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때문에 참 먼 길 간다 ㅎㅎ;;
그래서 『기나긴 이별』은 언제 읽으실 건가. 헤헤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물론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과 ‘고전’의 개념 사이에는 선천적인 긴장이 한 겹 깔려 있다. ‘고전’에는 적어도 두 가지 핵심 기준이 있어서 그중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하나는 ‘필독’이다. 만약 이 분야의 아름다움을 몸소 겪고 이 분야의 최고 성취를 즐기고자 한다면 ‘필독’으로 선정된 고전은 일단 읽어야 한다. ‘고전’의 높이를 통해 우리는 취향의 기준을 세워 다른 작품을 평가하고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고전’의 두 번째 기준은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읽기를 통해 신선한 즐거움과 깨달음을 끝없이 찾아낼 수 있다.
두 번째 기준은 추리소설에 불리하다. 추리의 핵심은 수수께끼 그리고 수수께끼 풀이이며, 수수께끼를 풀기 전의 의혹과 추측, 수수께끼를 푼 다음에 오는 깨달음은 추리소설을 읽는 근본적인 기쁨이다.
(중략)
이 이야기는 결과를 미리 아는가 모르는가의 여부가 감상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 추리 작품의 한계를 선명하게 지적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한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준다. 추리 작품을 소개할 때에는 결말을 말해서 그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느낄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특별한 도덕적 책임 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이야기가 어째서 다른 문학 분야보다 추리소설에서 ‘고전’을 만들어 내기 어려운지 설명한다는 점이다. 수수께끼,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하고 복잡한 실마리, 마지막에 이르러 극적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장면 등 추리소설이 독자를 끌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독자가 한 번 즐거움을 얻은 뒤 다시 읽으면서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독자에게 다시 읽을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영어로 설명하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이전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인간 세상의 법률이 아닌, 죽은 뒤에 하느님과 마주했을 때 받는 것이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의 핵심 개념과 근본 가치인 동시에 교회를 없어서는 안 되는 기구로 존재하게 하는 토대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고해와 참회를 하고자 했고,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인간 세상에서의 사실 확인과 처벌은 상대적으로 다음 문제였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 죄를 지었더라도 죽기 전에 참회하고 죽은 다음 ‘연옥’에 들어가 충분한 벌을 받으면 천당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죄를 짓고도 참회하지 않으면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이런 원리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더는 숭고한 진리라는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친족이나 이웃과 단단한 유대를 맺지 않는 생활로 들어서면서 범죄가 발생할 여지도 늘었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 생활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가 시작된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두 번째 조건인 ‘미스터리’에 대해 살펴보자. ‘미스터리’는 추리소설이 성립하는 다른 조건인 ‘there is something mysterious’(뭔가 이상하다)를 알려 준다. 추리 용어로 말하자면, 소설에는 반드시 ‘수수께끼’가 있어야 한다. 소설이 시작되면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사건의 전체 혹은 일부가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빙산’ 유형의 화자, 즉 ‘하드보일드 맨’에게 그가 본 세계를 말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독자의 마음에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강함이 있지만, 그 강함은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가질 리 없는 한 가닥의 냉정을 가진 데서 나온다. 헤밍웨이의 펜 아래에서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맨’의 형상은 훗날 해밋과 챈들러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사람은 거드름을 피우지 않으며 무슨 일에든 놀라지 않는 캐릭터를 그렸다.
이 캐릭터들에게는 항상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자 집에 낯선 사람 둘이 침입해 일언반구도 없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문장 끝에는 마땅히 느낌표를 찍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면서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무서울까 상상한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렇게 쓰지 않고, 해밋이나 챈들러도 그렇게 쓰지 않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게 쓰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공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니 두 사람이 마침 그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묻는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다. 물어도 답이 없으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는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생각한다. 어쨌든 인생은 그런 거지. 아침에 일어나니 누군가 쳐들어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일이 발생하는 그런 거.
그는 놀라는 일이 없다. 우리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법한 일이 일어나도, 심지어 자기가 얻어맞아 쓰러지는 일이 있어도 그의 반응은 한결같다.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하드보일드 탐정’을 이해하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셜록 홈스와 비교하는 것이다.
첫째, 하드보일드 탐정은 홈스처럼 똑똑하지 않다. 달리 말해 보자. 그들은 19세기 과학, 과학적 방법, 과학 기술에 대한 강한 동경과 믿음 아래 만들어진 홈스와 다르다. 홈스는 우리가 모르는 일을 과학적으로 일사불란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풀어 보여 준다. 홈스라는 캐릭터 뒤에는 19세기 과학관, 즉 과학이 계속 발전하여 언젠가는 모든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홈스는 과학의 이데아를 대표하며, 과학 추리의 능력으로 안개 속을 헤치고 진상을 드러낸다.
과학은 남은 흔적으로 사건 현장을 복원할 수 있고, 현장에는 반드시 충분한 흔적이 남아 훌륭한 과학 추리와 과학 기술을 통하면 사건을 되짚어 갈 수 있다. 홈스는 완벽하며, 사실을 복원해 드러낼 수 있다. 그는 19세기 과학의 꿈을 대표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이런 조건이 없다. 그들은 베이커 거리 221B에 앉아 사건을 탐색하지 않는다.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물증을 수집하고 물건을 검사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수수께끼를 풀고자 동분서주한다.
둘째, 그들은 홈스처럼 범죄자보다 위에, 심지어 영국 경찰청의 경감 위에 있지 않다. 범죄를 마주하고, 사건과 관련된 누구와 마주하더라도 어떤 유리한 점을 쥔다는 보장이 없다.
사립탐정이 경찰을 만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홈스의 경우, 난제에 부딪힌 영국 경찰청의 경감이 막다른 길에 이르러 공손히 협조를 청하고, 홈스는 그들을 도와 답을 찾아낸다. 하지만 챈들러가 그리는 세계에서 경찰은 사립탐정을 막고 오도하며 이용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미녀를 만나도 좋은 점이 없다. 홈스는 어떤 미녀도 만난 적이 없지만 챈들러 이전의 통속 탐정소설에서는 언제나 미녀가 나왔다. 미녀는 보통 탐정이 해결하려는 사건의 약점으로, 탐정의 매력에 굴복해 실수로 혹은 일부러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를 제공했다. 경찰은 어째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그들은 탐정만큼 똑똑하지도, 용감하지도, 남자답지도, 여성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단 탐정이 등장하면 그는 재빨리 어떤 미녀를 정복하고 사건을 해결할 열쇠를 만들어 낸다.
챈들러의 말로는 운이 없다. 미녀를 정복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미녀를 만나면 일이 꼬인다.
셋째, 하드보일드 탐정 곁에는 숭배하는 마음으로 사건 해결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왓슨이 없다. 챈들러가 쓴 말로 시리즈는 모두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홈스는 하나의 현상이고 놀라운 광경이다. 우리는 왓슨의 눈을 통해 이 놀라운 광경을 우러러본다. 왓슨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특수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인데, 그 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러러보는 앙각仰角이다. ‘하드보일드 맨’ 소설의 일인칭 시점은 우리에게 ‘하드보일드 맨’의 생명관을 통해 그의 세계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하며, 나아가 우리와 세계 사이의 다른 관계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왓슨을 통해 하나의 현상과 놀라운 광경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로의 일인칭 서술을 읽으면서 우리는 말로의 주관과 편견을 피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그의 주관과 편견 속에서 정리된 한 덩어리의 경험, 즉 로스앤젤레스의 기이하고도 다채로운 세계다.

챈들러는 해밋을 소설 창작의 모델로 삼아 ‘해밋의 소설처럼’ 쓰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학적으로 해밋이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하며, "이루고자 하는 일은 모두 잘해 냈지만 하지 못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챈들러가 ‘진정으로 뛰어난 대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바랐던, 순문학 작품을 쓰고자 했던 꿈을 버렸기 때문이다. 해밋은 순문학 작품을 쓰지 못했고, 애초에 쓰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와 달리 챈들러는 순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 했지만 스스로 포기했다. 적어도 챈들러는 자기 자신과 해밋 사이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챈들러는 말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모두 일곱 권 썼고, 이 일곱 권은 하나같이 훌륭해서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나 또한 다른 수많은 이와 마찬가지로 일곱 권 가운데 『기나긴 이별』을 편애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나긴 이별』이 어째서 일곱 편의 작품 중 가장 도드라지는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설명한다. 소설에서 레녹스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레녹스는 잘생기고 우아하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지닌 데다 어두운 과거와 깊은 수수께끼를 품은 인물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속에는 신비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인격에 결함이 있으나 알 수 없는 엄격한 규율로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약함과 강함이 그의 내면에서 도리 없이 결합해 있다. 말로는 이런 사람에게 이끌리고 결국 어지럽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전의 말로 시리즈에서는 레녹스처럼 존재감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좀 더 간단하고 직접적인 설명으로 바꿔 보자. 『기나긴 이별』은 챈들러가 아끼지 않고 내놓은 ‘원 플러스 원’ 작품이다. 다른 말로 시리즈에서는 말로를 판다면 이 소설에서는 말로 외에도 말로만큼이나 멋진 레녹스를 얹어 준다. 레녹스의 출현은 말로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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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5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늘 그렇지. 항상 그래. 이런 일이 터지는 걸 피할 수 없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호들갑을 떨어도 소용없잖아.’ 언제나 이런 태도와 말투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나긴 이별 내용 좋네요!

AgalmA 2020-08-25 03:37   좋아요 1 | URL
해밋, 챈들러, 기나긴 이별 내용이 넘 웃겨서 공유하기로 했죠😁😁
 

 

 

글을 어느 정도 읽었고 써봤다고 생각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생각이다. 경계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가 다시 시작점이라는 걸 잊는 순간 글은 자만에 빠지고 무미건조해진다. 이성복 시인은 늘 그것을 일깨운다. 어느 분야 글쓰기든 이성복 시인의 시론은 중요한 지침이다.

˝언어는 삶 이상으로 고결할 수도 없고, 삶 이하로 추악할 수도˝ 없지만(『불화하는 말들』,「87」)
언어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옮기는 그릇으로만 사용하는 사람은 감동도, 진실도 줄 수 없다. 글과 실제 이미지가 표리 부동한 사람들이 자주 이렇다.
글을 잘 쓰려면 잘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관찰과 대화만이 아니라 읽기도 그중 하나다. 마음이 깃들면 글은 절로 시작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기계발서는 욕심이 욕심을 부추기는 양상. 눈 먼 글에선 눈 먼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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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23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팬입니다. 세 권쯤 읽었어요. 그중 무한화서도 포함돼요.

AgalmA 2020-08-23 22:50   좋아요 1 | URL
이성복 시인의 요즘 시와 글은 아재 냄새가 자주 느껴지지만 걸러들으면 영양가 많은 글이죠^^
 
아네모네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
성동혁 지음 / 봄날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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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6』(2014, 민음의 시 204)을 읽고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퍽 기대했다. 『아네모네』(2019, 봄날의책 한국시인선 1)를 펼쳤을 때 예상된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詩의 위치는 묘하다. 이계의 언어 같으면서도 독자의 귓가에서 바로 속삭인다. 소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특성이다. 유서나 기도문보다는 일기, 일기보다는 편지나 에세이를 사람들은 편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詩는 어디에 해당할까. 성동혁의 시는 유서>기도문>일기ㅡ성동혁ㅡ편지>에세이 중간쯤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끌어온다. 80년대 중후반 태생인 황인찬과 성동혁을 (굳이) 비교해 황인찬의 시는 그토록 인기 높은데 성동혁의 시는 왜 그렇지 않을까. 독백 같지만 편지 같기도 한 그들의 목소리 초점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황인찬의 시는 현실에 더 가까이 있고 불특정 다수에게 더 열려 있다. 그런 유혹자 서술은 연애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성동혁에게 당신도 그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의 개성을 바꾸라는 무례니까. 절절히 아플지언정 선뜻 붙잡지 않겠다는 그의 결은 존중받아야 한다. 성동혁의 시는 검고 부드럽게 흐른다. 어떤 시인은 사람보다 시와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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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8-24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성동혁 시인 새 시집 덕분에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20-08-25 02:42   좋아요 1 | URL
오늘 성동혁 땡쓰투 적립금 들어왔던데, 혹 하나 님이?? 그렇다면 매우매우 감사하지요🥰
우리가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시집은 월리스 스티븐스! 입니다. 어제 추천마법사가 똭 보여주는데 감격의 눈물이😭😭😭 이번 주 내로 살 거 같은데 하나 님도 매우 좋아하실 시집이죠!

하나 2020-08-25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아갈마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얼른 사야죠! ㅋㅋㅋㅋ 성동혁은 저 맞아여 어제 아침에 주문했는데 벌써 왔어요~ 좋은 자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성복 에세이집도 같이 주문했는데 왠지 지금 감이 왔어요 ㅋㅋ 그 여름의 끝을 읽을 계절이라는 :)

AgalmA 2020-08-25 04:52   좋아요 1 | URL
이성복 시인은 글 쓰는 자세도 그렇고 글감도 참 많이 잡아주시는 정말 선생님 같은 분이죠. 계절 바뀔 때마다 찾게 되는 분이기도 하고^^
땡쓰투 해주시는 분을 제대로 알수 없으니 감사 인사 묵념만 했는데 이번에는 똭! 감사합니당👏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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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스트(harukist, 무라카미 하루키 팬의 통칭), 무라카미언(murakamian, 프랑스)이란 조어가 생길 정도로 하루키 팬층은 두텁다. 창작 생활 40년이 넘어서도 청년층의 인기도 여전하다. 북플 통계를 보면 하루키는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작가다. 하루키가 책을 계속 내는 한 이 순위는 변함없을 거 같다. 하루키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한 권만 읽을 수 없고 한 번만 읽지도 않는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에세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골라 마음껏 빠져든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하루키 팬들도 그럴 것이다. 독자들은 하루키식 (때론 오글거리는) 청춘형 문장과 (‘봄날의 곰’이나 ‘100퍼센트 소녀’ 같이 기발한) 비유와 유머, 그의 라이프 스타일(마라톤 같은 열혈 운동가, 영화와 음악 등 박학다식한 교양인, 요리와 다림질 등 만능 가사맨, 문화마저 멋지게 섭렵하는 매력 만점 여행가)에 반해 그의 소설에 쉽게 접근한다. ‘재밌다’, ‘이전보다 어렵다 or 별로다’, ‘여성을 도구적으로 쓴다’ 등의 인상평으로 그치기도 하고, 그가 뿌려놓은 메타포와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보려 머리를 쥐어짜기도 한다. 하루키 소설은 어렵게 읽고 싶으면 어렵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고 싶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나카무라 구니오, 도젠 히로코 『하루키의 언어』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소확행'이란 조어는 하루키, 안자이 미즈마루 & 하루키의 아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과 사진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1993~1995년 미국 체류기)이란 수필집을 통해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열거한 하루키에 대한 전반적 호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가라타닌 고진을 인용하며 "재패니메이션, 하루키, 요시모토가 쉽사리 세계화되는 이유는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독자든 비평가든 하루키가 영향받았다고 언급한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샐린저, 피츠제럴드 같은 후광 효과로 작품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하루키는 오히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스타워즈》에 더 영향을 받았다며 신화적 구조('모험으로의 부름 - 조력자(여신)와 만남 - 모험 - 역경 - 변모 후 귀환')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하루키 작품을 쭉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신화의 특성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남편이 저승의 나라로 죽은 아내를 찾으러 가는 오르페우스 신화(『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비롯해 기타 등등), 아버지 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해변의 카프카』) , 고대의 죽임을 당하는 왕(『1Q84』) 등등 말이다. ‘구조밖에 없다’라고 질타하는 에이지가 전말을 제대로 파헤친 걸까. 그 또한 캠벨, 《스타워즈》 같은 대단한 기표들로 폼 나는 비평을 했다는 느낌이다. 이계(異界)와 현실을 오가는 신화적 구조로만 읽을 때 소설의 매력은 휘발된다. 주목할 것은 구조 자체가 아니라 왜 이런 구조를 가지느냐이다. 하루키가 자주 다루는 '실종', '가출', '상실', '죽음'이 오히려 이런 구조를 부른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일층은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공동 공간이다. 이층은 개인 공간으로 나뉘어 각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지하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쟁여두거나 이따금 들어가 넋 놓고 있다가 나오기도 한다. 일반 소설이라면 이런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실은 지하 일층 아래에는 또 다른 지하가 있다. 그곳에는 특수한 문이 있어서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어쩌다 들어가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평소 집 안에서는 하지 못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건 자신의 혼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몰라 복귀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의식적으로 그 지하 이층의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밀의 문을 열고 캄캄한 어둠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체험하고, 다시 문을 닫고 현실로 복귀한다. 그것이 직업적인 작가이고, 진짜 작가다.’

ㅡ 유카와 유타카, 고야마 데쓰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하루키가 정의한 작가론처럼 그는 지하 이층형 작가다. 아기자기한 재미 가득한 그의 에세이나 소설 속 일상 묘사는 일층의 모습이다. 정체성을 찾는 근대적 교양 소설의 면모는 그의 모든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지하 일층의 모습이다. 주체가 해체되고, 선악의 기준도 없고,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질적인 게 뒤섞여 경계가 없는 어둠의 세계는 지하 이층의 모습이다. 실제 소설에서도 지하에서 한 단계 더 내려가야 하는 지하 세계나 우물, 문 너머 문, 벽 너머 거울 등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암호를 2차 암호화하는 ‘셔플링(인간의 잠재의식을 이용한 정보 변환술)’도 지하 이층의 표현형이다. 하루키는 가능하다면 더 깊숙이 더 복잡하게 엮고 싶어 한다. 신화적 구조에 혼령의 세계나 노몬한 같은 역사적 사건까지 곁들여 지하를 아주 두텁게 만든다. 그럴수록 주인공이 돌아오는 현실세계와 일상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루키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보수적이고 도식적이면서 가장 문제가 선은 올바르고 강하며, 악은 언젠가 멸망하는 ‘선악이원론’에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도식을 부조리의 세계에 가져왔다는 데 스티븐 킹의 성공비결이 있지만 바로 그래서 그는 제2의 러브크래프트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무라카미 하루키 「동시대로서의 미국 1: 피폐 속의 공포-스티븐 킹」, <바다> 1981년 7월 호.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인용) 스티븐 킹의 허점 파악은 하루키의 이야기론에 분명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키 이야기 속에는 선과 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 저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선택 속에 이야기가 달라질 가능성을 항시 담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하루키 소설을 게임 문화와 많이 연결하지만 소설과 영화 속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하루키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늘 격찬했다.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좋아했다. 하루키는 초기 소설부터 지금까지 쭉 미스터리·스럴러 장르 소설의 특징을 고수해왔다. 이 속성은 감춰진 비밀과 욕망, 민낯, 악을 뒤쫓는 액셀레이터로 작동한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 경향을 보면 지하 이층의 규모를 더 키워 판타지 세계로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이 관계 맺지 않는 거리 두기(detachment)에서 적극적인 관계 맺기(commitment)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나 줄곧 고수해온 1인칭에서 다른 인칭으로 시점 변화를 준만큼의 효과는 낳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가 일반 연애소설 『노르웨이의 숲』(1987), 르포 『언더그라운드』(1997) 만큼 하루키 소설 연보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초기 쥐 3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1988년 『댄스 댄스 댄스』 추가)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이계로 가는 연대기를 진행했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양립하도록 SF적 소재와 패러럴 월드로 분위기를 바꿨다. 이 소설 같은 평행세계는 2009년 『1Q84』의 ‘1984’와 ‘1Q84’로 다시 만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가상 공간 '세계의 끝'과 철저히 인공적이고 어두운 현실 공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나뉘어있는데 많은 것들이 뒤틀려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소리를 뽑거나 사람이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현실이다. 주인공 ‘나’는 조직에서 ‘계산사’로 일하며 중요한 암호를 숨길 수 있는 능력자이지만 그저 보통 사람이다. ‘세계의 끝’에서도 ‘꿈읽기’라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무력하긴 마찬가지다. ‘계산사’나 ‘꿈읽기’는 인생의 메타포다.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말했다. “내가 이 뼈에서 오래된 꿈을 읽어 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런 다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일하는 의미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 일에는 뭐든 목적이 있을 테니 말이야. 예를 들어서 그걸 어딘가에 베껴 쓴다든지, 어떤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분류한다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설명할 수 없어요. 오래된 꿈을 계속 읽다 보면 당신 스스로 그 의미를 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차피 그 의미란 당신의 일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어요.”

(중략)

“읽기로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한번 테이블에 놓인 두개골을 들고 손안에서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 같으니까.”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의 끝’으로 들어오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림자를 떼어낸 ‘나’는 과학에서 정의하는 ‘자아’와 완전히 다르다. 신경 뇌과학에서는 ‘기억’이 ‘나’를 형성한다고 본다.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도 가지 못해”라고 말하는 ‘나’의 대화처럼 하루키는 ‘마음’, ‘혼’을 ‘나’의 본질로 상정했다. 이걸 이해하면 ‘세계의 끝’에서 ‘그림자(기억)’와 이별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 두 세계에 다 존재한 ‘일각수’는 이와 비슷한 상징성이 있다. 일각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지만 동서양이 다르게 해석하는 가공의 동물이다. 동물이나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존재이자 남근적 상징을 가지면서 처녀만이 잡을 수 있는 신화적 특징(‘세계의 끝’), 홀수의 뿔로 인해 자기방어가 취약한 기형의 고아로 도태될 진화적 특징(‘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양면성을 가진다. 진화의 세계에서 일각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의식 프로그램을 나도 모르게 ‘나’에게 프로그래밍한 박사는 과학의 모습을 한 신(神)이었다. '나'가 만든 '세계의 끝'은 그것을 받아들여 붕괴의 숙명에 처한다.

 

 

 

“맞아요. 사고 시스템이란 그야말로 그런 것이야. 한 마디로 할 수 없어.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자네는 강단이 있거나 겁이 많은 두 가지 양극 중에서 어느 하나를 거의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것이야. 그렇게 세밀한 프로그램이 이미 자네 안에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 프로그램의 자세한 내역과 내용에 대해서 자네는 거의 아무것도 몰라. 알 필요가 없거든. 그걸 몰라도, 자네는 자네 자신으로 기능할 수 있어. 이거야말로 블랙박스 아닌가. 다시 말해서 머릿속에는 인류가 아직 발을 내딛지 않은 거대한 코끼리 무덤 같은 것이 묻혀 있는 셈이지. 대우주를 제외하면 인류 최후의 미지의 대지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아니지. 코끼리 무덤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군. 왜냐, 그곳은 죽은 기억의 집적장이 아니기 때문이야. 정확하게는 코.끼.리. 공.장.이라고 해야 가깝겠어. 그것에서는 무수한 기억과 인식의 칩이 선별되고, 선별된 칩이 복잡하게 얽혀서 라인을 만들고, 그 라인이 또 복잡하게 얽혀서 번들을 만들고, 그 번들이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 정말 ‘공장’이지 않은가. 그곳은 생산을 하고 있어요. 공장장은 물론 자네지만, 안타깝게도 자네는 그곳을 방문할 수 없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그곳에 숨어들려면 특별한 약이 필요하지. 루이스 캐럴의 그 이야기는 참 잘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그 코끼리 공장에서 떨어지는 지령에 따라 우리의 행동 양식이 결정된다는 말이군요.”

“그래요.”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나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먼저 질문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어서 해 봐요.”

“얘기의 맥락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현실적으로 행동 양식을 표층적 행위의 결정까지 확대할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 빵과 함께 우유를 마실 것이냐 커피를 마실 것이냐 홍차를 마실 것이냐, 그건 기분에 따른 것 아닐까요?”

“옳은 지적이에요.” 하면서 박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인간의 그 심층 심리가 늘 변화한다는 것이지. 비유하자면, 매일 개정판이 나오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에요. 인간의 사고 시스템을 안정시키려면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어요.”

“문제요?” 나는 말했다. “그게 왜 문제죠?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잖아요.”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쯤 되면 하루키가 이런 실험, 이런 질문을 소설에 담은 배경이 궁금해지지 않나.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하는 물음은 변하지 않는 탐구 주제인데,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년)를 원작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1982년에 개봉했다. 1984년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가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1985년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디스토피아 SF 영화《브라질》은 하루키의 이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하루키의 이 소설은 그 시대를 빼고 말할 수 없을 거 같다. 박사는 인간이 시간을 확대해서 불사에 이르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분해해서(사유 속에서) 불사에 이른다는 걸 깨닫게 되자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에서 계산사 ‘나’를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고, 불사의 세계와 그의 세계(세계의 끝)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운명을 내놓는다. 스스로 사고하는 AI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되묻듯 인간을 프로그레밍된 생존 본능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로 해석할 수 없다.

아무도 비를 그치게 할 수 없고 아무도 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모두에게 공정하게 내리는 빗속에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흐르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닫히는 풍경은 《블레이드 러너》의 포크 풍 같다. '나'가 만든 세계인 ‘세계의 끝’은 문지기가 지키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열리던 그로테스크한 알레고리 소설 카프카 『법 앞에서』의 낭만적 오마주였다. 소설의 역사가 그렇듯 이 모든 것은 이야기만을 좇는 모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루키를 우리의 ‘꿈읽기’로 여겨 읽고 또 읽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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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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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책을 죽 읽다 보면 전작들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이제껏 나온 그의 모든 소설을 읽어온 바 이번 소설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역동적이다.
(※ 국내 출판된 우엘벡 책 중 완독하지 못한 건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의 대담집 『공공의 적들』 뿐이다.)

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성, 일의 성취와 자발적 포기, 권태, 무기력, 은둔 등을 다루는데, 이 책 초반은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중산층 서구 엘리트의 모습으로 『투쟁 영역의 확장』, 『소립자』, 『지도와 영토』, 『복종』과 더 가깝고, 중반은 68세대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와 섹슈얼리즘, 과거 연인들과의 관계 고찰의 모습으로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플랫폼』과 닮았다. 후반부터 전개가 독특해진다. 직전의 전작 『복종』이 정치적 목소리가 강하긴 했지만 적극적인 저항까지 담지 못했다면 이번 『세로토닌』은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을 예견했다는 평을 들을만큼 사회 비판이 격렬하다. 점점 더 개판으로 돌아가는 세상 꼴을 보자니 당연했던 걸까. 물론 실패의 엔트로피로 향하지만. 자본주의 시대 ‘노동의 종말‘을 향하고 있는 지금이 어떤 꼴인지 자비 없이 보여준다.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벨 에포크(좋은 시절)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건 먹고살기 좋았던 중상위층에게나 해당했다. 빈부 격차나 각종 차별이 더없이 치솟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토마 피케티 『자본과 이데올로기』 참조), 지금 우리도 그런 역사 속이다.


섹슈얼리즘을 문제적으로 다루는 솜씨는 조르주 바타유와 비슷하지만 바타유보다 우엘벡이 더 저돌적이다. 섹슈얼리즘과 계몽주의와 냉소주의가 뒤섞인 D. A. F. 드 사드가 20~21세기에 살았다면 미셸 우엘벡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자살할 듯 말 듯 한 허무주의적이고 신랄한 문체는 에밀 시오랑이나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비슷하다.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를 많이 드러내는 미셸 우엘벡의 글이 불쾌한 부분이 많음(이번 소설엔 아동 관련 범죄까지...)에도 그의 글에 매료되는 건 절망의 끝까지 가보는 그의 적나라함이 폭력성과 환멸만으로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모든 것에 가차 없는 비판을 하는 한편 우리는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이고 굴레로 가득한 인생을 산다는 걸 비감히 고찰한다. 끝까지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사랑‘을 강조하며 끝나는(에로스적 사랑- 낭만적 사랑에 국한된 게 한계이지만 : 동성애를 혐오했던 바타유와 역시 닮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우엘벡답지 않아 더 뭉클했다. 그에게나 지금의 우리에게나 가장 지독한 상실은 ‘사랑‘이다


˝우리가 생의 단 한순간도 어떤 신이 됐든 신의 개입이나 존재조차 느껴본 적이 없으면서도, 심지어 우리가 신의 호의적인 개입을 특별히 누릴 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삶에 누적된 허물과 과오들을 고려할 때 다른 이들보다도 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바라는 어떤 것˝이 있는 게 인간의 삶이다. ˝지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이 달랑 여행가방 하나로 압축˝되고 ˝인간관계를 맺는 시기는 이제 만기˝가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폐를 끼친 일에 사과하는˝ 일만 가득할 거라고 판단한 46살의 플로랑클로드는 같은 나이에 죽은 네르발과 보들레르를 떠올리며 결코 쉬운 나이가 아니라고 자조한다. 그는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이미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무런 추억도, 다가올 기적에 아무런 기대도 없는 감정의 동절기로 조금씩 진입하고 있었고, 이 무력감은 직무 영역에서도 무산되는 사업이 늘어감에 따라 배가되었다.˝ 똑같은 한 주 한 주가 반복되면서 ˝우리가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았고˝,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는 창녀‘처럼 생각되었다. 윗세대부터 우리 세대까지 파괴된 것을 재건하는데 철저히 무능했으므로 인류 문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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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었다. 미래가 활짝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이후로 펼쳐지는 성인의 삶, 직업인의 삶은 느리고 점진적인 정체와 다름없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젊은 날의 우정, 학창시절에 맺었던 유일하게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 명명백백한 추락의 산증인들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친구들과의 재회를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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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간단하나 실질적으로는 이제 더는 그렇지 않으며, 바로 그렇게 인류 문명은 요란하지 않게, 위험도 비극도 없이, 아주 미미한 유린만으로 거꾸러진단. 문명은 무기력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으로 거꾸러진다. 사회민주주의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무것도 없고, 혹여 있다면 오직 영원한 그리움과 망각에의 호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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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도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조수간만은 살아오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육지를 뒤덮으러 조용히 밀려 올라오는 저 거대한 액체를 느껴보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토크쇼 <우린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가 왁자하게 흘러나왔고 느리게 밀려오는 대양과 기묘한 대조를 이뤘다. 패널이 너무 많았고 다들 너무 크게 떠들었다. 이 오락 프로의 볼륨이 전체적으로 과도하게 높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으나 이내 후회했다. 현실세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고 이야기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어쩌면 핵심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게스트들의 캐스팅은 완벽했고 스튜디오엔 소위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바닷물이 이제는 불안할 정도로 더한층 가까워진 듯 보였다. 다음엔 우리가 바다에 잠길 차례인가? 그 경우라면 약간의 기분전환이 되리라. 결국 나는 커튼을 닫고서 텔레비전을 다시 켠 뒤 볼륨을 죽였다. 이내 탁월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딱 좋았다. 오락 프로그램의 왁자지껄함은 그대로인 채로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즐거움이 더해졌다. 약간 정신 나간 듯하면서도 재밌는 미디어 인형들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할까. 그것들이 분명 나를 잠들게 해줄 터였다.˝



현재의 일본인 연인 유주는 집단 성교에 빠져 있고 플로랑클로드의 의미는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파트너일 뿐이다. 그녀를 죽일까도 생각하다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한˝ 필사적 노력을 끊고 자발적 실종을 택한 플로랑클로드는 인생을 결산하려는 의지 속에 의미 있었던 과거의 인연들을 찾아가지만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한다. 과거 연인 클레르는 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이 남은 희망이다. 유일한 친구 에메릭을 찾아간 플로랑클로드는 그와 마찬가지 처지인 에메릭의 몰락을 목도한다. 그는 ˝정말이지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정도 연민도 정신분석도 이성적인 판단도 전혀 유용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한 부풀˝려 질병 같은 그 메커니즘 속에서 죽음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카미유를 찾아가 몰래 훔쳐보기만 하다가 미혼모로 사는 것 같은 그녀에게 자신보다 아들이 더 중요할 거란 생각에 관계 회복을 포기한다. 세로토닌이 든 캅토릭스 부작용인 발기 부전은 남성으로서의 사형 선고였지만 그에겐 사형 선고의 추가 사항이었을 뿐이다. 사회적 관계는 모두 끝장났고 풍족할 줄 알았던 재산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10년 밖에 버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자살을 계획한다. 그가 고골 『죽은 혼』이나 토마스 만 『마의 산』을 읽듯이ㅡ365일이 다 그렇겠지만ㅡ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미셸 우엘벡 『세로토닌』을 읽는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생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는 40대 중후반이라면 엄청난 공감과 더 치명적일 것.

관계를 원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망치기 일쑤여서 도덕과 윤리, 법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끝없이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거기서 오지 못한다. 경계를 허무는 사랑을 생각해보라.

실패한 인생을 반추하는 주인공보다 주인을 잃고 전날부터 먹이도 먹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젖소들이 더 마음 아팠다ㅜㅜ

전 세계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외로운 자는 구강기로 퇴화해 요리에 열광하는 탐닉형 비만자, 약에 의존하는 건강염려증자, 흡연과 알콜중독 같은 중독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화려한 요리, 항우울제 캅토릭스 약도 아닌 플로랑클로드가 시종일관 마시는 칼바도스가 마시고 싶었다. 온갖 실망 속에 사람보다 사랑보다 그의 우울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다. 정말이지 인간은 다양한 증상의 병리 병동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난날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영원히 일어난 것이고,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으나, 그것은 닫힌 영원, 닿을수 없는 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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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7-28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앞부분을 며칠 전에 미리 보기로 읽었습니다. 앞부분만 읽었을 때는 이 작가의 자가복제(혐오와 환멸만 늘어가는 서구 엘리트 남성의 넋두리)가 갈수록 심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구매를 보류했는데 아갈마님의 리뷰를 읽으니 반드시 사야겠다는 판단이 서네요.
우엘벡은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가에 대해서 험을 잡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나라에 이런 글쟁이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ㅡ기껏해야 왕년의 장정일 정도만이 생각나네요ㅡ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간에 내가 하고픈 얘기를 다 하겠다‘보다는 ‘나는 윤리적, 정치적으로 아주아주 올바른 사람이다‘라는 강박을 몇몇 소설가의 글을 볼 때마다 느껴지고는 합니다.

AgalmA 2020-07-28 13:35   좋아요 1 | URL
책날개에 (골초라 더 그랬을) 폭삭 늙어버린 우엘벡 사진에 먼저 심란해지죠. 그 인상이 퍽 강해 주인공 46세 플로랑클로드에 바로 겹치더군요. 초반은 수다맨님처럼 ‘또 이 상태냐-_-...에효‘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요. 스릴러적인 게 있어서 초반 넘어가면 늘어지게 느껴지지 않아요. 재미 면에서도 메시지 면에서도 좋은 소설입니다.
이쯤 되면 우엘벡은 ‘서구 백인 엘리트 남성 넋두리‘ 대표 주자로 그게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도 같고요;

장정일, 마광수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런 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고 봐요. 두 사람 다 작품이 세련되지 못해서 더 그랬던 거 같지만 대중은 받아들일 준비조차 안 되어 있었죠. 지금 자본주의와 엮여서 팔릴 만 하니까 파는 거지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풍부한 교양이 뒷받침되어야하고 좀 세련되어야 하는데, 한국 작가들에게 이게 참 부족해요.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고 등단하면 밥벌이로 글을 쓰니 뭐가 제대로 나오기 힘들죠. 나이 들면 지치고. 이제야 퀴어 문학도 관심을 좀 받나 했는데 거기도 악재가 겹치고...

한국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문화가 강해서 내면적으로 외부적으로도 자기검열이 심하죠. 요즘처럼 속사포 공격받기 쉬운 환경에서는 더 몸사리게 되고요. 상과 상금이라는 물질적 욕심도 더러 보이고요. 전업작가로 먹고살기도 힘든데 대중의 눈밖에 나면 작가 생명 끝나니 눈치 안 볼 수 없죠. 장정일도 다른 쪽으로 방향 틀어 겨우 기사회생 했고, 마광수는 철저히 몰락.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문화의 문제라고 봐야죠. 역량 있는 작가들의 싹을 한국 문화 전체가 자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일본 경우,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작가들의 외설적인 소설이 저는 작품적으로 크게 뛰어나다고 보지 않거든요. 하지만 일본 문화는 그런 걸 다 품는 건 한국과 비교됩니다.

수다맨 2020-07-28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경직성과 배타성, 한국 대중 문화 경향은 크게 달라진 거 없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 등단과 작법에 몰두하지만 교양의 풍부함과 작품의 세련미는 부족하다는 지적에도 역시나 동의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에는 한국 문화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 변화를 이끌 만한 근본적인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창작 주체는 물론이고 이들을 인정(문단)하고 소비(독자)하는 집단에게도 나름대로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난망하네요.

프랑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우엘벡과 같은 (여기저기에서 돌팔매 맞기 딱 좋은) 작가를 그럼에도 인정하고 소비하는 경향이 저쪽에는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복종˝을 우엘벡의 작품군에서 가장 밀도가 떨어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책을 읽고 나니까 이런저런 걱정도 들더군요. ‘이런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가는 작가가 테러 당하는 거 아닌가‘ 헌데 우엘벡은 ‘정의‘나 ‘옳음‘ 같은 것들을 재인식시키는 소설보다는 ‘반동‘의 혐의가 붙는다고 하더라도 도발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작가 같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저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고요.

AgalmA 2020-08-01 00:04   좋아요 2 | URL
‘정의와 옳음‘을 말하는 소설은 많고 많아서 아예 그게 소설의 주제이자 지향점으로 굳어진 경향이 있죠. 미디어가 발달하기 전까진 글이 큰 사회적인 (고발) 목소리가 되어 왔으니까요. 지금 언론이고 미디어고 기레기 수준이니 <도가니>, <82년생 김지영>처럼 문학은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작가들이 당면한 좁은 틀은 섬세하게 잘 다루지만 넓은 스펙트럼으로 작품을 구축하고 있는가 하면... 글쎄요. 그런 소재 자체가 희박하고 감상적인 애국주의로 마무리되는 거 같거든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프랑스 경우였다면 김봉곤 작가 일이 그의 모든 책 절판 처리되는 데까지 가지 않았을 겁니다. 미셸 우엘벡이 실존인물을 가져다 죽이고 살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는 데도 다른 걸로는 소송까지 갔지만 명예훼손 소송까지 가지는 않았죠. 김봉곤 작가를 두둔하는 게 아니라 각 나라의 포용성에 대해 저는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의 큰 줄기는 두 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요.
1. 미투 운동, 페미니즘
요즘 보면 프랑스 공포정치 분위깁니다. 기존 남성질서의 반성 없음과 권력 선점을 뺏기지 않겠다는 저항이 커서 더 그렇죠.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싸움이죠.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취지와 활동에 동의하나 이 움직임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실린 거 같아 우려가 많이 됩니다. 그만큼 남성들과 반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니 갈등은 더 커지겠죠.

2. 인터넷 문화, 반지성주의
온통 몰려다니기 바쁜 sns 파이터, 유튜브 & 검색엔진 순례자 모습으로는 교양지식인은 커녕 나은 발전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 같은데 디지털문화가 앉은 채로 교양인 만들어 줄 거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 한숨이 절로 납니다. 배우려는 노력이 너무나 부족하죠. 먹고살기 바빠 책 볼 시간이 없다 말하는 건 지금 세대에겐 면피거리가 못 됩니다. 책이 편한 휴식거리로만 소비되어선 안 되는데 소비자, 출판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진화처럼 변화도 느리게라도 진행되는 거겠으나 ‘모두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수다맨 2020-07-28 14:52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의 고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요즈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고 심란했는데 달아주신 댓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 든든하기도 합니다.
이 블로그에 ThanksTo를 누르고 ˝세로토닌˝을 구매했습니다. 아갈마님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AgalmA 2020-07-29 12:17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함을 알아서 ‘고견‘이라 하실 만한 건 아닌 거 같고요^^;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생각 정리 기회를 가지게 돼 고마웠습니다. thanks to도 감사하고요!
저 때문에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시면 어쩌나 살짝 걱정도 되지만 우엘벡 작가 좋아하는 독자라면 큰 실망없이 읽을 책이라 생각합니다. 수다맨님 경우 <복종>보다는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추풍오장원 2020-07-31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의 대화만 봐도 배울 점이 많군요..^^
김봉곤 전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지만, 국가권력도 아닌 시장에 의해 책이 절판당하는 사회는 뭔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AgalmA 2020-08-01 00:43   좋아요 1 | URL
사회가 기준을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과정이고 숙의를 모은다면 좋은 결과도 낳겠지요. 장단점이 있겠습니다만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가 여론 형성으로 거칠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 같아 많이 답답합니다. 페미니즘이 피해자의 위치에서의 접근법이 되는 거 같아 그 또한 우려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