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좋은 어린이 책 <강냉이>의 전문가 추천사입니다.


글 : 김지은(어린이청소년문학평론가)

 

강냉이는 서럽다. 속 채우는 데 강냉이만한 것도 없는데 강냉이 밖에 없다는 소리나 듣는다. 우리는 강냉이가 얼마나 힘겹게 여물고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가문 날 빗소리를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다. 그 비쩍 마른 강냉이 한 포기조차 온전히 지키지 못해 밤새 가슴 아파하는 것, 그런 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알아도 곧 잊는다.


이 그림책은 강냉이와 한 어린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는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형이랑 둘이서 강냉이를 심었다. 생야―형이 판 작은 구덩이에 ‘강낭알 뗏구고’ 엄마는 토닥토닥 흙을 덮어 주었다. 거름도 주고 오줌도 주면서 열한 밤을 고이 키운 강냉이가 꼭 제 키만큼 자랐을 때, 그 밤에 전쟁이 일어난다. 서둘러 창창 떠난 피난길에 모르는 하늘 아래에서 잠자리를 폈지만 어른들은 시름에 잠겨 밤별만 바라본다. 아이는 어른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지금쯤 수염이 나고 알이 차곡차곡 들어찼을, ‘저꺼짐 두고 온’ 강냉이를 걱정한다.


이 그림책의 글은 전쟁 통에 무너져 내린 목숨을 스스로 들춰 일으켜 살아내면서 칠십 평생 어린이를 위한 글을 써왔던 권정생 선생의 시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어린 소년은 권정생 선생 자신일 테고 ‘생야’라고 부르는 형은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난 목생이 형을 가리키는 것이리라고 짐작한다. “요건 내 강낭”하며 손가락으로 점찍어 놓았던 소년은 강낭과 데려오지 못한 강아지가 마지막까지 꼬리를 흔들던 모습과 알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뒤뜰 병아리들 생각에 웅크려 운다. 어린이에게 전쟁은 이런 것이다. 그 어떤 대의도 소년의 눈에 비친 전쟁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강냉이』는 2005년 발의되어 2007년부터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함께 기획하기 시작한 한중일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열 번째 작품이다. 그 사이 동북아의 정치적 흐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고 여러 차례 전쟁을 경고하는 긴박한 순간이 지나갔지만 이 작은 평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늘땅이 쑥대밭이 되었던 날이 엊그제인데 사람들은 쉽게 전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밭에 두고 온 강냉이 한 포기를 통해서 평화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 일러 준다.


그림을 그린 김환영 작가는 어린이가 화자인 한 편의 짧은 시가 어떻게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힘을 지닐 수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작가의 거칠지만 정다운 그림은 사투리 원문을 살린 시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첫 장면부터 마을을 품에 안은 듯이 듬직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아름드리나무는 잿더미 속에 묻혀 버린다. 아름드리나무뿐만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개구리도 민들레도 달팽이도 강아지도 폭음 뒤에 보니 온데간데없다. 푸르고 풍성하던 옥수숫대는 앙상한 형상으로 타오르면서 원망하듯 독자를 바라본다. 소년을 비롯해 이 그림책 속 인물들은 표정보다는 어깨와 손등으로 말을 한다. 쓱 눈물을 훔치는 그 많은 손등 뒤에 얼마나 간곡한 슬픔이 있을까. 독자는 불붙은 혀처럼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전쟁을 지켜보면서 작고 작은 강냉이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마음이 된다. 한 강연록에 따르면 김환영 작가는 이 시를 그림책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은 다음 화장실 앞에 강냉이를 열 포기쯤 심고 오갈 때마다 빠짐없이 강냉이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시인의 심성을 고스란히 옮기고자 했던 작가의 정성은 이 그림책의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 웅크린 소년의 눈빛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몇 줄로 추려진 시의 구절을 넘어서 시인이 손을 부여잡고 들려주고 싶었을 어떤 말과 마음이 이 한 장면에서 온전히 전해진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전쟁을 할까. 강냉이 한 포기가 묻고 강냉이 주인인 소년이 묻는다. 독자가 대답할 차례다. 잿더미 눈물자국을 아닌 일처럼 지우려하는 어른들이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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