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말 -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아니 에르노.로즈마리 라그라브 지음, 윤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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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8남매중 다섯째였고 아주 가난한 집에서 자랐으며 배움이 짧았다. 문화생활은 전무했고 경제적 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바라는 자식은 얼른 자립해서 돈을 벌어오는 자식이었다.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는 자식 얘기를 친구들로부터 듣고 오면 그걸 그렇게나 부러워하셨다. 수학능력시험을 망치고 엉엉 우는 나를 달랜다며 아빠는 다른 길에 대해 얘기하셨다. 그건 공장에 취직해 얼른 돈을 벌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4년제 대학에 합격을 했고 등록금을 내러 가서 아빠는 합격 공고판에 내 이름을 한참 보시며 "네 이름 내가 지었다" 하셨다. 줄 서있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다른데 예비로 되어서 그거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 여기 등록금은 내야지요' 라며 다른 아주머니들과 넉살 좋게 이야기도 나누셨다. 아빠는 내가 대학에 가길 바라지 않았지만 막상 내가 대학생이 되자 여기저기 자랑에 자랑을 하셨고 신기해하셨다. 당시에 아빠 형제의 자식들 중에는 4년제 대학을 간 사람이 단 한명이었고 나로 인해 두 명이 되었다. 그리고 내 동생들이 4년제를 갔고 작은 아버지의 아이들중 하나는 대학원도 진학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움도 없던 아버지가 어디가서 하는 자랑이라곤 '내 자식들 다 4년제 나왔다' 였다. 나는 아버지가 결국 자식들의 4년제졸을 자랑할 수 있었던 건, 다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동생들은 대학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 역시 배움이 짧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부모님은 아니 에르노의 좋은 교육을 위해 좋은 학교에 보냈는데, 그 학교에서 아니 에르노가 알게된 건 자신이 자연스레 보고 당연하게 익혀왔던 말과 행동이 교양없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그것들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공부도 잘해서 학급의 1등을 하기도 하고 상급학교로 진학도 무리없이 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부모들보다 더 많은 배움을 그리고 그에 따른 더 많은 교양을 갖추게 된 건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이었지만, 그런 한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낮은 계급이라는 걸 뚜렷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당연히 학급에 유독 부자인 티가 나는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와 쟤네 집 잘산다, 쟤네 엄마 선생님이래, 하는 일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딱히 계급 차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친구의 부모님들이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그건 그렇게나 부러웠다. 어떤 친구 집에 가면 우리 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고 우리 집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가 났지만, 그것에 계급이란 이름을 붙이진 못했었다. 대학은 달랐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대학에서의 첫 영어 시간. 선생님은 영어로 자기 소개를 시키셨는데, 나는 나만큼 아이들이 영어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숫제 교수랑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이 네임 이즈 다락방, 이런게 아니라 무슨 외국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거다. 수업이 끝나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어떤 아이는 알래스카에서 어떤 아이는 프랑스에서 잠깐 살았었다고 했다. 게다가 방학이 되자 어떤 아이들은 캐나다로 어학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성형 수술을 하고 왔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그러니까 어학 연수 같은게 있는줄도 몰랐는데 그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는 거였다. 내게는 어학연수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대학에 진학할 때도 전공에 대해 혹은 대학진학에 대해 조언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되어 엄마 나도, 라고 말했어도 부모님은 잔뜩 겁을 내셨다. 사실 말할 때부터 안될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그렇게나 좋아했던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해봤자 살다 온 애들, 어학연수 다녀온 애들 근처에도 가지 못할테니까. 대학 등록금도 비싼데 용돈까지 받을 수는 없어, 나는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니 에르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책 <사건>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얘기한다. 대학에 들어간 후 부모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부모님들과 나는 이제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책 <남자의 자리>에서도 그런 마음을 보여주었던 터다. 이 감정에 대해서라면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무섭고 크고 내가 따라야했던 아버지는 어느 순간 나에게 더이상 크지 않았고, 그에 더해 나는 아빠랑 다른 사람, 아빠보다 배움이 깊고 아빠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구분 짓고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더더욱 계급에 대한 인식을 예민하게 하고 자주 분개하면서, 그런 한편 나 역시 더이상 아버지와 같은 계급이 아니라며 다른 계급으로 나를 밀어넣고 있었던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내가 한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부장이란 직급까지 가졌다. 나는 이제 부모님을 모시고 전시회를 가고, 영화를 보러 가고, 여행을 간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내가 부모님께 해드리고 있다. 우리 아버지에게 지적임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책이란 수단을 읽다 못해 쓰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세상 영특해서 대학을 갔고 지금은 회사 부장이고 책을 읽고 자기가 돈 벌어서 여행을 다니는 자랑스러운 딸.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보다 목소리가 더 커지고 가끔 아버지를 멸시하는 딸. 나는 그런 딸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프다. 계급, 위계화, 자리 에 대해 인식하고 분개할 때 그 대상이 나의 아버지를 향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니 에르노가 하고자 했던 일이 서로 다른 계급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이 내게 와 잘 닿았으며 나를 각성시킨다. 내가 해야할 게 무엇인지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니 에르노가 알려줬다.



자,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내가 좋아하는 한나 아렌트는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한 적이 없다. 오히려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고 있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아니 에르노 식으로 말하자면 '경험의 페미니즘' 이고, 자신에 대한 정체화나 말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페미니즘 이다. 실천하는 페미니즘이다. 나에게 한나 아렌트는 페미니즘 실천 최고봉에 있다. 자신의 스승보다 더 잘나 버린 여자, 본인의 철학을 세상에 알린 여자. 훗날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만든 여자. 이보다 더한 페미니즘 실천이 어디있단 말인가. 본받을 어른에 대해서 나는 자주 생각하는데, 이런 식으로 한 여자가 스스로 우뚝 서 잘 나가는 걸 보여준다면, 다른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만 보다가 엑스파일의 스컬리를 보는 것 같은 일. 나는 한나 아렌트가 그걸 한 사람이라는 게 짜릿하게 좋다. 한나 아렌트 자신은 '내 뒤의 모든 여성들에게 갈 길을 개척해주자'는 작정을 한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갔더니 이름 난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나에게는 그것이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뚜렷한 계급차를 느꼈고 그것을 글로 써낸 사람. 사랑하고 섹스한 것도 다 글로 써낸 사람. '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나 볼까' 객관적으로 펼쳐내 보인 사람. 그녀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한다'고 부르짖는 책을 쓴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써내고 그걸 결과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이미 페미니즘 실천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뚜벅뚜벅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걸 했더니 노벨상 수상자가 되어버렸어. 이 세상에 노벨상 수상자인 여자 작가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의 페미니즘적 실천이 아닌가. 그녀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오, 노벨상 수상자가 쓴 책은 어떤거지? 하며 그녀의 글을 누군가 더 읽는다는 것, 오 세상에 이런 글이 있네, 하고 한 명이라도 더 알게 된다는 것, 오, 그렇지 나도 그녀같은 감정을 느꼈어, 그녀가 느낀 인식 나도 느꼈어, 아아, 나야말로 계급 탈주자였네, 할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적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것이 페미니즘이다.



아니 에르노의 날카로운 말들을 더 읽고 싶어져서 책장에서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다 꺼내오고 어제는 몇 권 새롭게 주문도 넣었다. 자신을 계급 탈주자 라고 칭하지만, 그러나 '두 세계 사이에 있을수 있는,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다시 한번 사회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기회로 느껴질때도 있어요.' (p.95) 라는 말은 또 얼마나 날카로운가. 나 역시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이것을 기회로 느끼자고 다짐해본다. 내 멸시가 향할 곳을 제대로 향해야겠다는 다짐도 역시 더한다.



라그라브는 같은 시선을 자기 자신의 궤적에도 적용하여, 스스로 "계급에 합류"했지만 "계급에서 이탈되었다"고 말한다. - P21

나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나로선 그 책(단순한 열정)을 쓰는 게, 무엇보다 『자리』와 『한 여자』와 거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감정적인 게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방식으로 쓰는 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어요. 1년 반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거든요. 내가 처한 상태를 객관화 하려 했고, 그 상태에 가장 잘 부합하는 말이 바로 열정이었어요. - P43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 P61

나에게 페미니즘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경험의 페미니즘"이에요. 난 당신이 책에서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빈민가에, 신정神政 국가에, 혹은 옆 건물에 사는 여성들의 착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이 투쟁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투쟁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 P61

(라그라브) 사회 세계 속으로의 개입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당신과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했어요. 사회학은 사회들의 그물망을, 여러 가지 지배 위에 그리고 그 지배에 의해 불평등하게 직조된 망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드러낼 수 있게 해줘요. 여기서 사회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뤼크 볼탄스키Luc Boltansky가 말한 대로, 사회 세계가 그다지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자들의 방향으로 돌아갈 뿐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되죠. 그렇다면,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행위가 세상이 늘 같은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불의와 지배를 아게 하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 세계 안에서의 각자의 위치를, 특히 가장 심하게 지배 받는,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긴, 혹은 그러한 역할 지정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밝히는 행위라고 볼 수 있어요. - P89

그 자체로 사회 세계의 자의성과 폭력의 정당성을 부정한느 행위인 거죠. 하지만 난 우리가 책을 출간하고 연구를 이어가는 일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책으로 출간될 뿐, 대중의 손에 가닿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공적인 게 되고, 누구든지 읽어볼 수는 있죠. 우리는 공적인 직무를 행하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거니까요. 하지만 가장 심하게 지배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출간물과 연구를 거의 손에 넣지 못하잖아요. - P89

부르디외는 지배받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게 아니고-그랬다면 민중주의가 되겠죠-지배를, 그리고 그 지배를 세우고 영속시키는 것에 대해 의식하게 만들려 했어요. 바로 그 욕망이 『자리』『한 여자』『수치』같은 글들을 이끌어갔죠. - P94

사회학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난 부르디외의 "분열된 아비투스" 개념과 관련된 개인적인 예를 제시할 수 있어요. 분열된 아비투스는 사실 청소년기 이래 내 삶 전체를 설명해주니까요. 내가 분열된 아비투스를 처음 자각한 건 글쓰기를 통해서였어요. 『빈 옷장』에서 내가 학교로 인해 "둘로 잘렸다"라고, "두의자 가운데 걸터앉아 있었다"라고 썼잖아요. 그전에 난 내자리가 없다는 감정을 언제나 병리학적으로 설명했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도 사용했죠. 그런데 느낀 것과 상황을 깨닫고 기술하게 되면 모든 게 달라져요. 난 분열된 아비투스가 나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회적 상황들에선 여전히 나타나고 있죠. 분열된 아비투스는 내가 세계를파악하는 방식이고, 그런 뒤에 그것을 글로 쓰는 방식이에요. - P94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느껴질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오히려 사회가 나뉘어 있고 위계화되어 있음을 기억하라는 내 안의 요청 같아요. 심지어 두 세계 사이에 있을수 있는,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다시 한번 사회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기회로 느껴질때도 있어요.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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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2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도 에르노도 그들 자신이 ˝페미니즘의 실천˝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내 멸시가 향할 곳을 제대로 향해야겠다는 다짐˝ 멋지다!

제가 다락방님 글이나 다락방 자체에서(만난 적은 없지만 ㅋㅋ)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자라온 환경 배경이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다락방 님은 굳이 그런 자기 자신을 포장하려는 허영이나 허세가 없어서 제가 더 애정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다락방 2023-12-22 11:13   좋아요 3 | URL
저는 말뿐인 사람, 말만 하는 사람, 말을 가벼이 하는 사람, 말에 무게를 싣지 않는 사람, 말을 일단 하고 보는 사람을 정말 싫어합니다. 말을 했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행일치 자체는 무리가 있겠지만, 언행일치가 되려는 태도를 가지고 생활한다면 언행일치로 이어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2월이 지나가는게 너무 초조하네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천번 말하는 사람보다 자기 길 묵묵히 가서 무언가 성취를 보여내주는 쪽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잠자냥 님, 저랑 비슷한 환경 배경을 가지고 지금의 잠자냥 님이 되셨군요. 저는 무엇보다 잠자냥 님의 예술적 취향과 안목에 대해 놀라는데요, 그건 제가 결코 노력한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잠자냥 님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예술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저는 잠자냥 님이 따뜻한 사람이라 느낍니다). 제가 잠자냥 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파랑 2023-12-22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부장님은 성형수술이 불필요하시지 않았을까요? ㅋ

부장님에 작가에 순댓국 홍보대사까지!
자랑스러운 딸이신거 같아요~!@

다락방 2023-12-22 11:37   좋아요 1 | URL
순댓국 홍보대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순댓국은 사랑입니다.

새파랑 님, 메리 크리스마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2-22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다락방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3-12-22 12:04   좋아요 2 | URL
이 세상에 독서괭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은오 2023-12-22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께 6352815353737번째로 반해버리게 만드는 글ㅠ

다락방 2023-12-22 14:25   좋아요 2 | URL
♡♡♡♡♡♡♡♡♡♡♡♡♡♡♡♡♡♡♡♡♡♡♡♡♡♡♡♡♡♡♡♡♡♡♡♡♡♡♡♡♡♡♡♡♡♡♡♡♡♡♡♡♡♡♡♡♡♡♡♡♡♡♡♡♡♡♡♡♡♡♡♡♡♡♡♡♡♡♡♡♡♡♡♡♡♡♡♡♡♡♡♡♡♡♡♡♡♡♡♡♡♡♡♡♡♡♡♡♡♡♡♡♡♡♡♡♡♡♡♡♡♡♡♡♡♡♡♡♡♡♡♡♡♡♡♡♡♡♡♡♡♡♡♡♡♡♡♡♡♡♡♡♡♡♡♡♡♡♡♡♡♡♡♡♡♡♡♡♡♡♡♡♡♡♡♡♡♡♡♡♡♡♡♡♡♡♡♡♡♡♡♡♡♡♡♡♡♡♡♡♡♡♡♡♡♡♡♡♡♡♡♡♡♡♡♡♡♡♡♡♡♡♡♡♡♡♡♡♡♡♡♡♡♡♡♡♡♡♡♡♡♡♡♡♡♡♡♡♡♡♡♡♡♡♡♡♡♡♡♡♡♡♡♡♡♡♡♡♡♡♡♡♡♡♡♡♡♡♡♡♡♡♡♡♡♡♡♡

은하수 2023-12-2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시니... 제가 너무 혼자 짝사랑하고...
또 책을 안 살수가 없잖아요!!!
전 종일 집에서 책을 읽는거 같은데도 왜 따라가지도 못하는거 같은 느낌이 들까요?ㅠㅠ

다락방 2023-12-26 08:56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책탑 페이퍼를 써야 합니다. 아오 이제 진짜 책 안살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정폭력과 포퓰리즘 베스텐트 한국판 9
에디 하르트만 외 지음,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고지현 외 옮김 / 사월의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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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절반은 가정폭력에 대한 논문이고 독일 연구자들이 썼다. 논문인만큼 어려운 내용도 있긴 했지만,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을 언급한 것도 의미 있었고,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향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내용을 읽는 것도 좋았다. 그런 한편 시재에 대한 것도 인상 깊었다.

어린아이일 당시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리를 가져야 함이 마땅하나 그렇지 못하고 또 '아이'라는 약자임에 보호받아야 하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폭력에 노출될 때, 그리고 주변에 그 사실을 알려도 모두가 침묵할 때 아이는 폭력 속에서 자라게 된다. 훗날 어른이 되어 그 상황에 대해 뒤늦게 고발하게 되면, 과거의 그 시절을 재소환해 이야기 해야하고 또한 그 폭력은 미래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현재 역시 이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고발하는 생존자 뿐만이 아니라 현재 계속 일어나고 있을 아동 학대를 언급함으로써 그 앎을 건드린다는 것.


비밀이 보장되는 경청회에서 피해당사자는 전형적으로 상실된 아동기 및 그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에서 성적 아동 학대가 가져온 결과들에대해 말하곤 한다. 그들은 현재로 이어지는 부담들을 주제화하기도 하지만, 또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주제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보고들은 아동기와 연령의 축소라는 현상을 인지하게 해주는데, 왜냐하면 경청회에서는 예를 들면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기관에 위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동에 대한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에 대한 규명은 또한 항상 예나 지금이나 일어나고 있는 성적인 아동 학대에 대한 앎을 건드리게 된다는 점에서 현재는 매우 현재적인 성격을 갖는다(Jud 2014). 과거의 일이 규명되면서 지금 현재에도 성적 아동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P84


책의 뒷부분 절반은 포퓰리즘에 관한 것이며 한국 연구자들이 썼다. 한국 연구자들이 써서 그런지 번역된 논문보다 더 잘읽혔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포퓰리즘이 확장되기 위해서는 리더가 필요한데, 이는 리더가 없다면 그 결속력이 유지되지 못함을 뜻하기도 한다. 각자가 가진 약자성 혹은 소수자성은 모두 다르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분노가 일치하여 결속되는데, 누군가 앞에서 그 결속력을 계속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쉽게 해체된다는 것. 


그런 내용들을 읽다가 뜬금없이 리더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내가 리더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확실히 작은 집단이나 큰 집단이나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며, 리더를 아무나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내가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백종원을 얘기하게 되는데, 요즘 방송중인 <장사천재 백사장>에서 백종원은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면서도 이내 자신이 맡았던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아랫사람에게 넘겨준다. 이는 일을 더 잘 진행되게 하면서 아랫사람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또한 자신은 그 시간에 또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실수가 발생하면 일단 혼내거나 윽박지르기보다는 그 원인을 찾고자 하고 그 후에 해결방법을 찾아내는 거다. 나는 내가 리더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다가 백종원을 보면서 그래 내가 저게  안되지, 하고 구체적인 능력부족을 실감한다. 리더는 정말이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포퓰리즘이, 그러니까 왜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는데 우리를 배제하느냐는 약자성의 발언, 동시에 자신과는 입장이 다른 약자를 배제하고자 하는 혐오의 표현까지 그 모든 것이 표현되고자 할 때, 거기에도 그 나름의 리더는 필요한 것이었다. 일단 여러명이 모이면 리더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는 트럼프가 분노한 사람들을 모은게 아니라 분노한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을 언급한다.


일견 이상한 정치인이 갑자기 나타나 교묘한 말을 던지고 우둔한 유권자들이 그 말에 현혹되면서 포퓰리즘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 분명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거친 말을 쏟아냈고, 분노한 러스트벨트는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부상하는 포퓰리즘을 으레 비정상적이고 이례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만다. 현상을 달리 진단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말 덕분에 러스트벨트가 분노한 것이 아니라 러스트벨트의 분노 덕분에 트럼프가 말을 할 수 있었다. 포퓰리즘을 있게 한 것은 바로 이 분노이다. - P114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베스텐트 한국판 9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데, 다른 것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페르디난트 주터뤼티(Sutterlüty 2002 und 2004)는 아버지에게서 반복적으로 신체적 폭력을 당하는 한 어린 여성의 상황을 조사함으로써 이 점을 명백히 밝혔다. 즉 가족 구성원 전원이 계속 그녀에게 연대감을 보임으로써 폭력 가해자인 아버지는 권력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족 내에서 주변화되는 듯했다. 상호작용 속에서 표현되는 그런 연대감은 특정 상호작용 맥락에서 폭력이 어떻게 정당성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 P46

물론 수치심은 남녀 모두의 폭력 피해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결국 주변 사람들이 자주 가정폭력을 오랫동안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치심을 가리는 방식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여성 피해자는 자신이 남성 파트너와 폭력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아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자기 파트너의 폭력에 침묵한다. 이에 반해 남성의 수치심은 여성 파트너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이 자신의 유약함과 남성답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여 침묵한다(Wil-liamson, Morgan und Hester 2018:57 이하). - P65

종종 장기간에 걸쳐 공고화되는 상호작용의 역학을 고려하지 않을경우 파트너 간의 폭력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다. 노먼 덴진(Denzin1984)은 폭력적 부부관계의 역학을 만들어내고 유지해가는 결정적 메커니즘을 모범적으로 분석했다. 사례들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남성의 폭력이 잃어버린 것, 즉 여성과 이들의 온정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의지와 자유를 획득하고자 그녀의 몸에 강압을 행사하고자 할 수 있는데, 그가 폭력적일수록 그는 이 문제에서 더 실패하게 된다. 결국에 그의 폭력을 촉발한 것은 더욱 강화된다. 즉 그 실패는 그가 통제하고 싶었던 관계를 더욱 파괴한다. 남자와 그의 파트너는 부정적인 감정에 쌓이게 되고 폭력의 징조 아래 서로를 묶는 상호작용의 역학으로 얽혀 들어간다(같은 책: 488 이하). - P66

일어난 일에 대한 부인, 사과, 불성실, 폭력의 발생에대한 책임의 전가, 억압, 희망적인 생각 및 새로운 폭력 사건 등은 장기적 관계의 전형이다. 남성 파트너와 여성 파트너는 폭력이 어떤 면에서 실재하지 않으며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같은 책: 507). 이후에 등장한 연구들은 덴진의 분석을 확증해주고 있으며, 폭력이 멈출 것이라는, 심지어 질투하는 남자의 사랑을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저 거짓된 믿음이 낭만적인 관계의 내러티브와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Lloyd und Emery 2000:45 이하). - P66

상호작용의 역학과 정서적 얽힘은-경제적 의존성 외에도 여성이폭력적인 파트너와 함께 지내는 이유나 여성의 집의 전문 인력의 면전에서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이유를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일은 자주 여러 면에서 파트너 폭력의 희생자인 아이들에게도발생한다. "폭력의 순환에 관한 현재 널리 퍼진 문헌(Steinmetz 1977: 98이하)은 어린 시절의 폭력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부모 사이의 폭력 행위를 목격하는 것도 종종 어린이에게 새로운 폭력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P67

따라서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되는 것이다.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장기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볼 때도, 부모의 폭력을 목격하는 것은 직접적 희생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서는 부모 간의 폭력, 아동에 대한 폭력 및 아동 간의 폭력이 서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은 경우에도 한 가정 안에서 중첩되어 등장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증거물은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런 폭력 형태들은 가족 안에서의 상호작용을 서로 강화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경우 이후의 삶의 단계에서 더 많은 폭력을 초래한다. 이 모든 것은폭력에 대한 일반적 연구에서 사회화 이론의 중요성을 시사하는데, 최근의 사회화 이론의 탐구에서 이 부분은 아주 소홀하게 다뤄진다(Sut-terlüty 2017). - P67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주인은 우리인데 왜 우리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는가?‘라는 주변화된 이들의 물음에 민주주의 정치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함에 따라 생겨난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위기의 한 원인으로 꼽히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위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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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0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텐트가 뭔지 몰라 찾아본자... West End 라는 독일잡지군요. 관심을 가져보겠습니다 :)

다락방 2023-12-05 11:08   좋아요 1 | URL
저도 모르고 이 책 제목만 보고 고른건데 읽으면서 보니까 독일잡지 한국판이래요. ㅎㅎ

단발머리 2023-12-0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나.... 독일 연구자들이 쓴 논문 읽는 포스라니..... 기립박수 치고 갑니다. 전 오늘 처음 알았어요.

트럼프와 러스트벨트의 관계에 대해선 전 생각이 좀 다르기는 한데, 트럼프가 그들의 ‘리더‘인 것 확실한 거 같아요. 리더의 귀환,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하던데요. 큰일입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더 큰 일............ (먼 산)

다락방 2023-12-05 12:10   좋아요 0 | URL
독일 연구자들이 쓴 논문인줄은 모르고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ㅎㅎㅎ 제목만 보고 냅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이런 책일 줄은.. 그래서 어려웠지만 어려운 부분 빼고는 재미있었어요. 포퓰리즘 부분은 더 재미있었어요. 처음부터 한국 말로 쓴 글들이라 그런지 잘 읽히더라고요. 하하하하하.

그러니까요. ‘그 리더‘의 귀환... 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 같아요. 깜짝 놀랐지만, 뭐 우리 나라도...(먼 산)

달자 2023-12-06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읽은 후기만 보면 후기 남기신 책들 정말 다 읽고 싶어져요…. 이 책도 조용히 마음 속에 저장…

다락방 2023-12-06 07:57   좋아요 1 | URL
달자 님,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제목만 보고 빌린 책인데 참 좋았습니다. 훗.
 
엑소시스트
윌리엄 피터 블래티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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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영화배우 '크리스'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열한살 딸아이 '리건'이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 험한 말이나 욕설은 물론이요 갑자기 소변을 보고 라틴어,그리스어, 독일어, 불어 등의 외국어를 말하고 평소와 목소리까지 달라졌다. 이에 크리스는 너무나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려가 검사하고 그때마다 치료약이나 주사를 받아 아이에게 투약해보지만 아이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진다. 침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어쩌면 아이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살인사건도 일어난다. 크리스는 이에 정신의학의의며 주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신부 '캐러스'를 찾아간다.


캐러스는 크리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리건을 보고서 역시나 정신의학적 접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것은 악마가 빙의했다는 생각을 가진 리건의 엄마, 크리스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 이에 아이의 몸에서 악마를 내보내기 위한 엑소시즘을 행하려면 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이 기존의 목소리와 화법 그리고 지금의 화법까지 비교해 충분한 증거를 마련한 뒤 교회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는데 성공하고, 그런 캐러스를 도와 엑소시즘을 진행해 줄 베테랑 신부 '메린'이 리건과 크리스가 사는 집에 도착한다. 크리스는 메린 신부를 보자마자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 아이의 몸에 들어간 악마는 아이의 몸을 죽일 생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신체를 성적으로도 이용하고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아이의 몸을 점점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악마가 나간 뒤 아이의 육체가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까. 그런 아이를 보는 크리스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런데, 메린 신부가 도착한 것이다.



"맥닐 부인?" 그늘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드럽고 교양 넘치면서도 성량이 웅장하고 풍부했다.

그가 모자를 벗어 인사하자 크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는 그의 눈을 보고 압도되었다. 지식과 사려 깊은 분별로 형형한 눈에서 그녀에게로 평온이 쇄도해왔다. 따스한 치유의 강물처럼. 그 원천은 그의 내면이었지만 어쩐지 그 너머에서도 비롯된 듯했다. 물줄기는 유장하면서도 저돌적이고 무한했다.

"랭케스터 메린 신부입니다."

한순간 그녀는 얼이 빠져 쳐다보았다. 마르고 금욕적인 얼굴을, 동석凍石을 조각해놓은 듯 반질반질한 광대뼈를. 그러다 황급히 문을 활짝 열었다. -p.432



캐러스는 자신의 신앙,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신은 캐러스의 기도에 응답한 적 없었고 신이 존재한다는, 신이 여기 있다는 표징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어린아이 몸에 들어간 악을 쫓아내기 위해 메린을 도우면서 그는 악마가 자신의 죄책감을 자꾸만 들쑤시는 말을 하는 걸 듣는다. 좀처럼 아이의 몸에서 나갈 생각을 않는 악마 때문에 수면 부족에 육체적으로 지쳐갔던 캐러스는, 악마가 이미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로 말을 할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엄마를 혼자두었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그에게 깊게 남아있는데, 악마는 자꾸만 그걸 이용해 건드린다. 그런 참에 이렇게 온화하고 악마랑 대적하는 메린 신부 역시도 신의 존재를, 자신의 신앙을 의심하고 회의를 가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메린은 그런 시간을 거쳤지만 결국 자신이 깨달은 바를 캐러스에게 얘기해준다.



"아, 글쎄…… 결국엔 내가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면, 하느님도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분이 요구하는 사랑은 내 의지에 관한 것이지, 감정으로 느끼는 그런 게 아니었어. 하느님이 요구하는 건, 내가 사랑으로 행하고, 남을 대접하고, 또 나를 몰아낸 사람들조차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네. 물론 지금은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위대한 사랑의 실천임을 알고 있지." -p.461



워낙 유명한 영화이니 이 영화의 결말을 얘기하는 것은 굳이 스포일러이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 아이의 몸에서 악마는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악마랑 마지막까지 대적하는 사람은, 이 악마와 이미 구면이며 엑소시즘에 경험이 많았던 메린 신부가 아니라, 엄마를 향한 죄책감과 신을 향한 회의를 가지고 있던 캐러스였다. 그는 혼자 남아 악마에게 울부짖는다. 그 어린 아이의 몸에 있지 말고 차라리 내게로 오라고. 그 후에 캐러스에게 닥쳐온 것은, 내가 처음에 우려했던 것처럼, 죽음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죽음. 


나는 이미 이 책의 결말을 영화를 보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죽지 않기를, 악과 싸워 악만 쫓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캐러스가 결국 악을 아이의 몸에서 내보내고 자기가 끌어안고 죽어가는 걸 보면서, 그러나 그의 인간의 삶이 끝난 것이 슬픔인 것은 아니라는, 그러니까 그의 기준에서 슬픔이진 않을 거라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요구한 사랑을 실천한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으며, 놀랍게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목소리를 그는 두 눈을 감기 전에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짐작하거나 혹은 기대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 들었다. 



"에고 테 압솔보(너의 죄를 사하노라) ……" -p.491



놀랍게도 나는 그가 죽기 전 결국 듣게 된 저 말 때문에, 결국은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깨달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세상에, 누가 읽기 전에 짐작이나 했을까. 엑소시스트를 읽으며 느끼는 것이 무서움보다 더 큰 안도일 수 있다는 것을. 



악은 비겁하다.

메린 신부의 말대로라면 마귀의 목표는 빙의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라고 한다. 


그리고 목표라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거겠지.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도록.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짐승으로 인식하게 하려는 거야. 사악하고 부패하고 추악하고 무가치하며 존엄이라고는 없는 존재로 말이지. -p.460



나는 그간 무지와 게으름이 악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해왔다. 이 책을 읽으며 거기에 비겁함을 더한다. 나는 이 마귀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거나 드러내기 위해 고작 열한살 아이의 몸을 빌렸다는 게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귀가 최소한의 도리를 지킬 게 무어란 말인가. 또한 열한살 아이는 안되고 스물한살 몸은 된단 말인가? 열한살 아이에게 안되는 거라면 서른한살 몸에게도 안되는 게 맞다. 그렇지만 나는 그래도 고작 열한살 아이의 몸을 빌리고 그 육체를 제멋대로 학대해버린 마귀가 너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비겁함은 악의 부분집합일 것이며, 악을 이루는 구성요소일 것이다. 게으름과 무지는 악의 원인일 것이고 비겁함은 악의 특징중 하나일 것이다. 악에게, 마귀에게, 그래도 선을 넘지는 말라는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번이고 말해주고 싶었다. 비겁하다고. 고작 열한살 아이의 몸을 빌어 악을 보이려고 하는 너는 너무나 비겁하다고. 너무 비겁해서 토가 나온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영화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것이 어린 아이의 몸에 들어간 악마를 쫓아내는 공포 이야기 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며 나는, 이것은 한 인간이 구원 받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원은, 악마를 결국 내보내게 된 그 작은 리건에게도 일어난 일이지만, 무엇보다 죄책감과 신에 대한 한없는 부름을 가졌던 캐러스에게 찾아왔다. 이것은, 구원의 이야기이다. 안도감은, 아이의 몸에서 악마가 빠져나감을 알고 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가 들었던, 그가 너무나 절실하게 찾았던 응답으로부터 받게된 것이기도 하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그는 마침내 이루었다.



"어쩌면 악이라는 게 선을 벼리는 도가니 아니겠나. 그리고 자신의 뜻은 아니겠지만, 아무리 사탄이라 해도 어떻게든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네." -p.462


데이미언 캐러스는 조지타운대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찾은 책과 간행물들을 한아름 안고 서둘러 예수회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후다닥 짐을 책상에 내려놓고는 서랍을 뒤져 담배부터 찾았다. 오래된 카멜 반 갑이 나왔다. 그는 한 개비에 불을 붙여 깊이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숨을 참으며 리건을 생각했다. 히스테리. 당연히 히스테리여야 했다. 그는 연기를 내뿜은 후 양손 엄지를 벨트에 걸고 그 자세로 책들을 내려다보았다. 외스터라이히의 『빙의』, 헉슬리의 『루됭의 악마들:지크문트 프로이트의 하이즈만 사례에 나타난 착행증』, 매캐슬런드의 『현대의 정신병 관점으로 고찰한 마귀 들림과 초기 기독교 시대의 엑소시즘』. 그리고 프로이트 정신의학 저널들에서 뽑아온 논문들. 「17세기 마귀 들림의 신경증」과 「근대 정신의학에 있어서의 마귀 연구」. - P320

책에 따르면, 빙의가 자발적인데다 영매까지 있을 경우엔 새로운 인격이 유순하기도 하다. 티아처럼, 캐러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자 유령인 티아는 조각가인 남자에게 씌어 간간이 한 번에 한 시간가량 나타났다. 그러다 조각가의 친구와 절절한 사랑에 빠진 나머지 티아는 영원히 그 안에 있게 해달라고 조각가에게 애원했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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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1-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 엑소시스트 좋아해서 다 찾아봤는데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이걸 책으로 읽는다는건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책은 디테일이 강해서 훨 더 무서울 테니까..저 퇴마록 초반 읽다가 숨막혀서 중단한 사람ㅋㅋㅋㅋㅋ)

그런데 다락방님의 글을 읽으니
꼭 읽고싶어집니다. 눈물 흘리신 포인트가 데미무어 주연의 옛날 영화 <세븐 사인>을 떠올리게 하네요. 거기서도 아이를 위해 그녀가 대신 죽거든요. ‘숭고한 희생‘이란 의미에서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듯 합니다.

그나저나 알라딘의 저커버그 잠자냥님이 안보이시네요ㅡㅠ

다락방 2023-11-07 13:48   좋아요 1 | URL
전 이 책 보고나니까 엑소시스트를 다시 보고 싶더라고요. 오래전에 이 영화 봤을 때는 공포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구원에 집중해서 캐러스 신부를 보고 싶어요. 그런데 도저히 영화를 다시 볼 엄두는 안나요 ㅠㅠ 너무 무서울 것 같아요. ㅠㅠ

저는 캐러스 신부가 결국 구원을 받았다는 게 진짜 너무 좋더라고요.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너무 좋았어요. 단순히 악을 쫓아낸 이야기가 아니라, 간절히 원한 사람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요. ㅠㅠ

그러게요. 잠자냥 님이 왜 안보이실까요. ㅠㅠ

잠자냥 2023-11-08 09:28   좋아요 1 | URL
오구오구....

책읽는나무 2023-11-07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댓글이 1위가 아니라 미미 님이 1위 하셨군요? 덤으로 제가 2위로군요.^^
요즘 잠자냥 님이 바쁘신가 봅니다.

무서울 것 같은 책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책이었다니 놀랍습니다.
푹 빠져 읽으셨군요.
이 가을에 말입니다.^^
악을 물리치는 것보다 신에게서 구원을 받는 것! 마귀의 목표는 우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읽다 보니...
결국 사람의 껍데기보다(생명) 정신이 우선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심오한 책이로군요.^^

다락방 2023-11-07 18:05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우리의 잠자냥 님이 왜 뜸하실까요. 외롭게.. ㅠㅠ

무서웠지만 읽기를 잘한 책이에요. 가지고 있으면서 나중에 한 번쯤 더 읽어보고 싶긴한데 무서워서 책장에 꽂아두기가 좀 꺼려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어째야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 책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어요, 책나무 님!!

단발머리 2023-11-0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무서운데ㅠㅠㅠ 찬찬히 읽었어요. 아이의 몸을 빌리려는 악령의 처절함을 따라 읽는데 <거짓의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우리는 서서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악령은 그런 조건 아래서는 환자의 몸을 떠날 수 없거나 아니면 떠나려 들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 냈다. 하나는 이미 언급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환자 자신이 축사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탄은 인간의 몸 안에 있지 않으면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악을 행할 수 없다. (397쪽)

우아.... 소름......

근데 진짜 잠자냥님 어디 가신거에요? 핸폰 바꾸고 바로 아닌가요? 아.... 궁금합니다......

다락방 2023-11-08 08:41   좋아요 0 | URL
와... 인용문 진짜 너무 딱이고 대박이네요. 저 이 인용문 읽으니까 그래서 그놈의 악이 아이의 몸을 빌린거구만, 싶더라고요. 그 몸을 벗어나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크- 비겁한 악, 무력한 악. 역시 <거짓의 사람들> 사기를 잘했어요. 흠흠.

잠자냥 님 돌아오셨다는 소식입니다!! 일단 본인의 서재에 나타나셨더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달자 2023-11-07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엑소시스트를 공포영화 그 이상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딱히 없었는데 거기서 이런 후기가 나올 줄이야 캬 역시 다락방님....엑소시스트 심오한 책이였네요

다락방 2023-11-08 08:39   좋아요 0 | URL
처음엔 무서웠지만 끝까지 읽기를 참 잘한 책이었어요. 결국 구원받는 간절한 마음을 보는 것은 제게도 좋더라고요. 영화에도 그 구원이 나오던가 갸웃하여 다시 보고 싶지만, 그건 차마 용기가 안납니다 ㅠㅠ

잠자냥 2023-11-08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구오구 얘들아 나 없어서 심심했니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1-08 09:38   좋아요 3 | URL
무슨 일 있나 걱정했다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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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여자대학교의 교수이다. 그녀는 똑똑한 제자 몇몇을 눈여겨 보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인 '줄리아 스타일즈' 가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을 이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어떠니, 제안하고 줄리아 스타일즈도 그걸 고려하는 듯 보였다. 무릇 똑똑한 여성들은 공부를 이어가야 할지니, 주저앉지 말지어다!


그러나 줄리아 스타일즈는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대신 그녀가 선택한 건 남자친구와의 결혼이며 결국 더 큰 도시로 나가는 것도 그만두기로 하는 것. 이에 안타까워진 줄리아 로버츠는 줄리아 스타일즈를 찾아간다. 그리고 재차 대학원 진학을 얘기한다. 이렇게 똑똑한 여성이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되는데, 라는 마음이 그녀에게 있다. 그러나 줄리아 스타일즈 역시 재차 거절한다. 그리고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큰 도시로 가는 게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이 동네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주부가 되는 거라고. 이건 주저앉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이 장면이 굉장히 낯설고 놀라웠다. 우리가 어릴 적에도 현모양처가 장래 희망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는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소원일 수도 있는 것이구나, 라는 걸 영화를 보면서 충격적으로 깨달았달까. 나 역시 줄리아 로버츠 처럼, 학업을 이어나가고 큰 도시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한 혹은 더 가치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내가 정말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앞에 부끄러워졌다. 왜 내 가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걸까?


<소네치카>를 읽으며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혼란을 다시 느꼈다. 주인공 소네치카도 그리고 소네치카 인생의 중반부터 등장한 야샤도, 남자를 만나고 난 후 자신의 꿈을 다 잊은 혹은 잃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네치카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열심히 읽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딱히 이렇다할 사랑을 해본 적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지만, 책의 세계에 빠지면 그녀는 그게 그렇게나 좋았다. 책에서 기쁨을 얻고 책에서 위로를 얻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소네치카를 알아보고 그녀와 비슷한 남자가 청혼을 해온다. 그녀는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말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남편이 스무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지만, 그녀는 일상의 모든 소소한 순간들에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투잡을 뛰어 힘들게 일해도 그런데 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삶이 늘 행복이었던 거다. 게다가, 자신이 연민을 품게 된 소녀 야샤의 등장에서도 자신의 집 한 켠을 내어주며 그녀를 딸처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건, 천성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숱하게 책을 읽어오며 쌓아온 단단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배신감과 아픔이 찾아든다.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게다가 그 상대까지. 그녀는 슬프고 힘들다. 그러나 발악하고 우는 대신 다시 책을 꺼내든다. 역시 책이 그녀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준다. 지금 남편이나 딸이 줄 수 없는 것들을 책이 준다. 나는 다시 책을 찾아들고 위로를 받는 소네치카를 보면서, 대체 왜 그 책을 남자와 함께 살 땐잊은걸까 싶었다. 아니, 잊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건 안다. 가난한 삶에서 늘 일을 하고 가족을 돌봐야 하는데 책을 읽을 시간이나 여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런 한편 도대체 왜, 어째서, 그토록 좋아하고 기쁨을 주는 것에서부터 멀어지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가 싶기도 했다. 선택할 당시엔 그걸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너무 안타까운 거다.


야샤는 고아였다. 기꺼이 선량한 마음으로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그녀는 이 험한 세상을 홀로 살아내야 했다. 그녀의 나이 열두살 때부터 남자 어른들이 고추를 넣어가며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고,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이 지저분한 어른 남자들을 받아들인다. 세상은 이렇게 더러운 거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면서 혼자서 버티어낸다. 그런 그녀가 다니던 야간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 친구의 집에 초대 받아 간 순간부터 그녀는 그 집과 사랑에 빠진다. 자신이 그동안 가져본 적 없었던 따뜻한 음식과 돌봄과 잠 잘 공간이, 무엇보다 친구 엄마의 환대가 너무 좋았다. 게다가 친 구 엄마인 소네치카는 집의 방 한 칸을 그녀를 위해 내어준다. 이제 여기서 자, 라고.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진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외치느라 내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칠 정도의 충격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지마, 안돼, 그러지마, 라고 내가 얼마나 많이 말했다고! 그러나 내가 그러지 말란다고 어디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듣던가. 결국 자신의 선택이고 또 뒤늦은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던가.


언젠가도 얘기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느냐는 내 결핍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야샤가 선택한 사랑이 나로서는 이해 못할 것이지만, 그러나 야샤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필연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가져본 적 없던 아버지 같았고, 그는 그녀가 그간 경험한 고추만 밀어 넣고 이용하고자 한 어른 남자들과도 달랐다. 그래, 나는 정말 너무 싫었지만, 야샤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눈물을 머금고 '네 삶, 네 사랑' 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샤도 역시 이 남자와 사랑을 한 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더이상 꾸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바라는 건 자기 손가락의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나 다이아몬드 반지를 갖고 싶어. 그녀는 배우가 되고 싶었었는데, 남자를 사귀고 나자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싶다. 왜? 왜? 야샤, 당신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야, 왜 그 대신 다이아반지를 선택하는거야? 배우의 꿈은 사실 그렇게 큰 건 아니었던 거야? 그게 그동안 당신을 버티게 해주었는데, 이제와서 남자와 그 남자가 준 다이아 반지로 만족한다고?


나는 분했다.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억울했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분하고 화가 나고 억울하고 어이가 없는 건, 그 책을 읽는 '나'였던 것이고, 그 삶을 사는 야사도 소네치카도 아니었다. 야샤는 그 순간 원하는 걸 가진 사람이었고 소네치카도 그 순간 자신의 행복을 만끽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선택이 혹은 그 삶이 안타까워 속을 끓였을지언정, 그러나 그녀들에게 감히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내가 더 우선하는 가치를 그녀들에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정말 이걸 원하는 여성들이니 그렇게 본인들이 행복하다면 된거지, 하면서도 내내 안타깝고 슬펐다. 사실, 지금도 조금 슬프다. 


그런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가진 즐거움이 혹은 꿈이 단지 남자 하나뿐만은 아니라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여분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여분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하나는 안돼, 하나는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 내가 의지하고 기쁨을 찾는 것이 단지 하나뿐이라면, 그 하나가 내게서 지워지거나 사라진 순간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소네치카에게는 책이 있었다. 상실감이 크게 덮쳐왔을 때 그녀는 놓았던 책을 다시 들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책이 줄 수 있는 기쁨을 이미 아는 까닭이다. 야샤에게는 배우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녀 역시 사랑을 떠나보낸 후 다시 배우의 꿈을 꾼다. 다른 즐거움, 다른 꿈은 인생을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단단한 축이 되어준다. 사실 소네치카를 읽은 전반적 감상은 슬픔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여분의 것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안도도 함께 느낀다.



이 책에 실린 또 하나의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도 내게 슬픔을 준다.

왜 딸이며 손주들까지, 늘 존재했던 엄마(혹은 할머니)의 존재에 감사하기보다, 언제나 부재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혹은 할아버지)의 존재에 기뻐하고 행복해한단 말인가. 지금 자신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건, 없었던 그 남자의 존재가 아닌데, 늘 있었던 그 여자의 존재인 것인데. 그런데 그녀의 인생은 그전에 어떻게 흘러갔던가. 그리고 그 후에는?



나는 슬펐다. 슬펐는데, 

감히 내가 타인의 인생에 슬퍼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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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02 11: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마저 찌그러진 게 와서 더 슬픈 다락방.........

다락방 2023-11-02 11:47   좋아요 3 | URL
괜찮아요. 내릴 역을 지나칠만큼 책에 빠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1-0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슬프다........ 야사한테 뭐라고 그러면서 ‘그러지 마‘ 하셨는지 그걸 좀 써주셔야겠어요. 이럴 수가 있나요, 진짜.....

다락방 2023-11-02 13:22   좋아요 0 | URL
저는 슬픕니다. 매우 슬픕니다. 역시 소설 읽기는 힘들어요. 내가 막 슬퍼버린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23-11-02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02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02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11-03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집중력하면 이작가님~! 지하철역도 지나칠 정도였다니 ㅋㅋ

저는 어제 <소네치카>만 읽고 잤는데, 좀 안타까웠습니다. 소냐의 자존감이 쫌만 높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ㅜㅜ

다락방 2023-11-03 11:13   좋아요 1 | URL
저는 소네치카도 안타깝고 야샤도 안타깝고 ㅠㅠ 슬펐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olcat329 2023-11-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네치카가 너무 불쌍해서 다 읽고 나서도 계속 생각이 났어요. 소네치카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생각도 들었구요. 야샤를 보면서 설마설마 했는데 역시나 해서 아...어찌 이럴 수가! 했답니다. 근데 정말 마지막 문장에서 조금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 맞아~소네치카에게는 ‘책‘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있었지...하구요. 근데 저는 이 책이 이상하게 잘 안 읽히던데(가끔 번역이 이해가 안가서요) 다락방님은 너무 집중해서 지하철역까지 지나치고 제가 커피 끊고 집중력이 많이 약해졌나봅니다.

다락방 2023-11-06 10:14   좋아요 1 | URL
저는 야샤 때문에 내릴 역을 놓쳤어요. 정말이지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지마‘가 되었었거든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류의 이야기에요. 미성년자와 성인의 성관계요.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서 그러지마 그러지마 아니라고 해줘 막 이런 마음으로 읽다 보니 내릴 역을 지나쳤습니다. ㅠㅠ

왜 그 남자는 자신이 원하던 여성들 모두와 사랑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예술)도 계속해나갔는데, 왜 그를 사랑한 여자들은 그를 돕는 역할이었나, 를 자꾸 생각하고 집착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속상했어요. 그러나 그 당사자들은 그 시간을 좋아했다고 하면,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겠죠. 아 너무 안타깝고 복잡한 마음이었습니다. ㅠㅠ
 
로마 이야기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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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녔고, 아마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하겠지만, 정말 열심히 다녔다. 국민학교 6학년 때는 교회에서 반주를 했고 예배 시작 전에는 일찍 가서 주보를 나누어주며 전도를 하기도 했다. 어른 예배에 초대되어 반주를 한 적도 있고 그래서 동네를 걷다보면 나를 아는 척 해주시는 어른 분들도 계셨다. 중등부에 올라가서는 예배 반주가 아닌 성가대 반주를 했는데, 합창 연습 때문에 평일에도 간혹 시간을 빼야 했고, 그즈음 반주 하는게 너무 싫고 또 못한다는 생각에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도 일반 예배석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예배 보고 싶어요, 하고.

그보다 더 어릴 때는 크리스마스 라고 연극에 참여하기도 했다. 처음 주어진 역할은 동방박사 3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마리아 역을 하고 있었다. 배에 커다란 바가지를 넣고 나는 예수를 낳았다. 


이렇게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지만, 아니 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교회가 너무 싫었다. 너무 싫어서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더이상 다니기를 거부했다. 교회에서 여러 차례 전화가 왔는데, 한 번은 내가 아닌 척 받아 걘 이제 안다닐 거예요, 했지만 쉽게 들통났다. 어쨌든 나는 안다니기로 마음 먹었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새로운 신도가 오면 격한 환영을 하는 것도 싫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도 싫었고(나는 정말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성희롱이나 추행 때문에도 싫었다. 착한 사람들인척 좋은 사람들인척 해놓고 해선 안될 짓을 그 안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보았고 경험했고 그래서 알았다. 이런게 너무 싫어서 그만뒀다. 나에게 교회는 그 뒤로 너무나 끔찍한 곳이 되어 있었고, 신앙생활을 하는 엄마가 부흥회나 전도주간이라며 같이 가길 권하시면 마지못해 따라 나서는 아빠와 남동생과는 달리,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싫었다.



그러나 십년도 더 전에, 시사인에서 '임영신'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에게 끔찍한 교회가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임영신은 인터뷰에서 교회 때문에 자기가 살 수 있었다고, 그곳은 외롭고 힘든 자신에게 손을 뻗어준 곳이라고 말했다. 그 후에는 한 친구가 자신은 교회가 싫지만 동네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유일하게 교회에서만 받아주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엄마에게 구원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지만, 그런 사례들을 듣고나서야 나에게 끔찍한 곳이 다른 사람들의 구원이 될 수 있구나, 깨달았다. 그게 현실적으로 인지가 된거다. 



교회라는 장소에 대해서는 오랜 경험치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면, 여행지라는 낯선 곳에서는 짧은 시간의 경험만으로도 그 다름을 깨닫는 것이 가능했다. 타국에서의 오랜 유학이나 이민 생활에서 오는 인종차별과 고단함에 대해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듣노라면, 그곳에 내가 여행지로 갔을 때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낯선 여행객에게 사람들은 친절했고 그래서 내가 '다음에 또 오고 싶다' 생각한 곳이, 그곳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힘들고 고생스러운 곳이었다. 그래,


누군가의 낙원은 다른 누군가의 지옥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줌파 라히리의 《로마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로마 라는 도시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들은 인종 때문에, 종교 때문에, 어쨌든 오래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이유 만으로 배척당한다. 식당의 종업원들은 친절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욕을 하며 이곳에서 나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겪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저 평온하고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떻게든 섞여서 어떻게든 참아가면서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게 어디 쉬운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있다는 자각은 삶을 고단하게 한다. 



줌파 라히리의 작가 소개를 보면 벵골 출신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난 '인도계 미국인 작가' 라고 쓰여있다. 줌파 라히리의 글에서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 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일은 그전에도 있어왔다. 장편소설 《저지대》에서도,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도, 이곳에 있지만 이곳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나, 이곳에 적응하고자 하는데 힘든-가끔은 물론 행복하기도 한- 내가 등장하곤 했다. 한 곳에서 살며 늙어가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줌파 라히리가 쓰지 않고, 미국에서 나고 자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저지대를 쓰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당연하고, 물론 독자에겐 다행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방인의 정서를 쓰는 것이 줌파 라히리에게 원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로마 이야기에서는 그게 더 강하고 섬세하게 펼쳐진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대체 로마로 가서 어떤 시간들을 보낸걸까 싶어지는 거다. 이미 저명한 작가인만큼 줌파 라히리의 로마에서의 삶이 힘들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그건 여기에 있는 내가 멀리에서 본 것일테다. 줌파 라히리는 자기에게 직접 닥친 일들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이곳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낯선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시로 목격했으리라. 사소하게는 식당에서 좀 더 깊게는 직장에서,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거기에는 미국에서 거주하다 로마로 옮겨갔다는 장소의 이동성도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새로 공부하며 알게 된 외국어로 쓴 소설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모국어가 아닌 어른이 되어 새로 배운 나른 나라의 언어, 이탈리아어.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쓴 것은 영어로 썼던 것과는 다르게 풀어나가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이번 로마 이야기에서 분명 누군가에겐 낙원인 곳에서 그러나 다른 이에게 펼쳐지는 지옥을 자꾸 본다. 그 지옥은 물론 '로마여서', '로마이기 때문에'가 아니다. 그 지옥은 로마일 수도 있고 퍼스일 수도 있고 뉴욕일 수도 있고 서울일 수도 있다. 나만 해도 일전에 지하철에 탔다가 경로석에 앉은 (아마도)인도계 외국인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을 하는 한국 남자 노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 거기에 앉은 게 백인 남자였다면, 그 때도 그 할아버지는 경로석에서 비키라고 똑같이 소리 질렀을까? 서울이야말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낙원이 될 수 없는 곳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장소는, 이방인에겐 어쩔 수 없이 지옥이 되어야만 하는걸까?



줌파 라히리에게 외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쓴 탓인지 혹은 번역가의 번역 탓인지, 읽는 내내 문장들이 어색했다. 그렇게 이방인의 감각과 어색한 문장들로 소설집 자체가 약간 낯설게 느껴졌는데, 맨 마지막 단편인 <단테 알레기에리>를 읽으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친구의 남자로부터 받은 사랑고백에 느끼는 죄책감, 낯선 나라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삶, 결혼하고 육아를 하다 뒤늦게 다시 공부해 직장을 얻고 동년배의 여성 친구들을 사귀어 우정을 쌓아가는 일.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는데, 이건 줌파 라히리가 오래전에 쓴 적 있는 <헤마와 코쉭> 을 -전혀 다른 줄거리임에도- 생각나게 했다. 외국어와 낯선 장소는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지만, 어쩌면 작가 자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을, <단테 알레기에리>를 읽으면서 했다. 오십이 넘어 여성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자기 직업 가진 여성의 이야기가 왜이렇게 좋은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헤마가 자꾸 생각이 났다.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던 헤마는, 잘 살고 있을까?



줌파 라히리에게, 그러니까 적어도 줌파 라히리에게 삶은 한 곳에서의 정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훌쩍 떠날 수도 있고 혹은 여기와 저기를 오갈 수도 있다. 내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간혹 쓸쓸하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모두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므로 받아들인다. 


나는 여전히 프라납 삼촌을 좋아했던 엄마를 보는 이야기, <지옥 천국>이 제일 좋고, 예쁜 속옷을 준비했지만 차마 그걸 입어볼 수도 없게끔 그저 왔다 떠나는 유부남 애인을 다룬 <섹시>가 좋지만, 그런데  당신의 낙원이 다른이에겐 지옥일 수 있다는 당연한 얘기를,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삶을 살면서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고맙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실 사람들은 잊고 사니까. 내가 사는 이곳은 지금 다른 이에게 지옥일 수도, 그리고 낙원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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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2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나도 <소네치카> 리뷰 방금 올렸는데 일단 찌찌뽕(?!)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25 13:25   좋아요 1 | URL
너무 궁금해지더라고요? 사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0-25 12: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락방이 예수를 낳은 동방박사3이었다니.........
예수를 낳은 자, 어쩐지 대인배....

이 책에 대한 다락방 님의 아쉬움도 느껴지지만 그래도 읽고 싶어지는 리뷰.

다락방 2023-10-25 13:26   좋아요 4 | URL
원래 예수한테 선물주러 찾아온 동방박사 3 이었는데 마리아 역 맡은 언니가 안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졸지에 제가 마리아를 하게 됐고 그래서 요셉 역을 맡은 오빠와 핑크빛 로맨스가 싹터버렸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남자들 있는 곳에 가면 그렇게 루머를 만들고 다녔어요.. 하하하하하

독서괭 2023-10-25 13:52   좋아요 1 | URL
엄머나…!!😳

잠자냥 2023-10-25 14:09   좋아요 0 | URL
요셉 오빠 ♡

다락방 2023-10-25 14:14   좋아요 1 | URL
요셉 오빠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어휴 피곤해요. 저는 그 때부터 남자들 좀 울리고 다녔어요.
때려서 울리거나 애태워서 울리거나... (먼 산)

잠자냥 2023-10-25 14:27   좋아요 2 | URL
때려서 울림 100번 애태워서 울림 10번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깨물어서 울린 적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25 14:37   좋아요 3 | URL
노노 때려서 울림 100번 애태워서 울림 1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25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 신간 소식 보고 어 다락방님 좋아하시겠는데! 하고 보니 이미 주문하셨더라고요? ㅋㅋ 받자마자 빠르게 읽으셨군요!
이방인 이야기는 외국인이 점점 많아지는 우리 현실에도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국 가서 살아본 분들은 거기 가면 소수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들 하시더군요.

다락방 2023-10-25 14:39   좋아요 2 | URL
네네 너무 읽고 싶었어요. 아쉬운 마음과 그럼에도 여전히 좋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거 읽느라고 코스모스 내팽개쳤답니다? ㅋㅋㅋㅋㅋ

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방인이 되어볼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줌파 라히리의 이런 글이 더 좋았어요. 물론, 제가 이방인이 될 생각이 없다해도 이런 이야기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어로 소설 쓰는 줌파도 이탈리아어로 소설 쓰는 줌파도 좋아합니다. 만세!!

다락방 2023-10-25 16: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배에 커다란 바가지를 넣고 나는 예수를 낳았다. ‘

이거 명문인데 왜 아무도 언급을 안해주지? 세상에 누가 이런 문장 쓰냐. 내가 예수를 낳았다, 고. 최고다.

잠자냥 2023-10-25 17:25   좋아요 0 | URL
그때부터 배가 남산만 했구나!?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25 17:35   좋아요 0 | URL
아, 이 배가 그래서였구나!!!

꼬마요정 2023-10-25 21:23   좋아요 0 | URL
제가 언급하려고 했어요 ㅋㅋㅋ 저 문장 뭔가 멋져요 ㅋㅋㅋ 저는 엄마가 불자인데 강제로 교회 보내서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로 끌려갔… 흑흑 만화영화도 못 보고ㅠㅠ

다락방 2023-10-26 09:44   좋아요 1 | URL
아.. 강제로 교회를 ㅠㅠ 그런데 어린 시절 교회는 대부분 강제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성인이 되어 내 의지로 가보고 은혜 충만함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교육만 주입식이었던게 아니라 종교도 주입식이었던 것 같아요. ㅠㅠ

꼬마요정 2023-10-26 22:51   좋아요 0 | URL
전 엄마 아빠의 일요일 아침 시간을 위해 희생된 거였어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3-10-26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에 커다란 바가지를 넣고 나는 예수를 낳았다. ‘

그냥 명문 아니고 올해의 문장이죠. 난 교회 그렇게 다녔어도 성극에서 지나가는 사람 한 번 못해봤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가지 넣고 예수님 낳으신 분, 제가 한없이 흠모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평생 이런 문장 쓸 일이 없겠네요. 아쉬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0-26 11:06   좋아요 1 | URL
국민학교 4학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 오빠는 6학년이었고 중등부로 가는 바람에 우리의 핑크빛 로맨스는 금세 끝나버렸어요. 요셉, 잘 지내나요? ㅋㅋㅋㅋㅋ
이 교회는 매우 작은 교회에서 연극에 참여하지 않은 아이들 수도 얼마 안됐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후에 저는 큰 교회로 옮겨가게 됩니다...라고 말하면 뭔가 다음에 거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만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런 명문을 쓰는 저는 계속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