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따져 묻는 말투지만 이것은 고진에게 따지는 말투임;)

 

 

§  [흔적님 서재]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글 관련 단상

고진의 입장은 사르트르의 참여문학과도 비슷한 듯 보입니다. 두 사람 다 사회성을 너무 강조했달까요.

소세키의 '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발언은 김현 평론가의 '문학의 무용성으로서의 힘과 역할' 입장과 반대 입장이네요.
"근대"라는 접두어가 붙은 문학의 종언은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근대 문학의 시대는 사라졌죠. 그런 성질(계몽성, 사실주의 기타 등등)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러한 근대 문학의 고발성을 성격으로서 가진 채, 현대문학은 '개인(주체)'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게 되었고, 다른 꽃을 피워 나갔죠.

지금 인쇄매체 신문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 외 소통 창구의 다양화가 왜 문학의 종말론으로 선고받아야 하나요. 인쇄로 인해 책과 문학의 활성화가 있었으나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그 이전에는 위대한 문학이 없었느냐 아니잖습니까. 도덕성을 강조하지 않은 문학들이 무용했느냐 아니잖습니까. 즉, 문학에게 사회성의 '요구'는 할 수 있지만 '강요'하고 '단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사회성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 사회성에 갇히는 겁니다.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문학의 본질들을 밀어내는 척력이 될 겁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점은, 일본과 그리 입장이 다르지 않은 한국은? 일본의 장르소설이 요즘 왜 이렇게 인기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들여다 볼수록 문제는 복잡해지기 시작하죠.

 

여하간 저는 고진의 발언이, 굉장히 (일본 가부장적 권위의식이 짙게 배인) 엘리트주의적인 선언이며, 시스템과 형태가 본질을 좌우한다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은, 문학이 법을 만드는 데 기여는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법이 되어서도, 무사나 시녀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개인화 문화처럼, 일본의 사소설, 장르소설의 활성화는 그러한 과도한 요구의 반대급부로 파생된 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요.

고진이 어떤 철학적 기반으로 문학을 상정했는지 추적하진 못한 채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은 우려스럽지만, 이 포스트에서 거론된 것을 놓고 말씀드리면 고진은 '문학'과 '문학성(질)'에 대한 걸 너무 하나로 뭉텅 그려 일반화 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밥이 없으니 밥그릇이 아니라는 논리.

 

맨 앞에 고진에 반기를 든 문학평론가의 발언을 너무 짧게 가져오셔서 논의하기 좀 그런데요. 그 문장의 맥락상으로는 문학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좀 걸립니다. 그분이 '무엇이', '어떻게'에 대한 확실한 근거나 단초를 제시하셨나요?

 

제 요지는,
겉으로 드러난 "문학부", "사회성"의 쇠퇴 같은 외부적 탐지가 '문학성(질)'까지 착복해 문학 전체를 평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발표 당시에는 몇몇에게만 알려진 '카프카'가 왜 지금 이렇게 신화가 되었는가.
거기서 우린 문학의 힘을 볼 수 있었고, 그렇기에 문학은 예측하기 힘든 최종적 발화점일 겁니다. 불길이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불이 지금 안 난다고 해서 불 자체가 없는 게 아니듯.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단 하나라도 문학이 남는다면, 그 힘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인류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

무거운 주제인데, 이러다 논문 쓰겠어서 갈무리...

이 생각은 지금의 제 단상으로 여기 둡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을 진지하게 읽은 뒤 반드시 재고하겠습니다.

아아, 갈 길이 태산....

 

 

 

ㅡAgalma

※ 댓글이 너무 길어져서 내 서재에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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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3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

이 책도 그렇지만, 저도 문학 글쓰기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혼동하기 쉬운데, 글과 문학은 다릅니다. 문장만 잘 쓴다고 해서 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구분이 어렵다고 하지만, 대개의 글에서 우리는 콩트, 산문, 에세이, 논문 이상이 아닌 글을 직감적으로 압니다.
에너지, 문학의 힘이 나오려면 자가발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걸 가차 없이 그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돈, 건강, 애인, 가족, 나!까지도 우열 없이 집어넣는 작심(作心)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짜는 그렇게 해야 나오는 것이지만...) 정말 그러라는 소린 아닙니다; 제가 당신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니;; 능력껏, 소신껏.
아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글을 밑줄 긋기로 발췌한 것처럼, 막연한 읽기/쓰기/경험은 아무짝에도(너무 심하잖아! 조, 조금은 도움이) 쓸모가 없습니다. 발전소가 우르르쾅쾅대다가 잠잠해지다가 문득 혜성처럼 공이 날아오죠. 그 날아오는 순간 연필이든 펜이든 스마트폰이든 재빨리 붙잡고 같이 놀기 시작해야 합니다. 공을 받긴 받았는데, 이, 이걸 어떻게 하지 하다가 (대개 잃어버리지만) 기념으로 책장 한 편에 끼워 둬서는 먼지 쌓여가는 책 꼴밖에 안 납니다.
내가 처음 걷고 밥숟가락 들기 시작해 사람 꼴을 갖춰 나갔듯이, 좋아하는 글을 흉내 내기부터 해 보십시오. 그리고 작아진 옷을 버리듯이 또 가차 없이 자가발전소에 버리는 겁니다. 필요한 옷과 음식과 쉴 곳을 구하고 살듯이, 그렇게 책도 구하고 생각씨름을 하고 잠도 같이 자고 함께 사는 겁니다. 상상의 연애와 실제 연애가 다르듯이, 공상의 글쓰기와 실제 글쓰기도 그렇게 달라지게 됩니다.

문학 글쓰기는 출퇴근 개념이 아닙니다. 유명 작가들이 글 쓰는 시간은 따로 둔다 겸손한 듯 우아하게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죠. 머릿속에 숨겨둔 발전소는 어쩔? 달리면서도 글 생각, 얻어맞으면서도 이건 소재다! 글 생각, 자나 깨나 글 생각. 자면서도 아이디어가 생겼어! 벌떡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켜는 사람들이 작가입니다. 폴 매카트니처럼 잠결에 Yesterday를 작사하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죠. 우리가 그리도 원하는 로또잖아요! 하지만 꿈인가 생시인가 하다가 이 느낌은 뭐지? 이걸로 뭘 할 수 있지?(이 생각이라도 나면 다행) 우물쭈물 하다보면 공은 우주로 멀리멀리 날아가는 거죠.

작가란 무엇인가 뒷조사 작전에 골몰할 게 아니라 내게 날아오는 공을 봐야 되는 일입니다. 붙잡았다고 게임이 끝나는 게 아니죠. 송구도 해야죠. 공이 고래가 되어 헤엄치며 날아가게 될 때, 자신의 문학이란 야구게임을 즐기게 되는 겁니다. 그 고래는 다시 돌아오지 않죠. 우리는 또 공을 잡고, 고래를 꿈꾸는 허만 멜빌이나 헤밍웨이(너무 거창한가;)가 되는 겁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계속;


아, 내 공 생각하다 왜 남의 공 걱정... 난 늘 이게 문제야...

 

 

ㅡ Agalma

 

※ 다카하시 겐이치로 책들 정말 재밌죠-_-)b

 

 

 

 

 

 

 

 

 

 

 

집중적으로 수많은 소설을 읽는다(이건 분명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합니다. 충분히 실천해주십시오. 하지만 그저 읽는 것만으로는 연습이 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위의 사항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한다(이것도 위와 마찬가지).
무엇이든 좋다, 일단 쓰기 시작해본다(올바른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기억이라는 것은 흠씬 얻어맞은 개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움직이거나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주려고 했다가는 ....... 휘익 도망쳐버리거든요! 일단 도망쳐버리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에밀과 탐정들> 에리히 케스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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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1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5-03-3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활기를 말했는데 김사과가 그런것 같아요, 그 분노의 포효요~

2015-03-31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3-3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생각에 떠오른 걸 늘 메모해두는 습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되도록 자세하게. 생각을 복구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AgalmA 2015-04-01 00:17   좋아요 0 | URL
일기쓰기도 정말 중요한데, 요즘 북플하느라 이만저만 손실이 아닌 듯 합니다!
서재 리뷰식 글쓰기는 쓰기 시작하면, 일정한 규칙이 자동 작동돼서(작동 버튼 안 눌렀는데! 누구냐, 넌!! 이런 상황-_-;) 일기처럼 자유롭게가 안돼서 말입니다...

수이 2015-03-3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_ 어렵습니다 ㅎㅎㅎㅎㅎㅎ

AgalmA 2015-04-01 01:1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한번 읽어보세요. 금방 읽혀요. 딱딱한 글쓰기 책도 아니고, 겐이치로가 비유가 좀 독특해서 그렇지 작가들 특유의 두루뭉술도 아니니까요. 야나님은 평소 독서 많이 하시니까 이 책의 챕터별 소제목만 따로 정리해봐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 책은 오히려 어느 정도 글쓰기 감은 아는데, 잘 안 풀리는 사람들에게 새학기 기분을 전하는 책이랄까 그랬어요.^^ 저도 이 책 덕분에 기분전환이 좀 됐어요. 역시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실망시키지 않는다능!

수이 2015-04-01 09:55   좋아요 0 | URL
글쓰기 관련책은 어쩐지 오들오들 소름이 돋아서 잘 읽지를 못해요;; 그래도 아갈마님이 소개해주셨으니까 도서관으로 뒤적뒤적 하러~

cyrus 2015-03-3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쓸 땐 그냥 막 써보면서 어느 정도 완성되면 그때 퇴고를 해요.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머뭇거리면 시간만 아까워요, 케스트너의 말처럼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

AgalmA 2015-04-01 00:39   좋아요 0 | URL
제일 첫단계죠. cyrus님이야 글쓰기 책을 따로 읽으실 정도가 아니시니^^;
이웃분들이 기초적인 건 대부분 아실텐데, 좀 민망하군요;
전 이 책을 읽으려고 하는 분께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리뷰를 쓰긴 했는데, 이거 참;

오쌩 2015-04-0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정말 어려워요ㅠ
책을 읽다보면,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눈만 점점 놓아지는 것 같아요.
평생독자로써만 살게될듯 ㅎㅠ

AgalmA 2015-04-01 01:37   좋아요 0 | URL
아까 흔적님 서재 가보니 독자는 작가의 상속자다! 그 말이 콱콱ㅎㅎ
내 기준과 내 능력이 늘 어긋나니 참 어려운 일이죠~_~;;

오쌩 2015-04-0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을 거쳐간 작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분들 책 열심히 사서 읽어야죠머 ㅎ

AgalmA 2015-04-01 01:38   좋아요 0 | URL
어, 이거 재밌겠네요! 북플 작가세계 e-book 절찬판매중~ ㅋㅋ 알라딘에 또 쫄래쫄래 가서 건의해야 되나...에이, 알라딘 와서 할 일이 너무 많네!
자, 다같이 씁시다. 그 날을 위해ㅎ!!
 

 

 

 

 

 

 

 

 

 

 

 

 

 

 

 

 

 

 

§ 모두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 눈을 너무 오래 감지 마 … 음악들이 다 날아갈 때까지만 …

 ■ 섹슈얼리티라는 낱말은 1800년대에 생물학과 동물학에서 기술적인(technical) 용어로 존재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적인 혹은 성을 갖는 것의 성질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 것은 19세기 말경이다.(p57)

 킨제이 보고서 같은 각종 성문화 조사가 과학적 담보로 특정한 성적 관행의 자질에 대한 도덕적 반감은 중화(p65)시켰을지언정,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남녀평등’, ‘성 해방이니 하는 말들이 나는 불평등만큼이나 문제적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담론화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여성의 이권다툼이나 남성 공격만 일삼는 페미니즘으로 치부되기 일쑤고, 남녀노소불문하고 사회적 인식 저반도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앤소니 기든스가 미국의 러빈 조사와 관련해 말한 부분인데, 미국만의 상황으로 보이지 않았다.

■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들을 성적으로 손에 넣기가 보다 쉬워졌다는 사실을 환영하며, 장기적인 성적 결합관계에 있어서는 지적·경제적으로 동등한 파트너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빈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남성들은 그러한 선택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 의미에 대해 분명하고도 뿌리깊은 불안감을 보여준다. 남성들은 이제 여성들이 친절하게 해 줄 능력을 상실했다거나 더 이상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한다, 여성들은 아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남성들은 평등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평등이 그들에게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p40)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다한국남성들이 동남아로 신부를 구하러 떠나듯이 한국여성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 사회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까. 여성 비하 사이트의 인구가 2배는 증가하리라. 왜 누군가의 결혼(연애) 못함이 누군가의 콧대 높음 등으로 치부되는가. 같은 식으로 반대로 생각해볼까. 여성들 경우는 자신의 못생김/ 뚱뚱함을 고민한다. 상식이 없거나 넘어서는 사람(남/녀)은 과연 일부일까. 신부를 구하러 떠나는 사람들의 권리 만큼이나 거부하는 사람들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결혼은 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자 선택 문제이다. 왜 사회적 눈초리로 억압하는가. 이 억압들은 온갖 모습으로 도처에서 도깨비들처럼 출몰한다. 피해자이면서 왜 울면서 사과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알기싫다 - 122b. 광범위한 책임전가:성폭력을 소비하다]

  http://www.podbbang.com/ch/7585?e=21643417

 우리는 이런 소식들을 너무도 들어와서 일반화하고 슬슬 회피한다.

 모두는 정말 사랑과 공존을 원하고 있는 걸까. 서로를 인간으로, 남성/여성으로 존중하고 있는 걸까. 관계의 목적성(연애, 경제적·사회적 안정, 결혼, 자식 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랑을 원하는 만큼 상대에게 얼마나 이해와 배려를 하고 있을까.

  ■ 현대 이전의 유럽에서 대개의 결혼계약에 기초가 된 것은 서로 간의 성적 매력이 아니라 경제적 상황이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결혼은 농업노동을 조직하는 수단이었다.(p77)

 낭만적 사랑 복합체가 가진 내재적으로 전복적인 특징은, 사랑과 결혼과 모성의 결합에 의해, 그리고 진실한 사랑이란 일단 발견되기만 하면 영원하다는 관념으로 인해 오랫동안 억눌러져 있었다. 결혼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영원했던 때에는, 낭만적 사랑과 성적 파트너쉽이 확실히 구조적으로 적합한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종종 오랜 불행의 나날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결혼하기 위한 맹세로서의 사랑과 일단 결혼한 이후 계속해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요구 사이의 연관이 워낙 빈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실질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임노동을 남편의 영역으로 배당하고 아내에게는 가정을 배당한 성별 분업 덕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점잖은여자라는 표시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결혼에 감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남성들로 하여금 싹트는 친밀성의 영역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동시에 또한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도록 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p87~88)

  

§§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 그녀는 언제까지 거기 있을까

 

 

 

 

 

 

 

 페미니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내게 가장 부각된 점은 인물들(에리카의 어머니-에리카/발터 크레머-에리카)관계의 삐뚤어진 에고이즘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치를 떨었던 조국의 그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에리카의 어머니는, 에리카를 부와 명예를 거머쥔 예술가로, 부재하는 남편으로, 자신의 주택부금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3장 낭만적 사랑, 그리고 다른 애착들에서 '가부장적 권력의 완화에 따른 모성의 발명' 언급이 적확하다)

 

 

 에리카의 제자인 발터 크레머는, 고고해 보이는 에리카가 늙은 어머니에 붙잡혀 사는 노처녀 신세라 자신을 거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제 열정에 취해 집요하게 접근한다. 그는 자신의 상상을 충족시켜주기는커녕 훼손시킨 에리카에게 혐오와 폭력으로 되갚아준다. 발터 크레머는 다재다능함, 출중한 외모와 젊음, 활력적인 스포츠를 영위하는 자신의 외면적 삶에 취해 스스로가 에고로 가득 찬 마초라는 걸 모른다.

 

 

 에리카는, 어머니와 불분명한 꿈에 얽매여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채 자라나, 발터가 나타나자 이제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길 바란다. 그녀는 평범한 사랑으로는 발터를 붙잡지 못한다는 걸 알고 영구적인 애착관계를 만들어내려고 그에게 S/M을 권했지만 결국 파멸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3장 낭만적 사랑, 그리고 다른 애착들에서 여자에게 요구되는 정숙한(Chaste)’의 신화가 얼마나 견고한 지 잘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굳이 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드라마와 영화, 소설, 유행가를 통해 익히 안다. 하지만 앤소니 기든스가 '낭만적 내러티브와 열광적 소비자'로 여성만을 지칭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바로 위 발터 크레머도 만만치 않은 예이므로.)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성적 가학성 아래 자기 본래가 있음을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지만 그녀 또한 상대를 지겨운 어머니’, ‘얕잡아보는 제자’, ‘질투 나는 여자애’, ‘더러운 터키인등으로 바라보는 왜곡을 보지 못한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은, 자기 결여 충족만 추구하고 상대에겐 철저히 이기적이다. 그들에겐 모정으로 치장된 폭력’, ‘예술 뒤에 숨어 가하는 폭력’, ‘사랑이라 말하며 복종을 원하는 폭력의 감정계산만 있고, 성찰이 없다.

 이 소설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자전적 소설인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아픈 사실이다.  

 

 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으로 돌아와,

 그는 푸코가 성()을 담론화한 기여도는 인정하지만, 성을 종교-(생명)권력 구도하의 피지배적 혹은 행정 권력 관계성으로만 파악하고 개인의 제도적 성찰성, 선택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 경우는 '도착' 등의 과도한 병리적 해석이 있긴 했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개인이 자기 정체성과 신체에 대해 더욱 성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 프로이트의 중요성은 그가 성에 대한 현대적 몰두를 설득력있게 정식화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프로이트는 섹슈얼리티와 자기 정체성의 연관관계가 전혀 분명하지 않았을 때 그러한 연관을 밝혀냈고 또한 동시에 이 관계가 문제가 있는 것(problematic)임을 보여주었다.(p66)

 

 앞서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의 외부적 굴절들과 사회적 문제점들은 내부적 억압에 대한 성찰 없이는 해결 모색은 어려울 것이다. 힐링에 이어 심리학 저서들이 이토록 많이 출판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 스스로도 이미 이 문제에 심층적으로 고심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지만, 모두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바쁘다. 나부터도 너무나.

 

 

§§§ ……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 시간도 좋다.

말이 좀 없으면 더 좋으련만.​

나다운 건 말이 있는 거였던가, 없는 거였던가.

 

아무려면 어때. 곧 날아갈텐데 ……​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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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5-03-25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네크는 그렇다쳐도 미카엘 하네케의 s/m은 오버하는 편이 있죠~

AgalmA 2015-03-25 11:05   좋아요 0 | URL
미카엘 하네케가 그런 부분이 좀 있잖습니까^^; 오히려 전 라스 폰 트리에가 이 영화를 찍었다면 님포매니악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라스 폰 트리에가 찍었으면 더 하드했겠죠;

네오 2015-03-25 11:14   좋아요 0 | URL
네,,라스 폰 트리에,,음,,저는 굉장히 그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님포매니악은별로지만,,안티 크라이스트는 대단했거든요,,뭔가 여자한테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그의 주장이 합리적이지는 않지만,,남성들이 느끼는 괴로움을 잘 말해주는 것같아요~

AgalmA 2015-03-25 11:31   좋아요 0 | URL
저도 라스 폰 트리에 작품 불편하긴 하지만 그 작가정신에는 팬입니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부터 본격적으로 주목해온 감독이었습니다.
저도 말씀하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저는 라스 폰 트리에와 김기덕을 자주 연관시켜 생각해보게 돼요. 김기덕 감독이 라스 폰 트리에만큼 자연스러움을 획득한다면 싶은 게 늘 제 아쉬움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분도 많지만ㅎ;)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에게 저혼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네오 2015-03-25 11:43   좋아요 1 | URL
네,,저도 브레이킹 더 웨이브부터 그를 굉장히 좋아했어요,,다른 영화들은 두 세번 보지만,,그 영화를 본지 꽤 됐지만 단 한번도 다시 쳐다보지는 않았거든요,,원경험의 기억이 부서질까봐요,,정말 베스 그 주인공이 뭔가 계속해서 숭고해보였다고나 할까요,,말이 안돼잖아요,,남편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해서,,정말 그렇게 하기는요,,예수같은 이미지가 있다고들 하죠,,그녀에게서요,,마지막에 참 하늘에서 그럴줄이야!!,,전 잘모르겠더군요,,김기덕과 트리에의 연관성을 그들의 작품을 다 봤지만 그런 느낌을 든 적이 단 한번도 없었죠,,다만 트리에는 예술적이면서도 종교적이면서도 남성우월주의자같기도 한데 김기덕은 아직도 여전히 잘모르겠어요~

AgalmA 2015-03-25 13:11   좋아요 0 | URL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 대한 생각이 저랑 똑같으시군요! 저도 비디오테입까지 애지중지 모아놓기까지 하고선 절대 다시 안봐요. 비디오테입도 빌려줬다가 못 받는 불운까지 겪어 제겐 더 비운의 작품...아끼는 건 역시 빌려주는 게 아니다는 교훈마저 배운 작품입니다ㅎ
트리에와 김기덕은 몇몇 작품의 편차는 있겠으나 성과 폭력과 종교를 끊임없이 연결시키는 감독들이죠.

네오 2015-03-25 12:29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세요?

AgalmA 2015-03-25 13:39   좋아요 0 | URL
언제나 끌리고 강한 물음을 주는 건 타르코프스키, 알랭 레네, (빔 벤더스, 짐 자무시, 레오 까락스- 이들은 제게 늘 묶여서 생각됩니다)입니다.
영화에서 아이디어, 작법, 영상의 훌륭함도 중요하겠지만, 세상과 인간의 내면을 보는 그들의 태도와 시선을 좋아합니다

네오 2015-03-25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좋아하는 영화감독들이 영화관의 의자를 침대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감독들이긴 하죠^^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신다길래 결국 그는 영화를 통해서 뭘 말하고 간걸까요? 그냥 저는 과격하게 절망을 남기고 갔다고 생각하는 데요,,뭔가 화면안에서만 이뤄지는 `희망`이 그 가상의 세계를 뚫고 나와 뭔가 현실세계에서는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레네나 밴더스, 자무쉬, 까락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고요,,보편적인 통념이 아니고 개별적인 사유이니깐요,,기왕 영화감독 나왔으니,,래네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그가 가지고 있는 계몽적의식이고나 할까요,,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관이 아니면 뛰쳐나오고 싶더군요,,벤더스는 그런대로 참을만은 하죠,,그야말로 그는 아메리칸 락정신을 계승한 유럽감독이니깐요,,그렇게 미국을 좋아하는 감독은 뿌리칠수는 없죠,,,자무시는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고,,2000년 들어와서 그의 모든 영화가 재미있었습니다,,카락스는 이번 홀리 모터스를 보고 지지를 보내고 싶지는 않더군요,,나쁜피같은 영화를 또 만들었으면 좋게는데 말이죠,,이유는 영화의 본질을 캐고 싶겠지만 너무 산만하더군요,,그리고 지금 제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입니다,,21세기 미국역사룰 이렇게 잘 이야기해주는 영화에 대한 매혹이라 할까요,,

AgalmA 2015-03-2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말씀하신 부분들에 공감이 쏙쏙 되네요.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평은 저도 정말 그렇습니다. 현실세계로 절대 넘지 못하는 것을 감독은 계속 가져오려고 한 것 같은 느낌. 아마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한 채 인생이 끝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네, 벤더스-자무시-까락스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라 좋아합니다. 그 지극히 개인적인 탐구 끝에 어떤 보편적 깨달음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종교가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었죠. 아, 그러고보니 이 꾸러미에서 구스 반 산트를 빼먹었네요!
ㅎ 알랭 레네의 계몽성 공감합니다.
저도 홀리 모터스에는 절대 좋은점수 줄 수 없겠더라고요ㅎ 예전의 밀도를 잃고 아이디어에만 골몰해있었다고나 할까. 정말 뛰쳐나가고 깊었던; 왕년 인기로 제 영화목록 왕좌를 지키시기에는 위태해지고 있죠.
허트로커 스타일 보다 저는 코엔형제가 다루는 미국 관점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흥미있어 하는 감독은 정성일 평론가가 적극 밀고 있기도 한 위라세타쿤, 왕빙 감독과 자비에 돌란, 스티브 맥퀸입니다.
혹시 미국 거주 중이신가요?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시각이나 미국에 대한 관심도로 봐서 한국에 거주하는 느낌이 아니신 듯 느껴져서요.

네오 2015-03-25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서울에 있고요, 구스, 코엔,왕빙,돌란,위라세타쿤 좋아합니다만 맥퀸의 세임 정말 좋아합니다, 본질을 터치한것 같아보였거든요, 고독, 외로움, 인간의 그 우울한 심정들요~

AgalmA 2015-03-25 14:36   좋아요 0 | URL
오, 서울이시군요. 네오님의 방대한 관심이 즐겁습니다. 셰임 정말 좋죠. 헝거도 만만치않게 좋았고요. 말씀하신대로 정말 본질을 아는 감독. 이런 시각으로 여성과 세계를 읽는 한국의 여성감독도 있었으면 하는데, 기다림이 참 길어집니다.
노예12년은 못봤는데, 믿을만한 감독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네오 2015-03-2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노예12년 저는 딱 한 장면이 마음에 들었는데, 내가 영화를 보는것을 확 날려버리게 했어요~ 음 예전에 질투는 나의 힘을 만들었던 박찬옥 감독이 제일 비슷하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지금 막 떠올라지 않아서 그러데 아 미스 홍당무의 이미경도 이런 카테고리가 아닐까요,

AgalmA 2015-03-25 14:57   좋아요 0 | URL
맥퀸이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죠ㅎ
박찬옥 감독은 홍상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할 겁니다. 이미 그런 정서이더라도 예술세계를 직시한다면 비슷한 둘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본인이 더 잘 알테니 괴로울 겁니다.
미스 홍당무도 좋은 작품이죠. 허나 제게는 소품 정도로밖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임순례 기타 주류 여성감독도 제겐 여전히 한계를 넘어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여성 감독들은 여전히 남성세계사에서 비판하는 소극성, 장식성, 관계 애착, 가족사, 한국적 봉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장점도 되지 못하고 있고요.
영화현장의 어려움 이해는 하지만, 여성이란 걸 떠나 예술가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이 절실해 보입니다

네오 2015-03-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러면 남성세계사가 아닌게 뭐죠? 음,,저에게는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네요 그러데 저는 장식성은 조금은 너무했고 소극적이고 관계애착 가족과 여성이 같이 붙어있는 콤보를 더 선호해요~

AgalmA 2015-03-25 15:24   좋아요 0 | URL
제가 너무 비판일색이었나요;
많이 깨졌다고는 하지만, 유대와 관계성에서 안주하는 여성특성(장점이자 핸디캡)과 자라온 이 환경에서 결코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죠. 영화판의 무수한 타협들을 넘어 성장하기도 힘든 상황들도 있고요.
자신만의 예술을 구축한다면 남성세계사니 뭐니 하는 건 신경쓸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필름영화 시대보다 좀 나아진 상황이니 개인의 역량을 좀더 펼치길 기대 걸어보기도 합니다. 여하간 힘든 일이죠...

네오 2015-03-25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러면 어떤 영화가 나오기를 꼭 집어서 희망하나요? 저는 남성의 특징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는 하지만 캐서린 비글로우를 지금 현재 어떠한 감독들보다도 좋아하거든요,,유대성과 관계같은 것들이 뭐 남성을 통해서 비춰지지만요,, 예전에는 영화의 진리가 브레송, 오즈, 브뉘엘, 로메르처럼 만들지 않으면 되게 시시하게 봤죠,,거의 브레송에게는 홀릴정도로 몇년동안 온 정신을 팔릴정도로 그의 세계관이 저의 신념을 지배했을 정도니깐요,,아마도 이건 제가 토스트예프스키의 열렬한 사생팬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일것 같아요,,제말의 요지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여성이 뭔가 열정적으로 할수 있는 계기가 있으면 잘하는 데 그 레퍼런스들이 아직은 남성이 건축한 프레임들로 넘치기 때문에 한계성도 지니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죠,,이거는 제 잘못된 생각일수도 있지만 그들이 결코 여성을 이해한것 같아보이지는 않아요,,남성감독들이나 소설가들요,,매우 불행한 일이긴 하죠,,시대가 낳은 천재라고 불리는 버지니아 울프도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고민을 가지고 우울증까지 걸릴정도니깐요,, 그녀가 속한 블롬즈 남성멤버들은 잘 나갔죠,,희대의 불세출 경제학자이신 케인즈 같은 인물은 이제는 나올수 없는 거물이니깐요,

AgalmA 2015-03-25 15:53   좋아요 0 | URL
저도 브레송은 단번에 홀렸습니다. 시네마토그래프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기도ㅎ 하지만 결국엔 그 지나친 억제성은 어떤 심각한 결여로 진단되었습니다.
프레임에 갖혀있는 여성들에 대한 파악은 저도 매우 공감합니다. 비글로우의 허트로커는 제게도 그렇게 비쳤는데요. 영화가 남성전쟁터를 배경으로 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지만 감독이 남성의 전투복을 입고 싸움을 하러 들어간 듯한 영화적 모습 역시 프레임에 갇혀보였어요. 그래도 일말엔 기대했는데, 허트로커 이후 제로 다크 서티도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제시카 차스테인의 역할 딱 그대로죠.
실비아 플라스, 까미유 끌로델, 프리다 칼로...비운의 예술가들 또한 작품은 탈출시켰지만 본인들은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죠.
어떤 영화를 나오길 기다린다기 보다, 좋은 작품은 제게 오는 순간 그것이 제가 기다렸던 작품이라는 걸 알려주더군요^^

네오 2015-03-2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레송은 정말 뿌리칠수 없는 제안을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는 수도사이긴하죠^^ 당나귀 발타자르를 어마어마하게 좋아하는데요,,음,,그냥 여성이 가련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네요,, 단지 영화보는내내 당나귀의 눈과 그녀의 손과 슈베르트의 음악이 자꾸 왔다갔다하면서 그러한 쇼트들이 사이렌의 손길로 느껴졌어요,, 그의 배우의 모델론도 격하게 찬성하는 편입니다,무표정과 책을 읽는 듯한 발성 모든게 진실된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야기는 다르지만 맥락만 놓고 볼때 잔다르크영화의 계보중에 드레이어, 브레송의 연결고리는 아마도 고다르의 그녀생을 살다의 드레이어의 잔다르크를 보면서 흘린 나나의 눈물로 여기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해요..그 순수에 대한 갈망같은거요,,최근에 두편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내일을 위한 시간과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였습니다,,뭔가,,영화가 후져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래고 괜찮은 영화같덨군요,,그리고 알라딘서재에서 영화에 관한것이라면 맥거핀님이 독보적인 존재일것입니다,,저도 영화선택 할때는 꼭 비평문 읽어보고 참고하거든요,,정성일, 이동진, 김혜리, 허문영, 유운성 이제는 진부해 보이더라고요,,영화평도 동어반복적이고,,그리고 요새와서 든 생각인데,,그냥 영화는 아무렇게나 봐도 상관없다는 게 제 최신 애티튜드입니다^^

AgalmA 2015-03-25 16:02   좋아요 0 | URL
저도 브레송의 쇼트 처리가 언제나 현대적으로 보여요^^ 드레이어-잔다르크 보고 싶었는데 놓쳤어요ㅎ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도 예매까지 했다가 밖을 못나가는 바람에;
그렇군요. 저도 당장 맥거핀님께 달려가야겠군요 ㅎ
요즘은 비평들 제가 본 이후 참고합니다.
제 사유 속에서 영화를 해석한 이후 저와 다른 방식의 해석을 보는 식으로.

네오 2015-03-2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제 사유 속에서 영화를 해석한 이후 저와 다른 방식의 해석을 보는 식으로.˝라는 말에 좋아요 꾸욱 누르고 갑니다^^

AgalmA 2015-03-25 16:04   좋아요 0 | URL
댓글 수정했는데;;;
네오님과 대화 유쾌했습니다^^

AgalmA 2015-03-25 16:53   좋아요 0 | URL
좋아요가 두 번은 안되는군요;; 네오님의 섬세함 잊지 않을께요 :)

양철나무꾼 2015-03-25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영화로도 일가를 이루시는군요.
전 이 페이퍼를 보는데 이상하게 찰스댄스의 `라벤더의 연인들`이 생각났어요, ㅋ~.

AgalmA 2015-03-25 16:52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관심이 많아 이러저러 얘기가 나온 거죠. 네오님도 참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대화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고요^^
라벤더의 연인들 못 봤는데, 피아노와 바이얼린~ 오, 저는 음악 영화는 무조건 좋더라고요. 기억해둘께요^^* 감사
 

 

 

 

 

 

 

 

 

 

 

 

 

 

 

 

 

 

 

 

 

 

 

 

 

 

 

 

 

§ “사람만이 내게 완전한 타향”(블랑쇼, IC 60)

내가 라고 말할 때 그 단어, 그 개념 속에 나는 얼마나 들어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일상언어로 쓰는 ’, ‘죽음’, ‘는 우리가 돈을 주고받듯이 매개이다. 언어는 대상과 사물을 대체함으로써 그것을 지워버린다.

네가 아프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아픈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정확히는 모른다.

이런 경우도 있다. “당신은 인정머리가 없군요.”, “당신은 천사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 안의 반대 성향을 되짚어보게 된다(맞아, 나는 천사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선 할 말이 없으므로 생략). 이처럼 나와 너에 대해 아무리 많은 특징들을 가져온다 해도 부정확하며,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익명화되며, 개체성을 상실한다. 같지 않으면서 같아지는 우리.

도대체 나는 어디 있는가.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할 문제인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가능한 친구이다. 친구와의 관계는 언제나 불가능성과 함께 한다. 이 속에서 사람은 무력해지며, 이때의 소통이란 아주 먼 미래에는 서로 구별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개별 존재들의 소통이 더 이상 아니다. , 소통은 개개인들을 욕망의 깊숙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한데 뭉치게 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소통은 융합을 확인하는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거부하는 운동으로, 어떠한 보증도 확실함도 없는 운동으로서 홀로 나타난다.(F 96) (p 228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인간을 이름없는 존재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소, 문학

 

당신은 당신을 대신해 말해주고 행동하는 주체를 문학 속에서 찾는가. 블랑쇼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 모두는 그 속에서 사라지는 자이다. 인간에게 언어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익명성’, ‘부정성’, ‘부재에 핵심기제이다. 언어와 죽음이 함께 소용돌이 치며 말하고 있는 장소, 문학. 인간은 사는 내내, 죽는 순간까지 죽음을 사유하는 이상한 생물이다. 지식과 밥과 자식과 타인과 자연과 문학, 세상의 모든 것이 죽음 사유의 연료로 쓰인다 

■  194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블랑쇼가 쓴 모든 글은 우리가 죽음과 맺는 관계를 계속해서 반성하고 이 문제로 되돌아간다. 어찌 보면 우리는 문학이 요구하는 바를 따를 때 죽음을 경험한다. 물론 이때의 죽음은 누군가의 소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미성'이나 주체성의 한계를 묻는 질문으로서의 죽음이다. 글을 쓰는 것은 언어의 익명성에 노출되는 것이니, 인간 주체의 파멸과 소멸은 문학의 조건이다.〔언어의 익명성이란, 언어는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없으므로 특정한 이름 아래 귀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현대 대중 사회의 한 특질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인 익명성과는 다르다. 블랑쇼는 언어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해도 문학도, 죽음 앞에 처한 인간도 익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성찰로 나아갔다. 그가 언어, 죽음, 문학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제시한 익명성, 비인칭, 중성성은 블랑쇼가 일찍부터 탈주체적 시각을 앞세워 사유해 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비인칭과 중성성이라는 용어는 언어의 본성에 관한 성찰을 중요시한 블랑쇼의 사유를 잘 반영하고 있다.〕(p22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현실에서는 는 죽지 않으며, ‘어느 누군가가 죽는다.’(SL 241)

죽어가는 일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 각자가 개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익명적이고 비인칭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 자신과 나를 갈라놓는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달리 말하자면, 죽어간다는 불가능성과 맞닥뜨릴 때 나는 나를 가리켜 라고 말하는 힘을 빼앗긴다. (p102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니체에게서 물려받은 화두이자 블랑쇼가 글 전체에 걸쳐서 고민해 온 것은, 생소하며 이물스럽고 겉보기에는 의미 없어 보이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 실존의 유한성이었다. 우리의 실존은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드는 힘 있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의 이름 없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수동적인 인간 존재이다. (p230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 공동체 없는 이들의 공동체

내가 아플 때 더 아픈 사람 앞에서, 내가 행복할 때 더 환한 사람 앞에서 겸양을 배운다.

바닷가 물결들의 흔들림과 시장 사람들의 오고감은 그래서 닮았다.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파도소리와 말소리는 그래서 닮았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왔다가 사라진다. 너는 네가 아닌 채 말하고 써야 한다고.

주체라는 추상적 보편 관념으로 축소되지 않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공동체가 추구한다면 또 다른 언어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를 모두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진실에 다가가는 비변증법적 글쓰기가 그것이다.(IC36) 이 언어는 정치적 참여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적 참여의 언어이다. , 언제나 세상 속 인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 것이지 오락거리가 아니다.

세계의 바깥과 잇닿는 것이 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가 반성적인 인간 행위의 총체로 이해되는 한, 나아가 일어나는 모든 일이라고 이해되는 한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1921) 1장에서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한 바 있다., 세계의 바깥이란 완전히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실존의 의미를 소모해 버리지 않고 세계 안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우리 자신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끔, 문학은 우리를 인도하면서 참여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글쓰기의 소통 속에서, 개별적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개별적 존재는 앞서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별 존재는 그 자체의 진실, 그저 진실이 된다. (ICN 78)

(p209~210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참여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블랑쇼와 동시대를 함께한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 속 '참여문학' 를 떠올린다. 두 사람의 자유’, ‘혁명의 기본 논지는 비슷하나 그들이 문학을 보는 입장과 방향 모색은 판이하다. 사르트르는 문학의 직접적 정치 개입을 논하며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켰다. 블랑쇼는 나의 세계에 불쑥 등장한 타인은 내가 이 관계를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경험을 ”(p221) 필연적으로 낳으므로, 문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는 간접적 참여와 비참여를 통한 정치 개입을 논했다.

이러한 입장 차는 아직도 건재하다. 당신은 어떤가.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을 뜻하는 공산주의는 정치 경제를 지키거나 현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과 대립한다. …… 공산주의는 약화된 영구한 혁명이다. ‘약화된이 붙은 것은 완벽한 상태를 가져오는 영광스러운 혁명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공산주의는 정치제도들이 제도화되려고 하는 것을 계속 중단시키는 정치체제를 지향한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기존 공동체에서 내쫓긴 정치성을 사유하며, 조금 난해한 표현이긴 하지만 블랑쇼가 바타유를 따라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공동체 없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 신화로 회귀하지 않는 정치체제의 수립. 바타유와 블랑쇼가 생각하는 공산주의는 최종적인 구원을 약속하지도, 사람들의 어깨에서 정치의 무게를 벗겨 주지도 않는다. …… 문학은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혁명적이다. (p218~219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나는 어떤 나라, 어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든 중요하지 않다. 문학이, 작가가 유명세문고본으로 재단된 상품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기원한다나는 최소한의 입장으로 작품을 순수히 만나길 바란다. 그때 나는 오성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작품과 친교를 나눌 것이다. 문학은 내게 영원히 열려있는 우정을 허락하는 타인이다.

내가 왜 그간 카프카, 말라르메, 바타유, 들뢰즈, 바르트,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 낭시, 아감벤의 글을 접하며 즉각적인 공명을 느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공동체 없는 공동체로서 서로에게 말하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저작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

나는 모리스 블랑쇼의 비평집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과 소설 기다림 망각, 죽음의 선고등을 읽었다. 문학의 공간은 몇 해마다 한 번씩 다시 읽는 책 중 하나다.

그의 저작 독서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책은 문학의 공간, 카오스의 글쓰기, 무한한 대화일 거라고 생각한다.

무한한 대화(1969)는 미출간 중인데, 카프카, 파스칼, 니체, 브레히트, 카뮈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으며,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대한 화답이라고 한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속에서 논의된 '죽음', 죽음과 타자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해 들어간 저서이기도 해서 국내에 반드시 출판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난해한 주제라 국내 출판이 언제 될지 알 수 없으나 , 그린비 출판사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 기획에 이 책도 꼭 넣어주길 바란다.카오스의 글쓰기보다 형식상의 실험이 더 확대되었다고 하니 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에서는 이 책이 출간된 2008년 당시까지 국내에 소개되었던 모리스 블랑쇼의 작품들을 짚어주고 있어 도움이 된다.  카프카와 베케트를 떠올리게 하는  「또마, 알 수 없는 사람」 , 「목가」도 놓치지 말아야 할 소설이다 

내 생각에는 블랑쇼 소설부터 접근하기보다 모리스 블랑쇼의 주요 비평집부터 읽고, 그 시기의 소설을 찾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자는 게 아니라, 저자가 사라지는 딜레마를 이해하고 나 자신의 부재함도 인정하기 위해서.  

 

나는 다른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 변화나 정치적 행동들 등등.

이후는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느끼면서 알아가야 할 책임임을 밝힌다. 모리스 블랑쇼를 읽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故 모리스 블랑쇼(1907~2003)

 

Agalma

 

 

 

블랑쇼와 레비나스. 그의 은둔적 성격 탓에 남겨진 사진이 없어 희귀 사진이라고 한다. 이 책의 표지사진으로 쓰였다.

 

 

오, 은둔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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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18 1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여긴 비옵니다.
비가와서 더 좋은...
울적한 일 뿐인데..
빗소리 하나로..좋답니다.단순하긴...

AgalmA 2015-03-18 19:05   좋아요 1 | URL
네, 여기도 비요.
때론 많은 걸 공유하면서 때론 침묵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 자주 느끼는 것 같아요. :)

양철나무꾼 2015-03-18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짐작만 할뿐이지 모른다~라는 구절에 찔려서...ㅋ~.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받기 위해서, 좀더 정확하게 헤아림을 받기 위해서,
적어도 아프면 아프다고 명확하게 자신의 통증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할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너는 아니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건 머리로의 얘기일뿐~, 통증을 느끼는 부분은 머리 끝에, 내지는 가슴 어딘가에서부터 뻗쳐나오는 더듬이 한자락일 뿐이니까요~.
비가 오네요~, 이 비 하나를 놓고도 누군가는 있으라고 오는 이슬비요, 누군가는 가라고 오는 가랑비로, 이름을 달리하니까 말예요~.
내 삶의 주인공은 나예요. 소리내어 아프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공유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세상이랍니다~^^

AgalmA 2015-03-19 04:29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 지레 찔리셨네요ㅎ 전 의도한 바 전혀 없습니다^^
그게 문제인게요. 1007개의 눈과 537개의 비를 얘기해도 더많은 눈과 더많은 비가 또 있을 거란 말이죠. 결코 정확할 수 없고 우리의 최대치는 짐작과 공감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라는 주체로서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려 할 때 상대는 축소되죠. 블랑쇼는 그래서 타자 앞에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일 수밖에 없다 말한 거겠죠.
나라는 주체는 환상일 뿐이라는 블랑쇼에 저는 공감할 뿐이고요...
이슬비, 가랑비은 무슨 동시 같네요. 이 말은 좋다는 뜻입니다! 요즘 워낙 말 오해가 잦아 부연설명이 길어져서 휴, 힘드네요;

수이 2015-03-18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갈마님 서재 출입을 끊어야겠어요. 읽고싶은 책도 사고싶은 책도 너무 많아요. 흑 ㅠㅠ 근...데 레비나스가 제 상상 속 인물과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어서 깜짝 놀라고말았습니다;;;;

AgalmA 2015-03-18 21:22   좋아요 0 | URL
히히.. 그래서 저도 고민이 많아요.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게 이 부분에서는 좋은 듯ㅎ; 요즘은 메모도 잘 안 해요. 머리속에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으면 결국 읽게 되니까요.
노년의 레비나스는 레비나스 같이 생겼던데요ㅎ; 블랑쇼와 레비나스의 우정은 참 특별한 듯. 블랑쇼는 처음엔 우익쪽이었는데,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생각의 전환을 많이 해갔죠. 2차세계 대전 땐 유태인이었던 레비나스와 가족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말이죠. 서로 분명히 다른 생각 차가 있었음에도 우정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야나님과 저도 그런 친구가 되어 보아요~ 서로 논쟁할 여지는 없어 보여 극적인 우정은 안될 거 같지만요ㅎ;;

수이 2015-03-19 10:04   좋아요 0 | URL
극적인 우정_ 은 싫어요 호호호호호_ 그냥 저는 오롯하게 팬심으로만 :)

[그장소] 2015-03-18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어~ 어쩌면 자주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요즘은 안다..알고있다는 것의 경계를..다시 짚어야 겠다고 생각할 정도니까요.^^

[그장소] 2015-03-18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전에 제 장바구니 갔다가 깜놀했어요.
블랑쇼가..들어앉아있는겁니다.
언제 넣었지?원래 보려고 했나? 아님..우리 통했나...? 순간..진저리같이
소름이 스윽~... 아마도 무심결에 Agalma 님 책 보고 제목에서 확 끌렸고 내용도 더없이..그랬을 테죠..작용 반작용..마냥..
넣은 기억도 없이..있는 책.
암튼 . 데자뷰같기도하고 묘했어요.
ㅎㅎㅎ

AgalmA 2015-03-18 21:47   좋아요 1 | URL
제가 블랑쇼 관련 글을 몇 개 올리긴 했죠^^ 헌데 블랑쇼는 문학 분야에서 거의 전설이라 그장소님도 읽어야 할 생각은 늘 가지고 계셨을 겁니다.
저도 가끔 읽었던 책 또 사는 일명 서재병이 있어서 일단 책을 사기 전에 여러 모로 살펴볼 일이 많아졌어요. 요즘 개정판이 유행이니 제목만 바뀌어서 나오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죠;;

[그장소] 2015-03-18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이름은 아니고 요즘은 병같아요..^^
아는책도 가서 책장을 몇장 넘겨봐야..
아..언제 쯤 읽었구나..기억이 나요.
몇 권은 희미하게 기억하니까..얼굴을 알겠죠..최근엔 이 이름을 꺼낸 적 없다는..Agalma 님 방에서..?! 그 생각은 또 못한...뭐든 기원이라면..님이..원인일거라고..^^!

AgalmA 2015-03-19 04:01   좋아요 0 | URL
모두 흥미로운 신간 얘기들인데, 저는 옛날 책들 찾아 읽으니 웬만한 서재가들은 식상할지도요 ㅎ

오쌩 2015-03-1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죽음이라는 주제가 철학적 성찰에 대한 충동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것 같아요.
음악 잘들었어요,비오는날 들으니 마음이 안정되는것 같네요ㅎ

AgalmA 2015-03-19 13:41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인 이상 철학자든 작가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산맥이죠. 프로이트도 마지막까지 죽음충동-성충동에 천착했잖습니까...
헌데, 블랑쇼는 기존의 철학들이 죽음을 해석하고 지배하는 것에 강력히 반발했죠.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 많은 사례들을 거론하며 철학자들이 죽음을 마치 잘아는 듯이 말하는 관념적인 죽음의 앎에 대해...

바벨의도서관 2015-03-19 0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나스가 하이데거를 계승하면서도 강력히 반발했던 부분이 죽음에 관한 것이었죠. 내 안에 있는 전부를 다 빛 아래 드러낼 수 없듯이,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도 없고 다가설 수도 없는 미래의 사건을 마치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끌어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죽음을 선취해 자기 삶을 기획 투사한다는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블랑쇼와 레비나스는 그런 점에서 닿아 있군요. 저도 그린비의 책들 참 좋아합니다. 이해 여부는 둘째치고(ㅡ,.ㅡ) 표지를 비롯 만듦새가 썩 튼튼하고 기품있잖습니까. ㅎㅎ 어쨌거나 Agalma 님 굿모닝~ !

AgalmA 2015-03-19 13: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바벨의 도서관님/ 말씀하신 부분이 레비나스와 블랑쇼가 공유하는 윤리 문제죠. 그 속에서 또 레비나스와 갈라지던 블랑쇼...미로 속 미로 속 미로... 끝도 없는 듯한, 그러나 분명 그런 길이 있다는 걸 발견하는 신기한 체험들의 연속입니다ㅎ
그린비 출판사 표지도 좋은 거 같아요. 블랑쇼 표지 컨셉도 적절한 거 같고요.

2015-03-19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19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 돌이킬 수 없는.

어딘가에서 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알지 못한 채 밥을 먹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너무 뒤늦게 알게 된다. 유나[*]는 죽었다. 나는 아프게 밥을 먹었다. 배는 부른데 아픔은 가시지 않는다.

 

 

[*] <그것이 알고 싶다>(976, 열아홉 소녀의 사라진 7, 2015. 3.14)

 

   

 

§§ 우리의 인격은 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싸우고 난 뒤에 드러난다.

언제나 나는 내 의견의 관철이 아니라 다른 시각과 풍부한 관점이 모이길 바랐다. 나는 의견 충돌 정도로 생각했지만 상대는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이후 내가 좋아요나 댓글을 달면 글을 바로 삭제하고 다시 올렸다. 내 마음 상함 보다 상대의 마음 상했음을 존중해주고자 시일을 기다렸다. 어느 날 그가 새 이웃으로 등록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 모르는 새 그는 이웃을 취소했다가 다시 이웃 추가를 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위해 다시? 상황이 어찌 되었든 이제 서로 잘 지내보자는 건가 싶어, 나는 싸움이 되지 않도록 의례적인 댓글이나 좋아요로 동조와 관심을 보였다. 그의 분노는 여전했다. 내 좋아요가 달리자마자 그 글은 사라지고 다시 새 글이 등록되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간발의 차로 다른 이웃의 좋아요가 같이 달리면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다른 이웃과 덕담을 나누는 그의 모습은 ……. 인간 사회에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위신을 위해 이웃 취소 부탁드린다는 비밀댓글을 남겼다. 일말에는 내 오해이길 바랐건만, 그는 내 비밀댓글을 시원스레 지우고 나도 지웠다. 상대가 끝까지 괘씸하게 굴어서, 비밀댓글로 달지 말 걸 그랬나 뒤늦게 생각했다.

안타까운 건, 그가 격찬하는 예술과 문화가 그의 인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는 점이다.

하필 13일의 금요일에 절정이었다.

 

 

   

§§§ 자화상의 무용성.

 

좋건 싫건 나는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림의 추구를 놓아버린 뒤 나는 색이 사라진 내 세계를 바라보는 천형을 겪는다. 20년 전의 그림들은 집안 구석에서 곰팡이의 안락한 거처가 되어가고 있다. 그림들 속에 숨겨놓은 숨은그림찾기 목록을 나조차 잊어가고 있다. 내가 붙인 제목도 생각나지 않다니!

 

 

 

요즘 컬러링북이 유행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무엇을 마주하고 찾게 될까 궁금하다. 단지 잡념을 잊거나 작은 성취, 자랑을 하기 위해서라면 아쉬운 일이다.

스케치의 구도와 데생력도 그렇지만, 색에서도 그 사람의 중요한 심상이 바로 드러난다. 색의 변환을 시도할 때조차 문체처럼 색의 구조성은 따라다닌다. 그것은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며, 그러므로 그림은 그의 말할 수 없는 부분의 현현이다.

어제는 그림을 그리며 손과 어깨가 하나로 뭉쳐 보였던 게 충격이었다. 색도 잃고, 선의 구분도 잃고, 마지막에 남는 것을 과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그것이 나일까. 세상엔 무수한 추상이 있지만, 내가 바란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음에도.  

 

 

 

 

에피쿠로스 학파는 내 절망에 대한 것을, 이 사회가 왜 이미지와 사물을 탐식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일 수밖에 없는가를, 이미 기원전부터 말하고 있었다.

영상들은 항상 자신과 꼭 맞는 허공의 길을 찾는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바라보고 말한다. 별자리가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이름붙이고 바라보듯이.

현재 스펙타클 사회를 논하며 비판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 시장경제 체계는 외적 발화점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또다른 체계로 바뀌든 우리 의식의 메커니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 개개가 공동체와 선(善)의 의지를 부단히 세워나갈 때, 이 의식의 무소불위와 대적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조화와 파괴의 각축...

내 실패와 좌절을 바라보듯이 세상 또한 그렇다.

 

 

 

Agalma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ㅡ 에피쿠로스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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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1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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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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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1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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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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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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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2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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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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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7 2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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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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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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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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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0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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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5-03-1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만으로 성에 차지 않아 댓글을 달고 갑니다. 공감합니다. `당신에게는 더 이상 답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누군가들에게는 대단히 `쿨`해 보이는지 몰라도 그것만큼 무식하고 무례한 짓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잘 추스르시고 좋은 글 계속 써주세요, `친구` 님. 그리신 작품들도 더 많이 보고 싶네요.^^

AgalmA 2015-03-22 22:49   좋아요 0 | URL
에르고숨님처럼 TTB로 빠질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의견나눔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논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게 너무 괴로워요.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최대한 인신 공격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일단 의견이 다르다 싶으면 무시무시하게 돌변하는 분들이 있어서. 참...
너랑 이웃하기 싫어 그 한마디도 싫을 정도였다면 왜 이웃추가를 다시 했단 말입니까.
사람 참 겪을수록 새로워요.

cyrus 2015-03-16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북에는 상대방의 의견(특히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대놓고 페북 타임라인에 친구 관계를 단절한다고 공지문처럼 올려요. 그런 거 보면 어이가 없어요. 아갈마님처럼 상대방과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눠서 해결할 수 있고 아니면 그냥 조용히 친구 설정을 해제하면 됩니다. 사람 한 명 단절시키는데 굳이 악의적으로 몰아세워서 페북에 알리는 거 보면 진상이에요.

AgalmA 2015-03-16 21:24   좋아요 0 | URL
너무 피곤해질 거 같아 페북, 트윗 저는 다 폭파해버렸습니다;
위의 상황을 알리는 이 글이 뒷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식의 행동은 하지 말자는 의도도 있습니다. 이곳도 소통 네트워크니까요.

다른 서재에서 저도 나름 재고를 하고 의견을 밝히는데, 앞으로 남의 서재 가서 의견을 밝히는 건 참 한정될 거 같아요. 날씨 얘기나 우스개 소리로 모두가 즐거운 그런 화법을 개발해야 하는 건지; 제가 개그는 참 젬병이라.
이웃 신청이나 수락도 생각이 많아지네요.
cyrus님 같이 알라딘 서재 오래 상주하신 분들은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2015-03-16 2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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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2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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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6 2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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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3-1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훌훌 털어버리시고...기운내시길~!

전 언제나 agalma님의 리뷰나 페이퍼도 그렇고,
댓글 하나, 좋아요 한방에 완전 날라갈듯이 되는 1인이걸랑요.

근데, 저기 저 그림 말이죠, 님의 자작~?@@
완전 좋아요~^_________^

2015-03-18 16: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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