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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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을 소재로 한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뭘까. 아마도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일것이다. 우리는 서점이나 책을 다룬 책에서 내가 읽은 책이 나오면 작가와 나의 감상을 비교하며 즐거워하거나 혹은 '내가 이미 읽은 책인데!'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한 모르는 책이 나오면 메모를 하며 다음 읽을 책으로 점찍어두기도 하고. 이 책은 앨리스라는 섬에 있는 유일한 서점의 이야기이다. 서점 주인 에이제이는 2년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사는 39세의 남자인데, 싫어하는 책의 종류가 아주 많고 성격은 까탈스러우며 사람들한테도 잘 대하지 못하고 사실 아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사는 게 말이 아니다. 책은 파는둥 마는둥 저녁마다 술에 취해 잠들고 아내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이럴때 출판사 직원 어밀리아가 책을 영업하러 왔다가 좀 안좋은 기억을 갖고 돌아가게 된다. 


그런 퉁명스런 에이제이의 서점에 갓난 아이가 놓여진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서점에서 자랐으면 좋겠다며 부탁한다를 쪽지를 남겨놓고 가버린 후다. 꼬박 주말을 그 아기 '마야'와 보낸 에이제이는 위탁가정에 보내려던 마야를 자신이 키우기로 하고 입양한다. 갑자기 에이제이는 두 살난 마야의 아빠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에이제이는, 계절마다 한번씩 출판사 직원 어밀리아를 만나다가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난 이런 책 싫어!' 하고 버럭거렸던 책,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 꼭 읽어보라고 추천했던 책을 4년만에 읽고서는 엉엉 운다. 아 이 책이 좋은 책이었구나. 그 책을 소재로 어밀리아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같이 식사도 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 더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어밀리아는 그에게 애인이 있다고 말한다. 에이제이는 절망해서 소개팅을 몇차례 해보지만, 대부분의 소개팅이 그렇듯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지나치게 착하고 뻔하다. 그러니까 서점에서 일어나는 일, 그 서점 혹은 섬에서 일어나는 로맨스라고 해봐야 충분히 짐작가능한데, 그렇다고 그 착하고 뻔한게 싫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게 어차피 뻔한 거 아닌가. 가끔 착하기도 하면서. 또한 이 책을 읽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가 혹은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물론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책에 얽힌 이야기일텐데, 이 책은 그걸 충실히 채워준다. 다른 책들의 이야기, 다른 책속의 주인공이나 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내가 각주를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가 뭔지 내가 알 수 있다는 거 진짜 너무 신나지 않는가! -언젠가도 한 번 얘기했지만,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여러분 꼭 읽어보시라. 외국 소설에서 핍과 해비셤 부인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주석을 볼 필요가 없어!!- 게다가 《클로디아의 비밀》로 마야와 동네 경찰관이 나누는 대화는,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웃을 수 있다. 내가 읽은 책들이 다른 책 속에서 소재로 사용된다는 건 너무 신나는 일인데, 이 책이 그걸 해준다. 이것만으로도 뻔하지만 즐거운데, 뻔하고 즐거운 게 이뿐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로맨스!



로맨스 역시도 뻔하고 즐겁다. 


연애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함께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여자가 함께 살 애인에게 자신의 책장 반을 비워주는데 거기에 각종 트로피만 진열한 걸 보고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침묵과 대화를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건 비극임을 알고 있기에.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 어밀리아는 출판사의 책들을 서점에 소개하는데 에이제이가 그 책들을 부지런히 열심히 읽고, 읽을 때마다 어밀리아에게 메일로 혹은 문자로 감상을 얘기하며 그에 대한 대화(당연히 농담이 섞인!)를 나눈다. 에이제이는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도 보고 그에 대한 농담도 그녀랑 나누게 되는데, 한 계절을 보내고난 후 어밀리아는 그에게 애인과 헤어졌음을 얘기한다. 




저녁을 먹고 두번째 와인병을 딴 후에야 드디어 에이제이는 그녀와 브렛 브루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용기를 냈다.

어밀리아는 슬몃 웃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당신이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럴게요. 약속합니다."

어밀리아는 남은 와인을 쭉 들이켰다. "지난 가을에, 우리가 내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때…… 저기, 당신 때문에 내가 브렛과 깨졌다고 생각지는 말아줬으면 싶군요. 그런 게 아니니까. 내가 브렛과 헤어진 건, 당신과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과 감수성을 공유하고 열정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기억해냈기 때문이에요. 바보 같죠." (p.159)



나는 저것, 감수성과 열정을 공유한다는 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항상 함께할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필요한 것도 바로 저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돈이 더 중요하다, 외모가 더 중요하다 등등 다른 조건들을 더 중요하게 내세울 수 있지만, 그래서 그런 상대를 맞춤하게 찾았다 하더라도, 결국 감수성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 관계가 좋은 상태로 오래갈 수는 없다. 그러다보면 내 애인, 내 배우자는 아니지만 감수성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 혹은 '다른 관계'가 생기게 되는데, 어밀리아가 만약 애인 브렛과 헤어지지 않고 애인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면 어밀리아는 에이제이와 정서적 유대관계를 찐하게 맺게 됐을거다. 브렛으로부터 충족할 수 없었으니까. 에이제이가 어밀리아를 좋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관계는 그러니까, 부조리하지 않은가.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 남는 관계가 될 수가 있어. 그런 점에서 어밀리아가 브렛과 헤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어밀리아와 에이제이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데, 버스 타고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에 사는 에이제이와 도시에 사는 어밀리아의 거리는 멀고도 멀어서, 주변에서는 이들의 연애를 말린다. 그리고 그들도 그들 사이의 이 물리적으로 먼 거리가 그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한 쪽도 자신의 일인 '출판사 영업직원'과 '서점 주인'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개인적인 얘기로 들어가보자면,

나 역시 먼 거리에 있는 남자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어떤 함께살 미래를 꿈꾸거나 한 게 아니었음에도 그 연애는 즐겁게 유지됐었는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너네 그렇게 멀리 있어서 어떤 가능성도 없는데 그 여자를 놔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 얘기를 듣고 내게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게 부질없는 거냐, 이게 의미없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매우 화가 났었다. 왜 다른 사람의 연애에 이러쿵 저러쿵 하는걸까? 우리가 지금 이대로 잘하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 놔주라 마라 하는거지?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지 혹은 없을지는 제삼자가 판단할 몫이 아니지 않은가. 안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가끔 그런 고민에 놓이게 된다. 어차피 이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지 못할거라면 우리가 지금 이러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그런 고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지내는 것에 기쁨과 행복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내고 있는데, 거기에 왜 끼어들어서 놔주라 마라 하는걸까. 어떻게든 결론은 우리 스스로, 당사자가 내려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만약 멀어서 헤어졌다면 그것도 내 몫이요, 먼 거리를 극복하고 누군가가 이동했다면 그 역시 우리 몫이란 말이다.



어밀리아는 페리에 올라서 에이제이에게 전화했다. "난 프로비던스에서 못 움직여. 당신은 앨리스에서 못 나오고. 해결방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

"그렇지." 에이제이는 동의했다. (p.168)



"이건 너한테 불공평한 일이야. 넌 서른여섯이고, 앞으로 더 어려질 리는 없잖니. 네가 진심으로 애를 갖고 싶다면, 불가능한 관계에 시간을 낭비하면 안돼, 에이미." (p.168)



"제부가 그 어밀리아란 사람하고 정말 진지한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제부 인생에 그렇게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드는 건 마야한테 불공평한 일이야."

그리고 대니얼이 에이제이에게 말했다. "여자 때문에 삶을 바꾸다니 안 될 일이지." (p.168)



에이제이는 이 먼 거리와,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직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결혼합시다." 그는 거의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섬에 처박혀 있고, 가난하고, 애도 딸렸고, 수익이 점점 줄어드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거 잘 알아요. 당신 어머니가 나를 싫어하고, 작가 이벤트를 주최하는 일에는 영 젬병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이한 청혼이네." 어밀리아가 말했다. "당신의 장점부터 시작해야지, 에이제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라곤, 우린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예요, 맹세코. 나는 내가 읽는 책을 당신도 같이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밀리아가 그 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당신에게 책과 대화와 나의 온 심장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p.193)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하는 건, 네가 있는 곳으로 갈게 라는 말보다 더 힘든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내가 다른 걸 포기하고 너에게 갈게' 가 아니라, 상대에게 다른 걸 포기하고 내게로 오라는 걸 뜻하는 거니까. 상대에게 포기하게 만드는 건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걸 건네는 것 또한 사랑이고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쉽게 낼 수는 없는 용기. 내가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연애했을 때, 나는 그가 오라고 하면 언제든 가겠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이런 마음을 가진 나라도, 아무리 나라도, 그에게 '당신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해서는 안되는 말로 내게 여겨졌다.




어밀리아는 미간을 찡그렸고, 에이제이는 그녀가 거절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오코너의 단편을 말하는 거야? 당신 책상 위에 있던. 이런 순간에 떠올리기엔 지독히 어두운 건데."

"아냐, 당신을 말하는 거야. 나는 끝없이 찾았는데. 겨우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였군."

"차로 다니면 기차는 좀 생략해도 돼." 에이제이가 말했다.

"당신이 운전에 관해 뭘 아는데?" 어밀리아가 물었다. (p.194)




버스 타고 배 타고 기차 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차 두 번과 배 한 번 이었구나. 고현정과 조인성이 나왔던 드라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도 아주 먼 거리에 있었더랬다. 조인성이 슬로베니아에 있었지 아마. 그래서 그들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있었었는데, 어느날 충동적으로 고현정이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 티켓을 끊고서는, 그래봤자 열여섯시간(이 맞나 모르겠다)이면 갈 수 있는데, 그 시간이면 되는데!! 하는 거다. 에이제이와 어밀리아도 마찬가지.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라고 말해버리니, 뭐 괜찮아지는 것 같은 거다. 물론 실질적으로 이동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게다가 저 장면에서도 우리 책 읽는 사람들은(책부심 독서부심 가득만땅), 으하하핫, 플래너리 오코너,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내가 알지, 읽었지, 할 수 있게 되어 몹시 즐겁다. 게다가 나 역시 '어? 이건 이럴 때 가져올 수 있는 책이 아닌데? 어두운데?' 하게 되는데, 역시나 그런 식의 대화가 이어지는 거다. 크-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나 짜릿한 기쁨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즐겁지 아니한가. 




에이제이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고, 어밀리아 역시 마흔을 곧 앞둔 나이라는 것, 그런데 짝을 만나 결혼했다는 게 나는 너무 좋다. 나이 들어 결혼하는 부부가 반드시 더 잘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삼십대 중반에 만나 결혼한 내 친구 부부를 보면 되게 이상적인 것 같은 거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하다가 만나 각자가 맡은 역할을 역시 잘해내면서 둘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 나이 든다고 반드시 성숙해지는 건 아니지만, 성숙한 관계란 건 바로 그런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에이제이와 어밀리아의 결혼식에 섬의 경찰관 어머니가 참석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결혼식이라면 원래 다 좋아하긴 하지만, 성숙한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결심하니까 유독 멋스럽지 않아?" (p.195)



그러자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요, 엄마. 눈 감고 달려드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죠. 여자는 남자가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둘 다 세상에 완벽이란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죠." (p.195)




보통의 책이었다면 에이제이와 어밀리아가 결혼하면서 끝났을 거다. 마치 결혼하는 순간 이야기는 끝, 행복 끝이라는 듯이. 그러나 결혼하면서 이책의 겨우 절반 조금 넘는 부분을 지났을 뿐이다. 결혼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어밀리아는 여전히 출판사의 영업직으로 일하고 에이제이는 서점을 운영하고, 마야는 쑥쑥 자란다. 아이가 자라면서 집도 늘려가야 했고 서점은 섬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가고 서점은 여전히 섬에 존재한다.


착하고 뻔하네, 라고 읽으면서 좀 심드렁했는데, 응 그렇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읽었다. 나는 정서적 교감, 감수성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무척 좋다. 그거면 된 것 같고 그거면 충분하다. 우리는 결국 우리와 감수성을 공유할 사람을 찾아 시간을 보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어밀리아가 말했듯이 그렇게나 찾아 헤맸는데 기차 두 편과 배 한 척 거리에 그가 있었다. 이왕 찾을 거라면, 내 옆집에 살면 얼마나 쉬울까마는, 인생이란 게 또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행기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떠억- 하니, 감수성을 나눌 사람을 숨겨 두기도 한다. 내 감수성이 열세시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다면, 뭐 어쩌겠는가.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만나야지. 그러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출근해 돈 벌고 있는 거 아닌가.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든데, 열시간이든 스무시간이든 걸려 어떻게든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인생에 있어서 큰 행운을 쥐게 된 셈이라 봐도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좋은데 후훗, 읽으면서 혼자 계속 으쓱하고 잘난척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나 그거 알아, 나 그 주인공 알아, 나 그 이야기 알아, 나 그 제목 말아, 하면서 연신 혼자 잘난척 하는 기분이 정말이지 좋단 말이야? 앞으로 읽는 책들에서도 계속 더 잘난척 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그나저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도 내가 백자평을 써둔 것 같으니 뭐라고 썼나 찾아봐야겠다.



착하고 뻔한 이야기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겨울에 읽기 좋겠다고 한다. 착하고 뻔한 이야기인데, 착하고 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아야 그나마 삶이 좀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이 년전쯤 어쩌다 「로링 캠프의 행운」을 다시 들춰보게 됐는데 하도 펑펑 울어서 내 도버 염가 문고판이 수해를 이은 걸 볼 수 있을 거다. 생각건대, 중년이 되니 물러진 것 같구나. 그러나 또한 생각건대, 근자의 내 반응은, 인생의 시기마다 그에 딱 맞는 이야기를 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는 구나. 명심해라, 마야. 우리가 스무 살 때 감동했던 것들이 마흔 살이 되어도 똑같이 감동적인 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나 인생에서나 이건 진리다. (p.57)

"난 항상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터키시 딜라이트를 먹어보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으면서 에드먼드가 터키시 딜라이트 때문에 가족을 배신할 정도라면 그건 진짜 어마어마하게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에이제이가 말했다. "니콜한테 이 얘기를 했었나 봐요, 어느 해인가 아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박스를 줬거든요. 근데 가루를 잔뜩 묻힌 꾸덕꾸덕한 사탕이더라고. 내 평생 그때처럼 실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바로 그 순간 공식적으로 당신의 유년기가 끝난 거군요."
"절대 전 같지 않았지요." 에이제이가 말했다.
"하얀 마녀의 터키시 딜라이트는 달랐을지도 몰라요. 마법의 터키시 딜라이트는 훨씬 맛있다거나."
"아니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게 에드먼드가 가족을 배신하게 만드는 데는 그리 대단한 유혹이 필요치 않았다거나."
"엄청 시니컬하네." 어밀리아가 말했다.
"터키시 딜라이트 먹어본 적 있어요, 어밀리아?"
"아뇨." 그녀가 말했다.
"좀 구해줘야겠군요." 그가 말했다.
"내가 그 사탕에 환장하면 어쩌려구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얕보게 되겠지." (p.124-125)

"난 어밀리아를 사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에이제이가 반박했다. "근데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아직 타이밍이 나쁜 거지. 그 무렵에는 당신 아내가 세상을 떠났어. 그러고 나서 당신한텐 마야가 생겼고."
"별로 위로가 안되는데." 에이제이가 말했다.
"하지만 이봐, 심장이 여전히 뛴다는 걸 알게 된 건 좋은 일이 잖아, 안 그래? 내가 소개팅이라도 알아봐줄까?" (p.134)

"아, 갈게. 거대한 초록 코끼리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요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여행을 간다고 할 때 실은 다른 종류의 여행일 때도 있거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단지 내가 어떤 여행을 가는 건지 하는 거야. 우리가 토피어리를 보러 가는 거야, 아니면 뭔가 다른 걸 보러 가는 거야? 가령 당신의 그 여자사람친구라든가?"
에이제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잠깐 어밀리아를 보러 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맞아." (p.154)

"당신은 섬에 정착하면 안 되겠지. 일 때문에 출장을 무척 자주 가야 하니까."
어밀리아는 두 팔을 앞으로 쭉 편 채 에이제이를 붙들고 피식 비웃었다. "그렇지. 근데 나한테 앨리스 섬으로 이사와달라는 부탁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아니, 난…… 그게, 난 당신 생각해서." 에이제이가 말했다. "앨리스로 이사하는 건 당신한테 현실성이 없는 얘기잖아. 요는 그렇다는 거지."
"그치, 현실성이 없지." 어밀리아가 말했다.그녀는 형광 핑크색 손톱으로 에이제이의 가슴에 하트를 새겼다.
"그건 뭐라는 색조야?" 에이제이가 물었다.
"장밋빛 안경." 기적이 울렸고, 어밀리아는 배에 올랐다.
그해 봄,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기다리며 에이제이는 어밀리아에게 말했다. "일 년에 새 달만 앨리스에 있으면 안 되겠지."
"아프가니스탄으로 통근하는 게 더 쉽겠다." 그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 얘기를 버스 정류장까지 갖고 와서 꺼내는 게 마음에 드는걸."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내려 애썼어."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긴 하군."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을게." (p.165-166)

딱히 글 쓰기에 관련된 사항은 아니지만…… 언젠가 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할 날이 오겠지. 주변에 딴 사람이 있어도 너밖에 안보인다는 사람을 골라라. (p.199)

"섹스는 진짜 오래간만인데." 이즈베이는 자기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섹스를 해야 한다고요." 이즈메이는 분명히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하고 싶다면."
"하고 싶어요." 램비에이스가 말했다. "그게 두번째 데이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면요. 난 당신이 다른 남자를 얻을 때까지 준비운동 대상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p.252-253)

"씨발!" 평생 욕하는 법이 없는 어밀리아였으므로, 에이제이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야?"
"흠, 문제는, 내가 당신 뇌를 좀 좋아했나봐."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눈물은 됐어. 당신의 동정은 원치 않아."
"당신 때문에 우는 게 아냐. 나 때문에 우는 거지. 당신을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 끔찍한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 다시-"이제 그녀는 숨이 찬다."-다시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할 순 없어. 그럴 순 없다구." (p.294)

"있잖아, 서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에이제이나 어밀리아 같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난, 책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는 게 좋아. 종이도 좋아해. 종이의 감촉, 뒷주머니에 든 책의 느낌도 좋고. 새 책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해."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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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7-11-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왕 너무 좋은 이야기네요. 책도 리뷰도요. 저의 겨울 독서 리스트에 올리겠습니다. 코코아 마시며 읽겠어요. 책 다 읽고 이 리뷰도 다시 읽어야지! >.<

다락방 2017-11-15 09:37   좋아요 0 | URL
이 시점에 로맨스가 등장하는 거 너무 전형적이고 뻔하지만, 근데 저는 그 로맨스가 무척 마음에 들더라고요. 역시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차야 해요. 하하하. 코코아라니, 너무 좋아요, 네꼬님! 너무 잘어울려요! 저는 따뜻한 커피와 던킨 도넛츠 먹고 있어요. 후훗.

레와 2017-11-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장바구니를 편집(?)하고 있어요. 이 책도 넣을까 우짤까 막 고민하고.. 어렵다요! ^^;;


다락방 2017-11-15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좋을 책 같아요. 히힛.
물론 막 착하기만 한 건 아니긴 한데 전반적으로 착한 책이고...우리는 가끔은 착한 책을 읽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고 말이지요. 후훗.

psyche 2017-11-15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뻔한 이야기인데 책 이야기다보니 밑줄긋고 싶은 부분은 많더라구요. 저도 저 터키쉬 딜라이트 항상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길래 배신을! 하면서요. 먹어본 사람들이 실망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먹어보고싶어요

다락방 2017-11-15 15:04   좋아요 2 | URL
저도 터키쉬 딜라이트 궁금하긴 했었는데요 막 그렇게까지 먹어보고 싶거나 그러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걸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이 이 책에 존재하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그게 이 책의 묘미인 것 같아요. 책 읽고 대화하는 게 가능한 거요.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았어요.

psyche 2017-11-15 22:35   좋아요 2 | URL
예전에는 큰딸이랑 그런 대화들을 했었는데 얘가 사는게 바쁜지 어쩐지 요즘 책을 잘 안읽더라구요. 그래서 외로웠던차에 이렇게 북플에서 이런 대화를 할 분들을 만나니 참 좋아요!! 책 많이 읽고 글도 잘쓰고 생각도 깊은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다락방 2017-11-16 09:34   좋아요 2 | URL
어떤 관계든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진짜 큰 기쁨이죠!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면에서 알라딘은 정말 최고의 장소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에 대해 얘기하고 감상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알라딘에 글을 쓰고 또 다른 분들의 글을 읽는 게 즐거운 것 같아요.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말이지요. 후훗.

단발머리 2017-11-15 15: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착하고 뻔하면서도 그리고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네요.
나는 다락방님 페이퍼 읽으면서 아직 안 읽은 책이 많다는 걸 확인하면서 더 열심히 읽자~~~이런 착한 결심을 하고야 말았어요.
지금 이런 책이 필요해요. 착한 로맨스, 달콤한 사랑 이야기^^
그나저나 나는 뭘 먹으면서 이 책을 읽게될까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11-15 15:06   좋아요 2 | URL
맞아요! 착하고 뻔하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는 읽어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 즐거워하고 웃기도 하고 공감도 하고 같이 사랑에 빠지고 그러는 순간이 필요하죠. 후훗.

네꼬님은 코코아 저는 도넛.... 단발머리님은....음.....케익 어떨까요? 아니면 호두파이 같은 것! 후훗.
아, 단팥빵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뭐든 좋죠. 뭐든 먹으면서 읽어요! 히히.

비연 2017-11-16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망설임없이 보관함에 넣으며... (사실은 장바구니..)
락방님. 너무 합니다. 생각하게 되네요 ㅜ 며칠 전에 올해 마지막 책을 구입했었었었더랬는데요.
근데 안 넣을 수가 없어서 이 책을 넣으니.. 다른 책들도 함께 들어갈테고.
아. 전 아무래도 책더미와 함께 집에서 쫓겨날 거 같습니다..ㅜㅜㅜ

다락방 2017-11-16 14:04   좋아요 3 | URL
그런 비연님께 기쁜 소식 하나 전하자면, 이번에 새로 올라운 굿즈-식판입니다!!-를 받을 수 있는 해당도서입니다. 그러니 지르시고 식판 받으세요!! ㅎㅎㅎㅎㅎ
저도 식판 받으러 갑니다. 슝-

식판 받아서 거기다 밥 먹으며 다이어트 하려고요...(응?)

책도 사고 다이어트도 하고 일석이조!! (응?응?)

즐건독서 2023-01-1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책. 서점에 관한 책들은 책 구매에 있어서 탑픽 주제이나,
여기서 터질줄이야.

p219

˝우리 엄마는 삶을 포기했잖아요?˝
이유가 있었을 거야. 분명 네 어머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이태 전에 세상을 떴다. 그들 모녀의 관계는 때론 위기도 있었지만, 어밀리아는 뜻밖에도 어머니가 맹렬히 그리웠다. 가령,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격월로 딸에게 새속옷을 부쳤다. 어밀리아는 평생 단 한 번도 스스로 속옷을 살일이 없였다. 최근에서야 티제이맥스의 란제리 매장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팬티를 고르면서 울음이 터졌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는 사람은 다시는 없을 거야.

잔병치레 한번 없으셨던 어머니.

손주, 자식들 온 가족들과 여행하고 돌아와 저녁 식사중에 갑작스럽게 어머니 돌아가신지 150일.

내가 좋아하던 마늘쫑 늘 챙겨주셨던 어머니.

시장 밑반찬 집에서 고르다가 뻥 터져버린 내 눈.

내 공허함을 여기서 공감 받는다.

잊었던 책을 읽어야 할 이유 또 한가지를 또 깨닫게 된다.

공감하고 위로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