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예약주문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는 ㅈ 와 나는 어제, 실컷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ㅈ 는 내게 몇 개의 시를 알려주고, 나는 줄리언 반스의 문장을 다시 한번 인용했다.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다, 하는 것을.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누군가는 예외였다해도, 다른 사람에겐 어김없다. 때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中에서


결국 나는 ㅈ 의 추천을 받아 시집 한 권을 사기로 했고,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기 직전, 아니다, 지금 당장 읽자, 싶어 퇴근길에 서점엘 들렀다. 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서는 한 여자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시집에 그곳에 있으니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 말했다. 보라색 책등을 찾으니 딱 한 권, 나는 꺼내들고 계산대 앞으로 간다. 아, 그러나 이것은 누가 읽은 흔적이 있다. 조금 낡았어...나는 얼른 책 검색하는 컴퓨터 앞으로 가 재고를 확인한다. 만약 두 권이라면 다른 한 권으로 가져오고 싶어져서. 그러나 이거 한 권 뿐. 히잉. 어쩔 수 없지. 책 표지가 조금 낡았어도 안의 내용은 변함없을테니. 그렇게 계산을 마친다.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내년도 다이어리를 사고 싶은 마음에 다이어리 코너로 가며 읽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 한다는 것이, 휭-하니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많이 때렸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때린 적이 없잖아, 수없이 항변해본들, 그가 맞았다는 데야 별 수있나.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어디에서든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때린 적이 있는 것도 당신이 모를거라는 생각도 그제야 들었다. 당신은 나를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냥 그 자리에서 그렇게 웃으면서 모르는 채, 나를 때리고 있었던 것을.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 당신의 존재는 아픔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존재는 다행이었다. 다음 생에서 만나면, 아니 나중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모르는 채라도 서로를 때리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면 해.


그런데 혹여, 나한테 두들겨맞은 사람이 있나요? 으슥한 밤, 내가 당신을 매실나무인 줄 알고 발로 차진 않았나요?

미안합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매실나무이든 은행나무이든 발로 차지 않는 사람이 될거에요.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빛이 있는 곳에 그늘도 있으니, 그의 화사함이 내게 전해질 때 그 화사함은 내게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왜 그늘은 빛을 보고 빛은 그늘을 눈치채지 못할까. 빛은 제 빛에 빠져 화려하게 피어난 꽃을 보고 바싹 마른 빨래를 본다. 그러나 너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당신은 화사함으로 존재하고, 그 화사함에 그늘을 드리운 나는 두들겨맞고.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마냥 나를 아프게 할 때가 있었지. 나는 당신의 화사함이 아팠어. 이 편까지 건너온 당신의 화사함이. 왜 그 화사함은 이편까지 건너온걸까.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나 넓게 퍼졌던걸까. 아프게. 


화사함이 아플 수 있다니!




웃지 마세요 당신,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자고 어머니를 이끌었어요

언젠가 써야 할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서였죠

팔짱을 끼며 과장되게 떠들기도 했지만

이 길을 또 얼마나 걷게 될지



사진관에 들어섰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사진을 찍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급격히 어두워졌어요



나도 저렇게 하는 거냐



이게 요즘 유행이라며

평소에 미리 찍어두는 게 좋다며

나도 젊을 때 찍워둬야겠다며

쫑알대는 내 소리에는 눈도 맞추지 않으시더니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자

우물우물 급히 말씀하셨어요



나 웃으까?



그 표정 쓸쓸하고 복잡해서 아무 말 못했어요



돌아오는 길은 멀고 울퉁불퉁했고



웃지 마세요

그래요 웃지 마세요 당신,



나는 웃으라고 말해야 할까, 웃지 마세요, 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손을 잡고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할까, 찍으러 가지 말아야 할까.





들어내다



인테리어 기본 요건은

자리를 바꾸고 요소를 덧대는 게 아니라

들어내는 것이라고,

더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관계에서 나와야 할까

그렇다고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



분갈이 하는 아저씨는 흙을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숨쉬게 한다고 했다



언니가 없으면 독방을 차지할 거라 기대했지만

나 먼저 들어낼 줄은 나도 몰랐듯이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낸 길이었을까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들어내야 하는거라고, 그게 맞는거라고, 그게 숨쉬게 하는 거라고 그토록 생각하면서도 들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들어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들어내기 싫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이를 악물고 들어내려고 했더니 이토록이나 힘이 들어, 주저 앉아 울고 싶어지려는데 당신이 말했다. 들어내지 말라고. 내가 들어내야 당신이 더 편하지 않을까, 아니, 들어내지 말라고. 나에게 드리운 그늘이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의 화사함 속의 일부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화사함이 꽃을 피울 때, 빨래를 말릴 때, 반짝거릴 때, 흐느적거리는 먼지 조차 선명하게 비출 때, 내가 그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혹여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늘을 보는 사람이 될거야. 쪼그려 앉아 그늘을 볼거야. 우리는 그늘이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짙게 드리운 그늘이었을 테고, 어쩌면 앞으로도 화사함 대신 어둠이 채울런지도 모르니. 언젠가 당신에게서 나를 들어내고 나에게서 당신을 들어내야 할 때도 물론 오겠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 당신을 내게서 들어내는 일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인테리어를 예쁘게 할 수는 없는 사람일까? 나는 당신의 뿌리에 지나치게 들러붙은 흙이 되고 싶진 않아요.





현관문 나서다가



현관문을 나서다가 나는 다시 돌아오지요 돌아와선 왜 왔

는지 잊어버려 다시 나가요 나가다가 생각하니 그게 시계

였어요 시계를 찾기 위해 내가 뒤지는 곳은 시계가 없는 곳

이죠



당신과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처럼 시계를 찾다가 시간

을 잃어버리는 일, 시간을 찾다가 손목을 잃어버리는 일, 새

롭지도 않아요 오늘은 약국에 들어야 하는데 증세가 생각

나지 않아요



하얀 알약을 보면 왜 죽음이 떠오르는지요 편도염을 낫게

하는 알약을 한꺼번에 털어넣은 아랫방 언니가 있었거든요

그녀는 무얼 잊고 싶었던 걸까요



시계는 찾지 못하고 시간은 멎었어요 우린 평생 없는 걸

찾아다니겠지만, 찾아야 할 건 이미 옆에 있었다고 누군가

말하지만, 그런데도 그건 영원히 없는 것이죠



깜빡깜빡 잊으므로 여기 또 깜빡깜빡 살아요 현관을 나서

다 나를 잃어버리고 빨래통에 벗어놓은 나를 뒤집어쓰고 나

아닌 내가 다시 나가요 나가다 생각하니,





당신을 만나는 순간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순간보다 힘겨웠음은, 헤어짐에 있었다. 당신을 만나지 않은 순간에 내가 기대하는 것은 만남일 수 있었는데, 만나고 있는 순간에 내게 남은건 헤어짐 뿐이었으니.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해도 지금 당장 닥친건 헤어짐이고, 나는 마치 이 잠깐의 헤어짐이 영원할 듯 불안하였다. 그랬던 때가

있. 었. 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옳다고 여겼기에 헤어지기 싫다고 발악하지 못했다. 터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손톱을 깨물고, 발끝으로 땅을 툭툭 헤치는 일들은, 모두 내 속에서만 일어났다. 나는 당신을 평생 찾아다녔지만, 당신은 나를 평생 찾아다니지 않았으므로, 당신이 이미 내 옆에 있었음에도 당신은 내게 없었다. 당신을 들어내고 돌아서는 것이 내 역할이었지만, 들어내도 들어내도 이내 쏟아지는 걸 내가 어찌해.





이규리는 아픈 사람을 본다. 이규리가 말하는 최선은, 들여다봐주는 데 있고 들어주는 데 있다. 아픈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혹여라도 내가 때렸으면 어쩌지, 하고 그늘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늘이 생겨있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최선은 그런 것일게다. 하지마, 라고 말하기에 앞서 어쩌면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되새겨 보는 일. 그렇게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간혹 우리가 때리고 있었음을, 그늘을 만들고 있었음을 눈치채게 될것이다. 꽃을 더 활짝, 오래 피우기 위해 락스를 넣는 일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한 일이었을까. 누군가 아프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즐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이규리의 시가 하는 일이다. 그 잔혹한 명제앞에 잔인한 진실 앞에, 숙연히 고개 떨구며 내 자신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 번번이 두들겨 맞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맞은 만큼 누군가를 두드려 패기도 했던 날들이, 있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조용히, 락스를 한 방울 떨어뜨리기보다는 열었던 락스통의 뚜껑을 닫을 수 있기를,

그런 날들에 차마 들어내지 못한 당신이 화사하게 비춰주기를.


이규리는 그늘의 친구다. 




락스 한 방울


꽃꽂이하는 사람이 말해주었다 꽃을 더 오래 보려면 꽃병
에 락스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고 ‥‥‥아무리 해도 그거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싶으면서 그 말 왜 솔깃해지는지 머
뭇거리다가 한 방울 꽃병에 떨어뜨렸다 거짓말처럼 뒷자리
가 말끔해졌다 저러자면 누군가는 또 얼마나 참아야 했을
까 너무 똑 떨어지는 이치에는 어딘지 사기치는 냄새가 난
다 후각을 마비시키며 이룬 거사들, 달콤하게 던져준 당근
들, 한 방울 떨어뜨려 애써 제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꽃병 속
꽃은 어땠을까 락스 한 방울‥‥‥이 세계에서는 나를 더 연
장하지 않기로 한다





덧. 아....알라딘에서 사면 알사탕 300개를 주네......하루만 참을걸 ...... 약올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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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10-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비가 내리고...
이곳에는 시가 있고.

다락방 님이 낭독해주면
더 좋을것 같은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다락방 2014-10-21 09:50   좋아요 0 | URL
크- 아무개님.
제가 기회가 되는대로 저 시를 낭독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불끈!!

heima 2014-10-2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읽으면서 여름동안 따뜻하고 찡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다시 한번 꺼내어 읽고 싶어지네요 ^^
날이 꽤 쌀쌀한데 따뜻한 커피 한잔 하시면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4-10-21 10:49   좋아요 0 | URL
시를 잘 모르는 제가 좋은 시집을 만난 건 무척 오랜만이라 좋습니다. 바느질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가만히 앉아 시를 읽는 일이면 충분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헤이마님. 잘 보내요! :)

blanca 2014-10-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네요....

다락방 2014-10-22 10:31   좋아요 0 | URL
좋지요, 블랑카님? :)

그렇게혜윰 2014-10-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좋죠? 옮겨적어야지 했다가 아직 이러네요....^^;;

다락방 2014-10-22 10:32   좋아요 0 | URL
네, 좋아요, 그렇게혜윰님. 좋으네요. 좋은 시집을 만나서 참 좋아요. 회사 동료에게 빌려줬어요. 시집 한번 읽어볼래, 하고. 흣

mira 2014-10-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는날 커피한잔 놓고 읽어내려가니 웬지 서러운데요 ㅜㅜ

다락방 2014-10-22 10:32   좋아요 0 | URL
비 안오는날 커피없이 읽어도 기쁜 시는 아니지요. ㅠㅠ

단발머리 2014-10-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추천해주셨던 김이듬의 시집에서 <겨울휴관> 때문에 그 시집을 꼭 갖고 싶었어요.
이규리의 시집은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 한 문장 때문에 너무 갖고 싶네요.
옆에 두고 여러번 읽고 싶어요. ^**^

다락방 2014-10-23 09:5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문장이 그렇게나 꽂히더라고요, 단발머리님.
게다가 심지어 `이편까지` 화사하다잖아요? 슬퍼..

오늘인 이 시집에서 이런 구절이 꽂혔습니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크- 취하는 아침입니다.

단발머리 2014-10-23 11:09   좋아요 0 | URL
정말, 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나도 한국어에는 정통한테...... T.T

어떻게 이런 표현들이...
키햐~~~~~~~~~~~~~~~~~~

다락방 2014-10-23 11:17   좋아요 0 | URL
저는 시를 잘 모르고 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시인이 존재하는 게 무척 감사해요. 시인과, 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슴 벅찰 정도로 좋습니다, 단발머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