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트윗에서 정미경 소설가의 부고를 확인했다. 그의 암투병 생활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갑작스런 소식에 놀랐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안좋았다. 언젠가 그의 소설 《장밋빛 인생》을 읽고는 너무 좋아서, 그 책 한 권을 달달 외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출간된 그의 소설을 다 읽어야지 생각하고 신간 나올 때마다 부지런히 읽었는데, 다른 작가들과 함께 실린 작품집이 아닌 단행본은 내가 다 읽었더라. 그러고보니 《프랑스식 세탁소》였구나. 그 뒤로 단행본이 나오지 않았어. 몇 년간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를 물으면, 나는 거침없이 정미경의 이름을 댔더랬다.


페이퍼를 찾아보니 나는 2006년에 장밋빛 인생은 읽은 걸로 되어 있다.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아프리카의 별》을 읽고, 김을 먹는 장면에서 내가 한 남자를 그리워했던 기억까지도 주르르, 쏟아진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언젠가의 여름길,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걸으면서 읽기도 했었다. 너무 좋아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참 선물도 많이 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래, 소용없는 게 있다. 젖어버린 신발처럼, 범람하는 제방처럼,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의 강물은 도저한 양츠강의 범람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장밋빛 인생, p.48)



몇 시에요?」
「여덟시」
「이제 돌아가요」
「지금은 상인의 시간, 장사치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죠」
민의 얼굴은 이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상인의 시간을 견디며 말없이 물풀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윈드 브레이크 하나로 견디기에는 분명히 싸늘한 날씨였는데 민은 춥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재킷을 벗어주자 민은 고개를 저었다.
「옷을 줄 때가 아니라 돌아갈 시간이에요. 벌써 여덟시 삼십분이네요」
어둠에 눈이 익은 민이 몸을 기울여 내 손목시계를 읽는다.
「여덟시 삼십분이라. 그건 수학자의 시간이죠」 민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언제 가려구요?」
「시인의 시간에요」
「그건 언젠가요?」
「알 수 없는 일이죠. 난 지금 이 순간 시인이 됐으니까」
 (장밋빛 인생, p.50-51)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되는데 풀배팅하겠어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p.247)




"5월이 아름다운 거 같아요? 눈으로밖엔 풍경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5월을 아름답다 하죠. 전 6월을 좋아해요. 6월은, 거의 폭력적인 생기를 뿜어내잖아요. 무심히 흘러가던 강물에도 관능이 금가루처럼 녹아 흐르고, 그 물을 탐욕스럽게 빨아마신 식물까지 숨결이 가빠지는 게 6월이에요. 사랑 없는 섹스를 한다면 6월이 적당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꼭 죽여야 한다면 6월의 저녁에 그 일을 해치워버리세요. 6월은, 어떤 죄악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계절이에요." (내 아들의 연인, p.180-181)



나는 버림받았다. 그 생각이 몸 안에 꽉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이 오면, 김을 먹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면 찝찔한 맛이 혀에 감기면서 사정없이 나부끼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한번 먹기 시작하면, 바닥이 날 때까지 자꾸만 집어먹게 된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집이 없다. 이 공간은 집이 아니다. 집이란, 지켜야 할 어떤 것들이 모여 있는 곳. 여긴 지켜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그저 김 하나, 나 하나. 김 둘, 나 둘. (아프리카의 별, p.50-51) 



"그럼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어?"
"보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알 수 있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막 뜨기 전, 맨 처음 떠오르는 얼굴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거란다. 사랑이 내 전부를 가득 채워버린 거지." 
(아프리카의 별, p.201) 





"밤에 텐트 바깥으로 나가실 땐, 한 가지만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꼭 광주리를 들고 나가세요. 크고 작은, 푸르고 흰 별들이 밤새 무더기무더기 쏟아져내릴 겁니다. 담고 싶은 만큼 마음껏 담아가세요. 많고도 아름다운 별을 오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메르주가의 밤은 소란스러워요. 이곳의 별은 어깨까지 내려와 떠들어댑니다." (아프리카의 별,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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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01-1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미경 작가가 돌아가셨군요... 안 그래도 우울한 심경에 스산함까지 더해지는 아침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아무 2017-01-1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배수아 작가가 페북에 한 작가의 부고에 대한 글을 올려서 누구일까 생각했는데 그게 정미경 작가였군요.. 전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만 읽었었는데, 이번 달에 유독 부고 소식을 많이 접하네요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장소] 2017-01-1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작품으로 그녀를 기억하겠네요 . 이번 스파링 책 뒤에 심사위원 심사평을 한참 들여다 봤어요 . 어쩌면 공식적인 마지막 말이었을 ...그 말들 ..

푸른희망 2017-01-1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멍복을 빕니다.
나의 프랑스식 세탁소를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