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에 (아마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한 방청객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다가와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 우리 언니랑 사귄다, 언니가 좋아서 나에게 접근한거더라, 라고. 마음이 좀 아팠었다는 얘길하는데, 이런 얘기는 사실 무수히 많다. 당장 나폴리 시리즈에만 해도 릴라랑 친해지고 싶어서 레누에게 접근했던 새끼가 있었지.. 쩝..




















물론 '펄'은 '트립'에게 접근하기 위해 '무디'와 친해진 건 아니었다. 무디와 펄이 친해진 건 우연이었고, 그리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둘이 친하게 지내는 동안 둘은 서로에게 충실했고 딱 붙어 다녔다. 매일같이 펄이 무디의 집에 놀러가서 그집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무디의 형인 '트립'에게 마음이 끌린 건, 처음부터 계획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 혹은 호기심 혹은 욕망..같은 것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수가 많다.


만약 무디가 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친구가 아닌 다른 감정, 이성으로서의 욕망 혹은 끌림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면 딱히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디는 펄을 좋아했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했다. 이렇게 늘상 붙어다니고 펄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고 펄이 여가시간에 뭘 하는지도 알고 그래서 펄에게 너가 쓰고 싶은 걸 쓰라면서 몰스킨 노트-펄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를 선물하기도 했으니까. 펄은 그런 무디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사실 펄에겐 무디에 대한 어떤 이성적인 호감 같은 것은 없었다. 친한 친구 단짝 친구 좋은 친구지만, 욕망을 느끼는 대상은 아니었다. 펄은 무디의 형인 트립을 좋아했다. 무디의 집에 놀러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슬쩍 트립의 옆에 앉곤 했다. 그런데! 트립이 움직였어..트립의 마음도 펄에게 움직였고,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가족들 몰래 따로 만나게 된다. 이 청소년들은 그러나 단둘이 있을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어, 트립의 친구네 집에 가기도 하는데, 어느 하루, 펄의 집 펄의 방에서 관계를 갖고 나오다가, 문 밖에서 '설마... '하고 의심하던 무디와 마주친다. 요즘 계속 집에도 같이 안가고 자기를 만나는 시간이 줄었던 펄이, 그 시간에 자신의 형을 만나고 있었다니. 게다가 서로에게 다정한 저 친근한 행위들-머리카락을 떼어준다든가 몸을 다정하게 붙인다든가-이, 그들이 이미 여러차례 섹스를 했음을 암시했다. 무디는 절망했다. 무디는 슬펐고 무디는 화가 났다. 그렇지만, 무디가 슬펐고 무디가 화가났고 무디가 절망했다고 해서, 펄이 트립대신 무디를 좋아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기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고 그 말은 진리이듯이, 세상엔 아주 많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딱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일이 발생한다. 언젠가는 저 사람도 나를 봐주겠지, 나를 사랑해주겠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나의 그런 기도에 신이 혹은 상대가 응답해주는 일도 딱히 많지 않다. 나의 짝사랑은 그저 나의 짝사랑으로 끝날 확률이 훨씬 높다. 또한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천번 넘게 말하고 아무리 선물 공세를 퍼붓는다 해도, 나의 마음이 그저 저절로 '네가 나를 좋아하니 나도 너를 좋아해줄게'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좋은 관계, 다정한 사이가 될 순 있게 도와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 욕망과 끌림으로까지 가게 되지는 않는 거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너무 고맙고, 나 역시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이어지는 건 다른 문제. 거기엔 무언가 다른 것이 끼어들어야 하는 것 같다.



무디는 펄에게 실망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했던 펄이, 다른 여자아이들과 똑같이 트립을 좋아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바람둥이 트립과 사귀다니, 너무 화가났다. 너무 화가나서 둘은 이제 말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무디는 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선물했던 몰스킨 노트를 몰래 다시 가져간다.




무디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펄에게 가장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펄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트립을 택할 정도로 경박했다. 물론 펄이 자기를 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여자아이들이 반할 유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립이라니, 그 점은 용서할 수 없었다. 깊고 맑은 호수로 알고 뛰어들었다가 그것이 무릎까지 차는 얕은 연못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했나? 그래, 일어섰다. 진흙이 묻은 무릎을 씻고 진창에서 발을 빼냈다. 그 뒤에는 더욱 조심했다. 그때부터 무디는 세상이 예상보다 작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수학 수업 중에 펄이 화장실에 가자 무디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펄의 책가방을 열고 몇 달 전에 자신이 펄에게 준 조그마한 검은색 몰스킨 수첩을 꺼냈다. 의심했던 대로 책등은 갈라진 자국 없이 말짱했다. 그날 저녁, 무디는 방에서 홀로 수첩을 한 움큼씩 찢어내 꼬깃꼬깃 구긴 다음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휴지통이 구겨진 종이로 수북해지자 무디는-옥수숫대에서 벗겨낸 겉껍질처럼 이제 속이 텅 비어 축 늘어진-수첩의 가죽 표지를 맨 위에 떨어뜨리고는 휴지통을 발로 차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펄은 수첩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왠지 그것이 무디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p.407)




하아-



무디의 마음이 가장 아픈 이유로 나도 가장 아팠다. 그러니까 너무 화가나고 실망해서 자신이 주었던 수첩을 다시 뺏어왔는데, 그런데 정작 펄은 자신의 수첩이 없어진 사실조차도 몰라..그러니까 애초에 몰스킨 수첩에 딱히 의미도 관심도 없는 거였어.. 나는 생각하고 고민해서 마음을 담아 선물했는데 상대에겐 받았는지도 모를 물건이여... ㅠㅠ


나도 이 점이 가장 가슴 아팠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고 그토록 소중했는데, 그리고 내가 그러듯이 상대 역시 나를 그렇게 여길거라 생각했는데, 만약 상대가 나에게 몰스킨을 줬다면 나는 거기에 소중한 글들을 쓰고 간직하고 내내 가지고 다녔을텐데, 그런데 자신이 받았다는 사실, 그래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다니... 이것은 정말이지 비극..슬픔의 새드니스 ㅠㅠ




무디가 펄에게 몰스킨 수첩을 선물했던 건, 그가 나에게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했던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펄은 그 몰스킨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었고, 나는 몽블랑을 매일 지니고 다니며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나는 몽블랑을 너무나 갖고 싶어했고 그런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계속 지니고 다닐 이유는 충분했다. 내가 이걸 가지고다니는 만큼 계속 이걸 준 상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건 잊을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내가 그에게 줬던 것들이 결국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최근에는 가슴 아팠다. 사라지지 못할 것, 팔아넘기지 못할 것, 그런 것을 줄걸..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걸 주었다면, 그랬다면 오래오래, 평생, 영원히 기억하고 살 수 있을텐데. 빌어먹을, 죄다 팔아치워버릴 수 있는 것들이어서 공중에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보면 라디오작가 '공진솔'이 자신은 글을 쓰고 싶은데 라디오 작가를 하고 있고, 그래서 방송되는 말들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내가 준 선물들은 그 사라진 말들 같은 거 아니었을까. 기록되지 못하고 남아나지 못하고 그저 사라지고 지워질 것들. 뭔가 하나라도 내내 지니고 다닐 것이 있어야 했어. 뭐가 좋을까......문신????.............. 내 얼굴, 그 넓은 어깨에 문신으로 박아넣게 할 걸.. 어깨는 자기는 못보겠구나..그러면 배는 어떨까. <피파 리의 마지막 로맨스>에서 키에누 리브스가 자신의 몸에 예수님 얼굴 문신 했던 것처럼, 나는 가슴에, 그러니까 그의 한 쪽 가슴에 혹은 왼쪽 젖꼭지와 오른쪽 젖꼭지 그 사이에 크게 내 얼굴을 문신해놓는 거지... 샤워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옷 벗고 잘 때마다 보게...음.... 그러면...... 음..... 다른 여자랑 잘 때 그 여자도 보겠구먼? 좋은데? 변태같다...... 킁킁. 어쨌든 그 때 '이 건' 피디는 공진솔에게, 말하여지고나면 그게 왜 의미가 없는 거냐고 오히려 되묻는데, 그냥...무디, 몰스킨, 펄, 몽블랑, 다락방, 공진솔, 이건, 생각나고,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이해경'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생각나고, 뭐 그렇다. 어젯밤, 나는 진하게 무디가 되었어...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의 주인공..........나는 언제나 그들의 편. 



(말없이 운다)





지난번에 조카와 홍콩 디즈니에 갔을 때 기념품 가게에 가서 나를 위해 작은 인형을 샀더랬다. 여기에 이름을 붙여주고 매일 가지고 다니려고 했는데, 매일 가지고 다니는 건 어쩐지 좀 부끄러워, 사무실 책상에 두고는 출근하고 퇴근할 때마다 인형의 코를 가볍게 건드리며 인사하고, 또 수시로 말을 건다. 음.............역시 변태같은가..........


그 때 조카랑 투닥대며 이름을 지었었는데, 내가 지은 이름을 조카가 반대했고(사람 이름 붙였다고.. 역시 나는... 변태 ㅠㅠ), 그래서 결국...뭐라고 지었더라? 김말이었나??????????? 왜 기억이 안나지?????????? 조카에게 물어봐야겠다. ㅠㅠ


조카야, 학교 끝나고 이모한테 전화좀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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