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일전에 한 개그프로에서 아동성추행에 대해 다룬 걸 보았다. 장동민이 어린 아이로 분한 코너였는데 할머니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걸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그 영상을 본 나는 정말 놀라고 끔찍했다. 대체 저게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웃기 위해 그 자리의 방청석에 와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 그리고 웃기 위해 그 프로를 보겠다고 앉아있는 많은 시청자들 중에 아동 성추행 피해자가 무수히 많을텐데, 저걸 어떻게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까? 아동 성추행의 피해자인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정말로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다. 어떻게 저게 웃기지? 저게 웃겨? 저게...웃겨? 난 아픈데? 무서운데? 미쳐버릴 것만 같은데?


개그 프로는 어른들도 보지만 아이들도 본다. 그 아이들 중에도 그 경험을 실제 '당하고'있는 아이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매체에서 '어쩔 수 없다'고 그걸 허락하는 장면을 내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할머니(할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면 이렇게 해도 되는거야' 를 조장하는 거 아닌가. 진짜 숨막히게 위험한 프로가 아닌가. 어떻게 저걸 개그라고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누군가의 아픔과 두려움을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있지?



이 책의 저자 '린디 웨스트'는 코미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코미디의 한 복판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재미있는 걸 좋아했고, 그 재미있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그 길로 근접하게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서 튕겨져 나온다. 너무나 많은 남성 코미디언들이 너무나 당당하게 '강간'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토론하는 티비 프로그램에 나가서 코미디의 소재로 강간이 쓰여서는 안된다, 너네가 그렇게 강간으로 코미디를 하는 동안 그 안에 누군가는 강간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간 코미디를 옹호하는 그 남자 코미디언은 사람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줄 안다고 말한다. 야, 강간 장면 나오는 영화도 있잖아, 그런데 코미디는 왜 안돼? 라면서. 어떻게 이 남자는 이런 걸 비교대상으로 갖다 놓은걸까?



남자 코미디언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잘못인 줄을 모른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는데, 그 강간문화(코미디)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는 그 후에 여실히 드러난다. 저자 린디 웨스트에게 매일매일 끊임없이 아주 여러 개의 트윗 멘션과 이메일이 날아오는 거다. 그것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강간도 당하지 못할 뚱뚱한 여자 주제에. 너도 강간 당하고 싶지?




린디 웨스트가 받는 그 수백개의 멘션은 그대로 강간 문화의 여실한 증명이 된다. '사람들은 그게 농담인 줄 알고 있으므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도 된다'는 남자 코미디언의 말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증거가 된다. 린디 웨스트는 그 멘션들을 죄다 묶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이에 린디 웨스트를 지지하며 강간 코미디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속속 드러난다. 이 생생한 증거 앞에 남자 코미디언은 한 방송에 나가서 '강간문화가 존재하긴 한다(자신들이 그러고 있다)'고 인정하기는 한다. 그 후에 코미디에서 강간을 다루는 것은 좀 더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러나 말끔하게 없어지진 않았다.



나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강간이 왜 코미디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걸 소재로 삼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왜 웃기기 위해서 그래야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강간을 소재로 삼아야 할까? 왜 웃기기 위해서 약자를 소재로 삼을까? 그 웃음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코미디에서 강간을 소재로 사람들을 웃기려고 시도하는 것, 그리고 그 개그에 따라 웃는 것은 암묵적으로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 강간 농담을 허용한다는 것은, 실제 강간을 당한 피해자를 더 숨게 만든다. 더 숨게 만들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강간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범죄는 더욱 강해지고 피해자는 더욱 약해진다. 이런 시스템을 아주 충실히 만들어가면서 '야, 웃자고 한건데 왜그래?' 라니, 인간이 할 짓인가.




린디 웨스트는 자기가 뚱뚱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녀는 뚱뚱하다. 키가 175센치였나,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이라고 책에 밝히고 있다. 그녀는 세상이 자신을 혐오스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날씬하게 보이고 싶어 애를 썼던 과거도 물론 갖고 있다. 그러나 날씬해 보이기 위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정말 날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고 또한 뚱뚱한 것이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다. 잘못된 건, 뚱뚱한 사람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과 편견과 혐오였다.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그래' 라고 하지만, 린디 웨스트는, 정말 그들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그렇게 자신의 정신에 스트레스를 주는 몸에 대한 참견을 멈춰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뚱뚱한' '여자'로 살아오면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싸우기 시작한다. 뚱뚱한 그녀가 어릴 적부터 '저렇게 되고 싶다'고 했던 마땅한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자신이 다음 세대의 롤모델이 되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몸을 당당하게 공개하고, 결혼식을 앞두고도 '그래도 결혼식이니까 막강 다이어트 해야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봐,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아름다워!



그녀가 당당한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도 실패를 했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의 옆에 껌처럼 달라 붙고 싶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장한다.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이 사랑을 더 견고히 만든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페미니스트가 결점이 없는 인간인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자신이 어딘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린디 웨스트가 선택한 페미니스트로 사는 방법이고, 그리고 자신의 그런 말과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가 뒤에 숨거나 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너 틀렸어', '그거 잘못됐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서 고맙다. 그녀는 그녀의 바람대로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체가 너무 산만해서 초반에 읽기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자꾸 웃기려고 하기 때문에 산만해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별 하나를 뺀다. 본문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괄호를 열고 닫으며 설명하는 게 많아서(물론 옮긴이의 주석도 있다) 그 점이 나의 취향에서 약간 벗어났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에 그녀가 공개한 결혼식 사이트에 들어가봤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대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실용적인 결혼 A Practical Wedding>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한 덩어리다. 마찬가지로, 나는 살덩어리로 된 인큐베이터 안을 돌아다니는 자궁도 아니다. 여성의 몸을 여성의 생식기관과 분리하려는 역겨운 선전-임신중절과 피임은 보건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거짓말하는 것을 포함해서-과, 여자들에게 여성 자신과 몸의 크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동시에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한 제각각의 독립체라고 설득하려는 역겨운 선전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두 가지 모두 "너의 몸은 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너의 자율권은 조건부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비만이 페미니즘의 의제인 이유다. (p.35-36)

대학 시절, 나는 아침마다 하워드 스턴Howard Stern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나는 하워드 스턴을 정말 좋아했었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페미니즘에 대한 내 확신이 공고해짐과 동시에 그에 대한 지지를 쓰라린 마음으로 어느 정도 철회해야 했지만 말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개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p.42)

사실 나는 누군가가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하는 이유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다. 자기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자기의 피를 공급받으며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고 자기의 미래를 재설정하는 무언가의 향방에 대한 결정권은 어떤 경우에도 자궁의 주인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타당한‘ 낙태나 ‘타당하지 않는‘ 낙태 따윈 없다. 임신한 사람 가운데 출산을 원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사람, 그리고 선택에 접근할 기회 및 지지를 얻는 사람과 장애물에 부딪히고 거짓을 주입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p.101)

여자인 나의 몸은 끝도 없이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되며,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진열대에 놓인 물건처럼 취급받는다. 뚱뚱한 내 몸은 풍자당하고 공공연하게 매도당하며 도덕적, 지적 실패로까지 여겨진다. 내 몸은 내 직업적 가능성과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고, 공정한 시험을 받을 기회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와 인터넷 악성댓글이 하나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조처, 즉 나의 사랑받을 능력을 축소시킨다. (p.106)

나는 세상의 이런 시각을 ‘전도된 신체 이형증‘이라고 명명했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뭐가 그리 역겨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이 똑똑하고 재미있고 타고난 재능이 많으며 사교적이고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걸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홈런이었다. (p.106-107)

끝내 체중은 줄어들지 않았고-상당한 정도로는 말이다- 간간히 일궈낸 작은 ‘성공들‘은 ‘일반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식생활 습관 덕분이 아니었다. 내 몸을 ‘고치는‘데 필수적인 제한 수준이라며 전문가들이 말해주는 방법들은 사실상 인간의 즐겁고 충만한 삶과 관련된 거라면 몽땅 제거해버리는 것들이었다. (p.115)

그들은 뚱뚱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어째서 올바르고 좋은 일인지에 대해 수많은 자극적 이유들을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컨대 우리가 혐오스럽고 성적 매력이라고는 없는 몸의 소유자임은 물론(고전적인 이유다!) 의료보험료가 줄줄 새나가는 구멍이라고, 비행기 팔걸이를 독차지한다고, ‘아이들‘한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절제하는 삶을 식탐과 맞바꾸는(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마른 사람들은 모든 측면에서 절제하는 단정한 삶을 사는 데 반해서) 어쩔 수 없는 무능력자이자 괴물같은 고집쟁이라고 몰아붙이는 거다. 아, 우리의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걱정이 되기 때문이란다. 그들이 우리를 막 대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라는 거다(어떤 집단을 도울 때 실제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닌 게 뭔지 아는가? 바로 그들을 척결하자는 주장을 펴는 쪽과 같은 말을 하는 거다). (p.134-135)

새로운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몸 크기가 아니라 활동량이 적은 생활습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뚱뚱한 사람들은 다양한 외적, 내적 힘들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이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뚱뚱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빚진 거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다. 케이트 하딩Kate Harding과 매리언 커비Marianne Kirby가 『비만인 사람들에게서 얻는 교훈Lessons from the Fat-O-Sphere』이라는 책에서 쓴 것처럼, 건강은 무슨 도덕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p.136)

당신은 제 건강을 염려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제 건강을 걱정한다면 거기엔 제 정신건강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앞서 언급한 말들 때문에 제 정신은 지난 28년간 천천히 손상돼왔으니까요. 또한 당신은 제 건강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어쩌다 제 상사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제 의사는 아니니까요. 당신은 제가 뭘 먹고 운동은 얼마나 하는지, 혈압은 어느 정도며 당뇨병에 걸릴지 아닐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전혀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p.152-153)

낙인찍기는 이렇게 작동한다. 코미디언들은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다. 청중들은 웃는다.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공포가 사실임을-자신은 혐오스럽고 망가졌고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확인한다. 헤르페스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가장 나쁜 본능-자신은 깨끗하고 행실이 올바르고 더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당화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헤르페스에 걸린 사람과 자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엔 누구나 동의한다. 만약 헤르페스가 있는 사람이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려면-자기가 헤르페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해야 함과 동시에-과민반응을 일으켜서 재미를 망쳐버렸다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같이 따라 웃는다. 농담은 먹힌다. 너무 잘 먹혀서 아마 그 코미디언은 그런 농담을 하나 더 쓸 거고 말이다. (p.235)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우리가 다 같이 이따위 농담에 따라 웃고만 있는 거지?
나는 아함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너머로 말했다. "있잖아요, 저도 헤르페스에 걸렸을지 몰라요." (p.236)

"아마 이 청중들 중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헤르페스에 거려 있을 거예요."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들은 웃는 척 해야 되죠. 정말 더러운 느낌일 거예요. 그냥 다른 농담을 쓸 수도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람들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나도 걸렸을 수 있죠."
아함과 나는 5년 동안이나 자잘한 파티 또는 자원 공연을 다니며 잡담을 주고받았지만, 그동안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아함이 이런 얘기를 했다. 자기는 쭉 내 글의 애독자였지만 그 순간이 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영원히 바꿔놓고 말았다고 말이다. "한 여자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듣고는 정신이 멍해졌지."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냥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늘 당신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었지만- 진짜, 진짜, 엄청나게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p.237)

오랫동안 나는 어떤 코미디 쇼를 보러 가든, 내 젠더를 겨냥한 수많은 야만적인 농담에 별 도리 없이 그냥 히죽 웃고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우리를 때리는 것, 우리를 강간하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해도 싼 이유 및 우리를 서열화하는 것, 우리를 성관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미 비인간화된 우리 존재를 한 줌의 모욕적인 전형으로 쪼그라뜨리는 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이런 농담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진보적인 대안쇼라고 하는 무대나 내 친구들이 예약한 쇼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코미디에서 여성혐오는 평범한 요소였다. 제발 내 아내 좀 데려가줘요. (p.240)

어떤 자원 무대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간밤에 여자 하나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섹스하는 동안에 얼마나 소리를 크게 내던지.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죠. ‘쉿, 너 이 강간을 살인으로 바꾸고 싶어?" (p.241)

내가 사랑하는 코미디언이 나한테 경보를 울리는-뭔가 인종주의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트렌스젠더 혐오주의적인-어떤 말을 했을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은 걸 거야. 그가 괜찮다고 했고 나는 그를 신뢰하니까.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르는 비밀 계약 같은 게 있는 게 틀림없어. 여자나 게이나 장애인이나 흑인 들이 그게 멋지다고, 농담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동의하는 계약 말이야.
하지만 브릿지타운에서의 그 순간에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밀어닥쳤다. 그런 규칙은 대체 누가 만든 거야? 그런 계약을 누가 했냐고? 나는 아무 계약서에도 사인한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그건 보편적인 동의라기보다는 힘센 남자들이 자신들은 절대 겪을 일이 없는, 생명을 파괴하는-때로는 말 그대로 진짜 고문을 포함한-공포로 싸구려 웃음을 짜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설치해놓은 위장 폭탄에 더 가까워 보인단 말이지. 도대체 내가 왜 몇 시간 동안 ‘쌈박한‘ 여성혐오, ‘쌈박한‘ 인종주의, ‘쌈박한‘ 강간 농담에 환호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단지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한테도 중요한 이 산업에 끼고 싶어서? (p.241-242)

아함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내 세계에서 유일한 부분이 아니었다. 고통에 지친 나는 (그리고 나중에는 내 직업 탓에) 약간 그를 옆으로 밀쳐놓게 되었는데, 그 공간이야말로 정확히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p.332-333)

나를 속이다니! 5년이라고 해놓고. 나는 5년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2년 만에 프로포즈를 하다니.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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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7-03-2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도 이 책의 표지에 손가락 하나 보태고 싶어요.
저 역시 그녀의 결혼식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다락방 2017-03-27 08:3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요즘 어떻게 지내요? 열심히 글 쓰면서 지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