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좋은 어린이 책 <춘희는 아기란다>의 전문가 추천사입니다.

 

글 : 박진희(<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 저자)

 

상처를 보듬는 작은 리본

내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하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갑자기 찾아온 소아마비를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제때 치료하지 못한 흔적이 짧고 뒤틀린 다리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늦둥이 아들의 다리를 보며 평생 미안함을 짐처럼 껴안고 살아가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고 11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딸이 느낄 부끄러움을 덜어 주고자 큰 수술을 치렀다. 아버지의 다리는 목공소에서 다듬어지는 나무처럼 펴지고 이어 붙여졌지만 끝내 온전한 모양이 만들어지진 못했다. 그 큰 수술의 고통보다도 힘든 것은 아무리 애써도 쉽사리 깨지지 않는 유년 시절의 상처였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그저 지독히 가난하고 운이 나빴던 한 개인의 불행일 뿐이라고 여겨왔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냐고 단념시키기에 바빴다. 그러나 아주 작은 사실 하나만 바꿔보면 아버지의 삶이, 그리고 할머니와 나의 삶이 확 달라졌을 것이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말이다.

 

변기자 작가가 쓴「춘희는 아기란다」에서도 지독히 불운한 운명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이 소개된다. 마흔세 살의 춘희와 어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춘희는 마흔세 살이지만 제목에 나타난 바와 같이 여전히 아기처럼 살고 있다. 아직도 기저귀를 차야 하고 늙은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통을 개인의 불행으로 여겼던 것처럼 작품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춘희와 노모의 비극을 낮은 확률로 찾아오는 개인의 불행으로 여긴다. 노모는 봄이라곤 찾아온 적 없는 듯한 산비탈 아래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고 응급상황에서도 언덕 아래에까지 내려가야 겨우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들의 삶을 개인의 불행이라 여기며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춘희의 불행은 어머니의 잘못도 하늘이 내린 천벌도 아니었다.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전쟁 때문이었다.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싸움터에 보내졌고 전쟁이 쏟아내는 화염에 다쳤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헤아리기도 전에 가난과 육신의 고통에 신음해야 했고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대물림되었다. 그 때문에 전쟁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춘희는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폭탄 때문에 43년째 아기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노모의 불행은 남편을 잃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뱃속의 자식에게 대물림되었다. 그리고 춘희와 노모도, 나의 아버지와 나도 슬픔을 털어내지 못하고 살아간다. 뚜렷한 가해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전쟁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춘희의 삶이 어떠했을지 끊임없이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삶은 어떠했을지도 그려 보았다. 작품 속 춘희를 만들어 낸 작가의 삶과 아직도 고향의 봄을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이웃들, 평범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 지를 생각해 보았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졌을까. 단정할 순 없지만 춘희의 기저귀와 아버지의 다리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맺힌 노래가 조금은 더 사소한 고민거리들로 바뀌지 않았을까.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할 뿐 아직도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개인의 역사는 혼자 만들어 낸 것이 아닌데 우리는 삶 속에 스며든 그 흔적들을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봄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거를 되돌려 전쟁이 없던 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작품 속 유미가 봄이 오지 않은 할머니의 집에 들꽃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슬픔에서 허우적거리는 할머니에게 고향의 봄을 불러주는 것처럼 사소한 일상을 나누고 슬픔을 위로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유미가 내민 흔하고 소박한 리본은 잿더미처럼 시커멓게 그려진 할머니의 손에서 따뜻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아마 사랑이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리본 하나, 또는 음정도 맞지 않는 피리 소리지만 우리는 건네 보지 못한 작은 사랑. 사람에 의해 다친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들의 작은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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