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백조가 된 무시당하던 새끼 오리. "나는 저 위대한 새들에게로 날아갈 거야!" 미운 오리 새끼는 말한다. "그가 백조알 속에 놓여 있기만 했다면, 마당에서 태어난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백조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리도 오직 백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리고 인어공주가 꼬리를 갈랐지만 그 역시 다시 바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면, 이 이야기들이 약속하는 변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확실히 크리놀린과 단단히 동여맨 허리끈 아래에는 더 복잡한 드라마가 있다. 그건 필요, 욕망, 열망, 그리고 두려움이 집합되어 있는 이야기였을 터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서술들로부터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언제나-여자였어요’라는 하나의 플롯은 인간 정신의 상반된 흐름들을 반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동기들, 젠더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른 동기들을 압도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을 해내는 회고록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남자로 살았던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면죄부를 찾기 위해서 나의 순수함을 갱생시켜 주는 여성성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든가, "나는 억압당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도덕적 위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든가, 혹은 "특별한 존재, 칭송받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여자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등 작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찾아 헛되이 헤맸다. 개인의 역사, 모든 개인이 저마다 경험하는 특별한 투쟁, 실망,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은 하나의 유리병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 프로이트 이후, 심리요법의 기술은 표면상으로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격의 다양한 면모를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에릭슨 시대 이후로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상당 부분이 정반대의 목적을 추구했다. 심리적인 복잡성을 줄이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광범위한 한 방을 찾는 데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 사람의 삶 전체라는 이야기를 하나의 정체성 유형으로 축소해 버린다. 하지만 ‘정체성’이 ‘심리학’과 의절하는 데 쓰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정체성을 에릭슨이 경고했던 ‘전체주의’가 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각각의 모험은 정확하게, 성적 경험의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이동한다." 샌디 스톤은 1991년에 쓴 진심 어린 호소, 「‘제국’의 역습: 포스트-트랜스섹슈얼 선언문」에 이렇게 썼다. "섹슈얼리티 연속체 사이에 놓인 어떤 공간이 있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의심할 것이다. 제기랄, 나도 의심스럽다." 미디어 이론가이자 MtF 트랜스섹슈얼인 스톤은 내가 읽었던 초창기 트랜스 자서전들을 읽었고 나처럼 실망했다. "모든 작가들은 무엇이 여성다움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남성들의 전형적인 설명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드레스, 화장, 그리고 피를 보자마자 연약한 것처럼 기절하는 것 등." 그녀는 모든 회고록이 "남성 페티시이자 사회적으로 강요된 역할에 대한 복제로서 ‘여성’을 비슷하게 묘사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개구리에서 공주가 된’ 동화 속 여주인공에 투사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도 썼다. 누구도 초-여성적인 여성과 초-남성적인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스톤의 연구는 문학의 한계에 도전하며 스스로를 ‘젠더 무법자’라고 주장한 일군의 새로운 트랜스젠더 작가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새천년에, 아마존의 히트작 <트랜스 페어런트>와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전 올림픽 선수 케이틀린 제너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성별 이분법에 대한 고수가 더 견고해지는 와중에도, 성 연속체에 대한 주장은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 PGPpreferred gender pronoun(선호하는 젠더 대명사라는 의미. 이 용어는 대학 캠퍼스에서 유행하고 있다)와 ‘젠더퀴어’나 ‘데미걸’, 혹은 ‘가이다이크’로 스스로를 지정함으로써 표현되는 유동성의 시대에도 종종 낡은 시대의 근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여성’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본질주의자의 환상으로 비판되는 시대에도,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성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탈근대적 트랜스젠더 이론가들은 자신의 저작에서 완전한 여성성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과 의사인 제우스 박사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아테네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자인한 잡종 같은 젠더의 ‘괴물적인’ 면모까지도 끌어안고자 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에릭 에릭슨처럼)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성姓도 바꾸면서 자전적인 기록에서 이전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씻어 냈다. 나는 의문스러웠다. 왜 "젠더에서 어떤 경계도 규칙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 법의 이탈자들이 과거 자신들 앞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성적인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수술에 굴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분법은 그저 중간 기착지인 것일까?

어느 겨울날, 지나치게 난방이 잘 되던 포틀랜드 공립도서관 한구석에서, 나는 공책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본스타인은 그녀가 느꼈던 ‘문화적 압박’을 한탄했다. 그녀는 결국 사회가 ‘진짜 여자’로 여기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남자 성기를 버려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수술을 했을 것이다. 이 질과 성기를 가지는 게 어떤 것인지 안 지금, 나는 수술을 한 것이 기쁘다." 그녀의 책은 수술 7주년 기념에 맞춰 쓴 긴 산문체 시로 끝났다. 마지막 시구에서 그녀는 거울에서 소년이 아닌 소녀를 만난 ‘흥분’에 대해 썼다.
그러고선 비밀을 누설한다.

소녀?
그것은 내가 벗어나려고 애써 온 정체성이다.

그리고 또 다른 7년이 왔다 가고 나면 "내 소녀 피부가 내 뒤의 사막에", 그녀가 던져 버린 온갖 낡은 젠더적 의무들 옆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스타인은 주장한다. 그녀는 정체성을 벗어 버리고 "나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라고.

반유대주의에는 화수분처럼 수많은 원천이 있었지만, 근대 파시스트 국가를 위협한 유대인다움이란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젠더로서의 유대인다움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출판업자인 테오도르 프리슈는 이 문제를 1893년 베스트셀러 『반유대주의 교리문답The Anti-semitic Catechism』에서 확고히 했다. "유대인의 섹슈얼리티는 그야말로 게르만 민족의 섹슈얼리티와 다르다. 유대인은 게르만인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유대인이 자신의 태도를 게르만인처럼 바꾸려 한다면, 이는 게르만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당시 빈 은어로 ‘유대인the Jew’은 말 그대로 클리토리스를 의미했고, 여성의 자위는 ‘유대인과 노는 것playing with the Jew’이라고 표현됐다.) 몇 십 년 후에 미래의 나치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는 1930년에 동성애자 남성을 거세하는 법안을 독일 의회에 발의하는데, 그는 동성애를 ‘유대인 역병’이라고 불렀다. 하인리히 힘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을 ‘남성적 국가’라고 천명하면서 그 연관성을 분명하게 했다. "동성애자들의 음모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하나씩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 그 둘 다 독일 국가와 독일 민족을 파괴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역사학자 샌더 길먼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즈음 유럽은 "근대 유대인의 출현뿐만 아니라 근대 동성애자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 쌍둥이의 탄생은 "역사적 우연,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길먼은 쓰고 있다. "근대 유대인다움은 인종화된 만큼이나 젠더화된 범주가 되었다." 이는 프로이트 역시 의심했던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런 경향이 등장하기 수년 전이었던 1909년 소년의 거세 공포에 대한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거세 콤플렉스는 반유대주의의 가장 깊은 무의식적 근원이다."
유대인 남성의 여성성에 대한 믿음은 근대의 선도적인 유대인 작가, 학자, 의사 그리고 정치인 들에 의해서 내면화되고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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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은 "애쓰지 마라(Don’t Try)."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신이 멍하게 벽만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벽은 이상한 회색에 두껍고 축축하고 그만의 사연을 가득 품은 데다 아주 낡고…… 오래되었다. 여자도 그렇다……. 그들이 나이 먹는 것을 보면 정말로 슬프다. 젊은 애들의 탱탱하게 올라붙은 몸을 봤을 텐데…… 그 애들의 자부심은 정말 싫다. 기계적이고 찰나에 불과한 몸뚱이에 자부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을 증오한다. 자부심이란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고 승리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다시 미소를 짓고 가만히 서서 벽을 쳐다보았다. 벽이 즐겁고 의미 있어 보이기에 한 손가락으로 축축하고 거친 회색 가장자리를 만졌다.

- 「카셀다운에서 온 스무 대의 탱크」

독수리도, 당신 엉덩이의 들썩거림도 어쩔 수 없고,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인간의 운명뿐이지……. 죽음. 세상에, 죽음이란 믿을 수 없어……. 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록색 벽과 묵주 그리고 죽음을 마주했어. 잠긴 문에서 몸을 돌려…… 물기를 머금은 잔디를 보았어. 잔디는 항상 반짝이고 반짝이지……. 그 이유가 뭘까?

난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지옥을 거쳐 왔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또 있을 거라 믿으며 호흡마다 웃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아주 단조로운 것들을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칼을 들고 비명을 지르는 나환자는 없다. 토사물을 쏟아 내는 멍청이나 진을 마시고 취한 여자애들처럼 살게 내버려 두지 말기를. 오늘은 창문을 부수고 E. 파워 빅스를 들을까 한다. 당신의 핑계는 뭐지?

(중략)

인간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죽을 수 있다는 것과 그걸 무시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시와 그림은 억제력이 없고 사실주의를 무시할 만큼 마음에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마침내 진실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종종 진실을 제쳐 놓는 것이 중요하다.

-「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존 브라이언이 지하신문인 《오픈 시티》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칼럼에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가면을 쓰고 단편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가까이 썼다. 이기든 지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경마가 끝나면 여섯 개들이 맥주팩 서너 개를 뜯고 베토벤과 바흐를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말러를 들으며 칼럼을 썼다.
내가 건넨 원고는 브라이언이 모두 인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모두가 천재로 대접해서 난 그런 척을 하고 그런 글을 써야 했다. 어렵진 않았다. 천재가 되고 싶으면 유일한 사람이 되면 된다.

-「음탕한 늙은이의 고백」

헤밍웨이는 구성과 의미와 용기와 실패와 과정을 알려고 투우를 배웠다. 나도 같은 이유로 복싱을 하고 경마를 한다. 손목과 어깨와 관자놀이에 감각이 느껴진다. 지켜보고 기록하는 태도가 글이 되고 형태가 되고 행동이 되고 사실이 되고 꽃이 되고 개 산책이 되고 침대와 더러운 팬티가 되고 앉아서 타자 치는 소리가 되고, 그렇게 앉아서 자기만의 올바른 방식으로 타자를 치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가 되고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와도 눈이 가지 않으며 회화나 조각도 비할 게 아니다. 글을 쓰는 건 최종 예술로 용기가 있어야 하고, 역대 최고의 도박으로 대개는 이기지 못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부코스키 씨, 글쓰기 강좌를 연다면 학생들에게 뭘 시킬 건가요?"
난 명쾌하게 대답했다. "모두를 경마장으로 보내 경기당 5달러씩 걸라고 하겠어요."
질문한 사람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인간은 배신과 사기에 능하고 태세 변경도 잘한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약하고 더러운 책략을 쓸 수밖에 없는 분야에 발을 들이는 일이다. 파티에 나온 많은 사람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이유다. 질투하고 편협하고 교활한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가 친구인지 알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을 파티에 초대하거나 자신이 감옥에 가거나.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젖꼭지나 거시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잡아라. 모두가 여기 속한다.

-「올바른 호흡과 길을 찾는 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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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0-11-11 14:29   좋아요 1 | URL
경마장을 한 번도 안 가봐서 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경마장 가는 길> 소설이 좀 알려 줄까요(뭐든 책으로 보려는 이 심리ㅎ)
전혀 떠드시는 거 아녜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긴 힘들어서 저혼자 몰래(다 보고 있다!) 사부작 남기는 것도 있지만 신간 경우 내용이 궁금할 분들에게 정보만이라도 남기자 그런 생각도 있어서^^; 월말에 페이퍼로 한번에 정리하면 정보 공유가 늦는 거 같아서^^)>

2020-11-11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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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그러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 출판사가 매우 심각한 판매 부진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출판부수가 1,000,000권이네 40,000권이네 하는 얘기에서 단 하나의(0‘ 자도 믿지 마세요! 아니 400권 찍었다는 말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사기예요! 저런... 저런! 오직 〈프레스 뒤 쾨르) 정도가... 쳇!... 그 정도가 그럭저럭 팔리고... 그 외에는 〈세리 누아르〉,
세리 블렘므 정도가 근근이 팔리지요... 사실, 더는 책 한 권이안 팔립니다... 이건 심각한 상황이에요! 영화, 텔레비전, 생활용품, 스쿠터, 그리고 자가용! 2마력, 4마력, 6마력짜리 자가용들이,
책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할부" 판매되는 모든 것들, 그렇지! 그리고 "주말, 여행 상품들! 한 달에두세 번씩 있는 그놈의 바캉스며... 룰루랄라 떠나는 크루즈 여행까지! 안녕, 쥐꼬리만 한 예산이여!... 보세요 이게 다 빚이라고요!... 더는 동전 한 푼 없어요!... 그러고서 이제, 책을 한 권 산다고요!... 캠핑카 한 대를 더 사요? 또 삽니까!... 그런데 한 권의 책은요? 그건 빌리면 되는 물건이었지요.... 한 권의 책은, 다들 아는 얘기죠, 적어도 스물에서 스물다섯 명 정도의 독자들에게 읽힙니다... 아, 그런데 만약, 빵 한 덩이나 햄 한 쪼가리기, 책과 마찬가지로, 스물에서 스물다섯의 소비자를 먹인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무슨 횡제인가 하겠죠.... 빵이 불어나는 기적은 여러분을 황홀하게 합니다. 그런데 책이 불어나는 기적은, 그러니결국 무상으로 제공되는 작가의 노고라는 기적은, 기정사실처럼받아들여지고 있어요. 이 기적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게, 어느 "아수라장"에서, 아니면 좀 더 점잖게는, 곳곳에 있는 서재에서, 그리고 기타 등등의, 기타 등등의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어디서 일어나는 간에 작가들은 빈 깡통만 차요. 이게 요점입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사람이, 모르긴 몰라도상당한 자신가이거나, 풍족한 연금 혜택을 받고 있거나, (사실이라면 이건 핵융합 반응의 발견보다도 더욱 대단한 일인데) 먹지 않고도 살아가는 비법을 알아낸 사림이겠거니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데지체 높으신 분들은 선취권을 가진 채권자시며, 파산자들의 재산으로 배가 부른 양민들 얘기입니다) 모두 당신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처럼, 어떤 악의도 없이 설파할 것입니다.

2
"오직 비참만이 천재를 개화시키며... 예술가에게는 고통이 어울린다오... 그것도 아주 많이 고통스러워야 하오!... 아주 많이, 그리고 더, 더욱 괴롭게!... 왜냐하면 예술가들은 오직 고통 속에서만작품을 낳기 때문에!... ‘고통‘이란 예술가의 ‘스승‘ 이지요....(소클씨가 이렇게 말합디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모두 감옥이 예술가에게 어떤 악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오히려 그 반대지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가의 진정한 인생이란 짧든 길든 감옥과의 숨바꼭질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그리고 단두대야말로, 겉보기에는 흉측한 물건이지만, 단두대야말로 완벽하게 예술가를 대접한다는 사실을... 말하자면단두대가 예술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단두대를 피해간 모든 예술가들은(원하신다면 처형용 말뚝을 피해갔다고 합시다), 사십여 년쯤 지난 뒤에는, 한낱 재담가로 간주될 수가 있지요... 예술가는, 대중으로부터 부각된 존재고, 혼자 튀었기 때문에, 그가 본보기로 처벌받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고가에 임대되었습니다, 예술가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서지요. 그가 마침내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진심으로 찌푸리는 것을 보기 위해서지요! 또 예를 들면... 군중들은 일찌감치 콩코르드 광장의 나무들을 몽땅 뽑아놓습니다. 그러면 튈르리에는 널찍한 공터가 생긴단 말입니다!

3
"자네는 일하는 법을 몰라!"라고 그는 결론 내립니다... 그는 조금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어쨌거나!... 그는 예술의 후원자입니다. 다들 알지요, 가스통은 예술의 후원자라고... 하지만 그는 장사꾼이기도 합니다. 가스통은 장사꾼이에요... 나는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일하는 법"을 따를 만한 재능이 내게 있는지 살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나처럼 학구적인 사람이, "일하다"라는 표현의 저의를 살피게 되었을 때!... 나는 즉시 한 가지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이었어요...
만사 제쳐두고!... 라디오에서 횡설수설하는 일! 저런! 무슨 내용이라도 상관없어요!... 다만 라디오에서 자기 이름이, 정확한 발음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흘러나오게끔 하는 거예요! 당신 자신을 "거품이 잘 나는 비누나... "날 없는 가투이야(Gatouillat)면도기, 또는 "천재 작가 일리지(Illisy)‘처럼 만드는 거죠! 같은 소스를 쳐서, 같은 방식으로 요리하면 되는 일이에요! 마이크를 내려놓으면 바로 영상 촬영에 들어가야 합니다! 구구절절 찍어야 해요! 당신의 유년기, 당신의 사춘기, 당신의 중년, 당신 인생의 가장 사소한 우여곡절까지 촬영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전화 돌리기입니다! 모든 기자들이 다시 한번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게끔 해야 돼요. 그러면 당신은, 왜 당신이 당신의 유년기, 당신의 사춘기, 당신의 중년을 찍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그리고 나서 당신 사진을 또다시 찍어가게 해야 하고... 그게 잡지에, 더 많은 잡지에 게재되게끔 하는거죠!... 나는, 그죠, 내 얘기를 하자면 난 이미 한번 지 끔찍하게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 참여해봤습니다!... 내 인생의 이런 부분은 정당화해야 하지 않나?... 저런 부분은 찬양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저널리스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완전히 낙담케 했지요.
"자네는 자기 얼굴도 안 보나, 페르디낭? 미친 겐가? 어째서텔레비전에 나가지 않지? 자네 얼굴을 갖고? 자네 목소리를 갖고? 자네는 자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나?... 거울에 스스로비춰본 적이 없어? 자네 모습이 얼마나 웃긴데!"
(중략)
내 목소리에 대해서는, 나도 내 목소리를 알지요... "불이야!" 하고 외치기에는 내 목소리도 쓸 만합니다!

4
잊지 마세요! 분노에 사로잡힌 이는 바보짓을 저지르고 답니다! 그런 뒤에 갖가지 분노가 그의 몸을 꿰뚫지요! 그를 찍어발기지요! 그게 정의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Y 교수님, 나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 할 겁니다! 맹세코! 절대로!"
"그렇다면 철학적 토론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할 수있겠어요?... 가령, "자아(soi)‘의 변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져오는 변화들에 관하여 토론한다거나..."
"아, 선생님, 나는 물론 당신을 존중해드리고 싶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거 한마디는 분명히 말씀드라죠, 그런 건 내 관심 밖입니다!... 내게는 관념이라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내 생각에, 관념이란 것보다 더 천박하고, 진부하고, 역겨운 것도 없습니다! 도서관마다, 그리고 카페테라스마다, 관념들로 꼭 차 있어요!... 무력한사람들이... 그리고 철학자들이!... 관념을 곱씹어대지요... 관념이란 거... 그게 그들의 산업입니다!... 그들은 관념을 갖고 젊은이들에게 허세를 부리지요! 그들은 젊은이들의 포주 노릇을 하려 들어요!... 젊은이들은, 아시다시피 뭐든 마구 삼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엇을 보더라도 이거 "주우우욱이는데!"를 외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젊은이들을 창녀처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용이하겠어요! 정열 어린 청춘기가 저 "관녀어엄"들 앞에서, 그리고 더 정확하게 짚자면 ‘철학‘ 앞에서 흥분하느라, 열광하느라 바쳐지는 것입니다 선생님!... 젊은이들이 사기꾼을 사랑한다는 것은 꼭 강아지들이 나뭇조각을, 사람들이 이건 뼈다귀야 하면서 흔들어대는 나뭇조각들을 쫓아 달리고,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내달리고, 짖어대다가, 자기 시간을 잃고 말지요, 이것이 요점입니다!... 이제 그들이 젊은이들과 놀아주는 데 여념이 없는 저 모든 삼류 작가들을 봐보세요... 그들이 끊임없이 젊은이들에게, 속이 텅 빈, 그리고 ‘철학적‘인 가짜 뼈다귀들을 던져주는 모습을... 아, 청년들이 목이 쉬어라 짖어대는 모습을!... 포주들음 젊은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어요! 관념들!... 더 많은 관념들! 결론을! 지적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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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지구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요! 난 그저 작은 발명가일 뿐이에요, 그것도 아주 사소한 기법을 발명한! 당연히 언젠가는 잊힐! 다른 모든 것처럼! 토글 단추처럼! 난 내가 별거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관녀엄‘들보다는 낫다 이겁니다!... 관념들은 관념의 보부상들에게나 맡기지요! 모든 관녀엄들을!
포주들에게, 사문난적들에게!..."
내 말이 우습나 봅니다... 그가 히죽거리고 있습니다, 허 참!
오래는 못 웃게 할 겁니다!!
"그런데 이보세요, 말해봐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합니까?...
Y 교수님?... 당신은 학생들을 놀래주는 사람, 숨죽이게 만드는사람이 아닙니까, 젊은이들을 정신없게 하는 사람 맞죠? 그들에게 "메시지들을 보내곤 하지 않습니까... 이제... 나도 좀 놀라봅시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발명해냈다고 하셨죠?... 그게 뭡니까?"
그가 묻는다.
"문어에서의 감정 구현이죠!... 문어는 바싹 말라 있었어요, 거기에 감정을 되돌려준 것은 바로 나란 말입니다!... 말씀드리는것처럼!... 내 맹세컨대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제부터는어떤 머저리라도 "글을 써서 당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니까요, 그런 기법이고, 마법입니다!... "구어"의 감정을 글쓰기를 통해 되찾는 일이에요!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래도 업적은 업적이에요!..."
"그로테스크한 우쭐함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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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지 않은 하루키 소설은 아껴 먹으려고 따로 빼둔 과자와 같다. 읽기 시작하면 며칠만에 뚝딱 먹어치우니까 아깝다. 『1Q84』 이후 질리기도 해서 나머지 소설은 정말 심심할 때 읽어야지 하고 놔두고 있었다. 『1Q84』에서 편집자 고마쓰 씨는 읽을 책이 바닥났을 때는 ˝그리스 철학을 읽어. 싫증나는 일이 없어. 항상 뭔가 배우는 게 있지.˝라고 했지만.

최근 『기사단장 죽이기』, 『1Q84』를 읽으니 묘사, 서술, 소재, 인물 설정 등 영향받은 작가가 계속 오버랩되어 재밌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고.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이 결정적이다. 하루키가 변별점을 만드는 지점을 읽어내는 게 또 재밌고. 특히 가상 세계.
다시 읽어도『1Q84』는 여전히 실망스러웠지만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회복세가 보여 최근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기로ㅎ;;
소스의 비밀을 안다고 다 맛집이 아니듯 하루키가 펼쳐놓는 세계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무엇도 문제되지 않는다. 재독해도 재밌으니 이 정도로도 된 거 아닌가ㅎ








운전기사의 말투에는 뭔가 은근히 걸리는 게 있었다. 늘 중요한 것 하나는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듯한 말투다. 예를 들면(어디까지나 예로서) 도요타 자동차는 차음에 관해서라면 아무 불만이 없지만 그밖의 다른 뭔가에 관해서는 문제가 있다, 라는 듯한. 그리고 말을 마친 뒤에는 함축적인 작은 침묵 덩어리가 남았다. 차 안의 좁은 공간에 그것은 가공의 미니어처 구름처럼 덜렁 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오마메는 어쩐지 불안했다.

(중략)

"현실은 언제든 단 하나밖에 없어요." 책의 중요한 한 구절에 밑줄을 긋듯이 운전기사는 천천히 반복했다.

"물론이죠." 아오마메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장소에만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다. 현실이란 한없이 냉철하고 한없이 고독한 것이다.

- 「제1장 아오마메 Q,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이런 말이 있지." 고마쓰는 말했다. "다양한 예술, 다양한 희구, 그리고 또한 다양한 행동과 탐색은 선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지향하는 바를 통해 선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다."

"그게 뭐죠?"

"아리스토텔레스야.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읽어본 적 있나?"

(중략)

고마쓰는 담배를 끼운 손을 쳐들었다. "덴고, 이렇게 생각해봐. 독자들은 달이 하나 떠 있는 하늘은 지금까지 수없이 봤어. 그렇지? 하지만 하늘에 달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없을 거라고.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소설 속에 끌어들일 때는 되도록 상세하고 적확한 묘사가 필요해. 생략해도 괜찮은 것, 혹은 반드시 생략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독자가 이미 목격한 적이 있는 것에 대한 묘사야."

(중략)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거치며 그는 수학의 세계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 명쾌함과 절대적인 자유가 다른 무엇보다 매력적이었고, 또한 살아가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수학의 세계를 방문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진행된다.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 현실세계로 돌아오면(돌아오지 않을 수는 없다), 그가 있는 곳은 이전과 다름없는 비참한 감옥이었다. 상황은 무엇 하나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족쇄가 더욱 무거워진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수학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건 그저 일시적인 도피수단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오히려 현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문이 점점 커지면서 덴고는 수학의 세계와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의 숲이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끌어들였다. 물론 소설을 읽는 행위 또한 일종의 도피였다. 책장을 덮으면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소설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수학의 세계에서 돌아왔을 때만큼 삼엄한 좌절감을 맛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덴고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째서일까. 그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윽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야기의 숲에서는 사물 간의 관련성이 제아무리 명백하게 묘사되어 있어도 명쾌한 해답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수학과의 차이다. 이야기의 역할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제를 다른 형태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동의 질이나 방향성을 통해, 해답의 방식을 이야기 형식으로 암시해준다. 덴고는 그 암시를 손에 들고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그 암시는 이해할 수 없는 주문呪文이 적힌 종이쪽지 같은 것이다. 때로 그것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서 곧바로 실제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이 주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이 그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덥혀준다.

- 「제14장 덴고 Q,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

준결승이나 결승까지는 올라가도, 막상 가장 중요한 승부에서 어이없이 져버릴 때가 많았다. 유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서 덴고는 그런 경향이 있었다. 점잖다고 할까,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려보는 자세가 없었다.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장도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만들어낼 줄 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의 마음에 온몸을 던져 호소하는 강력함이 없다. 다 읽고 난 뒤에는 뭔가 약간 아쉽다는 불만이 남는다. 그래서 항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가면서도 신인상은 타지 못한다. 고마쓰가 지적한 대로였다.

하지만 덴고는 「공기 번데기」의 리라이팅 작업 이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억울함을 느꼈다. 작품을 고치고 있을 때는 작업에만 정신없이 몰두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작업을 마치고 고마쓰에게 건네주고 나자, 깊은 무력감이 그를 덮쳤다. 그 무력감이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분노 같은 것이 뱃속 깊은 곳에서 치밀었다.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빌려다 고쳐 쓰는 사기나 다름없는 짓을 한 것이다. 그것도 내 작품을 쓸 때보다 훨씬 몰두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덴고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자기 자신 속에 잠재한 이야기를 찾아내 올바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 아닌가. 한심하지 않은가.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너도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써낼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제16장 덴고 Q, 마음에 든다니 정말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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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1-04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1Q84』 이후 질리기도 해서 나머지 소설은 정말 심심할 때 읽어야지 하고 놔두고 있었다.˝ ㅋㅋㅋ 공감합니당! 근데 모 읽지 모 읽지 방황하다 하루키로 돌아가면 아.. 이래서 좋아했어! 매번 이래요. 저 최근에 <상실의 시대> 다시 읽었는데 충격적인 경험이었어요. 저는 십대 때 읽고, 이십대 초중반에 읽었었는데, 서술자의 나이가 되어 읽으니까 소설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소주 한 잔씩 마시는 느낌이었고요~

AgalmA 2020-11-04 15:19   좋아요 2 | URL
밑줄긋기 추가했어요. 읽어보시면 이 책이 더 읽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처음 읽었을 때는 덴고의 글쓰기 과정이 익숙하게 느껴져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왜 내 글쓰기가 잘 풀리지 않는지 하루키의 작법 조언으로 확실히 전달되더군요^^;

저는 상실의 시대를 네 번 읽었는데, 갈수록 더 와닿더군요. 하루키니까 위스키 커티삭 맛이라고 할게요ㅎㅎ;;

하나 2020-11-04 15:57   좋아요 2 | URL
1Q84는 출간 당시에 읽었는데, 아오마메의 고립 상황을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로 만들던 게 기억에 남네요. 갇혀야 읽을 수 있는 것인가 ㅋㅋ 저는 6권쯤에 멈춰있고요. 두 개의 달을 묘사하는 방법 좋네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묵직한 조언이 있었네요. 저도 다시 읽어야겠어요. <기사단장 죽이기>부터 읽고요~
 

『달걀과 닭』에 비해 매우 어렵게 읽힌다. 이 책은 종이책으로 꼭꼭 씹으며 읽으면 좋을텐데...


완전한 삶이란 비자아와의 동화가 너무도 충만한 나머지 마침내는 죽음에 이를 자아마저 소멸해버리는 종말일 것이다.
— 버나드 베런슨Bernard Berenson

계속 인간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망각이라는 희생이 필요한 것인가? 이제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몇몇 얼굴에게서 그들이 망각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망각했는지, 그리고 망각했다는 사실조차도 전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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