고 있었던 거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추억만 되새기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해왔는데, 내 안에 꽉꽉 차있는 과거 혹은 추억에 대한 일들과-대단치 않았는데도!- 감정들이 계속해서 나를 글쓰게 하는 거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어서, 다른 것들과 합쳐져야 타오르는 거다. 읽는 책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가, 듣고 있는 음악이, 보고 있는 영화가.. 이 모든 것들이 내 과거라는 연료에 불을 지피는 거다. 그러면 글로 타오르는 거지. '제임스 맥멀런'의 이 짧은 회고록 한 권이, 나로하여금 나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또 과거란 건 무엇인가 연속해 생각하게 하고, 이걸 생각하다보니 모든 것들이 다 '과거'를 중점으로 다시 보게 만드는 거다. 만약 이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내가 김신영이 출연한 영수증을 보면서 과거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까, 나니아 연대기를 말한 밤의 피크닉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들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하고, 화두를 과거로 맞추게 된 건, 제임스 맥멀런의 회고록이었던 거다. 



아, 여러분. 책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물론 이 책은 단순히 저 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특성들을 갖고 있다. 그는 부모님이 바란 것과 다르게 자랐던 자신에 대해 얘기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면서 푹 빠져들었던 자신의 어떤 특수한 감정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내가 무언가에 빠지고 그걸 생각하게 되는 것,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의 재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 이런 것들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고 있지만, 길어진 김에 긴 걸로 일등 먹어보자.



그 집주인이 테라스에 나와, 이젤 앞에 서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사실상 평온하게 캔버스에 붓질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작업하고 있는 화가를 난생처음 본 나는 그 모습에 사로잡혀 버렸다. 친구들은 대뜸 집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남아서 이상하리만큼 신비해 보이는 그 단순한 작업을 지켜보았다. (p.72)




그러니까 이런 것들.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던 풍경에 대해, 제임스 맥멀런은 그 자리에 남아 지켜보는 거다. 앞서 김신영을 언급했는데, 그 고교생들의 춤추는 영상은 나도 이미 트윗으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영상은 그냥 보고 넘긴 장면이었을 뿐, 그 뒤로 내게 남아있지 않았던 거다. 그러나 김신영에게는 어마어마한 영감을 줬고, 열정을 불러일으켜서, 일본까지 가게 하고 결국 데뷔하게 만들지 않나. 이런 거 진짜 너무 좋은 거다. 난 나를 비롯해 다른 어떤 사람이라도, 무언가에 흥미를 갖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행동하게 되는 그 과정을 가지는 게 너무 좋다. 그런 사람들 보면 정말이지 한껏 응원하고 싶어지는 거다. 너무 멋지지 않나!!




어린 시절에 내가 보인 소심함은 셰퍼드에게 물린 사건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남자애로 태어난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어린 시절의 내가 약골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걱정거리였고 대단한 실망거리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던 내 삶의 이야기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차츰차츰 깨닫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자다운 삶이라고 여기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찾아가는 소심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p.10)



이 책을 읽으려고 시작하자마자 만나게 되는 문장이 이렇다. 벌써부터 사랑하게 되는걸. 어린 제임스 맥멀런에게 아버지는 남자답게 자라라고 하는데, 아무리 운동을 시켜도 제임스 맥멀런은 운동을 못하고 하기도 싫고 두렵기만 한거다. 일전에 한 번 배웠다 중도에 그만둔 권투를 또 배우게 되는데, 다른 아이들과 대결을 한 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는 거다.



"우리 산책 좀 하자, 지미."

학교 운동장을 나란히 걸으면서 라이언 선생님이 물었다. 놀랍도록 다정한 목소리였다.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지미?"

"네."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라이언 선생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말했다. "음, 내가 어머니께 너한테는 이 수업이 맞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마. 그건 그렇고, 넌 좋아하는 게 뭐야?"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선생님."

"그러면," 라이언 선생님이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지미는 권투선수가 아니라 화가가 돼야지."

그 다정한 행동이 내 눈물의 수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교문까지 걸어가면서 소리 없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인사를 하고 헤어질 때까지 라이언 선생님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았다. (p.112)




지미가 어린 시절 저토록 다정한 권투선생님을 만나서 지금은 화가가 되고 이렇게 회고록을 낼 수 있었을까? 만약 다른 권투 선생님이었다면, 만약 '사내새끼가 왜그렇게 약해!' 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지미는 화가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있었을까? 이것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인생의 그 시기에 저 선생님을 만나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선생님은 분명 지금까지의 제임스 맥멀런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나는 이토록이나 나약하고 소심하다고 자꾸 주눅들게 되는건, 주변에서 마치 그게 잘못인 것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그 어린 시절에, 그 과거에 이 선생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니 성인이 되어 '그 때 그 선생님을 만난 게 정말 행운이었지'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좋았다. 좋은 시간이었고 또 좋은 시간이 지금 흘러간다.

과거라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그래서 과거라는 걸 중심에 둔 채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책 한 권이 가져온 일이다. 




나는 여전히 불태워버리고 싶은 나의 과거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계속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을 돌린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게될까를 스스로에게 물으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 거다.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아마 또 공부하기를 싫어했을 것이고 학교 다니기를 싫어했을 것이고, 그렇게 소설책을 보고 노래만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빈둥거리며 술만 마셨을 것이고, 또 만약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나는 내 인생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그 남자를 다시 사귀었을 것이고.. 어휴... 이미 지나온 게 어쩌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공부좀 열심히 할 걸, 이라고 후회해봤자 그 시절이 되면 안할거야.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공부의 중요성을 알지. 내 인생의 이 타이밍에 공부가 재미있고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거라면, 어차피 시간을 돌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만약 그 때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 젊은 시절에 그 남자를 사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에게 치명적인 과거가 생기진 않았겠지만, 어쩌면 나는 유약한 어느 남자와 벌써 결혼한 채로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남자와 그런 연애를 해봤기 때문에, 그 다음의 내 연애는 확 더 좋아질 수 있었고. 내가 당신을 과거에 만났다면 그건 그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내가 당신을 현재에 만났다면 역시 그건 그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랬다면 나는 지금에 와서 당신과 인연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그때 만났던 것, 그리고 지금 만나는 것, 이 모두가 다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 것일 거다. 


늘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시간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놓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이 현재이지만 바로 과거가 되는 것처럼, 이 과거를 나중에 떠올리면서 그때 이랬다면 혹은 그러지 않았다면, 하게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더 묻게 됐다. '지금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까?' 라고. 이건 후회한 적 있던 나의 과거가 내게 준 선물이다.




아침에 엄마가 동태찌개를 끓여줬는데 완전 살이 실한 동태를 한덩어리 줘서 행복이 넘쳐흘렀다. 엄청 흡입했지.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날 사랑해... 

그런데 또 배고프다.

고디바 쵸콜렛은 아까 먹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넓은 운동장에 나가서 보건 체조를 했다. 나는 보건 체조가 좋았다. 물구나무서기 같은 동작도 없었고, 체조를 하면서 매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운동장은 산허리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런 까다락에 운동장 한쪽 가장자리는 곧장 아래쪽 골짜기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었다. 운동장 맞은편 경치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곧장 칸첸중가 산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듬성듬성 솟은 작은 봉우리들밖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근처에 있는 히말라야 산에까지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따금 산봉우리가 유난히 찬란한 아침노을을 받아 샛노랗고 발갛게 빛날 때면 나는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런 나머지 팔 벌려 뛰기를 하는 다른 아이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 앞으로 불려 나갔다. (p.96)

아뿔싸, 알고 보니 내 그림 솜씨는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한 달 뒤 워먼은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부러진 팔이 다 나아서 학교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같은 축구부원으로서 물론 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 친구랑 다시 단짜긍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이 세계에서, 나는 정신적 소유권을 가질 의욕을 조금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남자애들 틈에서 친한 친구를 바꿔 가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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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8-01-2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았다.좋은 시간이었고 지금도 좋은 시간이 흘러간다. . 이 문장 아 참 좋아요 좋아서 필사 함 해 보았어요♥랩걸에도 인간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나아간다. . 라는 멋있는 말이 있었어요 어떤 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본능적으로 가게 된데요^^

다락방 2018-01-26 10:21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결국 제가 지금 사는 삶은 제가 원했던 삶인거죠. 저도 원하는 바가 있다면 사람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삶과 아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니어도, 근사치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한 이유겠죠. 헤헷.
원하는 게 있다면 그 방향을 향해 우리 뚜벅뚜벅 나아갑시다!

transient-guest 2018-01-2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의 완숙함을 갖고 다시 20대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자나 남자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그 이유랄까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후회되는 과거의 일이 몇 개는 있어요. 근데 나머지는 후회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다른 좋은 계기가 되었거나 더 나쁜 일을 피한 경우가 많아서 사실 50-50입니다. 과거를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김생민의 영수증은 이미 배워야할 철학을 처음 몇 주간의 방송에서 다 봤고 지금은 계속 반복이라서 안 봅니다. 일단 절실함을 전제로 하지만,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할 때, 김생민씨의 approach는 좀 무리가 있어요. 다만 그 정신에서 정말 필요하지 않은 소비를 줄이거나 다시 한번 고민하는 등 도움되는 면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미 그 프로그램을 보면 피로감이 높더라구요..-_-:

그나저나 너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시사잡지, 거기에 Moonlight이 전면에 떡..ㅎㅎ 잘 볼게요...

다락방 2018-01-26 10:24   좋아요 1 | URL
아, 트랜님 맞아요.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해요. 지금의 완숙함을 가지고 시간을 돌린다면 저는 공부도 더 열심히 할테고 그 남자를 선택하지 않을테고...그렇지만 시간여행이 아니라 단순히 시간을 돌리는 거라면, 과거의 저는 그런 선택을 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겠죠. 그때는 그 나름으로 잘한 줄 알지 않았을까요... 공부 안한 게 제일 후회가 돼요 ㅠㅠ

김생민 영수증은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더이상 듣지도 보지도 않고, 몇 번 들은 걸로 재미는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역시 그 와중에 도움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저는 절실함을 가진 사람이 원했으므로 김생민이 솔루션을 내주는 것에 대해서는 응 그렇구나 하긴 하지만, 제가 그런 삶을 살 순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비요정.... 음..요정은 아니구나. 어쨌든. 김생민의 추천삶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그냥 패쓰하는데, 간혹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저보다 더 적게 버는데 저보다 더 저축 많이 하는 사람, 그리고 노동은 중요하다, 뭐 이런 얘기들. 그러면 그런 말들은 순간순간 저를 자극하기는 해요. 위로도 받고요.


사실 저는 그 표지 때문에 보낸 게 아니라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책읽기 부록 때문에 보낸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