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질 때마다 <운명> 이 들어있는 '여행스케치'의 앨범을 카세트 테이프로 상대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한 번은 네가 운명을 준 남자가 몇이냐, 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때 나는 베시시 웃었고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몇인지 세어본 적 없어서. 그러나 어쩌면 단 두 명 뿐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기억나는 사람은 단 두 명 뿐이니까. 그 둘 다, 내가 그의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 노래 듣고 가, 라고 말했었지. 나는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오롯이 둘이 앉아 조용히 그 음악을 감상하던 일. 더이상 운명을 선물하지 않은 것은 내가 더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앨범을 구할 수 없어서였고 그 후에 만난 사람들은 테이프 대신 시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윤선의 <천사>가 들어있는 앨범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그건 시디 였는데, 그와 사랑에 빠져서 그 앨범을 선물한 게 아니라 그 앨범을 선물했는데 그와 사랑에 빠졌더랬다. 그에게 그 시디를 선물하고 난 다음날, 그를 만난 기억으로 하루를 온통 소비하고 있었을 때, 나윤선을 듣는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때 나는 아, 좋았던가. 



다,


지나간 일이다.




장갑의 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장갑을 선물하는 경향이 있

어 그건 잃어버리기 쉬우니까 지금 난 장갑 한 짝을

찾으러 가는 길이야 검정색 모직 장갑 장식이 없는

낡은 그 장갑을 어디 떨어뜨렸는지 알아 오늘 난 아

주 잠시 외출했거든 부드러운 눈길을 걸어 저녁 모

서리 골목 끝 국숫집에 갔거든 바지락조개가 든 그

릇 바닥에는 모래가 있었어 반짝이는 보석도 있었지

 가는 길은 얼었고 없던 비탈이 생겼네 바람은 전

혀 불지 않아 국숫집 바닥에서 내 검은 장갑 한 짝

이 조금 젖어가겠지 하지만 어제가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저녁을 거른 채 오래된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

던가 골목 끝 국숫집은 사라졌네 이전했다는 안내

문조차 없어

 사랑에 빠질 때마다 나의 기억은 바뀌고 부드러웠

던 길은 파여가네 곁에 그가 걷네 보이지 않게 엉덩

이는 자꾸 신성해지려 하고 누가 만져도 흔들고 싶

지 않아 내 몸에 그을린 그가 내 손목을 흔들며 사

라지면 밤은 언 손처럼 나를 끼네




<겨울 휴관>같은 시가 한 편쯤 떠억- 하니 나타나주리라 기대하고 천천히(어쩌면 빨리) 시집을 넘겼지만 그런 시는 한 편도 만나볼 수 없었다. 웬걸, 어려워서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더라. 무엇을 말하고 싶은건지, 어떤 상황에서 쓴건지를 모르겠고, 내가 이 시를 읽으면서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는거다. 무언가 장면이 펼쳐지다가도, 입에서 나온 한 줄기 담배 연기가 이내 공중에서 흩어지듯, 눈 앞에 내가 그린 풍경도 퍼지고 흩어지고 말아, 아, 시란 어떻게 읽어야 한단 말이냐, 자꾸만 답답해지는 거다. 내가 시인이 되어 읽어야 하는거냐, 시인이 말하는 걸 눈 앞에 그려가며 읽어야 하는 거냐,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거냐, 가만가만 조용히 읽어야 하는 거냐. 나는 그걸 알 수가 없어 이 시들을 모조리 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럴수록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든다. 시를 읽으면서 감탄하고, 이해하고, 외우고 싶다. 이해하지 못하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치게 당연할 터. 하나의 시를 읽고, 다음장에 있는 또 하나의 시를 읽고, 나는 자꾸만 아 뭔말이야 뭔말이냐, 한다. 그나마 기억속의 나를 끄집어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애쓰지 않고도 되는 일.


애쓰는 일은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 나는 무엇에도 애쓰고 싶지 않아. 며칠전 만난 친구가 '너는 연애할 때 애쓰지 않지' 라고 묻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황했다. 애..써야 해?, 연애에? 연애에도 애를 쓰지 않는 내가 시를 읽는데는 애를 쓰고 있다. 이 피곤한 일을 그렇다면 그만두어야 할까, 아니, 계속 애써보아야 할까, 아니, 애쓰는 건 싫단 말이야. 나를 애쓰게 하지 마. 그저 적당한 온도의 물을 편안하게 삼키듯, 그렇게 이해되면 안되는 거야, 시는? 어쩐지 분해서 울고 싶기까지 하다. 알고 싶다고! 나도 시를 느끼고 싶다고! 왜 쓴 건지 이해하고 싶다고!





밤의 여행자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력으로



 밤의 노래가 나를 데리고 가리 내 귀고리가 숨어

우는 자리로


 마트 지하 피팅룸에도 없다 나무 깔개를 들춰봐도

없다 원양어선 밑바닥 궤짝 아래 같이 눈앞이 캄캄

하다 스포츠브라 사느라 벗고 입고 하느라 정작 스

포츠가 뭔지도 모르면서 난 분실물보관소 카운터 직

원에게 말했다 혹시 맡아둔 귀고리라도 ‥‥‥

 그거 비싼 거예요?



 대형마트 맨 위층 목욕탕에 갔다 하수구 뚜껑을

손으로 훑었다 네 잘못은 아니지 바닥과 타일이 다

독인다 침착 침착해 이미 난 아스파라거스가 닭고기

에 집착하듯 귀고리에 매달렸다 탈의실 바닥을 샅

샅이 살펴보았다 체중계와 거울 위를 손바닥으로 쓸

며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말했다 여기서 혹시 귀고리

하나 못 보셨어요? 물에 떠내려갔겠지 그거 눈에 띌

만큼 커요? 값비싼 거냐고요?



 나는 7층부터 지하까지 뛰어다녔다 왜 엘리베이터

는 타려 하면 올라가나 나오지 않는 잔뇨로 전율하

며 다시 내 방까지 뛰어가보고 뛰다가 거북이 알을

품듯 큰 돌덩이를 붙잡고 쉬는데 돌 안에서 돌이 나

왔다 상추에 달팽이가 죽어 있는 야채 코너 트렁크

사이 머리를 넣어보았다 가지 않았던 곳도 가보았다

약속도 깨고 나는 잃어버린 한쪽 귀고리를 찾아 너

무 빠지지 마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래봤자 심금을

안 울리잖아 인생을 즐겨봐 섹스테크닉이나 배워



 이 아무것도 아닌 저질의 빛이 곱지도 않은 삐뚤

어진 속악한 누군가 보다가 구역질이나 할 나는 가

짜라고 분류될 그 아무 가치도 없는 누군가 주워 갔

다가 던져버릴걸 그 전에 내가 찾아서 없애버려야 해



 목탄으로 그린 그림 같아 나는 내가 지워지기 전

에 스프레이를 뿌려주세요 안개와 해초가 일렁인다

마트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래가 등장하는 재

미없는 아이스쇼 같아 헤이 헤엄치며 놀자 신경 끊

어누가 수상쇼 하든 트로피를 받든 감격은 없어 소

통이라니 깊이 들어가봤자 그거 고작 몇 센티잖아





비가 내리고 귀고리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또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귀고리를 잃어버렸는지도 알지 못했는데 그는 내게 뭐 잃어버린 거 없냐고 물었고, 나는 그가 무얼 말하는 지 몰라 모른다고 했다. 내가 무얼 잃어버렸다는 거지? 그러자 그는 주먹 쥔 손을 펴 내 은색 링 귀고리를 보여주었다. 차 안에 떨어진 걸 주워왔다고 했다. 아 그랬나 나는 잃어버린 줄도 몰랐네, 하고 그의 손바닥에서 귀고리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는데, 그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내가 며칠 가지고 있을게. 왜? 그러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해. 다음날과 다다음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내 귀고리 어쨌냐고. 그는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했다. 이 바지를 입을 땐 이 바지 주머니에, 저 바지를 입을 땐 저 바지 주머니에. 내 물건을 지니고 있으려는 게 애틋해 나는 살짝 웃었지만 사실 그 귀고리는 내가 당시에 가장 좋아하던 귀고리라 빨리 찾아와 귀에 걸고 싶었다. 잃어버린 것도 몰랐으면서. 나는 그에게 이제 그만 돌려달라 말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내가 그의 차 안에 두고 내리고, 두고 내렸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건 귀고리 뿐만은 아니었다. 스카프도 있었다. 그는 다음에 만날 때 곱게 접은 스카프를 내게 내밀었다. 너 이거 두고 갔다고. 




이런 기억들 틈틈이, 이것이 내가 시를 감상하는 방법인가 싶어 스스로 폭발해버리고 싶어진다. 이렇게 감상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옳은 감상 방법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러다가 내가 중국집에 가 짜장면을 주문했는데 내 앞에 놓인 게 삼선짜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저는 그냥 짜장면을 주문했는데 왜 삼선짜장이 나온거죠? 라고 일단 물을 것이고 만약 주인이 삼선짜장 주문하셨습니다 라며 거칠게 나온다면, 나는 잔인해 지리라. 거침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카운터로 가 계산해달라고 할 것이다. 내가 시켰다니 계산해주세요. 그러나 먹지는 않겠어요. 저는 해물을 일절 먹지 못하니까요, 라고 말하고 나와야지. 그러면 내가 삼선짜장을 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씨양, 시를 이렇게 읽으면 안되는 거잖아, 했다. 혼자서. 




사과 없어요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

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

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

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다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

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

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

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

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

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

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이해할 수도 없는 시들로 가득찬 시집을, 제대로 감상할 줄도 모르니, 나는 기꺼이 내 소유로 하지 않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까지 읽으며 생각하고 책장을 덮다가, 그런데도 무언가가 자꾸만 꿈틀꿈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아아, 내치지 못하겠어, 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다른 시집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던 현상인데, 그러니까, 어쩌면 시인의 말투 랄까 문체 랄까 마음가짐 이랄까 하는 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지렁이 기어가듯 미미한 움직임을 갖는 것이다. 부드러운 눈길을 걸어, 라고 말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내가 찾아서 없애버려야 해, 라고 말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종업원의 급료가 깎일까봐 염려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눈이 내리는 날 다시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나는 시집을 책장에 꽂아 두는 것으로 결정한다. 지렁이는 징그럽고 손에 잡을 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지렁이가 조금씩 꿈틀대는 미끄덩한 움직임이 어쩐지 싫지 않아. 이걸 어떻게 살릴까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비오는 날에는 지렁이가 땅 속에서 나온다. 비를 맞으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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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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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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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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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0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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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1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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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08: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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