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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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만 일어서야 한다. 작별 인사를 하듯 그는 맞은편 실루엣을 잠시 응시한다. 거기 시간의 덩어리 하나, 세월의 불룩한 자루 하나가 홀로 방치된 채 소리 없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 누추한 자루 속에 담긴 한 생애의 모든 시간, 추억, 풍경 들 그리고 이야기들도 함께 지워지고 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고 이름 없는 세계 하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p.152 <세상의 모든 저녁>

 

이 아름다운 글귀의 실상은 이러하다. 한 독거노인이 혼자 밥을 차려 먹다가 커다란 냄비 속에 머리를 박고,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의 시신은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못한다. 이미 몸을 떠난 그의 영혼만이 자신의 주검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누구든 와 주기를 바라지만, 그가 이승을 떠나야 할 때까지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점점 참혹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울 뿐이다.

 

“맞은편 노인은 이미 거의 형체를 잃었다. 햇볕 아래 눈사람처럼 소리도 없이 흐물흐물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다. 피부는 시루떡처럼 검붉게 부풀어 오르고, 극도로 팽창한 복부의 압력에 러닝셔츠는 터지기 직전이다. 방바닥 어디에나 희멀겋게 살진 벌레들이 구물구물 기어 다닌다. 모두 곧 쉬파리로 변신할 놈들이다.” p. 148 <세상의 모든 저녁>

 

한 노인은 자신의 참혹한 주검 앞에서 이승을 떠나지도 못하고 울고 있고(세상의 모든 저녁), 또 한 노인은 언제 홀로 죽음을 맞을지 모를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고, 아무도 몰래 죽을 수 있을 곳을 찾아 떠난다(흔적).

 

“당신은 철저히 혼자였다. 이제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어야 이 초라한 흔적을 지상에 남기지 않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당신을 두렵게 했다.” p.39 <흔적>

 

내내 우울하게 했던 이 소설집을 읽으며 나는 늙음과,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과,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와, 아픈 상처를 핥듯 자꾸만 아픈 이야기들을 읽는 나와, 무너져가는 작은 세계들을 생각했다.

 

나는 늙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늙음의 모든 단계를 보고 있다. 나는 죽음을 겪지는 못했지만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지는 못하지만, 사라져간 것들을 불러내는 소설가의 글을 감사히 읽을 줄을 안다.

 

“헐겁게 반쯤 벌어진 입. 이마와 입 주위의 굵고 깊게 팬 주름. 듬성한 머리. 목덜미의 검버섯들........지금, 하나의 생애가 저기 앉아 있다.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 혼자만의 시간들이 저 망가진 소파 위에 고여 있다.” p.300 <물 위의 생>

 

그 소설가 덕에 “아무도 모르는, 그 혼자만의 시간”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젊은 옹기장이(세상의 모든 저녁)의 삶과, 뗏사공(물 위의 생)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을 통해 듣는다. 또한 강의 물길에 존재하는 여울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 보기도 한다.

 

“바귀미여울, 범여울, 새범여울, 왕바우서리, 웃바우, 열두절, 황새여울, 된꼬까리, 상산암, 제남문......각 여울마다 특징도 천차만별이었다. 물길이 돌연 치솟는 여울, 쑥 가라앉는 여울, 오르내리기를 열두 번 하는 여울도 있었다. 바위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빨아들이는 바위, 뱉어내는 바위, 소용돌이치는 바위, 물길이 역류하는 바위도 있었다.” p.332 <물 위의 생>

 

“임철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시간들을 현재 순간으로 되불러 오는 자, ‘기억의 발굴자’였다.” (김형중, 해설 중) 큰언니의 책장에서 작가의 전작 <봄날>을 진작 봐왔지만, 꺼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한 건 무겁고 아플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아, 임철우의 책은 무겁고 아팠지만, 또한 고맙고 따뜻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사라져간 초라한 삶들, 지상에서 자꾸만 사라져 가는 “작고 이름 없는 세계”들을 이렇듯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알라딘의 복돌성이 찍은 할머니의 손 사진을 생각했다. 찍은 이는 진작 서재를 떠났지만, 나는 이 사진을 간직하며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미 돌아와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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