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
정혜신.진은영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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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행드폰 충전 안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다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를 계속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포근한 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또 한숨을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아이

제일 큰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아빠, 여기에는 친구들도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어

"쌍커풀 없이 고요하게 둥그레지는 눈매가 넌 참 예뻐"

"너는 어쩌면 그리 목소리가 곱니,

어쩌면 생머리가 물 위의 별빛처럼 그리 빛나니"



아빠! 엄마! 벚꽃 지는 벤치에 앉아 내가 친구들과 부르던 노래 기억나?

나는 기타를 잘 치는 소년과 노래를 잘 부르는 소녀들과 있어

음악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가진 고양이들과 있어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밤길 마중과 내 분홍색 손거울과 함께 있어

거울에 담긴 열일곱살, 맑은 내 얼굴과 함께, 여기 사이좋게 있어



아빠, 내가 애들과 노느라 꿈속에 자주 못 가도 슬퍼하지 마

아빠, 새벽 세시에 안 자고 일어나 내 사진 자꾸 보지 마

아빠, 내가 여기 친구들이 더 좋아져도 삐치지 마

엄마, 아빠 삐치면 나 대신 꼭 안아 줘

하은언니, 엄마 슬퍼하면 나 대신 꼭 안아 줘

성은아, 언니 슬퍼하면 네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를 타 줘

지은아, 성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노래 불러 줘

아빠, 지은이가 슬퍼하면 나 대신 두둥실 업어 줘

이모, 엄마 아빠의 지친 어깨를 꼭 감싸주

친구들아, 우리 가족의 눈물을 닦아줘



나의 쌍둥이 하은언니 고마워

나와 함께 손잡고 세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여기서, 언니는 거기서 엄마 아빠 동생들을 지키자

나는 언니가 행복한 시간만큼 똑같이 행복하고

나는 언니가 사랑받는 시간만큼 똑같이 사랑받게 될 거야,

그니까 언니 알지?



아빠아빠

나는 슬픔의 큰 홍수 뒤에 뜨는 무지개 같은 아이

하늘에서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진 아이로 만들어줘 고마워

엄아 엄마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가장 맑은 노래

진실을 밝히는 노래를 함께 불러줘 고마워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설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예은이가 불러주고 진은영 시인이 받아적다)





애초에 출퇴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읽어야 할 책이 아닌데, 처음부터 잘못 선택했다 싶었다. 자꾸 눈물이 핑- 거려서. 그런데 이 시를 읽을 때는 참을 수가 없더라. 결국 지하철 안에서 콧물까지 흘렸다. 상실로 인한 고통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곁으로 달려가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사람과 함께 얘기하고자 하는 시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다가, 숱하게 생겨나는 그 많은 감정들을 눌러 버리고, 결국 눈물이 흘렀다.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정말 그랬다. 읽을 때도 눈물이 나더니, 결국 여기 옮겨 적으면서도 코를 훌쩍였다.


이 시의 주인공 유예은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2학년 3반 학생이란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목소리가 생생한 시가, 여기 이렇게 있을까. 예은이의 목소리를 진은영 시인은 어떻게 들었다는 걸까, 했더니 이런 설명이 나온다.




단원고 희생자 유예은 학생의 열일곱살 생일이 지난 10월 15일이었죠. 선생님께서 제게 '이웃'에서 열리는 예은이 생일 치유모임에서 예은이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하는 말을 시로 써달라고 요청하셨어요. 세상 떠난 아이의 마음에 내가 과연 다가갈 수 있을까, 자신의 삶보다 더 소중했던 아이를 잃은 부모 마음을 어떤 언어의 결로 어루만질 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어 몇시간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예은이의 마음과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의 페이스북도 열심히 기웃거리고 예은인가 친구들과 봄날 벚꽃 아래서 노래 부르던 동영상이나 해질녘 해먹에 누워 있는 사진을 오랜 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낸 일주일이 저에게는 참 특별하고 치유적이었어요. 그렇게 시를 쓰고 난 뒤에는 그 아이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세상을 조금씩 매만지고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어요. (p.210, 진은영)




진은영 시인은 정헤신 박사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고, 적절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들의 문장이 시적인 것 같아 내게는  한 번에 쉬이 명료하게 읽히지 않았다. 정혜신 박사의 말이 오히려 명징하게 와서 닿았다. 질문의 문장들이 좀 시적이지 않나, 우리 엄마가 읽을 수 있을까, 하고 갸웃 하다가 진은영이 썼다는 저 시를 만나자 그냥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고 또 무슨 말을 더 할수 있을까. 



인용문만 옮겨적겠다. 






모든 고통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내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과 옆 사람 살이 타들어가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게 사람이에요. 각자가 자신에게 너무나 무거운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지 않지만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해요. (p.54, 정혜신)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시간이 멈춥니다.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삶의 진도를 나갈 수 없고 다음 과업으로 넘어갈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어떤 것이 트라우마의 치유이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삶이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요? 가장 핵심적인 것이 진상규명입니다. 이건 저의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정신과의사로서, 트라우마 치유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 위해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p.95, 정혜신)

심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요소가 바로 일상이죠. 다른 것이 아무리 많아도 이것이 결여되면 망가지고 비뚤어지는 거예요. 반대로 다른 것이 없어도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안정적이고 빛날 수 있고요. (p.180, 정혜신)

저는 모든 인간은 치유적 존재이고, 그것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치유작업을 하는 동안 제가 하는 일이란 건 결국 그 사람 안에 있는 치유적 요소들, 그 사람이 지닌 온전성, 건강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것일뿐이에요. 그래서 그 과정이 끝나면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가 아니라 `내가 참 괜찮은 데가 있나봐`라고 할 수 있어야 온전한 치유인 거예요. 거기까지 나아가면 그 사람은 제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확인하고 그 힘으로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죠. 그러지 못하면 의존적인 관계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동쪽으로 가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일이 너무 잘 풀렸어요. 그러다 살다보면 또 안 좋은 일이 생기니까, 그럴 때 마다 또 점집에 가서 이번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물어봐야 하는 거예요. 그건 아주 병리적인 의존관계입니다. 치유에서도 조언을 하거나 훈계를 하거나 해석을 하는 기능적인 수준에 머무르면 반드시 그런 관계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p.184, 정혜신)

유가족들은 지금 자기가 살던 세상이 모두 깨어진 거잖아요. 자식들 기르면서 가족끼리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었는데, 이게 모조리 무너졌어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이제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웃치유자들을 접하고 그들의 마음을 느끼면서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거예요. 다른 가치와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그건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지만,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또다른 세계가 생기기 때문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게 치유입니다. 그러려면 이런 재난을, 트라우마를 입었을 때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무척 중요해요. 건강한 이웃 치유자들이 많이 있을수록 다른 세계로 더 수월하게 진입할 수가 있어요. (p.191-192, 정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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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5-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읽겠어요 못읽겠어
세월호 관련 서적은.... ㅠㅠ

다락방 2015-05-21 21:33   좋아요 0 | URL
이건 그나마 가장 약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ㅜㅜ 세월호 관련책 저 더 있는데 어쩌죠 ㅜㅜ

레와 2015-05-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지 않아야지.. 꼭.

다락방 2015-05-28 08:38   좋아요 0 | URL
응 잊지말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