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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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간되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막다른 골목의 추억>을 만나기를 꽤나 미뤄왔다. 신간 소식을 접하고도, 서점으로 한걸음에 달려가지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왠지 모를 반감이 들었던 것인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하지만 책을 펼쳐들고 이내 나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그리고 감사함이 한 가득 차오른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의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이야기 속, 인물들을 통해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이 겪는 어떤 고통, 혼란 등이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또한 그네들이 조금씩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신과 마주하는 모습들 속에서 나 역시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여러 번 곱씹으면서 바나나의 이야기를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그 동안의 이야기들을 항상 내달리기에 바빴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사랑, 그리고 어긋남과 이별 등등의 이야기가 왠지 차분하게 천천히 다가와 오히려 신선하다고 할까? 왠지 ‘바나나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란 광고 문구, ‘지금까지’라는 단서가 붙어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란 바나나의 고백이 진심인 듯하다. 나 역시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많이 위로 받으며 좋아해왔지만 그 어떤 이야기보다 마음을 말갛게 씻어주는 듯하다.

천천히 이야기 속에 들어가다보니, 내 안의 어떤 격랑의 파고가 조금씩 잠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놀랐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시간이었다. 주인공들이 겪는 여러 시련들과 격정적인 감정을 토해내기보다는 잠시 더욱 움츠리면서 그 제 몫의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오늘의 우리의 속도와는 다르게 느껴져 좋았다.『도모 짱의 행복』속 5년을 짝사랑으로 기다렸던 도모 짱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나 역시 ‘아 좋아라’하고 그저 소리를 내뱉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잔물결이 살랑거리는 듯하다. ‘아, 좋아라’ 마법의 주문에 걸린 듯하다.

 

“가족, 일, 친구, 약혼자 등등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그 끔찍한 쪽 색채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빙빙 휘감긴 거미집 같은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미줄이 많을수록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잘하면 아래가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생을 끝낼 수도 있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가능하면 그 아래 깊이를 모르기를.’이라는, 그런 게 아닐까. (…) 인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보태 가며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210-211) 역시 어렵지 않게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단상들을 통해 마음이 훈훈하게 봄눈 녹듯 모든 시름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듯하다.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고 생각이 들 때, 벼랑 끝에 매달렸다는 절망이 피어오를 때, 다시금 <막다른 골목의 추억>이 나의 추억인 것 마냥 떠올리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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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
이토 우지다카 지음, 이수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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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는 느긋하게 읽어야지, 조급하게 건성으로 읽지 마십시오.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아직 활자로 나타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언젠가 법정 스님의 글을 읽다가 느끼는 바가 커 옮겨 적어 책장 앞에 붙여 둔 것이다. 하지만 책을 꺼내면서, ‘멈칫’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그저 읽기에 바쁜 습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책을 접하면서 그저 시간을 때우기에 급급한 것은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그만큼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아니, 그 보다 소설책 한 권을 3년간 읽었다는 것 자체에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3년 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올해 나는 <토지>를 읽었다. 1년 안에 읽고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어느 정도 단기적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저 읽기에 급급했다는 아쉬움은 성취감보다 더 크다. 돌이켜 보면 ‘과연 제대로 읽은 것인가?’하는 의문이 고개를 들면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앞으로 몇 번을 읽더라고 나는 늘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듯, 미처 보지 못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천천히 깊이 있게, 느긋하게 읽는다는 것은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아직까지 시도해 보지 않은 그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나 역시 만끽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끔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그냥 지나친다. 이야기의 흐름상 전혀 문제될 것은 없다는 태만이 단어가 막히고 이해가 부족하더라고 우습게 넘겨버린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점에서 나의 책 읽는 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남는 것인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몇 년이 지난 뒤, 많은 것을 잊어버렸을 때도 또렷이 떠오르는 경험. 내 안에 살고 있고, 언제든 응용할 수 있으며, 세상을 보는 틀이 되어 주는 책 한 권.’(42)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 물음에 답을 할 수 없다면, 분명 천천히 깊게 읽는 방법이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아니 책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천천히 깊이 읽어보라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본다. 지금껏 나는 대체로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해왔다는 것이다. 조금만 어려워도 읽기를 거부하면서 책 읽기를 즐긴다고 떠벌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인문 분야에 도전을 한 적도 있고, 어려운 고전을 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한 순간 뿐이었다. 이젠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 한 권의 책을 탐독하고 또 탐독하기. 미독하면서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몸소 체험하기! 나 역시 나만의 『은수저』를 한 번 만들어봐야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을 펼쳐야 할까? 책장을 한 번 둘러본다. 어렵다고 내팽겨 둔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한 번 골라야겠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죄와벌』이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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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1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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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처음으로 <토지>를 펼친 후, 때론 ‘과연 내가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하는 의혹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등장인물들이 생생하게 다가와 나의 일상 속으로 불시에 찾아와 말을 걸었고, 결코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과연 나라면?’이란 물음이 또한 마음을 뒤흔들었다. 돈, 권력의 유무를 차치하고, 면면의 인물들의 삶은 그자체로 아름답고도 애달픔 그 자체였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한 고비 넘어 숨을 돌리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다가도, 끝도 없는 펼쳐진 그 막연한 길에 대해, 그 불안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 때, 불쑥 다가와 조곤조곤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 불안과 두려움,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그리움마저도 온몸으로 끌어안으라고. 그렇게 견디는 삶의 환희를 오롯이 일깨워주었다.

 

생명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마지막을 향해 치달릴수록 명쾌해졌다. 생명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한 가치, <토지>를 읽다보니, 나 스스로 참으로 유해졌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졌다. 앙칼지고 모난 마음의 언저리를 자꾸만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그 느낌은 그 누군가의 품처럼 온몸이 짜릿하도록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결코 잊을 수 있는 따스함이었다. <토지>의 힘은 숱한 시간이 다져낸 생명에 대한 긍정의 힘이 아닐까?

 

이제껏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나와 비슷하게 읽던 누군가와 경쟁을 하기도 하면서. 때론 쫓기듯이 읽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족스럽지가 않다. 자꾸만 곁에 두고픈 마음이 커져, 최근 개정판 <토지>를 꼭 소유하겠다는 마음이 한 가득이다. 2012년, 21권의 <토지>를 꼭 읽겠다는 다짐을 이미 달성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선물해도 좋지 않을까?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간질간질하다. 그만큼 또 읽고 싶다. 아니, 어떤 아쉬움과 시원섭섭함보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들로 가득 차오른다. 월선, 봉선(기화), 김환, 이용 그리고 기억에 가물가물한 수많은 인물들이 그리워지고 또 그리워진다.

<토지 21(5부 5권)>의 마지막을 향하면서 왠지 모를 외로움과 두려움이 나를 괴롭혔던 것도 사실이다. 만주로 떠난 이들(석이, 상현)이 직접 등장하였고, 영광이 만주로 떠났고 그 어미는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현을 데리고 평사리로 돌아온 서희, 잠시 내려온 환국 등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갈등들이 풀리기보다는 그 다음의 이야기가 또한 궁금해진다. 과연 어떤 책을 펼쳤을 때,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을지 기대되기도 한다.

 

광복을 앞둔 상황 속, 그 암담함과 처절함, 결코 속속들이 들어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고통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박 겉핥기식의 역사를 통해 분개했던 것은 어쩌면 학습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그 숨 막히도록 살벌했던 시대, 그 핍박 받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결코 나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결코 머나먼 나라의 타자일 수가 없고, 그것은 과거의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해, 아니 외면하고 오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그 잔인함과 잔혹함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마음과 몸이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 찰 수 있는지도 더욱 뚜렷해지고 명쾌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음하며 좌절하고 움츠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도 가득 찼다. 그래서 스스로를 수시로 돌아보게 된다. 아니, 끊임없이 그들과 호흡하면서 나를 다지고 싶다. 흔들리는 마음들, 갈등으로 옴짝달싹 못하고 방황하는 그 마음들이 단단하게 묶고, 사람냄새 진하게 풍기고 싶다. 살뜰하게 나의 마음 밭을 다져줄 <토지>의 존재만으로도 풍요로워진다.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허허헛헛... 내 자랑이 지나쳤습니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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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의 땅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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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의 작품들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이 시간들이 무척 감사한 일이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전체적인 흐름은 일관되니, 어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탐하고, 그 속의 깊은 울림에 감동하고, 자신을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번 <유형의 땅>에서는 ‘냉정하게 되짚어보라, 우리는 제대로 걷고 있는가?’란 화두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속적 성공에 여전히 휘둘리고 있는 우리, 과연 우리는 무엇을 쫓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흔들림 없이 사람됨의 온당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되묻고 또 묻게 된다. 솔직히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무엇을 위해 그리 맹렬하게 질주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가족, 친구들은 물론이고, 자신조차 돌보지 않고 외면하면서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내달린 삶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번에 개정된 <유형의 땅>에는 79년에서 81년에 발표되었던 8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거의 시간은 여전히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 『장님 외줄타기』가 그러했다. 아이의 시선에서 그려진 이야기라 더욱 뇌리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알뜰했던 엄마의 변화, 그리고 엄마의 자살을 통해 드러난 갑작스런 삶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의 심리가 마음을 죄어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 역시 아이의 마음에 동화되면서도 의젓한 아이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타박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면서 견디는 그 눈물겨움에서 쓰디쓴 인내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또한『길이 다른 강』이란 이야기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돈에 지배를 당하고 그 지배 속에서 어떤 다른 삶의 전형이 있을 수 있을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가진 자의 오만과 그 병폐, 그리고 이를 앙 물고 다졌던 삶의 질박함이 극명하게 대조를 그리면서 세속적 욕망의 양면을 볼 수 있었다. 돈의 속박에서 분명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허영에 부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삶에 박수를 보내면서, 나 역시 나의 꿈, 어떠한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매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처절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 다양한 인물들이 쫓고자 했던 것은 특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쫓고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욕망에 그저 집착할 경우의 그 잔인함에 무섬증이 일어난다. 성공? 과연 내가 이루고자 하는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그러면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시간들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그 시간들의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그저 이기적인 욕망에 길들여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선한 마음이 한 가득 차올라,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오르는 긍정의 에너지가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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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0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0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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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아쉬움 때문인지 발걸음이 오히려 더딘 듯하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으면서 <토지>라는 이야기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착각에 휩싸인다. 각각의 인물들이 이야기가 수시로 불쑥 튀어나와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최근이 이야기 중에서는 양현과 영광, 그리고 오가다와 인실의 이야기가 일제 40년대의 암울하고 침체된 분위기를 잠시 잊게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 자체가 다시금 그 시대 상황을 떠올리게 하며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양현’의 이야기로 <토지 20(5부 4권)>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윤국’과 결혼을 할 수 없었던 양현은 평사리를 찾은 이후, ‘연학’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잠시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현을 찾은 영광,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에 감정이입을 하며 이야기에 흠뻑 취했다. 아슬아슬 마음을 졸이면서도 가슴이 촉촉해져, 40년대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잠시 나마 그들의 애잔한 사랑에 두근거렸다. 매서운 바닷가, 칼바람 속에서도 함께 걷는 그들의 모습이 황량한 풍경 속에서 환한 빛으로 다가왔다. 그만큼 그네들의 사랑의 희열과는 정반대의 안타까운 현실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리고 영광의 이야기를 이은 것은 바로 오가다의 이야기였다. 잠시 귀국해, 누이 집에 들러 매형과의 이야기는 그 당시의 일본의 상황과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찬하와 쇼짱의 만남 그리고 갑작스런 만주로의 여행, 어린 쇼짱의 주변을 둘러싼 어른들의 아픔과 쇼짱에게 닥칠 혼란이 시대의 혼란 그 자체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없이 밝고 순순하 쇼짱의 모습이 마음 속의 어둠을 일시에 몰아내주는 듯, 글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지난 조준구의 죽음 이후, <토지 20(5부 4권)>에서도 그간의 악행을 자행했던 우개동의 판면과 배설자의 죽음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멸시와 악행보다 서로를 짓밟진 않고서는 설 수 없는 듯, 조선인 내에서의 악행이 가슴을 더욱 분노케하고 좌절하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파국에서 강선혜가 겪는 정신적 피폐함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손자의 학병 소식에 모든 희망을 저버린 듯, 눈먼 성환 할매(석이네)의 이야기며, 그간의 잘못을 뉘우친 귀남네의 이야기, 또한 홍이의 딸 상의의 이야기, 학병에 자원한 윤국의 이야기, 만주로 떠나겠다는 영광의 이야기 등등, 마지막 권을 남긴 지금, 그 마지막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맺음을 하게 될지, 조금은 두려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토지를 읽는 내내, 저마다 삶의 애환을 가슴에 꽁꽁 짓누르며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인생이 희로애락의 굽이굽이를 넘으며 견디고 견디는 삶이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또한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소중히 생각해야 할 생명의 소중함이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가슴 깊이 파고든다. 마지막 권을 펼친다는 것이 손끝을 떨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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