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최근에 자꾸 여행을 가게 된다. 다가오는 연휴에는 김제에 가기로 되어있고, 지난주말에는 여동생,조카와 함께 셋이서 제주를 다녀왔다. 동생을 보고난 후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에게 제 엄마와의 시간을 오롯이 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고, 비행기를 태워주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아이가 얼마나 기뻐하고 흥분할까, 하며 내가 오히려 더 설레었더랬다. 그러나 아이는 비행기를 타기전에 얼른 타자 얼른 타자 졸라놓고는 막상 비행기를 타서는 심드렁했다. 창 밖의 구름이나 바다를 보라고 해도 심드렁한 채, 종이와 볼펜을 달라고 하고선 글자쓰기 놀이에 심취하더라. 아이가 비행기에서 좋아했던 건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 아니라, 다른 교통수단과는 달리 '책상'이 있다는 거였다. 돌아갈 때 비행기를 또 탄다고 했더니' 이모, 거기에도 책상 있어?'라는 게 아이의 첫물음이었다. 비행기 좋아, 책상 있어서...라니. 아, 나는 아이의 동심을 내 멋대로 또 생각하고 판단한건가. 하늘을 날아서 좋아하겠지, 라는 건 내 멋대로의 추측이었을 뿐, 사실 아이는 관심도 없었던 건가. 나는 으레 아이니까 이런거 신기하겠지,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건가. 게다가 아이는 승무원이 어떤 음료를 드릴까요 묻고 거기에 음료를 달라 답하는 걸 좋아했다. 그 음료가 맛있어서라기 보다는 음료를 달라고 하면 준다는 사실에 크게 흥분한 것.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는 이미 한 번 해본터라 신나서는 아직 승무원이 우리 자리에 오지도 않았는데 크게 '보리차 주세요' 라고 몇 번이고 외쳐 승무원과 승객들을 웃게 만들었다. 아이야, 우리 지금 구름 사이를 날고 있단 말이다!! Orz
더 많은 걸 경험하게 해주려던 나의 의욕은 너무 지나쳤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경험은 자신이 원할 때 해내는 것이 가장 좋은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가 호텔에서 극도로 흥분한 것에 또 멘붕이 왔다. 좋은 호텔에 흥분하고 그걸 즐기고 싶어하는 건, 세속에 찌든 나같은 어른이어야 하는 거지 너처럼 순수한 아이여서는 안되는 거잖아????? 그러나 아이는 패밀리스위트룸에서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고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밤 열 시까지 흥분한 채로 왔다갔다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춤까지 추더라. 여기로 이사오고 싶다고. 넌...내 생각처럼 순진하지 않은거니? 나는 또 고정관념에 휩싸인 거니? 난 아이에게 말을 타게 해줬는데, 말 얘기는 안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할머니와 제 아버지가 말탔어? 어땠어? 물어보는데 거기엔 큰 관심이 없고 집(호텔)이 좋다, 고만 얘기한다....내가 너의 동심을 내 멋대로 짐작한거니? 내가 너에게 순수를 '기대'한거니??
민속촌에서도 옛 집들이나 (작은)폭포, 꽃들을 보며 흥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얼른 나가서 볼펜으로 꾹꾹 누르는 거 다시 하자고 한다. 민속촌 입구에 안내가 있었는데 장착된 볼펜을 가지고 태극기를 누르면 한국어 서비스가 일본 국기를 누르면 일본어 서비스가 나오는 그걸 다시 하자는 거다. 들어가기에 앞서 그걸 가지고 놀았었는데, 아이에게는 민속촌 내부보다는 볼펜으로 무언가를 누르고 다른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더 좋았던 모양. 내가 감탄했던 것들 혹은 내가 좋았던 것들, 내가 일찍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나는 나도모르는 사이 이 아이에게 해주자, 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늦게까지 흥분한 아이을 재우고 여동생과 나는 내가 가져온 와인을 마셨다. 호텔에 들어오던 길에 사두었던 와인 안주 치즈가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있는 걸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거 누가 그랬어? 라니 아까 아이가 하나 꺼내먹고 냉장고에 다시 넣어둔거라는데, 그때 냉동실에 넣어둔거다. 아, 귀여워 ㅎㅎㅎㅎㅎ 와인과 맥주를 마시면서 실컷 이야기를 나누는 틈틈이 여동생은 자꾸 아이가 자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수시로 자는 아이의 이마며 몸을 짚어보았다. 혹 땀나게 자지는 않는지, 괜찮은건지.
텔레비젼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테마기행인가 뭔가 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됐다. 나름 와인 마니아라고 소문난 소유진-나는 몰랐는데 자기가 그러더라, 자기 와인 너무 좋아해서 공부도 했고 자기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다 안다고 -이 와인의 지역인 프랑스와 프로방스를 돌아다니며 와인을 시음하는 방송이었다. 저런 프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어쨌든 소유진이 돌아다니며 와인의 장인들을 만나 와인을 맛보고 와인 농장을 방문하고 심지어 그 집에 초대받아 식사까지 하는 걸 보노라니 뭐랄까...음......저 여자는 되게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프로방스까지 날아가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장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와인을 맛보고 식사에 초대된다니, 그건 그녀가 '소유진' 이기에, 프로그램에서 불러냈기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는 일 년중 어느 며칠을 뚝 떼어내 이국으로 날아가는 일이 가능한 직종이다. 심지어 경제적 여유까지 있다. 또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기에 '와인을 좋아하며 와인을 공부한' 다른 사람들보다 그 프로에 채택될 확률이 높았다. 일전에 누구더라..한...한...어느 연예인이 구두 디자인 한다며 이탈리아에 간 프로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구두를 너무 좋아해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브랜드 론칭하기에 더 유리한 위치를 그녀는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이름이 알려졌고,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시작했으니까. 그걸 딱히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나였어도, 내가 가진 유리한 점을 어떻게든 발휘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어쩐지 부조리하다는 느낌이다. 뭣 때문인지 정확히 콕- 짚어낼 순 없어도. 이건 어쩌면 어떤 식으로든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은 '여기의 내'가 느낀 단순한 시기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소유진, 별로 전문가 같지 않던데;;)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맛폰을 꺼내 트윗을 확인했다. 지금 이순간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장면이 트윗의 타임라인엔 떠있었다. 미디어몽구의 서북청년단 세월호 리본떼기-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영상도 올라와 있었다. 그것들을 리트윗하면서, 이제는 예전처럼 역사의 순간이나 장면을 왜곡하긴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 조차도 세상의 어딘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실시간 확인하며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니까. 내가 리트윗을 하고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 들여다보았을 때, 아 2014년의 9월의 세상엔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증거가 될테니까. 출근이라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상 나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 놓여 있는거다. 트위터를 하고나서부터 트위터가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니지만, 의미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SNS를 통해 이 세상 곳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부터 내 주변의 누군가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이건, 이것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겠구나. 어떤 일들은 특히나, 이런 식으로 전파되어 지는 것-퍼지고 혹은 틀리고 혹은 바로잡혀지는 모든 것들-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의미는 있겠어.
마지막으로, 제주도 호텔의 조식에서 만난 오믈렛. 아웅...조카와 여동생과 함께 먹기 위해 두 개를 해달라고 했는데, 역시 내가 만드는 오믈렛과는 비쥬얼이 확연히 다른, 아름다운 오믈렛이다. 히잉 ㅠㅠ 나도 이렇게 만들어보고 싶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