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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는 오후에 커피를 마셨는데도 마시면서 잠이 쏟아졌다. 집에 가 저녁을 배터지게 실컷 먹고(이제 안그럴거야, 소식할거야), 침대에 앉아 잠깐 책을 읽고 꾸벅꾸벅 졸다 잤다. 그렇게 꿈을 꾸었는데,


꿈에 나는 독일에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독일에서 나는 불법체류자였는지 아무튼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머무를 곳도 없고 떠돌아야 하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를 어느 가족이 재워주려 했지만, 그 주인집이 그 사실을 알고는 나를 내쫓았고 그렇게 나는 쫓겨나서 또 도망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가게 됐다.

일본 역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어쨌든 일본의 가난한 마을에서 나쁜 장교가 가난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 역시 거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중 한 명이었는데, 우리들은 먹을 것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고 돌보아줄 사람도 없는 매우 좋지 않은 환경 속에 지내고 있었다. 근데 이 나쁜 장교가 어른이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거다. 우리 가난한 아이들 무리는 이 어른 한 명이 시키는대로 해야만 했는데, 그러다가 이 나쁜 어른이 매우 어린 여자아이에게 더러운 짓을 시키려는 걸 보고 참을 수 없어진 아이 1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고, 나는 이에 힘입어 장교에게 개겨버렸.... 그러자 장교는 몹시 화를 내며 우리 모두에게 폭력을 쓰려고 하는데, 한 명 두명 아이들 모두가 한꺼번에 반항을 해서 갑자기 이 인간이 두려움에 액체가 되어 비이커 같은 용기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거다. 우리는 이 액체를 없애면 이 사람 자체가 없어진다는 걸, 즉 살인이라는 걸 알고 망설였다.



이 액체를 쏟아버리는 건 살인이야. 살인은 해서는 안될짓이지.

그렇지만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또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거야. 그것도 안돼.



이렇게 우리 여러명은 쪼그리고 앉아 고민과 의논을 거듭하다가, 내가 말했다.



"지금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하수도에 쏟아 버리자.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들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아무도 몰라."



아이들은 모두 그러자고 했고, 나는 그 액체를 하수도에 쏟아버렸다. 액체는 흩어지며 존재를 감췄고, 그렇게 나는 꿈속에서 살인을 했다.




자고 일어나서 대체 내가 왜 이런 꿈을 꾼건가, 이 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아침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대체 왜 이런 꿈을 꾼걸까 계속 생각했다. 이 가난한 환경, 집도 없고 도망다녀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꿈에 뜬금없이 이런 내용이 나오는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 출근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역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위해 꺼냈다. 그러자 앗! 내가 왜 그 꿈을 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제 읽다 잠든 책은 이것이었다.



















아아, 이거구나, 이거였어. 제목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다 잠들었더니, 꿈속에서 내가 세상 가난한 사람이 되어 쫓기고 있었고 폭력에 노출되었고 공격 당하고 있었다. 멸시와 폭력이 바로 내 앞에 다가왔는데, 그건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가난한 사람들》에는 정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나온다. 관청의 서기로 일하면서 사생활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집에 세들어 사는 대머리 중년의 남자 '마까르 알렉세예비치'는 바로 앞 집에 사는 먼 친척이자 역시 지독하게 가난한 젊은 여자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애정을 주고 받으며 지낸다. 이 책은 서로간에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사실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모르겠다. 간혹 편지에서 알렉세예비치는 상대를 '딸처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런 문장을 제외하고는 마치 연인을 대하듯 뜨거운 애정이 절절하게 넘치는 거다. 뭐여, 연애감정 가진건데 딸처럼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 거는건가.. 모르겠다. 알렉세예브나 역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편지에 답장도 하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그에게 집에 들르라고도 자주 청하고, 뭐 여튼 그들은 서로가 서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돈독한 관계속에 서로를 의지하는데, 그런데 둘다 너무나 가난한거다.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알렉세에비치는, 신발 밑창도 떨어질랑말랑하고 옷의 단추 역시 실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상태다. 알렉세에브나는 삯바느질로 돈을 버는데, 역시 너무너무 가난해서, 몸이 약한데다 일까지 하다보니 또 몸이 아프고,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생각하며 서로에게 사탕을 보내고 용돈도 보내고 그런다. 자기들 먹고 살 돈도 없어 집세도 밀리면서, 그런데도 서로에게 돈을 보내.. 아아, 인간이여.


게다가 이 가난한 남녀가 사는 동네는 역시 이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잔뜩 살고 있는데, 제 코가 석 자인 알렉세예비치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나보다 더 딱하다', '나보다 더 안됐다' 이러면서 그들을 동정하고 자신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주고 막 그런다..


하아-


이들은 서로 책도 빌려주지만, 알렉세예비치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교육을 받지도 못했으나 알렉세예브나는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이라 책을 읽고난 후의 감상을 주고 받을 때 너무 감상 달라버리고..



돈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알렉세예비치는 돈을 빌리려고도 해보지만, 그에게 담보가 없다는 걸 뻔히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줄 리가 없다. 그는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해서, 월급까지 가불한 상태이지만 이 가난은 끝이 없고, 어떻게 이보다 더 가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그러니까 그가 세들어 살고 있는 다른 집의 사람들 역시 너무 가난해서 오죽하면 알렉세예비치에게 돈을 빌리러 오기도 해. 그렇지만 그는 가진 게 없고.. 사정 들어보면 너무 딱해서 빌려주고 싶은데 자기 주머니에도 땡전 한 푼 없고.. 어쩌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걸 빌려줘야 하고...




그러니 그는 가끔 이 비참함과 슬픔에 술에 취해 사고를 치기도 하고, 이로서 알렉세예브나를 비롯해 직장 동료들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이 그에게는 한줄기 희망인데, 그런데 그가 어느날 아주 중요한 서류를 정서하다 한 줄을 빼먹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일로 그는 관청의 '각하' 앞에 불려가 크게 혼나게 되는데, 아아, 비참함은 이럴 때 '어디, 한 번 날잡아보자' 하고 폭풍처럼 밀려들어.




그런데 그때, 바로 그때, 지금 생각해도 펜을 그러쥘 힘조차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저의 단추가, 가느다란 실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망할 놈의 단추가 갑자기 실을 끊고 툭 떨어지더니 바닥으로 튀어 버린 겁니다. (아마 제가 저도 모르게 잡아당겼던 모양입니다.) 떨어진 단추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그 저주받을 단추는 곧장, 그야말로 곧장 각하의 발을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제가 각하께 대답하려던 모든 것을, 즉 변명과 사죄를 단추가 대신한 셈이었죠!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각하가 저의 겉모습과 의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셨으니까요. 저는 거울 속에서 보았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단추를 잡으려고 뛰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입니까! 몸을 굽혀 단추를 집으려는데 단추가 구르고 돌고 하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민첩한 행동을 구경시켜 드린 거죠, 헛헛. <이젠 끝장이구나!> 싶더군요.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저라는 사람은 완전히 파멸된 것이었습니다! (p.184-185)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가뜩이나 초라한 행색이고 그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특히나 자기 겉모습으로 자기를 판단해 직장에서 쫓겨날까봐 쫄고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단추가 떨어져 가장 높은 상관 앞으로 굴러가버린다. 그렇게 비참한 모습일 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들켜버리고야 마는 것. 아아, 그 자존심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온전히 시선이 비참한 내게로 향하는 그 순간. 그 마음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인가. 누추한 옷차림에서 떨어진 단추, 그것이 가장 호화롭고 높은 사람 앞으로 굴러가버려. 아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대체 가난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는 이제 자신의 직장생활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다. 그의 모습에 놀란 각하에게, 그의 상관은 '월급을 충분히 주는데도' 왜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 충분은... 누가 말하는 충분인가요?




각하는 다른 모든 직원들을 내보내고 알렉세예비치만 남겨둔다.



「자, 그럼.」각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빨리 이거나 다시 쓰게. 제부쉬낀, 이리 가까이 오게. 이번에는 실수 없이 다시 정서하게. 그리고 말이야 ……」각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보시며 지시를 내린 다음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물러가자마자 각하께서는 얼른 지갑을 꺼내시더니 1백 루블짜리 지폐를 한 장 빼셨습니다. 「자, 이거 받게.」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일세. 성의로 알고 받아 두게.」 그러고는 그것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나의 천사여, 저는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저의 온 영혼이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각하의 손을 잡으려 했으니까요. 각하는 얼굴이 빨개지시더니-소중한 나의 사람이여, 저는 지금 한 치의 거짓 없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저처럼 미천한 사람의 손을 잡고 흔드셨습니다. 정말로 제 손을 잡고 흔드셨다고요. 마치 가까운 사람에게 그러시듯, 당신과 비슷한 서열의 장군에게 하시듯 제게 그렇게 대해 주셨어요. 「자, 이제 가보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일세 ……. 더 이상 실수는 저지르지 말게. 이번 실수는 덮어 두겠네.」 (p.186-187)



각하가 한 번에 갑작스레 주게 된 돈 1백 루블은 큰 돈이다. 알렉세예비치가 머무르는 곳의 집세는 7루블. 그것도 못내서 집주인에게 멸시를 받고 있는데, 각하가 척, 내어준 돈은 1백 루블. 그는 일단 그 중에서 20루블을 집주인에게 건네고, 35루블은 알렉세예브나에게 준다. 신발도 새로 사서 신을 예정이고 반드시 새 옷도 사서 옷차림도 단정히할 참이다. 그 돈은 그를 살 수 있게 해주었고, 버티게 해주었고,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누군가는 1루블도 안되는 돈을 빌리러 오는데(굶어 죽을까봐), 누구는 그냥 탁, 꺼내어 줄 수 있는 돈이 100 루블이라니. 너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성실히 일하는데 한 달에 7루블 되는 집세를 낼 수가 없습니까. 왜 열심히 일하는데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아침에 예멜리얀 이바노비치, 악센찌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각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렌까, 각하는 저 한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더군요. 저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량한 마음은 세상이 다 알고 있더군요. 꽤 여러 사람이 그분의 공덕을 찬양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대요. 고아도 한 명 데려다 키우셨는데 안 해준 거 없이 다 해주시고, 각하의 휘하에서 특수 임무를 맡았던 고명한 관리에게 시집까지 보내셨다는군요. 어떤 가ㅗ부의 아들은 사무실에 취직시켜 주시고, 그 밖에도 그분이 베푼 은혜는 끝이 없어요. (p.190-191)




나는 너무 이상한거다. 물론 각하가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일이다.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해서 모두가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왜 누군가는 그렇게 끊임없이 베풀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는데, 왜 누군가는 당장 주머니에 한 푼도 없어 나가서 구걸을 해야 하는걸까. 그것은, 너무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왜 누군가의 지갑에는 1백루블이 그냥 늘상 들어있고, 누군가는 1루블도 없어 빌리러 다녀야 하는가. 왜, 왜?!




소설의 끝에 이르면서 알렉세예비치의 비참함은 조금 상황이 나아지는 듯하다. 누군가 그에게 부업을 가져다준 것. 정서를 해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세컨잡이 생긴 셈이다. 그는 지금보다 조금쯤은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식이 마냥 기쁜데, 알렉세예브나 역시 가난에 허덕이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그녀에게 청혼한 부잣집 늙은 남자에게 예스를 말한다. 그 부잣집 늙은 남자는 그동안 그녀를 지켜봐왔므여 품행이 단정한 걸 알고 있다고, 자기랑 결혼하면 지금처럼 마르고 병약한 모습에서 통통하게 살찐 모습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가난이 지독하게 끔찍했던 알렉세예브나는 자신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해 하면서도, 이게 답이구나 싶어서 결국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제가 당신이 베푸신 일은 아무리 큰돈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는 헛소리라며 제 말을 막았습니다.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제가 아직 어려서 시 나부랭이나 읽고 하는 소리라고, 소설이 어린 처녀들을 망치고 있다고, 책이 그들의 도덕성을 해치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어떤 책이든 쳐다도 안 본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 그때 가서 사람에 대해 언급을 하라고 제게 충고도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그는 덧붙였습니다. 「사람에 대해 알게 될 거요.」그는 자기 청혼에 대해 심사숙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제가 경솔한 행동을 하면 자기 기분이 안좋을 거라며, 경솔함과 열정은 경험 없는 젊은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긍정적인 대답을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죠. 그렇지 못한 경우엔 모스끄바에 사는 어떤 상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카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기로 맹세했으니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는 사탕이나 사 먹으라며 제 손에 억지로 5백 루블을 쥐어 주었습니다. 또 시골에 가면 제가 잘 부풀어오른 빵처럼 통통해지고 그의 품에서 배를 두드리며 유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 할 일이 태산이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하지만, 그 와중에 짬을 내어 제게 달려온 것이라고 하더니 마침내 가버렸습니다. (p.202)




그녀에게 청혼한 남자는 어린 니가 시 나부랭이나 읽어서 철이 없다고 말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경솔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그의말은 즉, 자신과의 결혼을 허락하면 그것은 신중한 것이고, 노(NO!) 라고 말하면 경솔하다는 것. 야, 이게 무슨 청혼이야 써글놈아. 가스라이팅 오지고요. 돈 있다고 돈 쥐어 주면서 빨리 결정해, 나 바빠~ 이러고 가버리는 늙은 새끼.. 벌써부터 그녀가 이 결혼을 하게 되면 얼마나 고생할지 뻔히 보이는구먼. 아아, 여자여, 그가 답이 아니다...


책이 도덕성을 망치고 있다니, 소설이 어린 처녀들을 망치다니.

이보시게, 책이나 읽고 말하시게.

소설 나부랭이나 읽는 나의 도덕성이 비꼬프 당신보다 오천 배는 더 나을것 같구려.




저는 당신께 조언도 구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혼자 생각하고 싶어서요. 제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가능한 한 빨리 이 결정을 비꼬프 씨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지급을 요하는 일로 하루 속히 시골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로 중요한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성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하느님이 정하신 운명의 굴레에서 제가 행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하느님만 아시겠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비꼬프 씨를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는 저를 존중해 줄 겁니다. 어쩌면 저 또한 그를 존경하게 되겠죠. 이제 저희가 결혼하는 데 있어서 더 뭘 바라겠습니까? (p.203-204)




가난에 치인 사람이 더이상 가난하기를 원치 않아 하게 되는 결정이니, 다른 사람은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다. 그녀의 지금까지 삶은 매우 힘들었고, 이제 이 늙은 남자랑 결혼하고 나면 더이상 돈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그래서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의 결정을 피해야 하는 거다. 가난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거 말고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결정이 가져올 앞으로의 다른 어떤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걸 다 따져보고 싶지만, 그녀에게 모든 건 그저 가난이었는걸. 그러나 여기, 독자로서, 제삼자의 입장으로서 내가 보자면, 그는 결혼해서 살기에 좋은 남자가 아니다. 자기에게 결혼해달라 청하면서 바쁘다, 빨리 결정해라 재촉하고, 경솔하지 마라, 자신이 이미 위에 놓여서 얘기하는데, 어떻게 이런 남자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지만,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그가 앞으로 어떤 남편이 될지 아아, 나는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친애하는 마까르 알렉세에비치!

부디 지금 당장 보석 세공인에게 가셔서 진주와 에메랄드가 박힌 귀고리는 만들지 말라고 말씀해 주세요. 비꼬프 씨가 너무 사치스럽고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그는 요즘 돈을 너무 많이 쓴다면서, 제가 그의 돈을 다 털어 간다고 화를 내고 있어요. 어제는 만약 미리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지출이 많을 줄 알았다면 아예 처음부터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을 거라고까지 하더군요. 또 하객도 없을 거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떠날 거니까 저더러 춤추고 즐길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우리는 잔치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더군요.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하죠! 이러저러한 것이 필요하다고 한 게 저였던가요, 하느님이 보고 계십니다. 비꼬프 씨가 직접 주문한 거였다고요. 하지만 저는 말대꾸도 한마디 못했습니다. 그는 다혈질이에요.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p.210)




결혼할 남자의 집으로 갔지만 모든 하인들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녀는 바쁜 일정을 혼자 소화해내야 했고, 그러니 보석 세공인에게 가야하는 것도 알렉세예비치에게 편지로 부탁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게다가 통통하게 살찌게 해줄게, 라고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청혼한 주제에, 너 왜그렇게 돈 많이 써, 돈 쓸줄 알았으면 청혼 안하는건데, 이 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주문도 지가 해놓고서... 개놈이여.....

알렉세예브나는 하나의 곤경을 피하려다가 다른 난관을 맞닥뜨린 것 같다.



이게 바로 가난이 주는 형벌인가. 가난한 사람에게 선택의 권리가 없다. 가난한 사람이 하는 선택이 과연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인걸까.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 사람에게 다른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건 너의 선택이었잖아!' 라고 말해도 될까?

알렉세예브나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저 부자 쫌팽이의 청혼을 받지도 않았을거고, 그 청혼에 예스를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난은 종종 다른 불행을 불러와. 아아, 도스또예프스키여, 어쩌면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잘도 써냈단 말입니까. 비참함이 비참함을 가져오고 비참함과 친구하고 비참함과 짝을 이루는 이런 이야기라니...




슬프다.

슬픔의 새드니스.

가난이 가져오는 이 슬픔.

가난이 가져오는 선택 아닌 선택.




아이참.

글 짧게 쓸 생각이었는데 또 쓰다보니 길어져버렸구먼 ㅠㅠ 나는 대체 왜이럴까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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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8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9-05-08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질구질한 가난도 어쩜 그리 구질하게 잘 묘사하는지 감탄이 나오던 작품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9-05-08 13:02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계속 아이고 너무 가난하잖아 ㅠㅠ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 얘기 써놨잖아 ㅠㅠ 했어요. 이야 진짜 기가 막히게 글을 잘쓰는 것입니다!!!

단발머리 2019-05-08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가가 분명해요, 다락방님은요.
국가와 대륙을 초월하는 이 스펙터클한 꿈의 대향연!!

다락방 2019-05-08 17:56   좋아요 0 | URL
전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걸까요, 단발머리님?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nine 2019-05-0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어요.
이렇게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 사랑은 무슨 사랑, 이러면서 시시하다 코웃음치며 읽기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 구질구질한 상황이라는 것이 사랑이 시작되는데 아무 상관없구나 감동했다가, 그런데 지속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너무 슬프다 생각했었어요.
이거 지금쯤 한번 다시 읽어봐야하는 소설이네요. 덕분에 생각났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5-08 17:58   좋아요 0 | URL
저는 삼중당 문고판으로 [카인의 후예]를 읽었던 것 같은데(맞는지 모르겠어요) 카인의 후예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네요. 아마도 중학교때 읽었던 것 같은데..

와, 정말이지 구질구질한 가난에 대해서 지독하게도 잘 묘사해서 비참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왔어요. 돈이 없어도 너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더 어렵다고 사정 얘기하는 걸 듣노라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 반면에 큰 돈을 팍팍 꺼내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나인님, 지금 다시 읽으면 또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읽고나면 후기 적어주세요!
 
복잡한 마음















어제 늦은밤. 컵라면에 밥을 먹고 홍콩에서 돌아온 짐을 풀며 틀어둔 티비에서는 <연애의 참견>을 방송하고 있었다. 사연 속의 여자는 남자와 일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던 중, 남친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든 뒤에 보란듯이 빵 차주겠어!' 하며 D-day 를 50일 뒤로 잡는다. 그렇게 남자의 집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확보하던 중, 까페에서 남친이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입을 맞춘 장면을 맞딱드리게 되는데, 이 때 여자는 그 자리에서 남자에게 아는 척을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조용히 모른척 지난간다. 나중에 남자가 왜 그 때 모른척 지나갔냐 물으니,


"오빠가 곤란할 것 같아서." 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이제 정말 너만 보겠다며 달라지겠다 한다. 그 뒤로 남자는 여자에게 엄청 다정하며 최선을 다한다.


여자는 달라진 남자의 모습에 수시로 흔들리지만, 그래도 복수를 하리라 결심한다. 드디어 디데이!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알 리가 없고, 그런 여자에게 꽃다발과 반지를 주며 프로포즈를 한다. 나와 결혼해줄래? 이 때 여자는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반지를 돌려주며, 사실은 네가 바람피우는 거 그 전부터 알았고, 너한테 복수하려고 내내 참았던 거다, 이제 그만하자, 라면서 뒤돌아선다.


남자는 아프고 괴로워한다. 여자에게 제발 돌아와달라고 애원한다. 이에 여자가 남자를 찾아갔는데, 남자는 그때 그렇게 말한다.


'4년간 사귀어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어느날 유학을 간다 해서 그 여자 유학가있는 동안 용돈도 보내주고 기다렸는데, 거기에서 다른 남자랑 결혼한다고 하더라. 그 때 상처를 받아서 깊은 관계를 못가지게 됐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시는 안그러겠다'


여자는 이 말을 듣고 고민하며 사연을 보낸 거다. 이 남자랑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 그래도 될지, 아니면 헤어져야 할지. 물론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만, 나 역시 여자의 흔들림을 알 수 있었다.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상처가 그에게 깊어 그런 식으로 나타났다면,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면, 달라지고 바뀌어 괜찮지 않을까,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남자에게 기대해봐도 좋지 않은가. 여자가 흔들렸다는 것은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는 걸 의미하는데, 미련이 남은 건 그만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꾸 자신에게 잘해줬던 게 생각났는데, 그래서 흔들렸다면, 이제는 믿어도 좋지 않을까?


나 역시 여자의 입장이 되어 이렇게 생각했는데, 와- 패널들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패널들의 얘기를 종합하자면, 이 선택에 다른건 없다. 딱 두 가지 길이다, 바람남과 사귀느냐 바람남과 헤어지느냐. 이렇게 말해주니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 뚜렷하게 보이잖아. 그리고 말했다. '내가 헌신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해서 내가 바람을 피우게 됐다'는 것은,



'나는 어릴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지금 바람을 피웠어' 와 다름없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명일 뿐이라고.

'나는 감기에 걸렸었어. 그래서 지금 바람을 피웠지' 이게 무슨 말이 되냐고.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자가 연애를 하게 되면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이입을 해서 말도 안되는 변명을 받아주게 된다고도 했다. 그 남자는 그냥 바람남이라고. 나는 사연을 보낸 여자의 마음이 되어 남자의 입장에 또 이입하고 있었다. 아!!


그러자, 5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 《여자는 인질이다》생각이 났다.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p.53)




은행강도에게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도 친절한 은행강도에게 감사했던 인질들. 게다가 그 중 어떤 여자는 그 상황에서의 범법자, 자신을 인질로 만들었던 남자와 약혼까지 하게 되지 않았던가!



1985년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질이었던 여자 세 명 중 두 명이 인질범 두 명과 각각 약혼했다. (p.62)




그리고 패널들은 말했다. 복수를 하기로 했으면, 바람핀 남자를 응징하기로 했으면 바로 했어야지, 도대체 왜 그렇게 그 뒤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거냐고. 둘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없던 정도 생기면서 복수는 불가해진다고. 스톡홀름 증후군에서도 함께하는 오랜 시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웨셀리어스와 데사르노는 두 번째 인질 피해자만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이 피해자가 인질범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긍정적인 접촉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인질들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반면 이 피해자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감금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피해자에게 스토골름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근거로는 ˝그가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점, 외부에 있던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는 점, 인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인질범이 실제로는 악취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했음에도, 인질범이 말쑥하고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한 유일한 피해자였다.˝- P68



만약 내 사연을 보낸다면 패널들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내가 들어가있는 사랑,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서 나는 당사자이지만, 제삼자가 보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연애 혹은 사랑과 다를 것이다. 패널들은 저 사연속의 연애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남자를 사실 그대로 '바람남'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연 속 여자는 자신이 당사자 였으므로 '상처를 가진 남자'를 봤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것처럼,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우습잖아. 패널들이 한 비유처럼, 어릴 때 나는 물에 빠진 적이 있지 그래서 바람을 피웠어... 랑 뭐가 다르다는 건가.


사연속 남자는 바람남이다. 한 번 바람피운 남자가 또 피울 확률은 높다고 패널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인질이 사랑에 빠진 남자는 납치범이고 범법자이다. 납치범의 친절한 행동에 감동을 받았다해도, 그가 납치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인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이래요, 그 사람은 당신을 인질로 만든 나쁜놈이야!' 라고 했지만, 그건 내가 제삼자였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나 역시 내 사랑들 속에서 부당하게 일방적으로 그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던 적은 없었나.

분명 이십대 중반의 나는 그런 적이 있.었.다. 그 관계에서도 물론 괴로워했지만 그 관계를 끊어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괴로워했던 건, 내가 나를 잃는 것을 누구보다 못견디기 때문이란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내 안에는 내가 있으니까, 나의 자존심과 자존감과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십대 중반의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써 지우고 그를 사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이 아직까지 내게 큰 상처로 남아있고 내 인생의 오점이다. 내가 이것 때문에 정치인이 될 수가 없어...


그러나 그 이후의 나는 어땠는가.

분명 몇 번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했을 것이고, 내가 잘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아껴줘야 한다는 걸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연휴동안 엄마와 둘이 홍콩에 다녀왔다. 비행기 안에서, 대관람차 안에서, 케이블카 안에서, 거리에서, 호텔방에서 나는 엄마와 내내 둘이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비행기 안에서 엄마는 내게 물었다.



"너 그 남자 그렇게 좋아하면서 대체 왜 쫓아가서 매달리지 않았어?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매달리고 잡았어야지."



나는 엄마에게 답했다.



"엄마, 나는... 그 남자보다는 나를 더 사랑했던 것 같아."



연애는 우리 둘의 몫이고, 우리만의 이야기는 우리가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의 일을,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제삼자가 보는 관계에서는 분명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나 혹은 그를 설명하는 간단명료한 언어가 튀어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를 제삼자에게 설명했다면, 그는 어떻게 정의될까. 그리고 나는?



나는 나쁜년일까? 나는 이기적인 여자일까? 내가 잘못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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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8-06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비슷한 사연을 들을때마다 글에 나오는 패널들처럼 단호하게 당연히 헤어져야지! 라고 했었어요.
이 글을 생각해보니 당사자가 아니기때문에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고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못했던거 같더라구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스톡홀름 증후군‘이 왜 나오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인질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온전히 보장받기위해선 인질범의 입장에서 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하고 작은 배려(?)에도 감사히 여기다 보면 이렇게 쌓인 신뢰, 연민등의 여러감정들이 마치 애정처럼 느껴질수도 있고..
이러다보니 인질-인질범 관계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 연인관계(특히 이성연인)에도 적용할 수 있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다 읽어갈수록 모든 연인의 관계가 가볍게 보이지 않더라구요. 무섭게 읽혀졌어요. ㅠ
 
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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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볼턴은 이 책의 후속편을 써주시고, 출판사는 샤론 볼턴의 책을 계속 번역해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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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소설이란 걸 알면서도 도대체 '뱀이 깨어나는 마을'이란 게 뭘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뱀은 뱀..을 말하는걸까? 마을에 뱀이 나타난다니, 그걸로 이야기가 된단 말인가, 하고 자꾸 읽기를 미뤄뒀달까. 아아, 그러나 너무나 지루하고 진도가 안나갔던 코렐리의 만돌린 다음에 읽게된 이 책은 진짜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러분, 독서가 지지부진 하다면, 뱀이 깨어나는 마을을 읽으세요. 다시 독서의 환상적 세계로 안내합니다... 으하하하핫



클래라는 수의사로 일하며 조용한 마을에서 산다. 혼자 있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불편해한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건 정말이지 그녀가 싫어하는 일이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 역시 정말 별로다. 그래서 친구도 만들지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성격은 책의 초반부터 너무 잘 보여지는데, 와, 어쩌면 이런 캐릭터를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작가 천재... 나는 감탄하며 읽어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두려움에 맞서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고(책 속에서도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누구보다 용감하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작고 약한 존재에 대해 보살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는 걸 힘들어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뒤돌아서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사는 마을에 뱀이 나타난다. 숲과 함께하는 마을이니 풀뱀이 어쩌다 보이는거야 이상할 게 없지만, 이 뱀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처음 그녀가 집 안의 뱀을 보게된 것도 마을 주민의 신고 때문이었는데, 갓난 아기의 몸 위에 살모사가 잠들어 있었던 것. 단순히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이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뱀이 '집 안'에 들어오는데, 이에 클래라는 이 원인을 찾고 해결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이 마을의 50년전 끔찍한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거다.



와, 진짜 뱀이라니. 게다가 어떤 집에는 뱀이 수십마리가 들어와 모든 방안에 있다. 나는 이 '혼자 있고자 하는' 생생한 캐릭터의 클래라와, 그리고 그녀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방식에도 매력을 느꼈지만, 정말 뱀이 나타나는 마을에 대해서도 자꾸만 그 이야기가 궁금해져 책장 넘기기를 멈추기가 힘들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 하면서 아홉시에 자려고 마음먹었던 노동절에, 아홉시 십분전에 이 책을 집어드는 바람에 열 시가 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자정이 되어버린 사건... 자정 즈음에 다시 갈등했다. 끝까지 읽고 잘까, 내일을 위해 이쯤에서 잠들어야 할까. 나는 결국 후자를 택했는데, 그러나 잠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잠을 자면 꿈에 뱀을 볼 것 같아서 너무 무서운거다. 게다가 뱀이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마리가 나와서 꿈틀댈 것 같아 너무 무서운 거야.


여러분, 이 책은 자기 전에 읽지 마세요!! ㅠㅠ




그렇지만, 자기 전에 침대에 앉아 책 읽는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책장을 덮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서,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앉아 잠들기 전에 좋은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앞으로 남은 삶들을 살고 싶다고. 혼자라면 혼자인대로, 누군가와 함께라면 함께인대로, 내가 잠들기 전에 책 읽는 시간은 계속 가져가고 싶다. 크-


이 시간에서 행복을 느낀 건 이 책이 '좋은'책이었던 게 참 크다.



클래라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지만, 잘못된 걸 바로 잡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고립되고 싶었지만 의지와 다르게 자꾸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그저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대해주려고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세상 속에 섞이는 것이 반드시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클래라가 이제 세상을 좀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해나간다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천천히 극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 그리고 로맨스..

나는 이 소설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나 뻔한 로맨스로 끝나버릴까봐 너무 두려웠다. 어떤 면에서 로맨스가 끼어들기를 바랐으면서도, 그러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달까. 그러나 우리의 샤론 볼턴은 이야기를 뻔하게 만들지 않았고, 세상 속으로 발을 디딘 클래라가 다른 식으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보다 나는 그녀의 책 《희생자의 섬》을 먼저 읽었는데, 희생자의 섬 주인공도 의사였고, 이 책에서 주인공은 수의사다. 혹시 이 작가는 의학을 전공하였나 싶어 작가 소개를 봤는데,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았다. 춤, 연기, 경영, 홍보를 공부했다고 하는데(대단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학은 거기 없었다. 그렇다면 의사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리고 이 책에서처럼 수의사 캐릭터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녀는 또 얼마만큼의 취재와 공부를 한걸까. 약간 불안한 장면들이 없진 않았지만(왜 남자가 예쁘다고 해주는 걸로 좀 나아지는 걸까?),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참 좋다, 너무 좋다 이러면서 읽었고 나중엔 '천재인가...' 막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샤론 볼턴이 매해 책을 내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 국내에 번역된 건 두 권 밖에 없다. 출판사, 힘내! 더 내줘요, 더!

무엇보다 남자가 구원해주는 서사 될까봐, 너무 좋았으니까 제발 그런 식으로 끝내지 말아줘... 했는데 흙흙 ㅠㅠ 샤론 볼턴님, 제가 앞으로 님 책은 닥치고 다 읽을게요!



어제 갑작스레 여차저차하여 친구랑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운동을 또! 못갔고 ㅠㅠ 아니 근데 5월이라 시간표 바뀐 거 인지하지 못한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양꼬치가 구워지는 테이블 앞에서 나는 내가 이 책에 밑줄 그은 부분을 친구에게 읽어주었다. 세 단락쯤 읽어줬는데, 친구는 너무 좋다고, 자기도 읽고 싶다고 했다. 정말이지 모처럼 책에 흥분해서 막 읽어줬네. 그런데 나 책 좀 잘 읽는듯? 아무튼 나는 이런 시간들도 너무 좋다. 책의 어느 구절이 좋아서 누군가에게 읽어주는 일, 그걸 듣고 친구 역시 궁금해 하는 일. 책 이야기 나누는 거 진짜 짱인 것 같아. 정말이지, 책 읽으면서 사는 삶을 쭉 이어나가고 싶다.




그러다보니 생각나는데, 며칠전에 혼자 술을 마시면서 <세계테마기행: 호주편>을 보게 됐다.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를 몰아주는 선장의 인터뷰가 잠깐 등장했는데, 그는 그 일을 아주 오래 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매우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내 직업이 좋고 특히 다른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아요."



백발의 선장님은 이렇게 말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세상을 사는 방식은 다양하구나, 새삼 느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다니. 많은 친구가 좋다고 말하는 선장님인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다양한 곳, 내가 있는 곳과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자신이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듯이, 선장님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거다. 바다낚시를 하기 위해 다른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모이는데, 와, 너무 근사하잖아?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러나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방법'은 이렇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소화해낼 수 있구나. 역시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나 다양해! 뭔가 짜릿해지는 거다.



그는 오래,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꿈에 그리던 집에 살게 됐다고 했다. 넓은 초원 위에 있는 집은, 와, 너무 근사해서, 포치에 앉아서 초록초록한 자연을 보며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주 많은 시간들을 멍때릴 수도 있고!!




저 가운데 사진 보면, 이게 선장님 포치에 앉아서 보는 풍경인거다. 세상에..... 해가 질 때나 해가 뜰 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겠지.



나는 언제나 포치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터라, 저 집이 너무 이상적으로 느껴졌다. 얼마나 돈을 모으면 저런 데서 사는 게 가능할까. 내가 살아생전 저런 집에 사는 게 가능할까? 일생의 어느 순간만큼은 저런 곳에서 저런 풍경을 보며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초저녁이면 저런 곳에서 조용히 먹고 마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다가, 밤이면 침대로 쏙 들어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마무리할 수 있다면, 으- 천국.....





어제 뱀이 깨어나는 마을을 다 읽고 자, 다음 책은 뭐가 좋을까 하고 책장 앞에 가 섰는데, 내 책장에 내가 사두고 안읽은 책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다음 읽을 책은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래서 역시 사람은 책을 사야해...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렇게 꺼내들고 온 책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가난한 사람들》인데, 오늘 출근길에 앞에 조금 읽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정말 가난하고도 가난한 사람들의 얘기잖아? 아아.. 제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뱀이 깨어나는 마을은 정말 뱀이 꿈틀대는 이야기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야...





9시가 되면 커피나 사러 다녀와야지.









"오늘밤부터 당장 뱀 포획에 나서서 녀석들을 잡아야죠" 키치가 말했다. 나는 홀 안을 둘러보았고 흔들림 없이 주목하는 사람들,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들, 그리고 흉측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들을 확인했다.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주저 않고 학대하려 드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합법적인 이유를 들어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벌이는 것일까?" - P58

나는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가 환경청이나 환경식품농무부에서 나온 인물인지 궁금했다. 그가 어디에서 왔든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계단에서 내려갈 마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인물이었다. 반면에 나는 남들이 함부로 쳐다보게 만드는 쪽이었다. - P60

"스크러피, 얌전히 있어!"
"괜찮아요." 내가 작게 말했다. 스크러피의 복슬복슬하고 성격 좋아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사람을 용모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 개들이 얼마나 상냥한지, 동물만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지 생각했다. - P70

"난 문 앞을 지킬게. 미안해, 친구들. 뱀은 정말 질색이라."
"병신!" 비웃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발음이 거셌다. 그들은 너무 시끄러웠다. 남자들이란, 조금 전까지 겁쟁이였다가 금세 용감한 척 허세를 부린단 말인가. 겁먹은 한 떼의 무리들이 이제는 모험에 나선 소년 일당이 되어 있었다. - P79

계단을 가볍게 뛰어오르는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극도로 안도했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내 모습은 이날 밤 가장 실망스러웠던 일이었다. 어른이 된 후로 한 번도 남자에게 의지해본 적도 없고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데 아주 익숙한 나인데 처음으로 진짜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자 감상적으로 변해버렸다. - P90

"조금 불안해 보이는 군요. 내가 운전을 할까요?" 맷이 말했다.
나는 시동을 걸면서 어떤 그럴듯한 변명을 들먹여야 할지 생각했다. 나는 야생동물을 다루는 일을 한다. 가장 외딴 마을에서 가장 적막한 거리의 맨 끝에 살고 있다. 의도적으로 이웃들의 이름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다. 쇼핑도 우편 주문만 이용했다. 혼자 있기 위해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 P103

나는 병원까지 십 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아무 말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침묵이 필요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을 때 쓰는 익숙한 기술이 있었다. 나는 머릿속의 어느 한 곳으로 숨을 수 있다. 세상과 격리된 그곳에 있을 때면 바로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사라질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 P104

나는 로저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에든버러에서 공부할 당시 강의를 들었으며, 그의 열정은 내가 파충류 연구를 선택하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는 늘 하던 대로 두 뺨에 입을 맞추었다. 호의는 잘 알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싶었다. 다른 사람이 얼굴을 건드리는 게 정말 싫으니까. - P113

"오소리, 여우, 각종 사슴, 온갖 종류의 영국 새, 또 요즘 갈수록 많아지는 뱀도 돌봐요."
내가 짜증이 난 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파충류 전문가에게는 역시 이상한 선택 같군. 큰 동물원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아?"
사람들은 왜 그럴까? 생전 처음 만난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려 드는 이유가 뭘까? 당연히 나는 전에도 이런 질문을 받았었고, 보통은 동물원 수의사 자리가 빈 곳이 거의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 P122

나는 그녀를 쳐다보고 다시 바이얼릿에세 고개를 돌렸다. "그를 묶었던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특히 그가 폭력적으로 굴었다면요. 그런데 굶긴 이유는 뭐죠? 그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기도를 위해서라고 그랬어." 바이얼릿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그 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그를 교회에 데려갔거든. 목사님이랑 다른 몇몇이.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그와 함께 몇 시간이고 기도를 했어. 악마를 몰아내려고. 그렇지만 소용없는 것 같았어. 며칠이 지나서 얼프레드는 여전한 상태로 멍든 손목에서 피를 흘리고 절뚝거리며 돌아다녔으니까."
"아, 정말 황당해요. 말도 안 된다고요. 그는 악마에 씐 게 아니죠. 아팠던 거예요. 병원에 보냈어야죠." 샐리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맞아. 그게 옳아 보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목사님과 많은 남자들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그렇게 확신하는 것 같았어. 나 같은 사람이 뭘 할 수 있었겠어?" 바이얼릿이 말했다. - P283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를 격려하려 했다.
‘사람들이 전부 외모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단다, 클래라. 너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야.‘ 마치 볼썽사나운 외모를 가진 사람은 저절로 더 좋은 내면을 지니게 된다는 듯, 아니면 외모의 결함을 내면의 뭔가로 당연히 보충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친절한 사람들은 틀렸다. 나의 내면은 아름답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기피하고, 주정뱅이들은 나를 안줏거리 삼아 짓궂은 농담을 하고, 길에서 십 대들이 조롱하고 놀리며 따라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옷가게에서 옷을 사려 할 때 점원조차 다가오지 않는데 어떻게 평범해질 수 있단 말인가? 평생 그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온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영혼을 지닐 수 있겠는가? 나는 내면도 외면도 아름답지 않다. 언니가 빈번히 정확하게 지적했듯 적지 않은 적개심을 품고 있다. 지독하게 수줍음을 타고, 영원히 성마르며, 자신에게만 집착한다. - P310

"어머니가 술을 드셨어요. 아주 오랫동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요. 음악가셨던 어머니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시골의 성직자와 결혼하면서 경력을 포기하셔야 했죠. 나중에야 성직자 아내로 사는 게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셨고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숀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둠이 더욱 짙어진 까닭에 나는 그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어머니도 힘드셨겠죠. 치료도 받으시고, 몇 년동안 병원도 다니셨죠.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몇 달을 버티기도 했는데, 그러다가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곤 하셨어요."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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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9-05-0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을래요, 그래서 ㄱ이 페이퍼 첫 문단만 읽었어요.

다락방 2019-05-03 09: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저는 참 좋았습니다! >.<

유부만두 2019-10-22 22:03   좋아요 0 | URL
다 읽었어요! 전 후반부 클라이맥스보다
전반부가 더 좋았어요. 차근차근 긴장이 쌓이는 거요. 남자들이 슬슬 치대는 건 싫었고요. 흥미진진진 독서였어요! 아, 좋다. 요즘 책 안 읽혔는데 체한 게 쑥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ㅎㅎ

다락방 2019-10-23 07:42   좋아요 0 | URL
저도 전반부가 특히 좋았어요. 주인공에 대한 게 조금씩 드러나잖아요. 주인공을 드러내는 작가의 방식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됐어요. 천잰가.. 싶을만큼요.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는 걸 보면 너무 좋은데 지금이 딱 그러네요. 히히.
좋습니다, 좋아요!

유부만두 2019-10-23 07:4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점이 맘에 들었어요. 얼굴 얘기가 많네 .., 싶었는데 그런 사연이 하나씩... 정보가 하나씩 드러나고 마을 얘기도 하나씩 나오는 과정이 세련되서 좋았어요. 후반부 육탄전은 뭐랄까 파리의 노틀담 스럽기도 하고요.
주인공이 넓게 세상을 살아가게 되서 기쁜 수요일(잉?) 입니다. 그래도 전 파충류는 별로임 ㅋ

다락방 2019-10-23 08:26   좋아요 0 | URL
저도 집에 진짜 뱀이 있다는 이 책을 읽고 너무 싫어서 ㅋㅋ 아 정말 싫다 무서워 만약 그러면 어떡하지 ㅋㅋ 이러면서 너무 무서웠어요 ㅠㅠ

이제 [희생양들의 섬] 읽으시는 겁니까? 후훗.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고 있는 책이 진도가 안나간다는 것은 무척 괴로운일인데, 왜냐하면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한 권 가지고 질질 끌고 있으면 그 다음 읽고 싶은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한없이 늘어져버려. 그러니 진도가 안나가는 책이 있다면 신속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 책을 계속 읽을 것인가, 말것인가...


나 역시 이 책을 계속 읽을 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갈등에 휩싸여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보고 결정하자 생각했다. 리뷰들이 다 좋았다. 고전에 비할만큼 좋다는 게 아닌가. 그래, 열심히, 끝까지 읽어보자. 그러면 내 안에 뭉클한 감정이 솟아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다음 책 읽을 기간을 하염없이 연장하고 또 연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왜!! 읽기 힘들었을까? 내용도 내용이지만(남자 작가들은 왜 여자주인공을 미모의 십대 소녀로 그리는걸까? 진짜 빻은 판타지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듯), 나는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이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좀 더 진도가 잘 나갈 수 있었을텐데, 몰입하려고 하면 할수록 남자 주인공 얼굴에 니콜라스 케이지 겹쳐버리고, 어쩌면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심한 방해가 되었던 것.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에 몰입해 나 역시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은 역인 '코렐리'를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 속의 코렐리와 내가 알고 있는 니콜라스 케이지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고,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모두 잘생기거나 예쁠 필요는 전혀 없고, 그리고 잘생기거나 예쁜 전형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맨스 로맨스 로맨스 하는데 니콜라스 케이지 떠올라 버려가지고 나는 사랑을 느낄 수가 없어. 아아, 왜그래, 나여. 나여, 생각해봐라. 너 현실속에서 잘생긴 남자들만 사랑했냐? 아니, 오히려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들을 사랑했지. 그러니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알아, 아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내면 아니겠니. 아름다운 내면...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자....


내가 진짜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중요한 거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나에게 속삭였는지 모른다. 코렐리의 내면은 추하지 않았으니까 사랑에 빠질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를 도무지 사랑할 자신이 나는 없네. 포기하겠소..



그러다가 내가 여자 주인공이 긴가민가 헷갈려서, 설마 페넬로페 크루즈였나, 싶어서 다시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이런 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 주인공 '펠라기아'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맞잖아! 아니 씨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자는 너무 예쁘잖아 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아 세상의 예쁜 여자들이여, 왜이렇게 남자의 내면만 보고 사랑하나요..... 우리 너무 남자의 미모 안보고 사랑에 빠지는 거 아닙니까. 주의합시다. 하아-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서로 적으로 맞서 전쟁중인 상황에서 이탈리아 장교 '코렐리'는 부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와 지내게 된다. 그 때 코렐리가 묵었던 곳이 '펠라기아'의 집. 어쨌든 현재 서로 싸우고 있지 않은 상황이고 서로 적이지만 도울 건 도와가면서 살아가다가 코렐리와 펠라기아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다 전쟁이 터지고 코렐리가 계속 그리스에 있다가는 죽을 운명이라 야밤에 몰래 그리스를 떠나게 된다. 그들은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전쟁이 끝나면'에 대해 많은 상황들을 상상하곤 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을 하자, 아이를 낳자, 의사가 될거야(펠라기아), 음악가가 될거야(코렐리) 등 많은 미래를 그렸던 것. 코렐리는 그리스를 떠나면서 펠라기아에게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펠라기아 역시 그가 돌아오겠다고 한 말을 믿고 기다린다. 믿고 기다렸는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코렐리가 70대가 되어버린.....



이보세요들.



나는 끝까지 코렐리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너무 초조했다. 그런데 그들이 재회하긴 했으되 70대라니. 님들 뭐에염? 지금 뭐하는거에염? 사람 말라죽일라고 그러는거에염?



그 긴 시간동안 펠라기아는 다른 사람과 연애도 사랑도 하지 않고 코렐리를 기다렸다. 자신의 집앞에 버려진 전쟁 고아를 딸로 받아들이며 키웠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살던 집이 불탔고, 딸이 아이를 낳아 손자까지 있는 상황. 그 사이 언젠가부터 그녀에게 세계 곳곳으로부터 엽서가 도착한다.



앞뒤 없이 쓰인 그리스어로 된 의문의 엽서가 세계 전역에서부터 오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이었다."당신은 이곳을 좋아할 거예요. 모든 집이 진흙으로 만들어졌답니다." 라고 쓰인 엽서가 산타페에서 왔다. 에든버러에서는 "성 꼭대기에 부는 바람은 정말 최고예요." 비엔나에서는 "여기 한 러시아 병사의 동상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이름 없는 강간범 기념비'라고 부르죠."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카니발 시즌이에요. 거리는 오줌과 가슴이 터질듯하게 아름다운 여인들로 가득 찼답니다." 런던에서는 "미친 사람들, 끔찍한 안개." 파리에서는 "탈장대와 탈장 부목만 파는 가게를 찾았어요." 글래스고에서는 "검댕과 술 취해 쓰러져 있는 인간들뿐이랍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지하철 속의 예술 작품." 마드리드로부터는 "너무 더워요. 모든 게 잠들어 있답니다." 케이프타운에서는 "훌륭한 과일과 썩은 파스타." 캘커타에서도 "먼지 속에 파묻혔습니다. 끝이 없는 설사." (p.455)



펠라기아는 이 엽서를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인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혹시 코렐리인가, 한순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코렐리는 죽었을 거고, 그리스어를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그렇게 엽서는 계속, 계속 온다.




나이는 70대였지만 어느 정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안토니오 코렐리는 무쇠로 된 프라이팬을 살짝 피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이 자기 뒤의 창문을 박살내는 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이 나쁜 놈아." 펠라기아가 소리를 질렀다. "이 나쁜 인간! 평생을 기다렸는데, 평생 동안 슬퍼하면서, 평생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살아있으면서 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감히 어떻게 약속을 어겨? 이 배신자야!"

코렐리는 갈비뼈에 빗자루의 날카로운 꼬챙이가 꽂히기 전에 뒤로 물러서며 담에 기대어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말했잖소, 당신이 결혼한 줄 알았다고."

"결혼이라구?" 그녀가 격분하여 외쳤다. "결혼이라구? 내 팔자에 무슨 결혼? 고맙군, 이 나쁜 놈아." 그러고 나서 그를 다시 한 번 찌르고 빗자루 손잡이로 머리를 때리려고 한다.

"당신 아버지 말씀이 옳았군요. 당신에게 야만적인 면이 있다고 하셨지."

"야만? 왜 그러면 안 돼? 이 돼지야, 그러면 안 돼?"

"나는 돌아왔었소. 1946년에. 마을 어귀를 도는데 거기서 당신이 아기의 입에 당신의 손가락을 넣고 있더군. 너무나 행복해 보였지."

"내가 결혼했다고? 누가 그래요? 누군가 내 현관에 두고 간 아기를 입양한 거라면 어쩔 건데요? 물어볼 수도 없었나요? 실례합니다만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인가요? 그렇게 물을 수 없었냐고?"

"제발, 그만 때리시오. 나는 매년 돌아왔소. 당신도 알고 있겠지. 나를 봤으니. 올 때마다 당신은 아이와 있더군. 너무 괴로워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봐야만 했소."

"괴로워? 내 귀를 믿을 수 없군. 당신이? 괴로워요?"

"10년 동안 ……" 코렐리가 이어갔다. "……10년 동안 너무 괴로워서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소. 그런 다음 생각했지. 그래, 좋아. 내가 3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아마 펠라기아는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가 자기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거야. 어쩌면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지도. 그녀가 행복하다면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매년 돌아왔소. 그저 당신이 잘 있는지 보기 위해. 그것이 배신이요?"

"그러면 제 남편 본 적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달려갔는데 당신이 사라져 버리고 없을 때 제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셨나요? 제 마음에 대해서 말이에요." (p.484-485)




글쎄. 너무 괴로워서 상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도무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 나는 상대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사람인데. 너무 괴로워서 죽이고 싶다니. 대체 그런 마음은 뭘까. 빻은 마음임에 틀림없어... 아무튼.


이 대화를 보는데 세상 답답했다. 코렐리는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찾아온 펠라기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해서 그녀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런 채로 몇십년을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위한 곡을 작곡해 연주하고, 그리고 엽서를 보낸다. 아니 세상 머저리 아닌가. 이런 미련퉁이가 또 세상에 있을까. 물어봤으면 됐잖아. 침묵은 가장 큰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왜 묻지 않고 제멋대로 생각해? 어떤 상황이 있을 줄 알고? 물어보면 되잖아.



자, 내가 돌아왔어요, 당신을 보려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당신 결혼한건가요?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룬거에요? 이제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나면 안되는건가요?


물으면 되잖아? 묻고 대답을 들으면 그 다음이 진행되잖아? 왜 묻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아? 그리웠잖아. 그리워서 엽서도 보냈고 해마다 보러왔잖아. 근데 왜 묻지도 않아서 서로 외롭고 괴롭게 늙어가게 만든거야, 대체 왜?

더 환장하겠는 지점은, 그 엽서는 역시나 코렐리가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를 배웠대. 심지어, 아테네에 25년간 거주하기도 했대. 이 쌍놈아! 같은 나라 안에 살면서도 그렇게 얼굴 안보여주고 그리워하게 냅둔거야 이 써글놈의 새끼야?!




"당신이 내 엽서를 받은 것을 알고 있소." 그가 말했다.

"그리스어로 되어있더군요. 왜 그리스어를 배웠어요?"

"전쟁이 끝나고 전모를 알게 되었소. 아비시니아, 리비아, 유대인의 박해, 잔학행위, 수천 명이나 되는 미확인 정치범들, 이 모든 것을. 나는 내가 침략자였다는 게 수치스러웠소. 너무나 부끄러워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 그래서 한 25년 동안 아테네에서 살았소. 나는 그리스 시민이오. 그렇지만 자주 이탈리아에 가지. 여름에는 투스카니로 가오."(p.486)



진짜 대환장포인트...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몇 십년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억울한건, 코렐리는 그래도 해마다 펠라기아를 봤어. 물론 펠라기아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며 자기도 괴로워했겠지만, 펠라기아는 코렐리를 몇십년간 보지도 못했단거다.



좋냐? 어? 좋아? 평생 그리워만 하니까 좋디? 어? 만족하냐 이 써글놈아?



그리워하다가 다 늙었다고. 그리워하며 평생을 보냈다고. 칠십대에 만나면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잖아 이 써글놈아. 진작 찾아왔으면 물어보지. 왜 서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내버려둔거야. 좋아했으면서, 그리워했으면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엄두도 못냈으면서. 이 세상 멍충.....








어휴..

내 속이 다 타들어가버렸어....


(절레절레)




"아직도 내 반지를 끼고 있군."

"손가락에 관절염이 있어 못 뺐을 뿐이에요." (p.487)



반지를 평생 끼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했었다. 그리워만 했다.



"그 사람은 당신을 만나기 전 제 약혼자였죠."

"약혼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소?"

"당신이 질투할 테니까요."

"물론 질투했겠지.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글쎄요, 당신이 처음은 아니었어요. 당신도 제가 처음은 아니셨잖아요?"

"최고였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 코렐리는 스스로를 억눌렀다. (p.488)




최고였잖아. 최고인데 왜 그냥 내버려둔거야, 대체 왜...

최고라며.

최고라며.







몇 초 동안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녀는 볼을 붉히며 코바느질로 주의를 돌린다. 그렇게 시선을 갑자기 돌려버리면 그를 무시하는 게 될 거야. 하지만 뻔뻔하게도 그녀는 그런 행동으로 그의 관심을 한 순간 더 잡아둘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몇 초 후, 다시 몰래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그가 바로 낚아챈다. 정말 분하고 창피하다.
그녀는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하고서도, 그가 일에 깊이 빠져있다고 확신하고 올려다보다가 다시 들키고 만다. 아, 정말 이러면 안 돼! ‘앞으로 30분 동안은 절대로 쳐다보지 않을 테야‘ 결심해도 소용없다. 그녀는 다시 쳐다보고, 그의 눈은 다시 깜박인다.
그가 자신과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작전을 바꿔야지. 절대로 먼저 눈을 돌리지 않을 테야. 그녀는 단단히 마음먹고 눈을 올려 뜬다. - P235

몇 시간이나 지난 것 같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한 채, 율동적으로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귀를 흔드는 게 아닌가? 또 말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코끝을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펠라기아의 입가를 잡아당기기 시작한 미소는 멈출 줄 모르고, 마침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코렐리가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바보처럼 울부짖는다.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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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9-05-0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장 터지는데요?!?! 뭐 이런 넘이, 책이 다 있을까요?! 전 안읽겠습니다. ^^;;

다락방 2019-05-02 12:42   좋아요 0 | URL
네, 안 읽으셔도 전혀 아깝지 않을 책입니다. 패쓰하세요~~

syo 2019-05-02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뜩이나 개똥같은 작잔데 다락방님의 솜씨를 거치고 나니 소똥같은 작자로 규모가 커지네요. 역시!!

다락방 2019-05-02 17:36   좋아요 0 | URL
페르귄트와 솔베이지 보다는 낫다고 해야할까요. 페르귄트는 죽기 직전에 솔베이지에게 오잖아요. 아 짜증나는 놈들이에요 진짜. 흥!

syo 2019-05-02 17:38   좋아요 0 | URL
흥! 으로부터 어떤 매서운 분노가 느껴진다?? 공감을 넘어 동감 수준의 분노가....

다락방 2019-05-02 17:39   좋아요 0 | URL
제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쇼님이 찰떡같이 알아들어서 너무 좋아요.....(수줍)

syo 2019-05-02 17:45   좋아요 0 | URL
우리의 우정이 무르익어 곱게 갈면 쫀득쫀득한 찰떡을 만들어 먹을 정도가 된 것이로군요 😤

다락방 2019-05-02 17:50   좋아요 0 | URL
우정은 역시 무르익어야 제 맛 아니겠습니까. 후훗.

다락방 2019-05-02 17:51   좋아요 0 | URL
아 쇼님, 근데 나 지금 엄청 재미난 소설 읽는다? 너무 재미있어서 미치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계속 읽고 싶은데 막 할 일도 너무 많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5-02 17:52   좋아요 0 | URL
뱀이 깨어나는 마을??

다락방 2019-05-02 17:56   좋아요 0 | URL
네네네네네네네네네네네네!! 작가 천재 ㅠㅠ

syo 2019-05-02 17: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이러시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그렇다면 체크해둬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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