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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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이 등장하고 비극적인 사건이 등장해도 결국은 인간애에 대해 말하는 소설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읽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존재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회복하고 극복하게 도와주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종류의 것이다. 작가가 그런 사람이라면 등장인물도 그러할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섬세하고 따뜻한 작가의 시선이 보여서 내내 기쁜 마음으로, 물론 초조해하기도 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라고 생각했다. 


'로스토프' 백작은 정부에 반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되는 벌을 받는다. 호텔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총살될 거라는 협박과 함께. 그렇게 호텔 안에서의 생활만 해야 하는 그의 나이는 서른셋. 


다행히도 그가 연금된 호텔은 매우 큰 호텔이었다. 세탁실과 재봉실이 따로 있고 레스토랑과 바도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숨겨둔 돈도 있었고 책도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만 살아야 하다니, 하는 절망 대신 그는 호텔에서의 삶을 잘 살아낸다. 물론 어느순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호텔의 옥상에 올라가 떨어지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때 호텔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는 불러내어 따뜻한 시간을 갖는다. 그는 자신의 자살을 조금 뒤로 미루게 된다.


그는 자신이 처한 한정적 상황내에서 그러나 긍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정함을 잃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나는 이 사람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결국은 잘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의 어린 딸 역시 그가 가진 장점-내가 알아챈 능력-을 알고 있었다.



"건배를 제안하고 싶어요. 제 수호천사이자, 아버지이자, 친구인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을 위해. 우리 모두에게서 장점만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p.578)



다른 사람에게서 장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의 그런 성향은 결국 그에게 좋은 직장과 직장동료(그렇다, 그는 호텔내의 웨이터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좋은 친구와 좋은 애인을 주었다. 물론 좋은 딸도! 그가 그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했기에, 그 역시 그런 사람들을 얻게 된다. 그는 호텔 안에서만 생활하고 호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그 누구보다 좋은 사람들을 사귀고 벗하게 된다. 그가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은 그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같이 나서서 도와준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위험한 결정에 있어서도, 저마다 기꺼이 돕기를 청한다. 


물론 그라고 실수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해서 지적을 받을 때면 기꺼이 인정하고 바로 사과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런 점이 그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는데 큰 영향을 줬을테다. 


"그 옛날 너에게 평생 메트로폴을 떠날 수 없다는 연금형이 선고 되었을 때, 네가 러시아 최고의 행운아가 되리라는 걸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p.460)

 

바깥 상황은 시끄러운데 그가 호텔 내에만 있기 때문에 행운아가 된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면, 어디에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그 상황을 행운으로 바꿔놓았을 것이다. 


로스토프 백작은 몽테뉴를 장농받이로 꽂아두었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딸은 몽테뉴를 읽으려고 안나 카레니나를 대신 장농받이로 꽂아둔다. 책을 살아하고 책 읽는 것을 사랑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것은 내게는 정말이지 짜릿한 기쁨인데, 로스토프 백작은 종종 문학과 작가에 대한 찬양을 하는 통에 아주 즐겁게 읽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두꺼운 책에 나오는 사소한 일화들과 긴 세월에 걸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작가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지, 이 책을 쓰는데 얼마나 오래 생각했을지를 짐작하게 한다. 나는 이 책의 아주 많은 대화들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마지막에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일렁일렁해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백작의 울음은 자신을 위한 울음이기도 했다. 마리나와 안드레이와 에밀과의 우정에도, 안나에 대한 사랑에도,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든 특별한 축복인 소피야에도, 미하일 표도로비치 민디흐가 죽음으로써 젊었던 시절의 백작을 알던 마지막 사람도 함께 사라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카테리나가 부탁한 대로, 적어도 그는 살아남아서 기억해주어야 했다. (p.589)




세상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다. 그중에는 내가 겪어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거다. 사람은 좀처럼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써준 작가라니, 작가라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로스토프 백작은 서른셋에 호텔에 갇혀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고맙게도 그 안에서 새로운 우정들을 만들고 사랑도 만들었지만, 그를 지탱하는 데에는 호텔이 아닌, 호텔 이전의 우정도 있었다. 호텔 이전의 학창생활에 자신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그가 백작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로스토프 백작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친구가 호텔로 백작을 방문해야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자신의 학창시절에 대해 아는 친구. 시간이 흐르고 여러가지 사건이 섞이면서 백작은 그 친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백작은 운다. 친구의 죽음이 슬퍼서도 울지만, 자신이 호텔 이후에 사귄 좋은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이전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자신을 위해 운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환경의 변화, 호텔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환경의 변화에 있어서, 그 전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 견고하게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큰 축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감정이 너무 손에 잡힐 듯해서 너무 안타까웠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로스토프 백작처럼, 자신이 사는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내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다. 그가 나를 만나서는, 환경의 바뀌기 전의 자신과 바뀌고난 후의 자신까지를 잘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자신을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라고, 이 만남이 그에게는 필요했다고 그는 내게 말했었다. 그가 그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 감정에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감정'이 있었던 거다. 나는 그런 감정을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 역시 일상적으로 겪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이모 토울스'가 바로 그 감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모 토울스가 그 감정을 백작의 입을 빌어 얘기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이 책을 사랑하기로 했다. 얄짤없다, 이 책은 사랑이다.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감정에 대해 얘기하다니, 이것만으로도 나는 작가에게 큰 감사를 보낸다.



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정말 좋았다고 쓰려고 햇는데, 쓰다보니 자꾸 개인적으로 흘러버리고 마네.



오늘 친구와 그런 얘기를 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아주 많은 것들이 아쉽고 슬프지만, 나는 자랑할 수 없는 게 너무 힘들다고. 나에게 일어난 좋은일, 자랑할만한 일을 얘기하고 싶다고.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나를 자랑스러워 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걸 할 수 없어서 너무 속상하다고. 몇 번 얘기한 적 있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고 싶다. 궁극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하는 내가 얼마나 뿌듯한 사람인지 느끼게 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에게 자랑스러움을 선사할 수 있는 좋은 사람. 그런 마음, 그런 바람이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고.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p.609)




아, 정말 너무 좋지 않은가!

나는 백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라서 눈물이 날만큼 좋다. 그 자부심이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해서이기 보다는, 그것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닌 걸 알아채서라는 게 자지러지게 좋다. 네가 우승해서가 아니야, 우승의 여부를 알지 못함에도 도전하는 거, 그 용기가 너무 자랑스러워. 나는 이 말이 진짜 너무 좋은 거다. 


인생에 있어서 나는 그다지 많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아주 많은 사람들과 크게 또 작게 연결되어 살 수 밖에 없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나 역시 그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 이것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큰 좌절과 절망쯤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자부심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특출나게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서 오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인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어디가서 어깨 힘 뽝 주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 진짜 너무 좋잖아. 그런데 그 어깨힘 뽝- 이 되는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가 '환호 여부의 불확실함에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지녔어'일 수 있다는 거, 진짜 짜릿하잖아. 


이런 식의 감정을 적어내다니, 에이모 토울스, 사랑합니다. 



이런 문장들이 고스란히 가슴에 와 살포시 쌓였다. 그럴 기회가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문장들을 나직하게 읽어주고 싶다. 밑줄을 그어놔야지. 언젠가 나의 조카가 내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을 때, 이 문장을 보고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또 접게 만들었다. 나는 아무리해도 이렇게 섬세한 작가가 될 순 없을 것 같아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교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지." 그가 말했다.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거나 아니면 활력이 주는 탓에 우리는 갑자기 몇몇 익숙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지금 단계에서 너처럼 멋진 새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 ( p.153)

"이 로비에 당신과 함께 있을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운명인 것 같네요." 그녀가 말했다.
백작은 놀란 표정이었다.
"수치심이라고요? 내가 아는 한 당신은 수치심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은 눈이 멀었나 보군요."
그녀는 젊은 감독이 밀고 나간 회전문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쪽을 바라보았다.
"난 그 사람에게 술 한잔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내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할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백작이 말했다.
그녀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진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계단을 가리켰다.
"그럼 나와 함께 위로 올라가는 게 좋겠네요."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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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8-09-16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신다기에 기다렸습니다. ㅎㅎㅎ 아아 그렇군요. 그런거에요. 역시 인간은 줄을 꼬기도 하지만 풀기도 하죠. 읽을게용~~

다락방 2018-09-17 08:13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이 책은 제가 참 좋아라 하는 종류의 책이었어요. 저는 따뜻하고 예의바르고 다정한 인간이 나오는 책을 정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지켜보는 것도 너무 좋고요. 긴 소설이지만, 소소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세요!

지나 2018-09-1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만의 백작이 너무 인기가 많네요

다락방 2018-09-18 01:56   좋아요 0 | URL
정말이지, 그는 신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