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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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상황에 대한 서술 스타일, 모오스브루거 살인 이야기 등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선생은 로베르트 무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특성 없는 남자』가 20세기 독일어 소설 1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으로 꼽히니 영향력이야 당연한 소리 아닌가 싶기도-.-)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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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2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거예요. 잡념을 말끔히 비워야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잡념이 있으면 마음은 초조해지고 몸은 자꾸 무얼 하려고 움직여요. 마음을 비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어요... ㅎㅎㅎ

AgalmA 2019-10-28 18:28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안 한다기에는 cctv 수준의 관찰과 많은 행보를 하고 있어요-_-);
명상이 그런 작용을 한다고 하지만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건 죽었을 때 뿐이죠;
 
[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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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는 뛰어난 에세이스트로서 문학을 일궈나가는데, 페터 한트케도 그렇다. 그가 초기작에서 서사성을 완강히 거부하려 했던 이유가 짐작된다.

[소망 없는 불행]
전쟁과 가난의 양차 곤경 속에 있었던 세대에 대한 탐구이자 그 속에서 소망을 잃으며 살았던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살펴보고자 한 한트케의 서술은 감성을 자극하는 쪽으로 흐르지 않아서 좋았다. 모든 세대가 자신의 부모 세대 이야기를 남기는데 지금 부모 세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이 남을까.

[아이 이야기]
한트케는 연극배우였던 첫 아내의 가출로 갑자기 아이를 기르는 상황에 처한다. 글쓰기만으로도 힘에 부쳤을 작가가 아이를 기르는 상황이라니^^;; 대작을 쓰겠다는 작가적 야심과 한 아이의 부양, 원하지 않게 부대끼는 일상 생활과 이방인으로서의 삶 속에서 한트케가 성숙한 작가이자 어른이 되는 성장담을 보는 것 같다.

얻는 게 없다시피 살았고 모든 걸 스스로 잃기로 작정한 어머니의 죽음(<소망 없는 불행>)과 모든 것이 새로운 딸의 탄생과 성장(<아이 이야기>)을 담은 소설이 수미쌍관으로 잘 배치된 듯도.

한트케를 읽으며 같은 오스트리아 태생인 로베르트 무질,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공통점도 느꼈다. 서사보다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철학적 사유를 문학으로 풀고 싶어한 점.
이 소설집을 읽고, 토마스 베른하르트 『소멸』(2008, 현암사, 절판, 부모님과 형의 부음을 받고 고향에 가 장례식을 치르는 사흘 동안의 일을 그린 소설), 로베르토 무질 『특성 없는 남자』와 비교해 보시라. 이들의 서술 스타일의 유사성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로베르트 무질이 사망한 해 페터 한트케가 태어난 것도 재미난 우연.


※ 페터 한트케 국내 출간된 작품 읽을 순서

1966년 희곡『관객모독』(2012, 민음사)
1968년 희곡『카스파』(1999년, 성균관대출판부, 절판)
1970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2009, 민음사)

그의 작품에서 주요 사건 배경이 되는
1971년 아내와 이혼 후 미국 여행, 그해 말 어머니 자살

1972년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2011, 문학동네)
『소망 없는 불행』(2002, 민음사)
시집 『시 없는 삶』(2019 신간, 읻다출판사)

1976년 『왼손잡이 여인』(2003, 범우사)
1986년 『반복』(2013, 종문화사)
1987년

『어느 작가의 오후』(2010년, 열린책들)

빔 벤더스 감독과 공동 작업한 영화 대본『베를린 천사의 시』(2003, Cinezon(씨네존), 절판)

     
1997년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2001, 문학동네)
2004년 『돈 후안』(지크프리트 운젤트 상 수상, 2005년 나왔다가 2019 베가북스 재판)

시기 파악이 잘 안 되는
『세잔의 산을 찾아서』(2006, 아트북스, 절판)

한트케는 최근까지 꾸준히 희곡과 소설,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는데 최신작은 국내에 소개가 안 되고 있다.
고전 외엔 독일문학이 한국에서 큰 인기가 없지^^;
빔 벤더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영화 시나리오 작업의 덕도 있었다고 보는데, 페터 한트케는 그나마 소개가 많이 된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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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28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를린 천사의 시> 번역본 있어요. 제가 이 책을 가지고 있어요. 영화를 보지 않아서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책 속에 영화 속 장면을 담은 사진 몇 점 실려 있어요. ^^

AgalmA 2019-10-28 18:35   좋아요 0 | URL
알라딘 DB에도 안 올라오는 귀한 자료를^^! 역시 cyrus님은 책수집가b
대본이겠죠. 이렇게 유명한 작품이 출간되지 않은 게 이상하긴 했어요.
주신 정보로 글 수정했어요^^
페터 한트케 주간에 리뷰 좀 올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ㅎㅎ
 
[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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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야기>

6.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7.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물건들은 무기처럼 비스듬하게, 악의를 품고 비현실적으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는 무기 창고 속에 무기가 쟁여져 있는 것처럼 공기 한 점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묶여 있는 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 속에서 어디를 보나 적대적인 무질서만이 있었다. 훨씬 나중 에야 비로소 그는 아이가 어질러놓은 잡동사니를 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심지어는 형편없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무질서 속의 질서를 깨닫고선 그 속에서 아이와 똑같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배웠다. 단지 자유로운 순간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만이 필요했다.

8.
그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지금까지 인류가 표현할 수 없고 또 생각할 수도 없는 구식의 어투로 말을 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던 것처럼 소리 죽여 울면서 맑고 빛나는, 뿌연 물기를 없앤 두 눈을 잠깐이나마 들어 보인다. 비참한 한 인간에게 그보다 그럴 듯한 위 안은 드물었다(아이는 나중에 ‘그땐 다른 도리가 없었으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그렇게 어른을 이해하고 가엾게 여긴다. 그와 같은 사건으로 아이는 처음으로 그의 이야기 속에 행동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후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때마다 그의 간섭은 이마에 이마를 대듯이 간단했고 경험 많은 심판관이 ‘경기 계속’을 알리는 표지처럼 매우 간결했다(그것은 이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다).

9.
(한때는 자신도 단체 생활에 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개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자기 같은 사람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자의에 의해, 작으나마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것을 만드는 데는 매번 근본적인 깨달음이나 전반적인 통찰이 무조건 필요했다. 그런 것 없이는 그에게 어떤 합법적인 혈연체도 있을 수가 없었다)

10.
아이에 대한 그의 기본 감정은 지금까지 느낀 어떤 애정보다 앞선, 무조건적이고 열렬한 신뢰감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갖기 이전에 그는 이 특정한 아이를 신뢰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이 잊어버렸거나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위대한 법칙을 구현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이는 그에게 개인 교사로 보이지 않았던가? ‘아이의 입’에서 어떤 특별한 말이 나와서가 아니라 단순히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 즉 아이가 구현하고 있는 인간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아이가 구현하는 인간 존재는 남자에게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아이를 객관적으로 존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영화관에서 페이소스라고 흘려 듣고 옛날에는 쓸모 없는 글이라고 대충 읽어버렸던 말을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실질적인 말이라 여기며 때때로 입에 올리곤 했다. 위대한 말들은 ‘역사적’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그 의미를 잃는다고 주장할 만큼 잘난, 뭘 모르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미몽에 빠져, 혹은 그저 무심함과 피로에 싸여 그런 말들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그런 말이나 하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았나? 누구와 함께? 그들은 또 별뜻도 없는 말을 하면서도 심하게 허풍을 떨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남의 일처럼 말한다는 것을 완전 히 잊었단 말인가? 공개 토론장, 일간 신문들, 텔레비전, 신간 서적과 가장 사적인 관계 등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표현들이 왜 천박한 말이 지니는 파괴성, 진부한 악취, 신성 모독성에다 영혼과 신경과 뇌를 죽이는 요소를 지니게 되었을까? 왜 사방팔방에서 속이 텅 빈 시대의 나태한 언어만이 울려 퍼졌을까? 어쨌든 남자가 비난을 많이 해왔던 위대한 말들을 하루하루 지나면서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이와 함께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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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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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1.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람들이 ‘난 내 자신을 느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할아버지께 무엇인가 배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할아버지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 몇 번으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2.
그래서 결코 시민적으로 평온해질 가능성이 없었던 정서 생활은 겉으로는 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모임의 시민적 체계를 서툴게 흉내 냄으로써 안정되어 갔다. 그 체계 속에선 ‘이러저러한 사람은 내 타입이지만 난 그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난 그의 타입이지만 그는 나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우린 서로 잘 맞아’라거나 ‘우린 서로 쳐다보는 것도 견딜 수 없어’라는 말들이나 상투적인 말들이 구속력 있는 규칙들로 간주되었기에 어떤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약간 주의를 기울이는 반응조차 모두 이 규칙들에서 벗 어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사실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

3.
이렇게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혀지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
이 두 가지 위험들은 — 즉 일어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위험과 한 인물이 시적 문장들 속으로 고통 없이 용해되어 버리는 위험 — 나의 글 쓰는 작업을 더디게 한다. 왜냐하면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평형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어떤 문학적 창작에나 다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는 사실들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무언가 허구로 생각해 낼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 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왜냐하면 이미 통용되는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서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소한 사건들 중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몇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4.
사사로운 걱정,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갈증, 무언가 하고 싶은 욕망, 단 한번뿐이라는 느낌, 먼 곳에 대한 동경, 성적 충동 등등 머릿속의 생각들이 어느 것 할 것 없이 역할이 뒤바뀐 듯한 전도된 세계와 함께 이런 의식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렸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노래를 같이 하자거나 춤을 추자고 요청할 때나 ‘자유 의지로’ 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내력과 감정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은 말[馬]과 같은 가축들에 관해 말할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숫기가 없어졌고 거의 말을 하지 않거나 약간 정신이 돌아버려 집 안 여기저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5.
기분 좋은 가난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완성된 궁핍. 얼굴의 모양새를 유지하려고 매일 노력을 하다 보니 그 얼굴은 점차 혼을 잃어갔다.
사람들이 형식 없는 궁핍에 더 편안함을 느꼈더라면 아마 최소의 프롤레타리아적 자의식에라도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 프롤레타리아는 한 명도 없었다. 있다고 해봐야 기껏 누더기를 걸친 날품팔이꾼이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완전히 폭삭 망한 사람들은 창피해했을 뿐이었다. 가난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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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보다가
어떤 기시감에 다른 작가의 어떤 책이 생각나 급 주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미로...휴
페터 한트케, 역시 재밌는 작가는 아니야(도리도리)













1.
블로흐는 극장에서 몸을 뒤로 기대고 앉아서 그랬듯이 지금은 앞으로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관중들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극장에서처럼 그는 영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막 경기장 조명이 켜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흐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는 야간 경기에는 서투른 골키퍼였다

2.
나시마르크트로 돌아와 가게들 뒤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텅 빈 과채 상자들을 보고 있자니 재미있는 익살을 보는 듯했다. ‘무언(無言)의 위트!’ 하고 생각했다. 블로흐는 무언 풍자극을 즐겨 보았다. 위장된 또는 과장된 행동의 인상은 — ‘배낭 속에 심판용 호루라기를 넣어 다니는 그런 과장된 행동.’ 하고 블로흐는 생각했다. — 희극 배우가 길을 지나가다가 고물가게에서 우연히 트럼펫 하나를 집어 들고 시험 삼아 불어 보면서 이 트럼펫과 다른 물건들을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재인식하는 영화 속 장면을 보자 비로소 사라졌다. 그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3.
"이거 가치가 있는 겁니까?" 하고 물으며 윗옷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내 탁자에 놓았다. 주인은 돌에 손도 대지 않고 그런 돌은 이 지역 도처에 널렸다고 대답했다. 블로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인은 돌을 집어서 손바닥에 놓고 굴려 보다가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블로흐는 곧 나갈 요량으로 돌을 집어넣었다.

4.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이상해져 버렸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비교할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 그는 땀이 났다. 동전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침대 밑으로 굴러갔다. 귀를 기울였다. 비유인가? 그러고는 잠이 들었다.

5.
블로흐는 흥분했다. 단면의 안쪽에서 그는 개별적인 것들을 점점 분명하게 보았다. 그가 본 부분들이 전체를 위해 서 있는 것 같았다. 또다시 그에게는 부분들이 문패처럼 생각되었다. ‘조명 문자 광고’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귀걸이를 한 여종업원의 귀를 모든 사람을 위한 신호로 보았다. 옆 탁자에는 어떤 여자의 핸드백이 약간 열린 채 놓여 있어서 그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물방울무늬 두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뒤에서 커피 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가끔 잡지의 그림을 보면서 재빠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아이스크림 그릇이 탑처럼 쌓여 있는 모습은 주인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고, 옷걸이 아래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은 그 위에 걸어 놓은 우산에서 흘러내린 물이었다. 블로흐는 손님들의 머리를 보는 대신 손님들 머리 높이에 있는 벽의 지저분한 부분을 보았다. 그는 여종업원이 벽 조명을 끄기 위해 지금 막 잡아당긴 더러운 줄을 보고 기분이 들떠서 — 밖은 다시 더 밝아졌다. — 이 모든 벽 조명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는 빗속을 걸어 다닌 탓에 머리도 아팠다.
부담을 주는 개별적인 것들은 그들의 외형과 그들이 속해 있는 환경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씩 이름으로 불러 보고 이 명칭들을 외형에 대한 욕설로 바꿔 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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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6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6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