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 수 없기에(정말?) 매 순간 어딘가를 꿈꾼다. 그런 열망 속에 펼친 백민석 《아바나의 시민들짧은 여행의 단맛처럼 순식간에 끝났다. 책에 이런 표현이 있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보니 그가 절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절망에 대한 감각은 현장이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찰나적 감각이다. 인간은 절망을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인간은 잠시도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절망은 쉽게 휘발된다.”(《아바나의 시민들》, p198)

 

 

 《아바나의 시민들

 

작가라서 더 그런 걸까백민석 사진은 황량한 소설 인상과 달리 의외로 다감한 시선으로 찍은 인물 사진이 많다. 특히 노인들. 저 문장은 그가 아바나에서 자주 본 자세라고 말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싼 노인이 성당 계단에 앉아 있는 사진을 찍고 남긴 단상이다. 그러나 절망만 그럴까. 희망도 그렇지 않은가. 희망을 꿈꾸지만 우리가 하루 중에 그것을 꿈꾸는 건 찰나다. 우리는 많은 일상을 원하지 않은 것들로 채우면서 아직은 괜찮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속인다.

 

바보 같은 이유로 카메라를 여러 대 잃어 버리기도 하고 인터넷이 잘 안 되는 쿠바에서 와이파이가 되는 장소에서 자조하기도 하면서 정처없이 헤매는 백민석을 놔둔 채 나는 우디 앨런 카페 소사이어티영화섬에 다녀오기도 한다. 1930년대 뉴욕과 할리우드 풍경이 아련히 펼쳐진다. 송년 파티 장면에서 합리적 공산주의자 Leonard는 이렇게 말한다.

 

 

 

 

음미할 시간도 경험도 갖지 못한 인생이면 어쩌나. 카페 소사이어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양식을 따른다. 성공을 꿈꾸며 할리우드로 온 바비(제시 아이젠버그)와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사랑에 빠진다. 보니는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바비의 청혼을 거절하고 자신을 버렸던 재력가인 그의 삼촌을 택한다. 뉴욕으로 돌아온 바비는 갱스터였던 형의 나이트클럽 카페 소사이어티영업에 재능을 발휘해 크게 성공한다. 바비와 보니는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서로가 함께 하는 사랑을 다시 누릴 수는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공허를 내내 음미할 것이다.

이 영화는 같은 해 개봉한 데미언 샤젤 《라라랜드와 흡사한데 두 영화의 판도가 판이하게 갈린 건 우리가 음미하고자 하는 게 달라진 걸 말하는 걸까, 데미언 샤젤이 우리가 음미하고픈 걸 더 정확히 짚어냈다고 봐야 하는 걸까. 두 영화 다 재즈 굿~ㅎ

삶의 많은 것에 대해 음미를 너무도 잘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음미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아바나의 시민들에도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인들은 그를 아토포스atopos’라고 불렀다. 아토포스라는 별명은 마르지 않는 사랑의 매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려준다. 장소를 의미하는 'topos'에 결여,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 ‘a’가 붙어 어떤 장소에 고정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정체를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의 아토포스가 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아토포스로 인지한다.”(《아바나의 시민들》, p270)

 

영화 속 Leonard처럼 백민석도 이의 제기한다.

 

하지만 아토포스는 또한 사랑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불행의 언표일 수 있다. 사랑하는 이는 소크라테스처럼 아토포스가 될 수 없다. 그는 사랑하는 이라는 정체에 기꺼이 고착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잘 바라다보이는 장소에 정주해야 하며, 변덕을 부렸다간 사랑을 잃을 것이라고 매 순간 자신을 닦아세워야 한다. 이것이 오늘도 넋을 앗길 순간을 기대하며 아바나 비에하를 걷는 당신의 정체이자, 불행이다. 아바나만 한 다른 아토포스를 찾기 전까지 당신은 한국에 가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아바나에 붙들려 있을 것이다.”(《아바나의 시민들》, p271)

 

"죽은 자의 넋 앞에서 한 가지 감정만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아바나의 시민들》, p22) 세상을 살아도 우리는 어떤 장소, 아토포스에 대한 열망을 접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고정되지 않는 속성이라 그런 것일까. 아토포스란 표현처럼 쿠바의 날씨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함이 있다. '미친 태양이 내리쬐면서 동시에 미친 폭우도 쏟아‘(p66)지는 쿠바. 기상학적인 합리적 분석으로 볼 땐 그 위도에 맞는 그 기후겠지만 그 속엔 어떤 음미할 것들이 가득 있다. 집을 두고 여행을 하는 우리의 오랜 습성과 사색과 관찰이 소용돌이치는 공간들이 그렇게 곳곳에 있다. 그리고 모두가 찾아 나선다. 여유가 있든 없든 자기가 꿈꾸는 아토포스에 대한 열정으로. 백민석의 첫 여행 에세이집은 이병률의 첫 여행 에세이 끌림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에서 엿보이는 현지 사람들에게 가지는 애정, 한국적 감수성, 작가적 필치 등등. 끌림을 좋아한 사람들은 《아바나의 시민들도 좋아할 것이다. 이병률이 아기자기하고 풍부한 인상파 화풍이라면 백민석은 권태와 단절감이 묻어나는 굵은 터치의 정물화 같달까.

 

 

 

《아바나의 시민들

 

"아바나에서 끝없이 걷는다는 것은, 당신에게는 아바나에 대한 독서 행위나 마찬가지다. 낱말을 읽듯 집집마다 기웃거리고, 행간을 읽듯 골목마다 헤집고 다니고, 문단을 읽듯 지역을 훑는다. 나중엔 책 전체의 흐름을 이해하는 듯 아바나 전체를 알게 되거나, 알게 되었다고 자신을 속이게 된다. 당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읽는 사람에 더 가깝다. 읽는 걸 더 좋아하고,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쓰는 건 포기해도 읽는 건 포기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단 읽으려 든다. 사람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도시든. 그래서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서점을 만나면 고향처럼 살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 권도 없을지라도."(《아바나의 시민들》, p107)

 

이병률 끌림에 대해서는 ...  http://blog.aladin.co.kr/durepos/7333525

이병률 다른 산문집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새삼 여행 에세이 참 잘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아, 해가 떠버렸다. 나의 아토포스는 어디 있는가. 카피톨리오의 늙은 사진가가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메라로 찍어주는 나를 만나고 싶은 아침이다. 단 한 곳에서만 찍을 수 있고 세상에서 단 한 장뿐인 단색조의 나를. 


《아바나의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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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8-17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 소설로 재미를 못 보시니까
이제 아예 여행작가로 전업을 하신 모양입니다.

나름 유쾌한 비급 정서를 담아내서 좋았는데
말이죠 ㅋㅋ

AgalmA 2017-08-19 07:23   좋아요 0 | URL
절필까지 할 정도로 소설 쓰기 지긋지긋해 했잖아요. 그런데 에세이는 힘이 나서 좋다네요. 이번 에세이는 출판사 기획으로 쓰신 거 같은데 이 책 잘 되면 앞으로 더더 쓰실 듯^^

요즘 소설쓰신 건 예전만 못해서 좀 아쉽더라는ㅎ;

2017-08-17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8-19 07:25   좋아요 0 | URL
핸폰으로 찍은 사진도 많던데 뭘 찍어도 작품이 되는 곳 같아요ㅎ
유네스코 문화 지정되어서 옛모습이 많아 더욱 그런 듯요. 문화적인 자유로움도 사진에 가득~^^
경비원 아저씬데도 모델급 포즈더라는ㅎ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