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 철학자 장켈레비치와의 대화 철학자의 돌 4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변진경 옮김, 이경신 해제 / 돌베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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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죽음과 불안을 조금씩 다 담고 있다. 아니 결코 떨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하다. 현실에서는 노화 방지 시술이나 체력 단련, 노후 대책 등으로 긍정적으로 보이려 애쓰지만 본질로 말하자면 미루고 싶은 몸부림이다. 마음의 상황은 더 난국인데 도망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연기(延期)와 회피. 이 시점에서 주사, 시술.. 누가 많이 생각난다.

켈레비치 :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문제를 막연하게 만들어보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데, 죽음을 다른 사람의 문제로 국한하려는 경향이 그것입니다.


다음 대화는 인간의 의미 부여에 대한 장켈레비치의 불가지론(경험을 벗어난 사물의 본질은 인식할 수 없다는 철학적 관점) 면모를 볼 수 있다.

다니엘 디네 : 삶은 죽음에 의해 감염되어 있고 죽음이 삶을 물리친다면, 인간의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장켈레비치 : 그것이 인간 실존의 비애입니다. 실존의 문제들은 삶 안에서, 삶과의 관계 속에서 합목적성을 갖습니다. 그것을 삶에 내재하는 합목적성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나의 일과나 내가 구상하는 계획들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개의 것의 총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삶 전체는 나 자신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깊이 사색에 빠지거나 인간 실존의 일반적 의미나 나의 실존이 나 자신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아니면 실존에 의미를 되찾아주는 종교적 희망 속에 피신해야 할 겁니다. 분명히 종교적 희망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문제는 그것이 진실인가 아닌가가 되겠지요.


다니엘 디네와의 대담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 여건들을 살펴보았고, 이어지는 조르주 반 우트와의 대담에서는 죽음과 신앙의 관계가 주요 쟁점이다. 신앙의 내세관 속에서 실존적 가치를 얻으려는 인간의 갈망, 죽음과 내세의 지복을 동일시하는 순진한 믿음.
파스칼 뒤퐁과의 대담에서는 안락사가 주요 주제였다. ˝삶에 대한 인간의 바람은 인간의 능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증가했˝다고 장켈레비치는 말했다. 즉 생명연장이든 안락사든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더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걸 시사한다. 변함없는 건 ˝죽는다는 사실의 확실함과 죽는 날짜의 불확실함 사이에서 불명확한 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장켈레비치는 현재의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너무 단순하다고 말하며 세심한 조건들을 거론했다. 치료 가능성을 따져볼 특정한 시기의 의학, 의사의 선택, 질병의 문제, 환자의 역사적 상황 등.
『어떤 육체?』에 실린 대담에서는 다음 문장이 핵심이었다.
˝시체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들은 아마도 문명과 종교에 따라 육체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을 의미할 겁니다.˝
우리는 죽음을 안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시화하려고 애써왔다. 잘 처리되지 못하면 금기로 닫아버린다. 오귀스트 콩트가 만든 실증주의력이나 그리스도교에서 죽은 자의 얼굴을 본떠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관습, 축제와 같은 장례 풍습 등은 산 자의 유희에 가깝다.
(*실증주의력: 오귀스트 콩트가 1849년에 만든 달력. 1월부터 13월에 각각 역사적 인물인 모세,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아르키메데스, 카이사르, 성 바울, 샤를마뉴, 단테,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프레데릭, 비샤가 지정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한 플라톤 《파이돈》을 홀로 맞는 죽음의 두려움을 철학적 수다로 푼 죽음이라 말하는 장켈레비치의 표현은 위트가 넘쳤다.
고령의 자연사도 우리의 편의적인 표현일 수 있다. ˝죽음에는 항상 추가적인 원인이 존재하는데 때로 그 원인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육체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스포츠. 평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스포츠의 폭력성도 아주 적절하게 잘 지적해 주었다. 정치적 이용에 대해서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금이라도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 그럼, 스포츠 소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심각한 현안들이 가득한데 갑자기 스포츠 소식으로 바뀔 때 나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생각해보니 JTBC 뉴스는 그런 게 덜하다.

삶의 희망이 죽음의 불안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말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장켈레비치(1903~1985)의 사상은 종교적 믿음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신비‘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는 모습이 독특하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중에는 죽음이 으뜸일 것이다. 대담들을 엮은 이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라디미르 켈레비치 《죽음》 (1966) 저서는 비체계적인 사상을 금언으로 풀어내는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죽음이 필연적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들은 충분하지만, 결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신이 존재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 구조자는 조난자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죽음》, p 394)

그의 이러한 경향은 반유대 철학자들(칸트, 피히테, 헤겔, 하이데거)과 독일 철학 체계를 교조적으로 따르던 당시 프랑스 철학을 거부하고 베르그송 등의 비주류 철학에 몰두함과 동시에 러시아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데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나는 환생한 체호프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국내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의 《죽음》 저서를 언제 접하게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 종교적 기만들을 걷어내고 이성적으로 현실화해 보려고 한 장켈레비치의 사유는 두려움 속에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충실과 행동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표지(標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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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3 13:48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 우리는 늘 현실을 매장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며 일희일비하는 광대들이란 심정의 연속입니다.

2017-01-13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1-13 13:47   좋아요 1 | URL
이 책 오늘은 반드시 다 읽고 정리할 테다! !해서 저도 늑장 출근ㅜㅜ; 아아, 저도 매일 이놈의 노예생활~ 노래를 부릅니다ㅜㅜ

겨울호랑이 2017-01-13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emento mori」가 ˝죽음을 기억하라˝인데 ‘잊으라‘ 고 한다면 ‘죽음‘만 남게 되겠네요^^:

AgalmA 2017-01-13 14:22   좋아요 1 | URL
죽으면 나도 사라지니 죽음만 남아서 다른 삶을 받겠지요...^^;
장켈레비치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죽음을 살아서는 경험 못 하는데 애초에 모르는 걸 기억한다는 건 부조리하죠.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을(mortal)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AgalmA 2017-01-13 15:38   좋아요 1 | URL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규정된다는 점에서 메멘토 모리는 말씀하신 뜻이 담겨 있죠. 그러나 종교적 영향이 서구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퍼진 상황에서 그것은 성찰보다 위협조로 많이 변질되었죠. 우리의 불안이 그것을 더 가중했을 테고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기독교는 죽음 후의 심판을 너무 강조하기에 복음이 아니라 화음(禍音)이라 할 수 있습니다.

AgalmA 2017-01-13 15:39   좋아요 1 | URL
장켈레비치도 이 책에서 그런 점을 내내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회유할 뿐이라고.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러면 쓰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세상은 왜 만들어 심판이니 천국이니 난리를 피우느냐고 말합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로마 병사의 질문에 햇볕을 쬐게 비켜달라 했던 디오게네스처럼 삶이 아닌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싶습니다.

AgalmA 2017-01-13 16:14   좋아요 1 | URL
그들은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간편한 말도 만들어 뒀잖습니까. 인간은 집단과 체계를 원하는 시스템적인 동물이죠. 어떻게든 최소한의 집단을 만들려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부 규율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고.
우리 DNA에 생존요건으로 작동한다고 하니 어쩝니까.

디오게네스 - 알렉산더 대왕 일화는 시원한 구석이 있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든 이는 부처 말고도 많겠지요. 우리가 모를 뿐.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동의합니다. 기독교의 득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강합니다.

AgalmA 2017-01-13 16:31   좋아요 1 | URL
어디까지나 제 짧은 생각입니다만 플라톤부터 이어져오는 이러한 지식 계보를 봐도 그렇고 체계화의 문제 아닐까 싶어요. 체계화되지 못한 이전 사상들은 계보화되지 못했죠. 기독교는 공동체로 묶는 규율 체계가 아주 잘 되어 있죠. 해외 어디를 가든 그런 안전한 공동체 속에 묶일 수 있죠. 동양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개인적인 자율 세계가 아니란 말이죠. 정치 체계가 모두 와해되어도 인간에게 종교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장담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13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정치도 종교,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감할 수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