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의 열풍 문지 푸른 문학
리처드 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첫 문단을 읽는 순간, 나는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했다.

  

 

 

(p7) 서인도제도에서 노예해방이 얻은 결실 중 하나는 수많은 폐허다. 폐허는 아직도 남아 있는 집에 딸려 있는 경우도 있고, 거기서 돌멩이를 던지면 닿을 곳에 있는 경우도 있다. 노예들이 살던 곳, 사탕수수를 압착하여 즙을 내던 곳, 그 사탕수수즙을 끓이던 곳은 모두 폐허가 되었고,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드는 저택들도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지진과 화재와 폭풍우, 그리고 극성스러운 식물들이 저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재빨리 해치웠다. ■

 

  

  폐허를 사랑하는 내 취향에 흡족할만한 시작이었고, 침착한 내레이션 화자를 통한 군더더기 없는 서술은 더욱 신뢰감을 주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작가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듯 여러 마술들을 펼치기 시작한다. 작가 리처드 휴스(1900~1976)가 방랑과 유랑 속에서 체험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 소설 속에서 매력적으로 재탄생한다. 참고로 휴스의 어머니는 자메이카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바닷가 만에서 에밀리가 체험한 지진, 모든 걸 평등하게 만드는 허리케인의 광경, 깨어진 채광창으로 차례로 뛰어 들어온 살쾡이 12마리가 저녁 식탁을 어지럽히며 절망적으로 울부짖는 사냥감을 쫓는 광경, 말과 노새가 함께 묶여 우스꽝스러운 행보가 되는 사륜마차, 병아리 한 마리가 전갈을 밟고 쓰러져 죽어버리는 모습, 이상한 한숨을 쉬는 거북이……이 놀랄만한 묘사들이 초반 50페이지 속에 들어있다. 이쯤에서 나는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작가는 나를 비웃듯 선장의 편지와 함께 추리소설과 모험의 세계로 방향키를 바꾼다. 폐허에서 갑자기 펼쳐진 바다!  에드거 앨런 포 + 세르반테스 + 허만 멜빌이라고 하면 당신은 어떤 식일 거 같은가. 이 조합은 기묘하고 재미난 상황들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의 촌철살인 철학들이 해적선처럼 기습한다.

 

 

 

 

 

(p66)    철학적으로 말하면 출발하는 항구의 배는 도착하는 항구의 배와 똑같다. 두 배는 존재하는 시간과 장소가 다르지만, 실재의 정도는 다르지 않다. ‘따라서영국에서 날아올 첫번째 편지는 이미 쓰인 거나 마찬가지다……아직 읽을 수 없을 뿐이다. 아이들을 보는 것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같은 논법을 노년과 죽음에 적용하려 해도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31)   아이들과 그들을 새로 맡아서 돌보게 된 어른들의 관계에는 한 가지 단계가 있다. 처음 알게 된 뒤부터 처음 꾸지람을 받을 때까지의 단계다. 이 단계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원초적 순진무구함뿐이다. 일단 꾸지람이 가해지면 이 단계는 절대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p150)   그녀는 하느님에 대해 항상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정체성 문제는 그녀 자신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여겨졌을 뿐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하느님이 아닐까? 그녀가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일까?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은 그녀의 손에 잡히지 않고 교묘히 빠져나갔다. (자기가 하느님인지 아닌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그렇게 중요한 점이 생각나지 않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 문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아마 나중에 다시 생각날 것이다.

 

(p172)    로라의 내면은 정말로 전혀 달랐다. 그것은 말로는 거의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올챙이에 비유하면, 다리는 점점 자라고 있지만 아가미는 아직 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거의 네 살이 다 되었으니 어린이인 건 확실했다. 어린이는 인간이다(‘인간이라는 낱말에 넓은 의미를 허락한다면). 하지만 로라는 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기는 물론 인간이 아니다……아기는 동물이다. 그리고 고양이나 물고기나 뱀처럼 아주 오래되고 세분된 문화를 갖고 있다. 아기는 이들과 같은 종류지만, 훨씬 복잡하고 원기왕성하다. 아기들은 결국 하등 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발달한 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기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말과 범주로 작동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것을 인간의 마음이 갖고 있는 말과 범주로 바꿀 수는 없다.

아기들이 인간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면, 아기보다는 대부분의 원숭이가 더 인간적이다.

잠재의식 속에서는 아기가 동물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기가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할 때 왜 사람들은 항상 사마귀가 사람 비슷한 행동을 했을 때처럼 웃겠는가? 아기가 덜 발달한 인간일 뿐이라면, 그것은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을 것이다. ■

 

  

  책을 덮을 땐, 데이비드 셀처 오멘을 읽고 난 뒤처럼 서늘하고 착잡한 뒷맛이 남았다. 그 책이 데미안악마를 섞어놓았듯이, 자메이카의 열풍각종 리뷰들의 수식처럼 앙팡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1929년에 발표되었다. 즉 리처드 휴스는 양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세대로서, 인간에 대한 깊은 물음으로 작품을 썼을 것이다. 죽기 전에 인간의 궁지’ 3부작(다락방의 여우(1961), 나무로 된 여자양치기(1973), 3권은 작가 사망으로 미완성)을 발표하려 했었다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리처드 휴스는 모든 상황에 처하는 인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제어불가능한 모순같은 아이性’를 통해 인간 본질에 대한 현상학을 보여주려 했다. 지진 이후 몰려오는 허리케인처럼 말이다.

  내가 홀로 있었던 9살의 산 속, 10살의 빈 바닷가에서의 경험은 정확히 에밀리의 지진과 같았으며, 나는 그 속에서 분명 신이라 불릴만한 그 무엇과의 접촉을 느꼈고,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지진이다. 이것은 장 그르니에가 - 의 매혹에서도 말한 바 있는 그것이다. 누구든 이런 경험은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경험이며, 평생 함께 해야 하는 아이이다(童心이 아니다).  ‘아이性’은 다른 말로 '인간의 근원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 물음을 실고 자메이카의 열풍』은 이곳에 85년 만에 도착했다.

 

 

 

ㅡAgalma 

 

 

 

 

 

 

 

 

 

 

 

 

 

 

 

 

 

 

 

 

 

 

 

 

 

 

 

 

 

 

 

 

 

 

 

 

 

 

 

 

 

 

 

번역에 대한 생각

파스칼 키냐르의 신비하고 난해한 울림들을 아름답게 풀어주던 송의경씨, 바슐라르 공기와 꿈에서의 정영란씨,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와 어빙 스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를 시처럼 전달해준 최승자 시인처럼, 리처드 휴스 자메이카의 열풍을 김석희씨가 번역한 것은 다행하고 아름다운 조합이었다. 작가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건조하면서도 풍부한 사유의 매듭들을 김석희씨가 가감없이 보여 주려하는 것이 느껴진다.

모비딕(2011, 작가정신)을 김석희씨가 번역한 걸로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Book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 형식이 내겐 책읽기의 즐거움을 너무도 떨어뜨려서 E-Book 적극 활용자들이 부럽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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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dky 2015-01-3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걸 평등하게 만드는 허리케인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정말 그렇군요. 아이성이라는 말의 뜻이 참 궁금하네요.

AgalmA 2015-02-02 05:12   좋아요 0 | URL
˝아이성˝은 제가 만든 말입니다. 어디서 누군가 비슷하게 말했을 수도, 지금도 말하고 있을거예요. 사람 생각이 참 비슷비슷하잖아요? 모두 정확히! 다르게!를 외치곤 있지만^^ sirdky님이 인상적이라 말씀해준 표현도 작가가 딱 그렇게 말하도록 표현해줘서 제가 그렇게 말한 거죠. 여기서 누가 더 정확하고, 뭐가 다르다고 해야할까요? 그럴 때 전 꼭 그렇게 갈라야하나 싶을 때가 있어요ㅎ 이미 모든 작가들은 모든 작가들에게서 태어나고 닮지 않았는가!
sirdky님도 책 여러가지 많이 보시니까 잘 아실 겁니다. 여러 책을 보다보니 어휘들이 하나둘 모이고 ˝아이성˝ 같은 자신만의 돋보기, 삼각자, 신발, 가방같은 살림살이, 도구 같은 게 생기죠. 저는 아직 언어여행중이니 어디에 어떻게 도착할 지 잘 몰라서 뭐라 확답을 드리기 어렵네요...지금은 ˝인간의 근원성˝ 정도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죠 :)

sirdky 2015-02-01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같은 생각이라도 표현이 다르니 정말 아이성이라는 생각도 어딘가에서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ㅎㅎ책을 읽다가 비슷한 것이 나오면 Agalma님을 생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