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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정순임 지음 / 파람북 / 2023년 4월
평점 :
우리는 가끔 들을 수 있다.
'내 힘든 걸 말하자고 하면 몇 날 며칠을 말해도 다 못할 것' 또는 '책으로 쓰면 몇 권'이라는 말을.
이 말은 곧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은 속엣말이 그만큼이나 많고, 절실하다는 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제목만 보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기계발서 정도로 추측했는데 내가 가진 편견이었다.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받은 차별과 사랑 그리고 책임의 삶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이자, 마음속으로 누르기만 했던 그 때 그 감정들을 글로 쏟아낸 한 사람의 삶이자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소박한 꿈을 싣고 있다.
아들과 딸의 차별, 이건 참 흔한 이야기지만 끝내 변하지 않을 부모 세대에 오래도록 지켜져 내려온 관행과도 같은, 그 속에서 힘들어야 하는 것도 그 차별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것 또한 딸의 몫이다. 15대에 걸쳐 400년을 한집에서 살아온 가문의 딸로 태어난 정순임 저자는, 어머니의 손에서 시작된 매질과 차별을 받아들여야 했고, 온전한 사랑을 받고자했지만 무책임한 남편과의 이혼으로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두 딸에게 가장으로 엄마로 책임을 다하고 사랑을 안기며 함께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간다.
지금 이 자책을 쓰는 것은 앞으로 똑바로 살겠다는 다짐이다. 심각한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곳에서 피해자가 선택한 침묵은 동조도 용서도 아니다. 심각한 차별이 종용한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79쪽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는, 저자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부터 학생운동을 했던 시절, 결혼이란 굴레에서 애쓰며 살았던 8년의 시간, 고향으로 내려가 성인 대 성인으로 엄마 앞에 선 모습까지 독자에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된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 한 켠에서 올라오는 안쓰러움과 순응하지 않고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애씀이 그대로 전해진다. 삶은 누구에게나 혹독하다. 잘사는 사람은 더 잘 사기 위한 고민을 가지고 있고, 못사는 사람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안고 있으며, 잘난 사람은 잘남을 내세우기 위해 애쓰고, 못난 사람은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아둥바둥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 하루, 다가올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저자가 살아낸,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통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난 매일 뾰족한 칼로 심장을 찔리는 기분이야. 나가 사는 동안 떠올리지 않았고 잊었다고 믿었는데, 우리 엄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하면 세 살쯤 어린아이가 되는 거 같아. 그 아이가 자꾸 떼를 쓰고 울어. 내 안에서.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133쪽
'가족'이라는 관계는 매우 가깝지만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을 받고, 똑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모든 것을 이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내가 받은 사랑과 차별을 누구와 나눌 수 없으며, 사람은 누구나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먼저이기에 나의 모든 감정을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 이해하고 알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집안의 셋째로 태어난 나에게 가족은 울타리가 아닌 울타리 밖으로 나를 밀어내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가족'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그 또한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서도 남이 되지 못하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슬픔도 아픔도 힘겨움도 다 겪어 내야만 하는 거라고 입술을 앙다물고 걸어왔는데, 울부짖지 않아도 슬펐고, 악쓰지 않아도 충분히 아팠으며, 주저앉지 안았어도 죽을 만큼 힘겨웠다. 그동안 그러려니 밀쳐두었던 슬픔, 괜찮으려니 외면했던 아픔, 다 이러고 살아 포기했었던 힘겨움이 해일처럼 밀려와 마지막 버팀목 하나 툭! 하고 부러뜨리고 나니, 거짓말처럼 잔잔하고 보드라운 바다가 얼굴을 보여준다.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156쪽
정순임 저자는 두 딸을 키우고 난 후, 엄마에게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된장, 고추장 만드는 비법을 배우기 위해 엄마 곁으로 내려간다. 딸의 결정은 자신이 이제껏 가꾸어온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내려가 엄마 곁을 지키지만 엄마에게 딸은 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자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였고, 그대로의 말로 상처주고, 상처딱지마저 떼어내려한다. 엄마와 딸은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작은 그슬름 하나가 평생 가슴에 담가 상처를 내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작가를 통해 나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딸이자 딸을 둔 엄마인 나, 딸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신중해야 하며, 더 깊이들여다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져야 함을 배운다.
혼자 걷고 있는 내가 참 좋다. 나만 나를 쓸 수 있는, 나만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는, 나만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나만 나를 웃게 할 수 있는 시간에 닿으니 마구 행복하다. 자책이나 원망 없이 무엇이든 볼 수 있을 거 같다. 자만이나 악다구니 없이도 자존할 수 있겠다. 오로지 혼자서 걷는 길, 비로소 나는 나다.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226쪽
외로웠을 정순임 저자 뿐만 아니라, 차별받은 상처로 괴로웠을 많은 딸들 그리고 아물지 않은 상처로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존재함을 귀하게 여기라 말하고 싶다. 나의 상황에서 나의 존재가 '을'일지라도 분명 나는 존재하고 있고, 난 언젠가 갑을병정으로 순서를 매기지 않는 "나"로 설 수 있는 날이 분명 올거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귀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주가 말해주고 싶다.
정순임 저자의 살아온 흔적은 자신의 푸념을 쏟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한 글이었겠지만, "나"로 서기까지의 시간을 찬찬히 담아내어, 같은 입장이 아닐지라도 읽는 동안 순간순간 숨이 막혔고, 순간순간 속이 시원했으며, 자신을 찾아가는 저자의 모습에 흐뭇했다. 『괜찮지 않다고 외치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는 제목 그대로 아픈 나를 아픈 눈으로 바라봐주고, 힘든 나를 쉬어갈 수 있도록 시간을 안겨주고, 슬픈 나를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안위를 걱정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라는 것을 되새기는 날이 되었음 참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인 견해를 담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