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선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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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대학생 '앙주'는 16살 소년 '피'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님이 된다.

피의 아버지는 벨기에에 거주하는 피가 프랑스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봐야 하는데 독서장애가 있어서 프랑스어 과외가 필요하다며 앙주를 고용한거다. 그렇게 앙주는 피에게 문학 작품을 읽도록 시키고 그동안 책을 읽어본 적 없었던 피는 이 과외 덕분에 책을 읽으며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앙주와 나누고 둘은 친밀한 관계가 된다. 앙주는 우정이라고 계속 강요하지만 피는 자꾸만 사랑을 이야기한다. 


19살과 16살 사이에는 고작 3년이라는 나이차이만 존재하지만, 그러나 어떤 경험치냐에 따라 그 차이는 아주 크게날 수 있다. 처음 책을 읽어보는 피에게 책은 싫은 것이었다가 재미있는 것이었다가 이제 앙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을 자꾸 만나러 오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 문학 작품에 대한 얘기로구나, 하고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세상에, 이 짧은 책 한 권에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책장을 넘기면서 놀라게 된다. 그러니까 앞부분만 읽었을 때, 과외를 시작하고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그 나름대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책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책을 추천한다면, 그 책은 어떤 책이어야 할까' 하는 것들. 그러나 그것 외에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할 이야기가 이 책으로부터 나온다.


-책 이야기

물론, 당연히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사라고 해봐야 고작 19살이고 책을 읽어야 하는 학생은 16살이다. 그런데 이들이 읽는 책의 목록이 대단하다. 시작이 '스탕달'의 [적과 흑]이며 그 다음 읽는 책이 세상에 [일리아스] 라니까? 독서인생이 그들의 두 배가 넘는 나도(계산하지 말도록 하자) 아직 일리아스를 안읽었는데? 게다가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심오하다. 단순히 재미있다 재미없다 정도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뜻을 분석하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넌 모든 것에 답을 갖고 있구나」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쁜 거예요?」「그보다는 네 한계를 보여 주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추론은 스스로를 유효화해 추론 그 자체 속에 닫혀 있는 것, 그게 바로 우매함의 정의야.」 -p.96


아니, 이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 이게 대체 무슨일이야.  조금 더 볼까?


「실망스럽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그딴 걸로 엄마에대한사랑을 접다니, 정말이니?」「누군가를 업신여기면서 사랑하긴 어려워요.」 -p.99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이 열여섯살 소년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군가를 업신여기면서 사랑하기 어려워요, 라니. 그러네, 정말 그러네. 업신여기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지. 이 소년, 책 한 번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삶을 알아? 대단하다.. 그래서일까, 책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책 속에 담긴 뜻을 그 재미를 깨닫는다. 이들이 나누는 책들에 대한 이야기, 적과흑, 일리아스, 변신, 육체의 악마, 클레브 공작부인에 대한 감상들이 너무 재미있다. 육체의 악마가 여기에 나오는구나. 내가 또 다 사놨지.



-(남)교수와 (여)제자

그러나 책 이야기만이 이 책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책 이야기만으로도 사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을 순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많이 아쉬웠을 것 같다. 그런데, 아멜리 노통브는 남교수와 여제자의 사랑 이야기를 여기에 집어넣었다. 불러들였다, 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이 싫어하는, 이 친구 하나 없는 '앙주'를 비교신화학 교수가 눈여겨보고 접근하는거다.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불러내는데, 그의 유혹에 나는 가슴 졸였다. 안돼, 허락하지마. 오십대 남자교수를 네 인생에 들이지마, 라고. 

그런데, 우리의 앙주, 교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자를 유혹하는 건 비열한 짓이에요. 나쁜 학점을받을까 봐 겁이 나서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제자를 유혹하는 건 더 나빠요. 상대가 취약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공략하는 거니까.」「왜 그런 말을 하니?」 그는「그렇게 생각하니까요.」-p.107


아아, 앙주, 너무 기특하다. 이렇게 말하는 거, 아무리 유럽에 거주하는 여성이라 해도 쉽지 않았을텐데. 그런 한편 이렇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건, 앙주가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고 그것이 앙주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부분에서 어김없이 한나 아렌트 생각이 났거든.

한나 아렌트는 이미 결혼해 아이가 있고 애도 있는 늙은 교수 하이데거의 접근을 두 팔벌려 환영하며 그와 연인이 된다. 한나 아렌트의 엄마는 한나 아렌트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한나 아렌트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한나 아렌트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그런 한나 아렌트에게 다정하게 접근하는 성인 남성, 게다가 한나 아렌트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한나 아렌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접근하는 하이데거에게는 당시 가진 것이 많았다. 사랑은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라면, 한나 아렌트에게 있던 결핍을 당시에 하이데거는 채워줄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결핍이란 무엇인가.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아직은 결핍이 더 많지 않은가. 살아가면서 알고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차곡차곡 하나씩 채워지는 것일텐데, 어릴 때에는 부족한 게 얼마나 많아. 그만큼 그 부족을 채워주기도 싶다. 샴페인만 해도 그렇다. 고작 나이 스물이 샴페인에 대해 어떻게 취향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앙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도미니크는 앙주에게 샴페인을 사준다.


「정말 빨리 마시는군!

「그러네요.」「늘 이렇게 마시나?」리우스 카이사「누가 날 위해 샴페인을 주문한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당연히 습관 같은 건 없어요.」-p.138


스무살에게 누군가 샴페인을 주문해주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건 서른이 되도 경험하기 쉬운게 아니다. 글쎄, 마흔쯤 되면 자기 돈으로 사먹을 수 있겠지만, 스물에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걸 해줄 수 있는 상대는 당연히 나보다 가진게 많은자일 것이다. 나에게 학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 샴페인도 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은 얼마나 큰가. 앙주는 자신이 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자기 감정을 돌이켜보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앙주와 교수의 관계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라고 해서 안타까운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던가. 

누군가 뜯어말리고 싶었던 관계가, 나라고 없었을까. 그리고 나 역시 그 때, 나에게 있던 결핍을 상대로부터 채우려고 했던거라는 생각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러지말았어야' 했던 일이지만, 그래서 아주 많이 내 자신을 원망하고 살기도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 내 나이가 젊었다는 것, 철없다는 것 때문에 나를 조금 용서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내가 너무 철이 늦게 들었다는 것이지만..


그런 한편, 앙주의 저 말, 제자를 유혹하는 건 비열한 짓이라는 말에, 나는 어김없이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을 떠올린다.

추락에서의 남교수도 예의 자신이 가르치는 여자 제자들을 여러명 사귀었다. 젊고 예쁘고 똑똑한 여자 대학생들. 그러나 그가 교수의 권위를 잃게 되었을 때, 그가 만날 수있었던 건 비슷한 나이대의 예쁘지도 않은 여자였다. 제삼자가 '교수이고 돈도 많아서' 그를 사귀었다고 여자 제자들을 욕할 수도 있겠지만, '교수이고 돈도 많아서' 남자 교수야말로 젊은 여자들을 사귈 수 있었던 거다. 그 관계에 사귄다는 단어를 적용하는 건 적합하진 않지만. 그러나 앙주는, 뚜벅뚜벅 제 발로 알면서 걸어 들어갔고, 나는 타인의 사랑에 혹은 그 관계에 딱히 더 말을 얹고 싶지 않다. 앙주는 열아홉살이고, 앙주에게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 찾아올 것이며, 앙주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는 다 앙주가 감당할 몫이다.



-벨기에

뜻밖에 벨기에를 만난다.

나는 벨기에의 브뤼셀을 두 번 갔었다. 사실 갔다는 말이 부끄러울만큼 잠깐 들렀던 것에 불과하다. 한 번은 해가 쨍쨍했고 한 번은 비가 내렸다. 아직도 브뤼셀 기차역에서 번화가로 걷던 그 순간의 장면들이 생생하다. 길을 아름다웠고 몇 번이나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선하다. 그러나 내가 고작 그만큼의 시간을 머물고서 벨기에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 내가 모르는, 내가 보지 못한 벨기에를 앙주가 말해준다.


「브뤼셀은 예쁜 도시야.」 내가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날씨가 좋아야 그게 보여.」

「왜 그런데요?」처음이「거의 모든 집이 양방향으로 트여 있거든. 그래서 날씨가 화창할 때는 빛이 집들을 관통해서 지나가지. 그러면 브뤼셀은 마치 광선으로 지어진 것처럼 보여. -p.116~117


브뤼셀의 집이 양방향으로 트여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야 알았다. 날씨가 화창할 때는 빛이 집들을 관통해서 지나간다니, 그러면 브뤼셀은 마치 광선으로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니, 이거야말로 내가 몰랐던, 보지 못했던 브뤼셀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브뤼셀에 가고 싶어졌다. 간다고 해서 내가 광선으로 지어진 브뤼셀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관계

그렇다. 관계다.

단순히 스승과 제자일 수 있었던 앙주와 피는 특별한 관계가 된다.

그 집구석 이상한 집구석이야, 애도 이상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상해, 라고 하면서도 앙주는 그 집에 가는 것을 끊어내지 못한다. 피가 어쩐지 마음이 쓰여서. 으리으리한 집, 거대한 서재를 갖췄지만 그 책을 읽는 이는 하나도 없었던 집에 사는 피가 어쩐지 애틋하다. 과외수업이 있을 때마다 염탐하는 아버지라니, 얼마나 변태적인가. 앙주는 돈을 받으면서 언제나 그것에 대해 비난하고 자신이 그만둘 수도 있음을 얘기한다. 그러나 피의 아버지는 앙주의 교육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붙잡는다. 아들인 피가 의지하는 사람은 앙주가 유일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당신이 피에게 얼마나 절실한 사람인지 당신도 알잖소.」-p.122


김혜리 기자의 <조용한생활 3월호> 에는 경제학자 '홍기빈'이 게스트로 나왔다.

그는 대가족보다는 핵가족이 핵가족보다는 1인 가족이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뭐가 됐든 다 돈을 써야만 하는 거라고.

아이를 키우는 예를 들면서, 대가족일 때는 모든 가족들이 양육에 참여하지만, 핵가족이 되면 아이를 돌보는 일에 돈을 써야 한다고.


과외 선생에게 많은 돈을 들이면서 아이에게 책을 읽도록 하고 또 아이의 대화상대가 되도록 하는 일이, 피의 아버지가 하는 일이었다. 피의 아버지라면, 그보다는 피에게 절실한 사람이 그가 되어줬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 서재의 많은 책들을 읽도록 독려하는게 아버지인 그가 해야 하는일 아니었을까. 아들을 염탐하는 게 아니라 아들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게 그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피와 피의 아버지도 핵가족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게된 건 아닐까. 다른 가족이 그 큰 집에 더 있었다면 피도 조금 달라졌을까? 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사랑을 그리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 피는, 친구도 없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앙주였던 거다. 그러니 앙주가 계속 이 집에 찾아오게 하고 싶다. 앙주를 계속 만나고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 그러나,


절실한 사람이라니.

누군가에게 절실한 사람이 되는거, 나는 피하고 싶다. 



-잔혹동화

책과, 관계와, 브뤼셀을 얘기하는 것 같았던 이 책은,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잔혹동화가 된다. 아니, 본래부터 잔혹동화였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읽었다는 게 더 맞을테다. 이 잔혹동화에 대한 결말은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렇게만 말하겠다.


책을 읽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열리지만, 그러나, 꼭 그런 것도 아니고 모두 그런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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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책 참 잘 읽는다~!! 아마도 아맬리 노통브가 이런 독자를 기다리고 썼울 거 같은 그런 책.

저는 마지막 결말 상징으로 읽었습니다. 책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자의 갇힌 세계 탈출 뭐 그런 거요.

다락방 2024-03-28 08:44   좋아요 1 | URL
마지막 결말은 피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선으로 가진 않았고 가족과 스스로에게 그리고 앙주라는 타인에게까지 결코 좋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어떤 사람이 어떤 수단과 만나느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이 책 처음부터 좋진 않아서 리뷰까지 쓸 줄 몰랐는데 점점 더 좋아져서 결국 할 말이 많아져버리고 말았어요. ㅎㅎ
덕분에 책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님. 오래되어 기억 안나긴 하지만, 제가 읽은 아멜리 노통브 책들 중에서 이 책이 제일 나은 것 같아요.

잠자냥 2024-03-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너무 진지하게 달았어~!! ㅋㅋㅋㅋ 난 다락방 안 업신여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3-28 08:53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이 저를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건 제가 잘 압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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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진짜 너무 좋다. 책장을 넘길수록 아 내가 하루키를 좋아햇던 그 오랜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인터뷰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보면 그는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이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그 말, '결국은 선한 이야기'를 계속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선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선한 이야기이다.


'나'는 열여섯살 에 열다섯살 소녀가 만나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매주 만나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누며 교감하고 만나지 않는 동안에는 서로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며 대화한다. 자연스레 소년은 소녀를 사랑하게 되고 연인이라 생각하며 소녀 역시 온전히 네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소년은 이에 기다린다. 응, 너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내 육체도 뜨겁게 반응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야. 너와 함께라는 게 중요해.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품었던 소녀가 그러나 어느 순간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진다. 한마디 말도 없이. 소녀가 나를 좋아했던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을까. 그녀는 어디로 간걸까. 우리가 만나는 동안 소녀가 얘기했던 '그 도시'로 간걸까? 나는 소녀의 편지를, 그리고 소녀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고 동료도 만나고 연인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관계들 중 어느것도 소녀에게 품었던 만큼의 격렬한 애정을 갖게 하진 않았다. 마음 속 저 깊이 누군가를 품고, 그 사람을 계속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의 연애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이제 더이상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 되어도 그는 변함없이 마음 속 성소에 소녀를 둔 까닭이다. 그러던 그가 그 소녀가 있는 그 도시에 들어가게 된다.


이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인가. 그는 그 도시로 들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곳'에서 소녀가 늘 말해왔던 '꿈을 읽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리고 매일 꿈을 읽는 도서관에서 소녀와 만날 수 있다. 비록 소녀는 자신과 헤어졌던 열여섯 살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러나 눈앞에 그토록 그리던 그녀가 있다. 매일 그녀를 만나 꿈을 읽고 그리고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그녀를 집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일이 그의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순간을 위해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려야 했다. '나'와 떨어진 나의 그림자는 시름시름 앓는다. 그는 다시 나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 도시에서 떨어져 사는게 아니라 그들이 원래 함께했던 현실 세계-그것을 현실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다.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림자를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여기에 남겠다고 한다. 여기는 그가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 그토록이나 그리워했던 소녀가 있던 곳이니까. 그렇게 자신의 그림자와 작별을 하고 여기에 남고자 결심했는데, 눈을 떠보니 그는 다시 바깥-현실-으로 돌아와 있다. 그 도시를 떠나서. 그리고 이제 다시 이곳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거기에 남기로 결심했었는데.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의 도서관 관장으로 취직해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들과 알고 지내게 된다. 



자, 나는 내 입장에서 이야기속 주인공이 되어본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 속 성소에 누군가를 품고 산다.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면서, 그러나 마음속 성소에 누군가를 품고, 그런채로 직장을 다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책도 읽고 친구들을 만나고 또 연애를 하며 결혼에 이르기도 한다. 내 마음 저기 저 한구석, 저기에 있는 그 사람을 그대로 둔채로. 그런 상태의 나를 누군가는 '어딘가 비어있다'고 눈치챌 지도 모른다. 혹은 '도저히 다가갈 틈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누군가가 분명히 계속 존재하고 있고,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이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함께함, 부재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강한 존재, 그렇다면 내 마음속 성소의 사람과 지금은 함깨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함께할 거라는, 함께하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소년을 결국 싱글 중년이 되게한 것일테다. 그런데 마흔다섯, 그토록이나 바라던 상대를 만나게 됐고 심지어 매일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얼마나 꿈같은 일이냐, 얼마나 달콤한 일이냐, 결국 이 순간을 위해 삼십년을 기다린건데. 


그런 상대는 여전히 열여섯살의 소녀다. 게다가 그 도시에서의 소녀는 내가 현실이라 부르는 바깥세계에서 나와 만났었다는 사실을, 나와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내게 '온전히 네 것이 될게'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 그렇다면, 그것을 소녀에게 알려야 할까? 마흔다섯인 내가, 열여섯의 너에게, 너랑 나랑 바깥 세게에서 사랑했어 우린 연인이었어를 말해야 할까? 나라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를 계속 사랑하면서.


사실 내 나이 열일곱에 열여섯 남자를 사랑해본 적은 없어서(여중여고여대..), 그리고 나의 강한 무의식은 미성년자를 성애의 대상으로 보기를 거부해서, 아무리 입장을 바꿔보려고 해도 열여섯 소년을 떠올리게 되진 않는다. 대신, 나는 이 모든 이야기에 실감적으로 나를 넣어보기 위해, 상대의 나이를 스물일곱으로 설정했다. 자, 그와 내가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내가 그에게 반하고, 그리고 그가 온전히 내것이기를 강하게 바랐던, 그 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러나 그가 홀연히 내 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은 가지만 그러나 그곳에 가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마음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도 내가 그를 사랑했던 만큼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함께하지 않을까. 그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그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나는 직장 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취미활동을 하고 연애도 한다. 몇 번의 연애를 거듭해도 나는 정착하지 못한다. 그렇게 마흔 다섯이 되었고, 어느날 갑자기 나는, 그가 있는 곳에 닿게 된다. 눈을 떠보니 내 눈앞에 그가 있다. 그런데 그는 스물 일곱의 모습이다. 아이고야. 나는 드디어 그를 만나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지만,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서 나와 사랑했던 기억이 없다. 나를 모른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내가 나타났고 함께 일을 하면서 매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와 나는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에게 무리 없이 잘해주지만, 나는 그를 매일 볼 수 있어서 기쁘지만, 그런데, 그에게 말을 할 것인가? 있지, 저기 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연인이었어, 라고. 그는 여전히 스물일곱 나는 마흔다섯인데? 이 나이 차이가 뭐 감당하지 못할 나이차이도 아니고 상대가 미성년자인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마음에 품은 채로 그를 계속 사랑하면서, 말하지 않고 좋은 동료가 될것이다. 그러다보면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고 그가 아이를 낳고 아이 아버지가 되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하나,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나'는 그림자만 바깥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여기 남기로 결심한다. 다른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는 적막한 도시. 내가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출근해서 나와 함께 일하는 그만 있는 도시. 나는 내가 마음 속 성소에 품었던 사람이 이 도시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기에 남기를 선택할 것인가? 역시 '아니' 라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그림자와 함께 바깥으로 돌아갈 것이다. 비록 바깥으로 가면 내 마음 속 성소에 있는 스물읿곱의 그를 만날 수 없겠지만, 그러니까 그와 함께할 수 없겠지만, 나라면, '그와 함께 적막한 곳에서 둘이서만 사는 삶' 보다는 '그가 없는 바깥 세상에서 내 그림자와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그를 다시 내 옆이 아닌 내 마음 속에 넣어야겠지만, 나는 그 삶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그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내 그림자 없이는 살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내'가 믿어야 할 건 바로 '나 자신' 이므로. 낙하할 나를 받아줄 이는 결국 나이고, 나에겐 그 누구보다 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에겐 그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필요하다. 그만 있는 세상 보다는 그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나는 선택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줘서 하루키의 이야기를 읽는게 즐거웠다. 게다가 선하기까지 하다. 눈앞에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유령이라고 할 수 있지' 라는 존재가 나타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 나는 섹스를 할 수 없는데 나에게 성애를 품고 있는 너는 그럼에도 나를 만날거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말해줄 수 있는 인간이 하루키의 이야기 속에 있다.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와인을 따라주고, 그리운 사람의 묘지에 매주 방문하는 인간이 여기 있다. 다른 사람의 안부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여기 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 것 처럼 만들어내는 것이 하루키의 능력인 것 같다. 책속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인용하며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리얼과 비리얼이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했'(p.672)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루키가 사는 세계 역시 바깥 세계와 그 도시가 기본적으로 이웃하며 등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기다림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간다. 선택이 아니라 그것만 주어진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p.681)



자, 나는 떠난다. 나를 받아줄 이가 나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이 도시를 떠난다. 이 도시는 어떤 도시냐, 내가 그토록이나 원하던 바로 그 사람이 있던 도시, 삼십년을 기다렸다 만난 그 사람이 있던 도시, 그런데 그 도시에 그 사람이 있음을 알고도 나는, 나를 찾으러, 나를 믿으며 떠난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믿는 것, 나를 찾는 것. 그 사람보다 원하는 건, 바로 나였다.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 P138

누구를 위한 비밀 공간을 확보해둔 채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가 된다-그런 게 가능할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P192

여성과의 관계로 말하자면 거의 똑같은 문제의 반복이었다. 남들이 그러듯 몇 명을 만나 사귀었고,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절대 반쯤 노는 기분으로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들과 진정한 의미의 신뢰 관계를 쌓진 못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떤 경우도 잘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꼭 무슨 일이 터져서 매번 그르치고 말았다-그르치다라는 표현이 실로 딱 맞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게 항상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가, 너의 이야기가, 너의 모습이 내 마음을 도저히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의식의 깊은 곳에서 너를 생각했다. 짐작건대 그것이 가장 큰 이유다. - P193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선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 P194

"네,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 있어요. 그리고 그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 - P441

다만 당신의 이야기에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사실 그 모두가 당신의 마음이 원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당신 마음이(당신은 모르는 곳에서) 그러기를 원했다-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디조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 P444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났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제법 진지하게 사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소녀만큼 누군가를 열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고, 대낮에 깊은 꿈을 꾸는 것 같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런 순수한 심정을 품은 적은요. - P447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449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 P452

"아무래도 우린 해가 진 뒤에 만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두 마리 부엉이처럼."
"어두운 숲속 깊은 곳, 두 마리 부엉이처럼." - P572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 P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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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31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다락방님의 진심이 담긴 리뷰를 쓸 수 있게 해준 리뷰이벤트 도서 간만에 등장!!👏👏👏👏👏 어떤 지점이 다락방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아요. 소설에 아주 푹 빠져서 읽는 다락방님의 독법도 도드라지고요^^ 즐거운 독서하셨군요~~!

다락방 2024-01-02 08:45   좋아요 0 | URL
어휴 하루키가 하는 이야기가 이야기 자체로 제 마음에 이렇게 훅 들어온적은 또 처음인 것 같아요. 그간 하루키의 유머를 제가 엄청 좋아했거든요? 찰떡같은 비유도 좋아했고요.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 자체가 저를 움직이네요.
ㅋ ㅑ - 역시 독서 만세입니다. 만세!!

단발머리 2023-12-3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다락방님 너무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같은 책을 읽었을 때 겹치는 지점과 다른 지점을 발견하는게 이렇게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네요.
저도 그 사람에게.... 이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너를 사랑했던 그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 못할거 같고, 그리고는 그렇게 그 사람 곁에 남기 보다는 그 사람을 두고 도시를 떠나 나의 또 다른 현실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또 다른 나를 그 사람에게 남겨두고 싶기도 해요.
나의 일부를요.

전 하루키를 많이 안 읽어서요. 인제서야 조금씩 좋아져요. 이 책도 궁금해서 나오자마자 샀는데 이제 막 읽었네요.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죠? 하루키를 읽는 시간이라니.....근사하다!!!

다락방 2024-01-02 08:47   좋아요 0 | URL
게다가 상대가 미성년자인데 내가 성년이라면 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건 말하는 순간 범죄가 되지요. 아무리 내 안에 사랑 있어도.. 그리고 어쨌든 저는 현실로 돌아올 겁니다.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둔 채로 삶은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걸 선택할 것입니다. 크- 어쩐지 마음이 살짝 아프지만, 삶이란 건 결국 모든 걸 다 가지면서 살아갈 순 없는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겠지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야겠고요.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처음에 오글거려서 이걸 어쩌나 했는데, 좋은 독서였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12-3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글거렸지만 결국엔 좋았군요! 저도 언젠가 하루키를 좋아할 날이?!

다락방 2024-01-02 08:48   좋아요 0 | URL
하루키 안좋아하는 사람들도 엄청 많잖아요. 저도 제가 지금 하루키를 알았다면 좋아했을지 모르겠어요. 제 경우에는 <렉싱턴의 유령> 이라는 단편집 읽고 훅 빠졌는데, 어쩌면 책과의 궁합도 필요한 일인것 같습니다!

persona 2023-12-3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읽겠다고 안 읽고 있었는데 끝까지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완독 축하드립니다.

다락방 2024-01-02 08:48   좋아요 1 | URL
저도 초반에 엄청 갈등했어요. 그냥 팔아버릴까, 하고요. 그런데 이렇게나 즐거운 독서를 하였습니다. 페르소나 님, 도전!! ㅎㅎ

루피닷 2024-01-01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24-01-02 09:09   좋아요 1 | URL
루피닷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미 2024-01-0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완전 초반 재미없어서 던져두었다가 다락방님의 ‘아오 진짜 너무 좋다‘보고ㅋㅋㅋㅋㅋ
지금 400쪽까지 읽었어요 정말 좋네요. 마저 읽고 리뷰 읽어보렵니다. 다락방님은 한 문장조차 영향력!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24-01-02 09:09   좋아요 0 | URL
저 막 읽다 보니까 ‘아오 좋아‘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지금쯤은 다 읽으셨을까요? 미미 님께도 어느 부분에서든 좋은 독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미미 님, 해피 뉴 이어!!

느긋느긋 2024-01-1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1등 축하드려요!
이게 바로 호텔에서 쓰여졌다는 전설의 리뷰!!
읽고있으니까 책 다시 읽고싶어지는걸요, 읽으면서 무척 좋았던 그 시간을 다시 만들어봐야곘어요,

저도 돌아간다면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채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 나이간격은 너무한 듯 ㅠㅠ 그걸 떠나서라도
오래 그리워한 사람을 갑자기 볼 수 있게 됐을때는 그냥 매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은 느낌.

마지막 문장도 새롭네요, 그 사람보다 원하는 건 바로 나, 진심으로 원하는 건 바로 나.
역시 외로움지수 0인 락방님다운, ㅎㅎ
그러고보니 다들 궁극적으로는 그럴 것 같아요.
선한 리뷰 잘 읽고갑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이름을 들어본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이 시, 소설, 에세이로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펼쳐나갔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서문을 힐러리 로댐 클린턴 으로 시작하는데, 당시에도 그 후에도 어떻게 힐러리가 아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히다. 개인적으로는 비욘세 보다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들어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지만, 내가 하려는 얘기는 그 얘기가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훌륭한 인물로 다뤄지지 않는, 그러나 슬쩍 스쳐지나가며 언급된 여자의 얘기를 하고 싶다. 


모니카 르윈스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르윈스키가 클린턴과 불륜이라고 했을 때, 그 당시에 자세히 알고 싶어 시사 주간지를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자기 시선에서 바라본 칼럼을 적어내곤 했다. 아마 여성잡지였을까, 어딘가에서는 '구강성교는 남자가 그만큼 상대 여자를 믿고있다는 증거'라는 글을 보기도 했다. 여자의 입속에서 여자가 물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자기 고추를 맡긴다는 건 그만큼 그여자가 나를 물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다는 거였다. 아마 대학생이던가 졸업후 얼마 안됐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거 읽고 너무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연애 남들보다 늦게 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쥐뿔도 몰랐지만, 어떻게 고추를 여자 입안에 넣는게 여자를 신뢰하는 걸로 표현되냐. 이거 너무 고추 넣는 입장에서 넣는거 핑계 대려고 별 거 다 가지고 오는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자, 이 책에서는 아까 언급했듯이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어린시절부터 매우 똑똑하고 능력도 있었으나 정치에 입문하며 남편 발목잡는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주장 혹은 신념을 굽혀야 했던 이야기들도 언급한다. 클린턴이라는 성을 굳이 같이 쓸 수밖에 없었다거나 얌전한 옷을 입어야 했다거나 쿠키를 구워야 했다거나 등등. 그리고 힐러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 중에는 대통령인 남편의 성추문이 있었다. 그러나 백악관 인턴과 성관계(가 아니라고 클린턴은 말했다)를 가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이병헌, 장동건, 엄태웅 등 자신의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추문이 있었던 남자 배우들이 여전히 잘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세상이 다 아는 내 남편이 세상이 다 아는 불륜 혹은 성매매를 저질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의 아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용서와 사랑과(이건 아닐듯) 각오와 다짐이 필요한 일일까? 어제도 엄마랑 와인을 마시면서 힐러리 클린턴 과 르윈스키 얘기를 했는데, 같이 살긴 살아도 살아야 하니까 사는거 아닐까, 하는 짐작을 감히 해보았다. 


자, 이 책에서 힐러리의 얘기중 언급된 모니카 르윈스키 얘기를 잠깐 함께 보자.



그러나 클린턴의 대통령직을 두고 일어났던 켄 스타 검사의 청문회 조사보다 이 저질스럽고 조잡한 법안에 더 들어맞는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청문회 보고서의 초안은 상당 부분 한 젊은 변호사에 의해 작성됐는데, 그는 나중에 성폭력 가해로 큰 논란을 일으키는 대법관 브렛 캐버노였다. 이 음란한 보고서의 한가운데에 매춘부, 바람난 여자, 섹시한 여자, 그리고 (가장 유명한 호칭으로) "나는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라는 발언에서처럼 "그 여자"라는 호칭으로 낙인찍힌 스물두 살의 젊은 독신 여성 모니카 르윈스키가 등장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억지 궤변에 의하면 구강 성교는 성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는 이 발언이 계기가 돼서 결국 보스와의 사랑을 끝내버린 것이라고, 바버라 월터스와의 장시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인정했다. 르윈스키는 이 시점에 대통령은 그들의 성애적 관계를 부인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그보다 클린턴의 보좌관 한 명이 그녀가 대통령을 스토킹했으며 섹스를 요구했고 그의 거부를 조롱했고 그를 협박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위험한 정사>에 나오는 가정파괴범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칼럼니스트 모린다우드 같은 사람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  P411~ P412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잘 모른다면-그러나 당사자가 아니면서 잘 알 수 있을까?- 르윈스키는 자신의 보스와 사랑을 했다는 걸 위 인용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르윈스키는 사랑을 했는데,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보스로부터 '그 여자' 라고 불렸고, 그리고 보스의 측근으로부터 '스토킹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 때 이 젊은 여자가 느꼈을 충격과 배신감은 어떤것일까. 그녀는 스물두살의 인턴이었고 세상의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는데,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한 남자 역시도 자신을 내팽개쳤다. 직업을 그만두고 백악관 바깥으로 걸어나가 그녀가 가야할 곳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였을까? 대통령과 인턴 사원인데, 어째서 세상은 그녀를 비난했을까? 왜 그 젊은 여성은 가정파괴범이 되어 있었을까? 가정 파괴범은 클린턴이 아닌가? 나는 '그 여자' 라는 호칭이 너무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스물두살의 그녀는 분명 어리석은 관계를 맺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러나, 그건 끝나봐야 아는 일이다. 그 관계에 그리고 상대에 푹 빠져있었을 때에는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을 것이다. 나는 모니카 르윈스키가 궁금했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말을 듣고 싶었다. 물론 그 관계가 르윈스키가 정말 원했고, 스스로 하는 일이 어떤건지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정말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해도, 그들 사이에 권력은 분명히 존재했다. 스물두살의 여성에게 상대는 스무살 이상 차이나는 대통령이었다고. 



나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때 어쨌든 그녀가 잘못된 관계를 맺고 끝냈을 때가 아니라, 그 후에,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세상 모두가 어떤 남자와 어떤 식의 관계를 맺고 어떻게 팽당했는지 알고 있는 이 여성은 그 후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는 모니카 르윈스키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모니카 르윈스키는 그 때의 일에 대해 혹시 책을 내지는 않았을까? 검색해보니, 오래전에 자서전을 내긴 했더라. 내가 궁금한 건 자서전이 아닌데. 

















나는 일전에 읽었던 김형경 의 책에서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언급됐던 게 생각이 났다. 당시에도 읽으면서 이게 뭔소리야, 했던 구절이었다.




미국 정신분석가 호르게 드 그레고리오는 《나의 이성, 나의 감성》이라는 책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관계를 애도 관점에서 분석한다.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다음 해인 1994년 1월 6일 그의 사랑과 열정의 원천이었던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 클린턴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예전에 간호사였고 빌이 네 살 때까지 함께 산 할머니 역시 간호사였다. 어머니 사망 후 애도 과정을 거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감성 안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아버지는 항암 치료사였다. 그는 젊은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떠났다. 아버지가 가정을 떠날 즈음 르윈스키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당시 학교 연극 무대 설치 기술자였던 앤디 블레일러와 첫사랑에 빠졌다. 앤디는 결혼 2년차 유부남이었지만 르윈스키는 앤디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아내의 친구가 되었고, 때로 그들의 아이를 돌봐 주기도 했다. 그 이상한 관계에서 르윈스키는 아버지의 욕망 대상인 간호사 역할을 맡으며 다시 아버지와 연결되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 배경에는 '간호사'가 있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상실감을 돌봐 줄 간호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고, 르윈스키는 아버지의 내연녀인 간호사가 되어 돌봐 줄 만한 아버지 대체물을 찾아냈다. 저자는 그 만남이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만남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아버지의 만남이라고 분석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무의식 속에서 추구하고 있던 원초적 사랑의 대상을 만난 것이다. 잃은 대상을 추구하는 행위가 무의식 차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pp.104-105)



내가 이 책 2014년에 읽었는데, 2014년에 읽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에 무슨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아버지의 만남이 나올까. 르윈스키에게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늙은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만나 사랑한 것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만남이라니, 대체물이라니. 그런 식으로 이 관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걸까? 그건 단지 권력을 가진 나이 든 남자가 자신의 젊은 직원 데리고 재미 좀 본게 아닌가. 물론, 이 관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해 보이기는 한다. 당시에 르윈스키는 자신들의 관계를 '합의'하에 한 관계라고 했으니까. 합의했다고 말했을 당시의 르윈스키는 인턴이었고 스물두살이었으며 상대는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모니카 르윈스키가 미투 운동이 활발했던 당시에 했던 인터뷰도 읽어 보았다.



르윈스키 "미투 계기로 다시 보니...클린턴과의 관계는 권력 남용" - 머니투데이 (mt.co.kr)



르윈스키는 그때의 자신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거기에 분명 권력이 있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르윈스키의 그 후의 삶에 대해 궁금해한 건 나만은 아니었다. 개브리얼 제빈이 있었다. 그녀는 르윈스키의 사건을 보고, 그 후에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을지, 그녀의 엄마라면 딸을 어떻게 대해줘야 했을지 궁금해하며 책을 써냈다.















자, 책소개는 이렇다.


정치 지망생인 20대 여자 아비바 그로스먼은 하원의원 에런 레빈의 인턴이 되어 일하던 중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다. 하원의원과 불륜관계가 된 것. 우연한 사고로 그 불륜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무너져버린다.

<비바, 제인>은 그렇게 자신에게 몰아닥친 상황에 좌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한 여성의 선택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여자는 어떤 피해를 입는가? 세상은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녀의 부모는, 남자의 아내는, 주위의 사람들과 대중은, 그리고 미디어는? 후폭풍의 끝은 어디이며, 궁극적으로, 성추문에 휩쓸린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이 가능하기는 할까?


이 책을 쓰기까지 개브리얼 제빈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그녀의 인터뷰도 가져온다.


르윈스키가 내 딸이라면… 엄마 시각에서 본 스캔들 (naver.com)



나는 르윈스키가 그 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개브리얼 제빈은 비바, 제인에서 그 후의 삶은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하며 살아냈다고 주인공의 입을 빌려 얘기한다. 르윈스키의 삶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르윈스키의 삶도 그러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당신은 그녀에게 다가가 조언을 구했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당신이 말했다.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그녀가 말했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어떻게?" 당신이 물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난 가던 길을 계속 갔지." 그녀가 말했다. -《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p.395



넷플릭스에 클린턴의 성추문 사건을 다룬 <탄핵>이란 드라마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걸 한 번 봐야겠다. 제작에 르윈스키가 직접 참여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번 12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도 다 읽었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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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2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바, 제인> 책소개를 보고 르윈스키가 생각나긴 했는데 그게 모티브가 된 소설이었군요.
<섬에 있는 서점>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한국계라니 작가가 궁금해지고 (사실 이미 책도 갖고 있음) 이 책도 찾아둬야겠어요.

<여전히 미쳐있는> 다들 술술 잘 읽어내셨네요. 축하드립니다 :)

다락방 2023-12-26 12:32   좋아요 0 | URL
비바, 제인 저 출간 당시에 급박하게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에 여성들의 연대를 느껴서 좋았더랬어요. 사랑인지 아닌지는 사랑이 끝난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내가 빠진 관계가 어리석은건지 아닌지도 역시 그렇고요.

여전히 미쳐있는 다 읽어서 너무 좋고요,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수하 님. 만세!!

잠자냥 2023-12-26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연애 늦게 했다고?!?!?! 그게 더 놀라움 ㅋㅋㅋㅋ

르윈스키와 클린턴 사이 애도의 관계라고 본 저 정신분석가에게 애도를….. 호르게 드인지 호로개 드인지 원… 저런 소리할 때 보면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참…..

다락방 2023-12-26 12:34   좋아요 1 | URL
저 첫 연애가 스물다섯이었어요. 넷이었나? 남들보다 늦었는데 ㅋㅋㅋ 한번 사귀고 나니까 남자들이 막 들러붙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봤자 지금 연말 다가오는데 약속 못지키는 다락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책의 저 부분 읽으면서 클린턴이랑 르윈스키에 간호사를 가져다 붙인다고? 진짜 징하다 싶었어요. 해석을 위한 해석 분석을 위한 분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으..

잠자냥 2023-12-26 12:38   좋아요 0 | URL
첫 연애 후 팜파탈 변신 다락방…. 그러나 2023년은 이제 오늘까지 6일 남았을 뿐이고…. ㅊ침대여, 들리는가! 다락방 울부짖는 소리가….

햇살과함께 2023-12-2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르윈스키를 잡아내신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비바, 제인> 궁금하네요.

다락방 2023-12-26 12:36   좋아요 1 | URL
저는 빌 클린턴은 그 후로도 속 끓이지 않고 살았을 것 같고요 힐러리는 아주 속 끓였을것 같거든요. 지금도 앙금이 남아있을 것 같고요. 그런데 르윈스키도 그래요. 일정부분 그녀 스스로 한 행위라고 해도 시간이 지난후에 그 때 내가 왜그랬을까, 나를 그렇게 취급하는 사람한테, 하는 마음과 또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살아와야 했을텐데 싶어서, 르윈스키가 아픕니다. 그런데 이렇게 르윈스키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르윈스키가 가장 원하지 않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ㅜㅜ

단발머리 2023-12-2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르윈스키와 클린턴 사이를 애도 관계로 보다니요.. 제가 이 분 책 안 읽은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애도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클린턴이 그 많은 선거 때마다... 선거 운동 기간 중에 젊은 여성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해서 문제 생긴 거, 힐러리가 그 뒷처리 하느라 고군분투한 거, 그걸 책으로 내도 책 한 권이 나오는데, 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간호사 역할을 찾았다고요? 진짜 어이가 없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건 맞는거 같아요. 요는 그걸 ‘합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가의 문제인데, 그 당시에는 르윈스키가 잘 몰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근데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거는 아니다...를 못 알아본거는 좀 아쉽구요. 원래 눈이 확 돌아가면 그걸 알아채기 쉽지 않죠. 하지만.... 워낙 그쪽 분야에 악명 높은 사람 아니었습니까.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 부지런히?ㅋㅋ 읽고 있어요. 책탑 페이퍼 쓰고 계시는 거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12-26 12:40   좋아요 1 | URL
김형경이 그렇게 본 건 아니고 ‘미국 정신분석가 호르게 드 그레고리오‘가 그렇게 봤다고 합니다. 김형경 님도 정신분석 본인이 공부하기도 하면서 다른 책들도 열심히 읽은 것 같아요. 아무튼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간호사라는 매개, 어머니와 아버지.. 이모든 것에 대해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과도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으..

사랑은 당시에는 상대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주변에서 그 남자(여자) 아니야 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들리잖아요. 그러다 끝나고 나서야, 끝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하게 되지요. 그렇지만 저는 르윈스키에게도 어느 순간 ‘어 이건 아니지 않나‘하는 감각이 있었을 것 같아요. 제가 조카들에게도 하는 말인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순간, 그건 아닌게 맞다는 겁니다. 그 감각을 무시하면 안돼요. 에휴..

저 애도로 본 관계가 왜 말이 안되냐면, 클린턴이 르윈스키랑만 성추문이 있었던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정신분석의는 여성들마다 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게 될까요?

책탑 페이퍼는 썼습니다. 점심 시간이 다가와서 급박하게 마무리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리의화가 2023-12-26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다양한 페이퍼가 나오는 것이 역시 여성주의책함께읽기 모임의 묘미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르윈스키에 대해서 만 질타하는 분위기가 기억나네요! 둘의 사랑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권력 관계의 힘이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다락방 2023-12-27 07:40   좋아요 0 | URL
저는 당시에 르윈스키에 대한 외모 평가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이번에 르윈스키 검색하면서 알았는데 클린턴이 르윈스키랑만 불륜관계였던 것도 아니더라고요 ㅠㅠ 힐러리 클린턴이 진짜 빌 데리고 사느라 마음 고생 많았겠구나 싶습니다. 어휴 남편이란 뭘까요? ㅜㅜ

완독 축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해에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님!!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구강성교는 여자를 믿어서 하는 거고, 불륜은 어머니아버지 가족관계로 인해 하게 되는 거고 ㅋㅋㅋㅋ 포장 장난 아니네요 ㅋㅋㅋㅋ
다락방님은 이 책 술술 읽어내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제가 읽어야 할 게 너무 많구나 싶더라고요;; 꾸준히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3-12-27 07:42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진짜 너무 요점 정리 잘해주시는 분. 구강성교는 여자를 신뢰해서, 불륜은 가족관계로 인한 트라우마로 ㅋㅋㅋㅋㅋㅋㅋㅋ포장을 위한 포장입니다. 불륜마다 사연 있어 거룩합니다. -.-
저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좋게 읽으셨던 것만큼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어요. 대단한 인물들을 역사속에서 만난다는 건 좋았는데, 저한테는 뭔가 큰 각성을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레이첼 모랜이 좋습니다. ㅋㅋ
 
아니 에르노의 말 - 사회적 계급의 성찰과 자전적 글쓰기의 탐구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아니 에르노.로즈마리 라그라브 지음, 윤진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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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8남매중 다섯째였고 아주 가난한 집에서 자랐으며 배움이 짧았다. 문화생활은 전무했고 경제적 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바라는 자식은 얼른 자립해서 돈을 벌어오는 자식이었다. 조금이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는 자식 얘기를 친구들로부터 듣고 오면 그걸 그렇게나 부러워하셨다. 수학능력시험을 망치고 엉엉 우는 나를 달랜다며 아빠는 다른 길에 대해 얘기하셨다. 그건 공장에 취직해 얼른 돈을 벌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4년제 대학에 합격을 했고 등록금을 내러 가서 아빠는 합격 공고판에 내 이름을 한참 보시며 "네 이름 내가 지었다" 하셨다. 줄 서있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다른데 예비로 되어서 그거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 여기 등록금은 내야지요' 라며 다른 아주머니들과 넉살 좋게 이야기도 나누셨다. 아빠는 내가 대학에 가길 바라지 않았지만 막상 내가 대학생이 되자 여기저기 자랑에 자랑을 하셨고 신기해하셨다. 당시에 아빠 형제의 자식들 중에는 4년제 대학을 간 사람이 단 한명이었고 나로 인해 두 명이 되었다. 그리고 내 동생들이 4년제를 갔고 작은 아버지의 아이들중 하나는 대학원도 진학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배움도 없던 아버지가 어디가서 하는 자랑이라곤 '내 자식들 다 4년제 나왔다' 였다. 나는 아버지가 결국 자식들의 4년제졸을 자랑할 수 있었던 건, 다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동생들은 대학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 역시 배움이 짧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부모님은 아니 에르노의 좋은 교육을 위해 좋은 학교에 보냈는데, 그 학교에서 아니 에르노가 알게된 건 자신이 자연스레 보고 당연하게 익혀왔던 말과 행동이 교양없다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지적'을 받으며, 그것들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공부도 잘해서 학급의 1등을 하기도 하고 상급학교로 진학도 무리없이 한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부모들보다 더 많은 배움을 그리고 그에 따른 더 많은 교양을 갖추게 된 건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이었지만, 그런 한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이 낮은 계급이라는 걸 뚜렷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당연히 학급에 유독 부자인 티가 나는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와 쟤네 집 잘산다, 쟤네 엄마 선생님이래, 하는 일은 있었지만 당시에는 딱히 계급 차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친구의 부모님들이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그건 그렇게나 부러웠다. 어떤 친구 집에 가면 우리 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고 우리 집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가 났지만, 그것에 계급이란 이름을 붙이진 못했었다. 대학은 달랐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대학에서의 첫 영어 시간. 선생님은 영어로 자기 소개를 시키셨는데, 나는 나만큼 아이들이 영어를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숫제 교수랑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이 네임 이즈 다락방, 이런게 아니라 무슨 외국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거다. 수업이 끝나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어떤 아이는 알래스카에서 어떤 아이는 프랑스에서 잠깐 살았었다고 했다. 게다가 방학이 되자 어떤 아이들은 캐나다로 어학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성형 수술을 하고 왔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그러니까 어학 연수 같은게 있는줄도 몰랐는데 그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부모님이 지원을 해주는 거였다. 내게는 어학연수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대학에 진학할 때도 전공에 대해 혹은 대학진학에 대해 조언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알게 되어 엄마 나도, 라고 말했어도 부모님은 잔뜩 겁을 내셨다. 사실 말할 때부터 안될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더이상 그렇게나 좋아했던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해봤자 살다 온 애들, 어학연수 다녀온 애들 근처에도 가지 못할테니까. 대학 등록금도 비싼데 용돈까지 받을 수는 없어, 나는 대학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니 에르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책 <사건>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얘기한다. 대학에 들어간 후 부모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부모님들과 나는 이제 다른 사람임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책 <남자의 자리>에서도 그런 마음을 보여주었던 터다. 이 감정에 대해서라면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무섭고 크고 내가 따라야했던 아버지는 어느 순간 나에게 더이상 크지 않았고, 그에 더해 나는 아빠랑 다른 사람, 아빠보다 배움이 깊고 아빠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구분 짓고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더더욱 계급에 대한 인식을 예민하게 하고 자주 분개하면서, 그런 한편 나 역시 더이상 아버지와 같은 계급이 아니라며 다른 계급으로 나를 밀어넣고 있었던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내가 한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부장이란 직급까지 가졌다. 나는 이제 부모님을 모시고 전시회를 가고, 영화를 보러 가고, 여행을 간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내가 부모님께 해드리고 있다. 우리 아버지에게 지적임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책이란 수단을 읽다 못해 쓰기까지 했다. 어릴 때부터 세상 영특해서 대학을 갔고 지금은 회사 부장이고 책을 읽고 자기가 돈 벌어서 여행을 다니는 자랑스러운 딸.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보다 목소리가 더 커지고 가끔 아버지를 멸시하는 딸. 나는 그런 딸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프다. 계급, 위계화, 자리 에 대해 인식하고 분개할 때 그 대상이 나의 아버지를 향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니 에르노가 하고자 했던 일이 서로 다른 계급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이 내게 와 잘 닿았으며 나를 각성시킨다. 내가 해야할 게 무엇인지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아니 에르노가 알려줬다.



자,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내가 좋아하는 한나 아렌트는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한 적이 없다. 오히려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고 있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원망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아니 에르노 식으로 말하자면 '경험의 페미니즘' 이고, 자신에 대한 정체화나 말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페미니즘 이다. 실천하는 페미니즘이다. 나에게 한나 아렌트는 페미니즘 실천 최고봉에 있다. 자신의 스승보다 더 잘나 버린 여자, 본인의 철학을 세상에 알린 여자. 훗날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만든 여자. 이보다 더한 페미니즘 실천이 어디있단 말인가. 본받을 어른에 대해서 나는 자주 생각하는데, 이런 식으로 한 여자가 스스로 우뚝 서 잘 나가는 걸 보여준다면, 다른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만 보다가 엑스파일의 스컬리를 보는 것 같은 일. 나는 한나 아렌트가 그걸 한 사람이라는 게 짜릿하게 좋다. 한나 아렌트 자신은 '내 뒤의 모든 여성들에게 갈 길을 개척해주자'는 작정을 한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갔더니 이름 난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나에게는 그것이 페미니즘이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뚜렷한 계급차를 느꼈고 그것을 글로 써낸 사람. 사랑하고 섹스한 것도 다 글로 써낸 사람. '자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나 볼까' 객관적으로 펼쳐내 보인 사람. 그녀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한다'고 부르짖는 책을 쓴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인식하고 생각하고 느낀 바를 써내고 그걸 결과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이미 페미니즘 실천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뚜벅뚜벅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걸 했더니 노벨상 수상자가 되어버렸어. 이 세상에 노벨상 수상자인 여자 작가가 하나 더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의 페미니즘적 실천이 아닌가. 그녀가 노벨상을 수상함으로써 오, 노벨상 수상자가 쓴 책은 어떤거지? 하며 그녀의 글을 누군가 더 읽는다는 것, 오 세상에 이런 글이 있네, 하고 한 명이라도 더 알게 된다는 것, 오, 그렇지 나도 그녀같은 감정을 느꼈어, 그녀가 느낀 인식 나도 느꼈어, 아아, 나야말로 계급 탈주자였네, 할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적이 아닌가. 나에게는 그것이 페미니즘이다.



아니 에르노의 날카로운 말들을 더 읽고 싶어져서 책장에서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다 꺼내오고 어제는 몇 권 새롭게 주문도 넣었다. 자신을 계급 탈주자 라고 칭하지만, 그러나 '두 세계 사이에 있을수 있는,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다시 한번 사회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기회로 느껴질때도 있어요.' (p.95) 라는 말은 또 얼마나 날카로운가. 나 역시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이것을 기회로 느끼자고 다짐해본다. 내 멸시가 향할 곳을 제대로 향해야겠다는 다짐도 역시 더한다.



라그라브는 같은 시선을 자기 자신의 궤적에도 적용하여, 스스로 "계급에 합류"했지만 "계급에서 이탈되었다"고 말한다. - P21

나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나로선 그 책(단순한 열정)을 쓰는 게, 무엇보다 『자리』와 『한 여자』와 거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러니까 감정적인 게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방식으로 쓰는 게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어요. 1년 반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었거든요. 내가 처한 상태를 객관화 하려 했고, 그 상태에 가장 잘 부합하는 말이 바로 열정이었어요. - P43

보편적인 페미니즘은 불가능해요. - P61

나에게 페미니즘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경험의 페미니즘"이에요. 난 당신이 책에서 한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빈민가에, 신정神政 국가에, 혹은 옆 건물에 사는 여성들의 착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이 투쟁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투쟁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 P61

(라그라브) 사회 세계 속으로의 개입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당신과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했어요. 사회학은 사회들의 그물망을, 여러 가지 지배 위에 그리고 그 지배에 의해 불평등하게 직조된 망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드러낼 수 있게 해줘요. 여기서 사회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은, 뤼크 볼탄스키Luc Boltansky가 말한 대로, 사회 세계가 그다지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자들의 방향으로 돌아갈 뿐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되죠. 그렇다면,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행위가 세상이 늘 같은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그와 같은 불의와 지배를 아게 하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사회적 세계 안에서의 각자의 위치를, 특히 가장 심하게 지배 받는,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긴, 혹은 그러한 역할 지정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밝히는 행위라고 볼 수 있어요. - P89

그 자체로 사회 세계의 자의성과 폭력의 정당성을 부정한느 행위인 거죠. 하지만 난 우리가 책을 출간하고 연구를 이어가는 일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책으로 출간될 뿐, 대중의 손에 가닿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공적인 게 되고, 누구든지 읽어볼 수는 있죠. 우리는 공적인 직무를 행하는 대가로 급여를 받는 거니까요. 하지만 가장 심하게 지배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출간물과 연구를 거의 손에 넣지 못하잖아요. - P89

부르디외는 지배받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게 아니고-그랬다면 민중주의가 되겠죠-지배를, 그리고 그 지배를 세우고 영속시키는 것에 대해 의식하게 만들려 했어요. 바로 그 욕망이 『자리』『한 여자』『수치』같은 글들을 이끌어갔죠. - P94

사회학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난 부르디외의 "분열된 아비투스" 개념과 관련된 개인적인 예를 제시할 수 있어요. 분열된 아비투스는 사실 청소년기 이래 내 삶 전체를 설명해주니까요. 내가 분열된 아비투스를 처음 자각한 건 글쓰기를 통해서였어요. 『빈 옷장』에서 내가 학교로 인해 "둘로 잘렸다"라고, "두의자 가운데 걸터앉아 있었다"라고 썼잖아요. 그전에 난 내자리가 없다는 감정을 언제나 병리학적으로 설명했고,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도 사용했죠. 그런데 느낀 것과 상황을 깨닫고 기술하게 되면 모든 게 달라져요. 난 분열된 아비투스가 나의 정체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요. 어떤 사회적 상황들에선 여전히 나타나고 있죠. 분열된 아비투스는 내가 세계를파악하는 방식이고, 그런 뒤에 그것을 글로 쓰는 방식이에요. - P94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거북함으로 느껴질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젠 오히려 사회가 나뉘어 있고 위계화되어 있음을 기억하라는 내 안의 요청 같아요. 심지어 두 세계 사이에 있을수 있는,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다시 한번 사회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참여관찰‘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기회로 느껴질때도 있어요.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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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2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도 에르노도 그들 자신이 ˝페미니즘의 실천˝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내 멸시가 향할 곳을 제대로 향해야겠다는 다짐˝ 멋지다!

제가 다락방님 글이나 다락방 자체에서(만난 적은 없지만 ㅋㅋ)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자라온 환경 배경이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다락방 님은 굳이 그런 자기 자신을 포장하려는 허영이나 허세가 없어서 제가 더 애정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다락방 2023-12-22 11:13   좋아요 3 | URL
저는 말뿐인 사람, 말만 하는 사람, 말을 가벼이 하는 사람, 말에 무게를 싣지 않는 사람, 말을 일단 하고 보는 사람을 정말 싫어합니다. 말을 했으면 그것이 어떻게든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행일치 자체는 무리가 있겠지만, 언행일치가 되려는 태도를 가지고 생활한다면 언행일치로 이어질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2월이 지나가는게 너무 초조하네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페미니스트 라고 천번 말하는 사람보다 자기 길 묵묵히 가서 무언가 성취를 보여내주는 쪽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잠자냥 님, 저랑 비슷한 환경 배경을 가지고 지금의 잠자냥 님이 되셨군요. 저는 무엇보다 잠자냥 님의 예술적 취향과 안목에 대해 놀라는데요, 그건 제가 결코 노력한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잠자냥 님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예술을 사랑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저는 잠자냥 님이 따뜻한 사람이라 느낍니다). 제가 잠자냥 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파랑 2023-12-22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부장님은 성형수술이 불필요하시지 않았을까요? ㅋ

부장님에 작가에 순댓국 홍보대사까지!
자랑스러운 딸이신거 같아요~!@

다락방 2023-12-22 11:37   좋아요 1 | URL
순댓국 홍보대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순댓국은 사랑입니다.

새파랑 님, 메리 크리스마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2-22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에 다락방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3-12-22 12:04   좋아요 2 | URL
이 세상에 독서괭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은오 2023-12-22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께 6352815353737번째로 반해버리게 만드는 글ㅠ

다락방 2023-12-22 14:25   좋아요 2 | URL
♡♡♡♡♡♡♡♡♡♡♡♡♡♡♡♡♡♡♡♡♡♡♡♡♡♡♡♡♡♡♡♡♡♡♡♡♡♡♡♡♡♡♡♡♡♡♡♡♡♡♡♡♡♡♡♡♡♡♡♡♡♡♡♡♡♡♡♡♡♡♡♡♡♡♡♡♡♡♡♡♡♡♡♡♡♡♡♡♡♡♡♡♡♡♡♡♡♡♡♡♡♡♡♡♡♡♡♡♡♡♡♡♡♡♡♡♡♡♡♡♡♡♡♡♡♡♡♡♡♡♡♡♡♡♡♡♡♡♡♡♡♡♡♡♡♡♡♡♡♡♡♡♡♡♡♡♡♡♡♡♡♡♡♡♡♡♡♡♡♡♡♡♡♡♡♡♡♡♡♡♡♡♡♡♡♡♡♡♡♡♡♡♡♡♡♡♡♡♡♡♡♡♡♡♡♡♡♡♡♡♡♡♡♡♡♡♡♡♡♡♡♡♡♡♡♡♡♡♡♡♡♡♡♡♡♡♡♡♡♡♡♡♡♡♡♡♡♡♡♡♡♡♡♡♡♡♡♡♡♡♡♡♡♡♡♡♡♡♡♡♡♡♡♡♡♡♡♡♡♡♡♡♡♡♡♡♡♡

은하수 2023-12-2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시니... 제가 너무 혼자 짝사랑하고...
또 책을 안 살수가 없잖아요!!!
전 종일 집에서 책을 읽는거 같은데도 왜 따라가지도 못하는거 같은 느낌이 들까요?ㅠㅠ

다락방 2023-12-26 08:56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책탑 페이퍼를 써야 합니다. 아오 이제 진짜 책 안살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정폭력과 포퓰리즘 베스텐트 한국판 9
에디 하르트만 외 지음,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고지현 외 옮김 / 사월의책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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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절반은 가정폭력에 대한 논문이고 독일 연구자들이 썼다. 논문인만큼 어려운 내용도 있긴 했지만,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을 언급한 것도 의미 있었고,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향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내용을 읽는 것도 좋았다. 그런 한편 시재에 대한 것도 인상 깊었다.

어린아이일 당시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리를 가져야 함이 마땅하나 그렇지 못하고 또 '아이'라는 약자임에 보호받아야 하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폭력에 노출될 때, 그리고 주변에 그 사실을 알려도 모두가 침묵할 때 아이는 폭력 속에서 자라게 된다. 훗날 어른이 되어 그 상황에 대해 뒤늦게 고발하게 되면, 과거의 그 시절을 재소환해 이야기 해야하고 또한 그 폭력은 미래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현재 역시 이 영향을 받는다는 거다. 고발하는 생존자 뿐만이 아니라 현재 계속 일어나고 있을 아동 학대를 언급함으로써 그 앎을 건드린다는 것.


비밀이 보장되는 경청회에서 피해당사자는 전형적으로 상실된 아동기 및 그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에서 성적 아동 학대가 가져온 결과들에대해 말하곤 한다. 그들은 현재로 이어지는 부담들을 주제화하기도 하지만, 또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주제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보고들은 아동기와 연령의 축소라는 현상을 인지하게 해주는데, 왜냐하면 경청회에서는 예를 들면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기관에 위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동에 대한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에 대한 규명은 또한 항상 예나 지금이나 일어나고 있는 성적인 아동 학대에 대한 앎을 건드리게 된다는 점에서 현재는 매우 현재적인 성격을 갖는다(Jud 2014). 과거의 일이 규명되면서 지금 현재에도 성적 아동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P84


책의 뒷부분 절반은 포퓰리즘에 관한 것이며 한국 연구자들이 썼다. 한국 연구자들이 써서 그런지 번역된 논문보다 더 잘읽혔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포퓰리즘이 확장되기 위해서는 리더가 필요한데, 이는 리더가 없다면 그 결속력이 유지되지 못함을 뜻하기도 한다. 각자가 가진 약자성 혹은 소수자성은 모두 다르고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분노가 일치하여 결속되는데, 누군가 앞에서 그 결속력을 계속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쉽게 해체된다는 것. 


그런 내용들을 읽다가 뜬금없이 리더에 대해 생각했다. 요즘 내가 리더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확실히 작은 집단이나 큰 집단이나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며, 리더를 아무나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을 내가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백종원을 얘기하게 되는데, 요즘 방송중인 <장사천재 백사장>에서 백종원은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면서도 이내 자신이 맡았던 일을 하나씩 하나씩 아랫사람에게 넘겨준다. 이는 일을 더 잘 진행되게 하면서 아랫사람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또한 자신은 그 시간에 또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실수가 발생하면 일단 혼내거나 윽박지르기보다는 그 원인을 찾고자 하고 그 후에 해결방법을 찾아내는 거다. 나는 내가 리더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다가 백종원을 보면서 그래 내가 저게  안되지, 하고 구체적인 능력부족을 실감한다. 리더는 정말이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포퓰리즘이, 그러니까 왜 우리에게도 인권이 있는데 우리를 배제하느냐는 약자성의 발언, 동시에 자신과는 입장이 다른 약자를 배제하고자 하는 혐오의 표현까지 그 모든 것이 표현되고자 할 때, 거기에도 그 나름의 리더는 필요한 것이었다. 일단 여러명이 모이면 리더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는 트럼프가 분노한 사람들을 모은게 아니라 분노한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을 언급한다.


일견 이상한 정치인이 갑자기 나타나 교묘한 말을 던지고 우둔한 유권자들이 그 말에 현혹되면서 포퓰리즘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 분명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거친 말을 쏟아냈고, 분노한 러스트벨트는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부상하는 포퓰리즘을 으레 비정상적이고 이례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고 만다. 현상을 달리 진단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말 덕분에 러스트벨트가 분노한 것이 아니라 러스트벨트의 분노 덕분에 트럼프가 말을 할 수 있었다. 포퓰리즘을 있게 한 것은 바로 이 분노이다. - P114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베스텐트 한국판 9호>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데, 다른 것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페르디난트 주터뤼티(Sutterlüty 2002 und 2004)는 아버지에게서 반복적으로 신체적 폭력을 당하는 한 어린 여성의 상황을 조사함으로써 이 점을 명백히 밝혔다. 즉 가족 구성원 전원이 계속 그녀에게 연대감을 보임으로써 폭력 가해자인 아버지는 권력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족 내에서 주변화되는 듯했다. 상호작용 속에서 표현되는 그런 연대감은 특정 상호작용 맥락에서 폭력이 어떻게 정당성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 P46

물론 수치심은 남녀 모두의 폭력 피해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는 결국 주변 사람들이 자주 가정폭력을 오랫동안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치심을 가리는 방식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여성 피해자는 자신이 남성 파트너와 폭력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아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자기 파트너의 폭력에 침묵한다. 이에 반해 남성의 수치심은 여성 파트너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이 자신의 유약함과 남성답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하여 침묵한다(Wil-liamson, Morgan und Hester 2018:57 이하). - P65

종종 장기간에 걸쳐 공고화되는 상호작용의 역학을 고려하지 않을경우 파트너 간의 폭력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다. 노먼 덴진(Denzin1984)은 폭력적 부부관계의 역학을 만들어내고 유지해가는 결정적 메커니즘을 모범적으로 분석했다. 사례들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남성의 폭력이 잃어버린 것, 즉 여성과 이들의 온정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의지와 자유를 획득하고자 그녀의 몸에 강압을 행사하고자 할 수 있는데, 그가 폭력적일수록 그는 이 문제에서 더 실패하게 된다. 결국에 그의 폭력을 촉발한 것은 더욱 강화된다. 즉 그 실패는 그가 통제하고 싶었던 관계를 더욱 파괴한다. 남자와 그의 파트너는 부정적인 감정에 쌓이게 되고 폭력의 징조 아래 서로를 묶는 상호작용의 역학으로 얽혀 들어간다(같은 책: 488 이하). - P66

일어난 일에 대한 부인, 사과, 불성실, 폭력의 발생에대한 책임의 전가, 억압, 희망적인 생각 및 새로운 폭력 사건 등은 장기적 관계의 전형이다. 남성 파트너와 여성 파트너는 폭력이 어떤 면에서 실재하지 않으며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같은 책: 507). 이후에 등장한 연구들은 덴진의 분석을 확증해주고 있으며, 폭력이 멈출 것이라는, 심지어 질투하는 남자의 사랑을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저 거짓된 믿음이 낭만적인 관계의 내러티브와 엮여 있음을 보여준다(Lloyd und Emery 2000:45 이하). - P66

상호작용의 역학과 정서적 얽힘은-경제적 의존성 외에도 여성이폭력적인 파트너와 함께 지내는 이유나 여성의 집의 전문 인력의 면전에서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이유를 이해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일은 자주 여러 면에서 파트너 폭력의 희생자인 아이들에게도발생한다. "폭력의 순환에 관한 현재 널리 퍼진 문헌(Steinmetz 1977: 98이하)은 어린 시절의 폭력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부모 사이의 폭력 행위를 목격하는 것도 종종 어린이에게 새로운 폭력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P67

따라서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되는 것이다.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에서만이 아니라 장기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볼 때도, 부모의 폭력을 목격하는 것은 직접적 희생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서는 부모 간의 폭력, 아동에 대한 폭력 및 아동 간의 폭력이 서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은 경우에도 한 가정 안에서 중첩되어 등장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좋은 증거물은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런 폭력 형태들은 가족 안에서의 상호작용을 서로 강화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경우 이후의 삶의 단계에서 더 많은 폭력을 초래한다. 이 모든 것은폭력에 대한 일반적 연구에서 사회화 이론의 중요성을 시사하는데, 최근의 사회화 이론의 탐구에서 이 부분은 아주 소홀하게 다뤄진다(Sut-terlüty 2017). - P67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주인은 우리인데 왜 우리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는가?‘라는 주변화된 이들의 물음에 민주주의 정치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함에 따라 생겨난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위기의 한 원인으로 꼽히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위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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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12-0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텐트가 뭔지 몰라 찾아본자... West End 라는 독일잡지군요. 관심을 가져보겠습니다 :)

다락방 2023-12-05 11:08   좋아요 1 | URL
저도 모르고 이 책 제목만 보고 고른건데 읽으면서 보니까 독일잡지 한국판이래요. ㅎㅎ

단발머리 2023-12-0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마나.... 독일 연구자들이 쓴 논문 읽는 포스라니..... 기립박수 치고 갑니다. 전 오늘 처음 알았어요.

트럼프와 러스트벨트의 관계에 대해선 전 생각이 좀 다르기는 한데, 트럼프가 그들의 ‘리더‘인 것 확실한 거 같아요. 리더의 귀환,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하던데요. 큰일입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더 큰 일............ (먼 산)

다락방 2023-12-05 12:10   좋아요 0 | URL
독일 연구자들이 쓴 논문인줄은 모르고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ㅎㅎㅎ 제목만 보고 냅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이런 책일 줄은.. 그래서 어려웠지만 어려운 부분 빼고는 재미있었어요. 포퓰리즘 부분은 더 재미있었어요. 처음부터 한국 말로 쓴 글들이라 그런지 잘 읽히더라고요. 하하하하하.

그러니까요. ‘그 리더‘의 귀환... 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 같아요. 깜짝 놀랐지만, 뭐 우리 나라도...(먼 산)

달자 2023-12-06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읽은 후기만 보면 후기 남기신 책들 정말 다 읽고 싶어져요…. 이 책도 조용히 마음 속에 저장…

다락방 2023-12-06 07:57   좋아요 1 | URL
달자 님,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제목만 보고 빌린 책인데 참 좋았습니다.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