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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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세상을 태어나 그 삶을 다하기까지의 이야기가 한 편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제목처럼 이 책은 가만가만한데, 책날개에 실린 저자소개조차도 가만하다. 이 책의 저자인 '최윤필'은 저자소개에서 자신을 '요컨대 나는 국적·지역·성·젠더·학력 차별의 양지에 살았다' 라고 표현한다. 양지에 살았다는 그가 뭔가 특별한 이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고 이성애자 사내아이, 서울대 사회학과,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도 이 사회에서는 양지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을 보게 될 시야에도 관여한다. 너네가 기득권이다, 라고 사회적 약자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내가 왜?' 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부인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렇듯,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더 특별한' 무얼 가진 게 아니면서도, 그는 자신의 양지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누군가의 부고를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 실린 이들 중에는 내가 기존에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게다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노라면, 사실 그간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예 인식조차 해보지 못했던 면들에 대해서 부르짖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재소자의 인권도, 국가의 국민에 대한 감시도, 자살 조력자에 대한 것도, 평소에 내가 인식하고 사는 부분들이 아니니까. 이슈가 되면 그 때 잠깐 반짝할 뿐, 나는 그것들로부터 아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사람들, 한 평생을, 식상한 표현 그대로 '뜨겁게' 살다간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의 축을, 사회적 약자에 맞춰놓고 움직였다. 성폭행 피해자들을 돕고, 여성의 낙태권에 대해 주장하고, 학살 당하는 인류의 편에 서고, 전쟁을 반대한다. 경찰의 비리를 고발하고, 모성에 대해 연구해 발표하고,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을 한다. 어떻게 하면 힘들고 아픈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던 이들에 대한 가만한 부고가 여기, 이 책에 실려있다. 알지도 못했던 존재에 대한 웅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고작 4-5장 정도에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는데, 짧다면 짧다고 볼 수도 있을 그들의 생에 대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가만한 마음 위에 얹혀져, 아름답고 또한 거룩하다. 인상적인 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이 책에 실린 모든 이들, 그들중에 여성이란 성별을 가진 이들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다. 나 역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시작하면서, 저절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심까지 갖게 되었는데, 페미니스트라는 건, 소수자의 삶이 소멸되지 않게 그들의 삶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결한 것임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더더욱 페미니스트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그저 부고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탄생부터 삶의 전반적인 과정까지, 그들이 살아생전 했던 말들과 행동들까지 고스란히 알려주는데,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알 수 있었을까, 궁금했던 바, 미주에 그 답이 나와있었다. 그는 각 인물에 대한 책과 기사들을 많이 참고했다. 한 사람의 생을 어떻게 다른 한 사람이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관련 기사와 책을 살피며 그 사람의 삶을 곰곰 생각했을 저자를 떠올려보며 그 노력에 감사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나 노력을 했다.



좋은 글을 만나면 언제나 나 역시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더 좋은 글에 대해 고민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라니, 나도 더 아름다운, 더 좋은, 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나 이 책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그가 글을 아름답게 쓰기 이전에, 그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 자체가 깊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고는, 글을 잘 쓰기 이전에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게 먼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더 좋은 사람이 되야 한다는 의미일테다.



아름다운 글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이들중 누군가의 삶에 대해 한 편쯤은, 가만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읽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 여기, 이런 삶이 있었어, 들어봐, 하고.






바버라 아몬드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상담 의사로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라는 책을 썼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을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가 그런 모범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그녀는 모성에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며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바버라 아몬드, p.51)

책을 낼 무렵 아몬드에게는 손주들이 있었다. 2011년 <보스톤글로브> 인터뷰에서 할머니가 되니까 ‘양가감정‘이 덜하냐는 질문에 그는 "조부모 노릇Grandparenthood은 부모 노릇과 달리 순수한 기쁨이다. (…) 하루이틀 뒤 조금도 미안한 마음 없이 짐 싸서 집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바버라 아몬드, p.59)

콰스니 부부의 탄생으로 인디애나 주의 동성혼 합법화 투쟁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14년 6월에 영 판사는 동성혼 불허는 연방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며 100여 건의 동성혼 신청 소송 사례를 이거에 주정부로 보내 즉각 혼인확인서를 발급하도록 판결한다. 판결에서 영 판사는 "조만간 미국 시민은 원고들과 같은 커플의 결혼을 흔히 보게 될 것이며, 그걸 ‘동성혼‘이 아니라 그냥 ‘결혼‘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젠더와 성적 지향을 빼면 그들은 거르의 여느 부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다르지 않은 그들을 다르지 않게 대하라는 게 미합중국 헌법의 요구다"라고 밝혔다. (니키 콰스니,p.74-75)

법과 제도의 진전이 시민 의식과 관습 속에 스미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상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에 맞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법 제도와 별개로 천부의 권리를 시민들의 감각 속에 끊임없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 인종 분리의 담장을 넘어 흑인이 진입하고, 동성애자 커플이 손을 맞잡고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고, 남성이 전유한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허무는 일. 끊임없이 자극하고 부딪쳐 더디더라도 점차 자연스러운 풍경의 일부가 되는 일은 집단이 거대한 대오를 이뤄서 힘과 함성으로 법 제도에 맞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투쟁의 일부다. (델 윌리엄스, p.123-124)

한국은 군비 지출 세계 10위에 무기 수입 세계 9위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복지비는 OECD 조사 대상 28개국 중 최하위다. 2015년 한국 국방 예산은 전년에 비해 4.9퍼센트 증가한 37조4560억 원으로 북한 실질 GDP의 두 배가 넘는다. (루스 레거 시버드, p.320)

시버드가 첫 보고서를 낸 이래로 세게는, 적어도 거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는 비교적 멀찍이 서 있게 됏다. 그 평화는 시버드의 뜻처럼 군비 감축을 통해서가 아니라 파국적인 군사력 축적으로 이룩된 평화다. 하지만 시버드는 "군사력으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관료 사회가 지속되는 한 이 지구는 결코 안전해질 수 없다. (…)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우리를 죽일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원론적으로 옳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의 ‘우리‘가 인류라는 이름의 우리는 아니다. 군사 강국의 정치와 군수산업은 지금도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전쟁무기 수요를 창출하고 있고, 한반도도 그중 한 곳이다. ‘세계 군축 행동의 날‘ 슬로건("전쟁 대신 복지를")을 한국에서는 "우리 세금을 무기 대신 복지에!"라고 외친다. (루스 레거 시버드, p.321)

영국이 낙태를 합법화한 건 1967년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때까지 영국 산부인과 환자의 태반이 불법 낙태 수술 후유증 환자였고, 그들 대부분은 미혼 여성이었다. 리비가 생기는 대로 아이를 낳은 것도, 아이를 키우느라 병원을 그만두고 셰필드 지역 보건의GP가 된 것도, 낙태를 불법화환 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60년대 초 기혼 여성 가족계획과 미혼·독신 여성 피임을 돕는 ‘408클리닉‘이라는 여성보건센터를 개설했다. 여성(자신)의 삶에 대한 법의 부당한 간섭을 어떻게든 최소화하자는 취지였다.
그의 클리닉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여성들이 아니라 윤리 경찰을 자임한 성직자와 지역 유지들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신문 칼럼등을 통해 클리닉의 부도덕성을 성토했다. 리비는 "그건 우리가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최고의 홍보였다. (…) 여성들이 몰려들어 클리닉이 있던 블록을 에워쌀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 p.335)

리비는 1990년 은퇴 후 가족계획 국제 NGO인 ‘마리스토프스인터내셔널 MSI‘을 도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1년간 봉사 활동을 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그는 "전 세계 어디나 여성은 다 똑같다. 내가 만난 시에라리온 여성들은 글래스고에서 만난 수많은 가난한 여성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남편을 두려워하고, 섹스를 거부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또 아이를 낳곤 했다"라고 말했다. 법은 법이고, 가부장 권력은 또 가부장 권력이라는 얘기였다.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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