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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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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물리학자들보다 실제 탐사연구자라 확실히 구체적인 설득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분자-원자 구조 생물체인 인간 이성의 한계 또한 보여준다. 물론 칼 세이건은 훌륭한 과학자다. 그가 용매가 필요없는 생물, 전자기호적 생물 상태를 얘기할 때 좀더 파고 들어가주길 바랐지만 칼 세이건은 언질로만 끝맺었다. 그는 실리적 존재방식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기에 당연한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존재 방식은 여전히 이론에 불과하다. 과학의 절대명제인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괘변적 과학자나 미치광이 사이비 종교가가 되기 쉽상이니...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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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스포있으니 안보신 분은 통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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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떤 우주조종사인가에 따라 <인터스텔라> 영화의 의미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어떤 시간대를, 어떤 비행 노선을, 어떤 도킹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텐데, 그것은 '선택한 과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늘 그걸 말해왔다.

 

 

§§

널리 알려진 고대 그리스 격언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 입구 현판에 새겨진 문구다. 소크라테스의 격언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사실이 아니다. 현재 위키백과에는  이 경구의 출처로 6명을 거론하고 있다. 스파르타의 킬론,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아테네의 솔론, 밀레투스의 탈레스가 그들이다.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에서 라블레는 킬론의 격언으로 거론하고 있다. 

인간처럼 그 기원이 불명확한 '너 자신을 알라'는 언어로 만들어진 우주선이다. 나는 이 우주선에 탑승한 상태에서 <인터스텔라>와 도킹하게 됐고 예상치 못한 인셉션에 빠졌다. '아니, 이건! … 아니, 이건! … 아니, 이건….' 계속 그 상태로 3시간 내내 부들부들 무슨 전기충격요법을 받는 듯이. 게다가 블랙홀 이름은 왜 가르강튀아로 만들어가지고 어휴. 어제까지만 해도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은 무수히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신나게 말했다가 이렇게 우주 폭풍을 만날 줄이야;

라깡, 니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 쉽지 않은 리좀 산맥을 돌아다닐 일거리가 생겨버렸다. <코스모스>도 다시 들춰봐야되고... 정리가 언제 어느 정도 될 지 미지수. 친절하게도 <인터스텔라의 과학>이 나와 있으니 일거리가 좀 수월할지도. <솔라리스>가 렘의 원작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것과 달리 <인터스텔라>는 킵 손과 협력이 잘 된 모양이다.
어쨌거나 내게 이 영화는 우주과학도, 사랑도, 지구종말의 구원 얘기도 아니었다.

<인터스텔라>는 인간 기원이라는 영원한 물음이 매트릭스화된 세계였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1972)는 상징계 속의 분열을 보여줬다. 법, 질서가 와해된 솔라리스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죽음(자살/살인/희생 어떤 형식으로든)과 은폐는 인간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두 영화 곳곳에서 당신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두 영화 다 주인공 아내의 빈 자리를 설정해뒀는데, 인간이 모태상실 속에서 오이디푸스적 현실과 만난다는 상징계 분석과도 맞아떨어진다. 인간의 위치는 이미 일어난 일이자 항상 무언가를 좌충우돌 해결해야 되는 '머피'(자아)이자 '쿠퍼'(초자아)였다.

 

다르게는 쿠퍼를 '오뒷세우스'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전쟁 후 귀향(일리아스)했다가 다시 길을 떠나는(오뒷세이아) 두 번의 여행을 거친다. 오뒷세우스, '미움을 받는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그는 결코 안주할 수 없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쿠퍼도 온갖 역경 끝에 (우주시대이므로 위치가 바뀐)고향과 자식에게 도착하지만 원형적 모태 '브랜트 박사'를 찾아 다시 떠날 수밖에 없다.

 

 

§§§§

"생명의 기원, 지구의 기원, 우주의 기원,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인간과 우주와의 관계 등을 밝혀내는 일이 인간 존재의 근원과 관계된 인간 정체성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ㅡ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리가 우주로 가고자 함은, 인식과 시간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존재론적 정복과 다름 없다.

인간 내에서 어떻게 완벽하게 인간을 조망할 수 있겠나. 지구에서 우리는 이 한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중력' 때문에. 이 과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원죄는 '중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밖을 그토록 원하게 된다. 인간이라서 신을 찾듯, 삶이 있어 죽음을 향하듯.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신은 죽었다'를 21세기 어법의 영화로 선언한 셈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에게 답을 주는 것은 '유령'이거나 '외계인'이라 불렀던 차원 너머의 인간이다. 우리가 神이라 부르던 그 영역에서 온 존재는 바로 인간이라는 것, 이 설정은 SF 영화에서 제법 제기되었지만 <인터스텔라>는 가장 완성도높은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 무훈 같은 <인터스텔라>의 끝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아주 오래된 물음도 같이 출발한다. 첫번째 전쟁을 성공시켰던 '사랑' 또한 시공간을 움직이는 인간내 중력 중 하나일 뿐이다. <인터스텔라>는 미래에서 보기엔 원시적인 방정식에 불과하지만, 동시대 인류인 내가 보기에 인간 근본에 대한 처절한 사투임은 분명하다. 

 

 

ㅡAgalma

 

 

 

 

 

 

 

 

 

 

 

솔라리스 행성처럼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인터스텔라> 속 행성들

 

 

 

 

 

<솔라리스> 오프닝씬에서 불가해한 신비처럼 펼쳐져 있던 숲

 

 

<인터스텔라> 인간의 마지막 생명줄인 옥수수 밭

와, 이 밭 위로 날아가는 무인정찰기를 따라 차를 몰고 들어갈 때 기절할 듯 좋았다.

머피가 막상 잡혀버린 무인정찰기에 대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시 보내주면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쿠퍼가 그 쓸모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하던 장면은 정말 '인간다운'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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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타르콥스키 솔라리스와 램 솔라르스 둘 다 접했지만 둘 다 뛰어난 걸작입니다. 램은 카로큽스키 영화 보고 성질을 냈다고 하지만, 이살 솔라리스만한 영화도 걸작이죠. 아직 인터스텔라를 접하지 못했네요. 아직도 극장에서 하나요

AgalmA 2015-01-02 17:41   좋아요 0 | URL
네, 걸작들이죠. 이견없어요^^.
상영관 아직 많아요. 디지털로는 어렵지 않게 보실 거예요. 시간대는 이제 좀 뒤로 밀려난 감이 있지만요. 전 아이맥스로 한번 더 보려고요.

고양이라디오 2015-11-18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맥스로 보셨나요? 전 <인터스텔라> 아이맥스로 봐서 너무 좋았어요ㅠㅠ

아~! Agalma님 저도 옥수수밭 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 정말 너무 신나고 좋았어요!!!

리뷰 너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AgalmA 2015-11-20 08:28   좋아요 0 | URL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놓쳤어요; <그래비티>는 아이맥스만 보고...영화관에 두 번 가는 게 은근히 어려워요.
아, 옥수수밭 씬 때문에 아이맥스를 진짜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ㅜ

고양이라디오 2015-11-20 10: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인터스텔라 한 번 더 보려했는데 안되더라고요ㅠㅋ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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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해석들에 반, 아니 불만스럽다.
(수전 손탁<해석에 반대한다> 다시 읽어봐야 되는데...)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
1차 감상자들 반응은 엽기, 폭소, 조롱으로 끝. 라블레가 서문에서 주의를 줬는데도 그런 답밖에 못 가져가다니 애석한 일이다. 애들 때만큼이나 참 똥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순수니 본능이니로 위장하지 말기를, 언제나 해석은 독단과 불확실성을 야기한다.
2차 독해자들 또한 역시나 라블레가 서문에서 주의를 준, 플라톤 [국가]2부에서 나오는 개처럼 그 속 골수만 빨아먹으려는 자세다. 바흐친, 카니발리즘, 르네상스와 위마니슴...대단한 알레고리가 그 속에 숨어있어야만 한다!는 듯이 그 자체에서만 무언가를 얻으려는 독법. 독자들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맞나 싶다. 왜 자기 해석은 없고 기존 이론에 대입하려고만 하는가. 정치적 대입은 그나마 현실적 접근은 해보려고 한 것 같다.
3차 독해자들이 보이지 않는 게 내가 눈이 어두워서인지 모른다(사실은 찾기 귀찮아서). 역시나 내가 논문을 쓸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내 생각의 단편만 남긴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16C)과 후대 작품인 <걸리버 여행기>(18C초), 사드(18C 후반) 비교분석이 요구된다(17C <돈키호테>와는 비교재미는 없을 거 같은데... 칭송하는 고전들이니 서구에서는 여러모로 분석했을 거다. 뭘 발견했을까) 라블레 저서는 금서가 많이 돼서 당시 파급력은 강하지 않았을 거 같지만 작가층에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을 거 같다. 후대 작품이 각 시대 사조로 인해 어떤 걸 더 표방해 발전했는지 비교해볼 지점이 있다. 계몽주의 추종자였던 사드는 해학과 웃음보다 사디즘으로 발전했다(당연히 라블레처럼 금서 조치) 조만간 <걸리버 여행기> 원전번역을 읽어봐야 할 일거리가 또 생겼다. 취미생활 맞나.

라블레가 의사였던 만큼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과 현대의 몸철학, 현상학 관련해 달리 살펴볼 수도 있다. 몸을 통해 세계를 보는 작가의 인식들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가, 요즘 내가 작품을 볼 때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밀란 쿤데라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에서 왜 전립선 비대증 오줌싸개 칼리닌을 통해 칼리닌그라드를 구축했는지, 칼리닌그라드는 왜 이름이 바뀌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는지, 작가의 의도가 흥미롭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밀란 쿤데라는 라블레적이다. 소련에 대한 풍자. 전체 작품의 카니발리즘적 기조. 그가 자신의 작품 주석과 해설을 거부하는 것 또한 라블레가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서문에서 밝힌 바를 계승하고 있는 것 같으니 관련지어 생각할 수 밖에. 나는 이런 괘변적인 비교들이 재밌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에서처럼 행동으로 극단의 재미를 추구할 순 없지 않은가. 토마스 만 최근 번역작 <뒤바뀐 몸과 마음>도 이런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워 장바구니~ 토마스 만 <마의 산>,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 그의 소설 많은 부분이 병을 통한 신체 관찰-정신 흐름의 고찰이다.

<가르강튀아ㅣ팡타그뤼엘>은 여러모로 대입해 볼 것이 많아 작품 속 내용보다 더 생동하는 작품이다. 500년 전 사람이 이렇게 현재적으로 즐겁게 만들다니, 역시 소설은 놀랍다.
현재 한국엔 위무를 위한 작품보다 이런 작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격이라 해도 생동하지 못하고 고여있다. 단지 시대분위기 때문일까. 안주하려는 생각들을 자꾸 깨워줄 장치들이 많아야 한다. 울며 위안만 해서는, 똥만 보고 조롱하다 끝나서는 이 현실에서 어떤 맷집도 키울 수 없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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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1-08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르팡디아를 초등학교 때 읽었습니다. 삽화 많은 어린이용 가르팡디아였습니다.
물론 어린이용 축약본이기는 하나, 그때 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AgalmA 2015-01-08 16:54   좋아요 0 | URL
곰곰 생각하는 발님과 참 어울리는 작품이죠. 이 책 읽을 때 곰곰 생각하는 발님 문체가 오버랩이 되기도 했어요 ㅎ 어릴 때부터 본인 취향을 제대로 아셨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9 09: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그렇습니까 ? 얼른 사서 봐야겠네요. 기억은 안 납니다만. 하여튼 무지 많이 먹고 무지 많이 똥 싸고.. 뭐 그런 내용만 기억이 납니다.

AgalmA 2015-01-09 13:25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곰곰 생각하는 발님이 라블레를 엄청 좋아하셔서 그런 문체이신 건가 했을 정도. 원작 꼭 보세요. 곰곰 생각하는 발님의 잃어버린 형님 만난듯 반가울, 아니 닮아서 싫을래나ㅎ 잊지마세요. 나랑 한몸 같은 작가 만나기가 그리 쉬운가요.
 
우리 시대의 비극론 경성대문화총서 15
테리 이글턴 지음, 이현석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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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폭주하는 기관차가 아니라 비상용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것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현명한 격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서론의 문장에서, 나는 이 책이 우리가 쉽게 비극 속에 동화되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주리라는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통섭의 겸비 뿐만이 아닌 문체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되는 비평가는 흔치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흔히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빌 브라이슨 기타등등에게서 그 성마르게 꼬집어대기 좋아하는 문체 때문에 나는 얼마나 펼쳤다 덮길 반복했는지(단순히 좋다, 싫다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성질의 김수영을 비롯한 많은 부류도 즐겨 읽으며, 블랙유머들도 재밌어 하는데, 어째서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중단할까,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이렇게 또 모호해지는 취향. 취향이 편향이 되고 다시 편향이 취향이 되는, 분류들, 분류들)
하여간 이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희극 측에서 보낸 자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극의 창시자, 대가들, 작가, 모든 비극 논평자들을 색출하여 담백하고 예리한 논박을 가한다.

-헤겔의 비극이론은 안티고네에 너무 의존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에 지나치게 의존했듯이.
-월터 카우프만은 고전 시대의 이론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고통만을 비극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발을 자르거나 눈알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사소한 문제들은 비극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살 때는 비극적이지만, 과거를 회고할 때는 희극적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표현하듯 ˝키에르케고르에게 비극성은 무한과 싸우는, 그래서 무한에 따라 측정되고 무한의 척도에 의해 판단되는, 유한이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개신교도라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무한 앞에 서면 언제나 잘못된 존재다.
-고통의 공동체에서는 상처, 분열, 적대감이 공통 화폐로 유통된다.
-비극은 사회 질서나 법질서의 의미 지평을 보여주는, 다시 말해 사회 질서나 법질서가 침묵과 무의미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 일종의 초월적 거점 구실을 한다.
-나는 비극이 우리의 관습적 지혜에 도전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그 도전에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숭상하는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 포함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유주의적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가?

테리 이글턴의 기지 넘치는 지견들은 시종 통쾌한 반성을 끌어낸다. 나는 왜 이 책을 이렇게 늦게 펼치게 된 거지. 올해의 비극을 잊지 않으려고.

이 땅의 이 시대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예전엔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시대가 파편화된 만큼이나 시각도, 논제도, 가리키는 방향도 너무 국지적이기만 하다.
삶이라는 댓가가 너무도 무한하다. 동시에 쓰러지는 꺾어짐들...우린 그것을 보고 비극이라 말하고 덮을 게 아니라 달려가 살아남은 것이 없는지 하나하나 끝까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비극`이란 단어를 섣불리 쓰지 않는 법, 제대로 쓰는 법은 단단히 배워둔 셈이다.
그럼에도, 비극은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 같다고, 그때 우리의 처지는 죽음을 무릅쓰고 헤엄쳐 나가야 하는 것인지, 기적의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지, 사실은 이 모든 게 내 상상계 속 막을 수 없는 사태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지금의 나는 말한다. 이 책에 끼워두는 2014년의 내 서표인 셈이다. 이 책을 덮고, 또다시 펼쳐 읽을 땐 또 어떤 서표를 끼워둘 지 궁금하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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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죽었다 했지만 여기선 여전히 서정시로 맘을 달래고, 대공황기 이후 독재와 파국의 길로 들어서던 그 시기는 기어이 다시 왔고....다들 라이타를 만지작거리며 눈치나 보고 있는데 형국이 참 묘하군. 한국아, 대문 열어두고 낡아빠진 파시즘으로 안방, 부엌 분간도 못하고 푸닥거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다.... 사회민주주의라.......암튼 책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르동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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