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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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제목 자체만으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독자는 알겠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 ‘일반적이지 않다’는 수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책소개를 보면, ‘책과 사랑에 빠진 영국 여왕 이야기’란다.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겠다고 하는 순간, 다시금, ‘왜?’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여왕이니깐? 여왕이라서? 그러나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왕의 자질, 여왕의 위치에서 갖는 의무와 책임을 생각할 때-초반부에 이미 그 특질을 설명하고 있다.-, 곧장 수긍하게 된다.

‘일반적이니 않은’의 숨은 의미를 -실제로 나는 책을 한참 읽은 후에야-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그 입장, 그 위치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갖게 되고, 내가 아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보았다. 여왕에 버금가는 그 누군가-우리에게 있어 정치인, 유명인 등등-가 어떤 책을 읽는지 매체를 통해 노출될 때, 그 파급력을 생각해본다. 때로 의도된 무엇일 수 있지만, 때론 순수하게 개인이 취향, 즐거움일 수 있을 독서가 대중의 시선과 부딪히고, 그 시선 속 이해-정치, 문화, 사회-관계를 이용하려는 또 다른 시선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벌어지는 일화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끌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자주 책장을 덮고, 책을 내려놓게 되었다. 여왕의 생각, 말을 통해 뱉어지는 책에 대한 단상(?)을 담은 한 문장들은 나를 멈춰 세웠다. 그저 내침걸음으로 내달릴 수가 없었다. 펜을 들어 메모를 하고, 나 역시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여왕의 이야기 속에 바로 내가 투영되었다. 그녀의 일련의 변화들과 그 변화를 둘러싼 사소하지만 커다란 갈등들은 이미 내가 경험했던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여왕은 책의 마력에 빠져들게 되면서 기존의 많은 일상이 조금씩 시들해지고, 책에 더욱 몰두하게 된다. 나 역시 한때는 그런 변화를 겪기도 하였고, 그러다가 지난 몇 달 동안 아예 책을 펼치기는커녕 책과 등을 돌린 채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를 펼치게 되었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 책과 비교하면 아주 얇은 책이다. 아주 가볍다. 하지만 그 유쾌한 이야기는 진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책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함께 책을 읽으면서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누군가의 존재 등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여왕에게 있어, ‘노먼’의 존재, 그리고 노먼의 부재 등등을 통해 겪게 되는 여왕의 변화가 나의 변화였다. 때론 다른 일들은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책에 빠져들 때의 희열, 그것을 함께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의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읽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조언해줄 수 있는 ‘노먼’같은 존재가 내겐 누구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를 읽으면서 책과 소원했던 지난 공백기, 나 삶이 어떠했는지 뚜렷히 눈에 들어왔다. 다시금 손끝이 간질간질, 어떤 책부터 읽어야할지 마음이 급해진다. 과연 어떤 책을 이끌어줄지 나역시 궁금해진다.

또한 책이 주는 일상의 풍요로움이 배가되었다. 내게 있어, 책이 얼마나 일상의 활력소같은 존재인지 자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책 읽는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만으로도 책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고, 그래서 우리들은 책을 읽을 당위성이 생긴다. 그 누구보다도 바쁜 여왕이 책에 빠졌다. 시간이 없어 책을 읽지 못한다? 과연 정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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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집, 이슬람은 어떻게 유럽 문명을 바꾸었는가 - 9세기 바그다드의 지식혁명
조너선 라이언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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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을 떠올려보았다. 여전히 기억나는 몇 가지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바로 중국과 유럽 중심의 역사이다. 중국의 통사를 비롯하여, 중세유럽과 르네상스, 그리고 산업혁명 등의 일련의 과정들은 흐릿해졌지만, 어느 정도 맥을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만난 이슬람의 역사는 , 찬란하고 역동적으로 꽃피웠던 한 시대를 우리는 얼마나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시각이 철저하게 서구지향적, 서구중심적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러한 시각을 인정한다고 해도, 편협되게, 왜곡된 다른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 것이다. <지혜의 집, 이슬람은 어떻게 유럽 문명을 바꾸었는가>를 읽으면서, 경쟁과 협력을 통해 문화, 정치, 경제, 사회에 하나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기존 역사인식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가장 흥미롭게 읽은 점은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에 의해 이슬람 문화에 꽃피던 지적 탐구의 역동성이었다. 지적 호기심과 지식 추구의 과정, 즉 '9세기 바그다드의 지식혁명'이란 부제에서 느껴지듯, 의학, 철학, 수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지식 혁명이 절로 온몸을 들썩거리게 하였다. 또한 그것은 마치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정조와 규장각 검서관들의 모습으로 절로 그려지면서 온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삼국, 신라, 고려의 역사로까지 확대되었다. 방대한 지식이 충적되던 시기, 우리 땅을 밟았다던 아라비아 상인의 모습이 바로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나만의 상상력이 자극을 받느라 나의 뇌세포들은 아주 분주했던 시간이었다.

 

물론 쉽지많은 않은 이야기임엔 분명하였다. 사전 지식이 전무한 가운데, 하나의 흐름으로 일관되기 보다는 시간을 수시로 오가는 느낌이라 처음에 이야기의 맥을 잡기가 힘들었다. 또한 이 책을 읽는 나의 태도는 '과연 이 책은 인문서일까?'하는 까닭 모를 의구심이 수시로 샘솟았다. '배스의 애덜라드'라는 영국인이 등장하는데 그가 지식, 지혜를 찾아 동방으로 떠났다는 사실에 국한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수시로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 마치 밑밥을 던져온 것처럼 자꾸만 호기심을 자극하여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그로 인해 이슬람이 어떻게 유럽 문명을 바꾸었을지, 핵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많은 갈등들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우리의 현상황이 빗대지기도 하였다. 그만큼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갖고 있는 문제점, 우물안 개구리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주소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들처럼 기존에 알지 못했던 세계, 다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는가?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하고 외면했던 문화와 역사를 만나고 나니, 절로 느껴지는 것, 생각할 것들이 많아지기도 하였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역동성, 기대 이상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설레고 흥미진진했다. 기존에 알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지식의 팽창' 과정은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며 신선한 충격 그 이상이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신나는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에 들뜨기도 했지만, 두발로 걷고 또 걸으며 온세계를 누볐던 많은 이들의 열정과 그 열린 마음이 무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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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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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는 왜 책을 읽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스스로 되묻는 시간이었다. 다른 이와의 공감, 미처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책’에 대한 단상, 사색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책 읽기의 가장 궁극의 목적은 아무래도 ‘변화’에 대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그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지, 스스로 어떤 이야기일지 재단해보기도 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 나 역시 ‘책’을 가까이하고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항상 목이 마르고 배가 또한 고프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허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묻게 되었고, 책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았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독서 경진 대회 같은 것이 있어, 그것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였다. 그런데 그 시절 읽었던 많은 동화책들의 이미지와 가치가 불시에 나의 선택을 저울질하는 어떤 작용을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머리가 굵어졌을 딱 이맘때, 고3이 되기 직전이었다. 몇 주를 나는 문제집이 아니라면 어떤 책이라도 좋다며 정신없이 펼쳤다.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도피처로서의 책이 내게 가까이 있었다. 불안, 두려움 등등의 마음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는 없었지만, 분명 고3이 되면서 찾아온 후회로 나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과연 나는 왜 책을 읽는 것일까? 다시금 책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그저 목적 없이 ‘심심풀이 땅콩’같은 것과 허영심이 내재하고 있었다. 그냥 시간을 때울 무언가가 필요한 정도라고 할까? 그리고 학창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반항을 뒤늦게 하면서, 오히려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한창 좌절과 비관의 시간을 헤매고 있을 때, 내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도. 그리고 책을 펼쳐 물었다. 진정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냐? 아니 그 길은 무엇인가? 그렇게들 입버릇처럼 말하는 책의 유용성, 그 가치에 대해 절실하게 의문을 품었다. 그 어떤 삶의 돌파구도, 도피처도, 해결책도 될 수 없는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욱 책에 매달렸다. 그나마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책이었던 것일까?

 

그것이 어떤 변화일지언정, 나는 어떤 변화의 필요성을 간절히 원할 때, 책보다 쉽고, 편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나와는 궁합도 잘 맞고, 그리고 이미 책이 가진 마력을 온몸으로 느끼며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책에서 느꼈던 긍정의 에너지를 삶에서 찾고 싶어, 움직이고 행동하게 된다. 책을 읽다보면, 그저 책에만 갇히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다시금 길을 떠날 수 있는 마음밭을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바로 삶, 그리고 사람을 향한 길 위인 것이다. 마음이 한없이 말랑말랑 유해지고, 비극의 순간에도 삶의 열의에 들뜨는 생의 힘이 불끈 솟기에 자꾸만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이 욕망하게 된다는 것!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을 읽으면서 책이 던지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보았다.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해 혀 끝에 달려있는 책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마음에 새겨보았다. 또한 숨은 비법을 몇 가지를 취해보기로 했다. 책을 벗하며 내가 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덜 헤매고 싶고, 헤매더라고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얻고, 그래서 조금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삶’으로 충만하고 싶은 마음으로 2013년을 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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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 그대에게 - 세상 속 당신을 위한 이주향의 마음 갤러리
이주향 지음 / 예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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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치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여러 책들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림 속 저마다의 사연과 숨은 이야기들, 그것을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며 나를 매료시킨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그림 너머 그대에게>는 일단 ‘철학자의 시선’이란 것인 더욱 흥미로웠다. 기존 내가 만나왔던 책들은 대개 미술 전공자의 시선이었다. 물론 그들이 풀어낸 이야기 속에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위안을 얻고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철학자’의 시선은 굉장히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림의 시선이 바로 ‘철학자’라지 않는가?

 

그저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들을 그림 속에 풀어놓고 그저 무장 해제되고 싶었는데,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느낌이다. 얽히고설키면서 마음으로 침울하고, 때론 지옥의 시간을 견뎌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융의 말로 시작된 책은 그 문구만으로도 나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미처 생각지 못한 화두로, 마음 속 구름들이 일시에 흩어지는 기분이랄까? 가장 때를 잘 만난 책이 바로 <그림 너머 그대에게>인 듯하다. 이 책을 손에 쥐었던 것은 지난 봄이었다. 그럼에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내내 나를 붙잡고 있던 것이 또한 이 책<그림 너머 그대에게>였다. 많은 문구에 나는 발목이 잡히고, 머뭇거리기를 수없이 했다. 그저 읽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글에 눈이 박히고, 생각이 박혀버렸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무수한 번민, 갈등과 불안 등을 똑바로 직시하게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로인해 나는 한 번 더 곰곰이 나를 바라봐야만 했다. 나의 초조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뚜렷해졌고, 내가 가고 깊은 길, 그 지향점이 명확해졌으며, 더 소중히 아껴야할 것 등등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숨기고 싶었던 마음속 진심에 정곡을 찔리면서도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천천히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그림 너머의 나의 마음들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존 책 속에서 만났던 여러 미술 작품들 이외에도 직접 전시장-특히, 오르세미술관展-에서 봤던 그림-들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작가 역시 직접 몇몇의 굵직했던 전시회를 거론하면서 이야기를 엮다보니, 지난 기억을 떠올리면서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살갑게 이야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실제로 보았을 때의 감흥이 떠오르고, 미처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그림과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더욱 희미해져가는 기억 속 전시장의 풍경, 그 속의 작품이 또한 눈길을 끌며 머릿속에 각인되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주옥같은 이야기로 마음의 훈기를 가득 불어주었다. 진정한 위로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한다. 그저 함께 해주는 것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것, 그리고 그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도와주는 작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림 너머 그대에게>를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좀 더 돌아보며 새해를 맞이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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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극단 사계절 1318 문고 77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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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야말로 한 인간과의 가장 내밀한 연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한다“

(102)

매서운 추위로 몸과 마음이 꽁꽁 얼어붙는 요즘, 마음에게 훈훈한 햇살 같이 위로를 건네주는 이야기 <유랑극단>

 

처음 <유랑극단>을 만났을 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대로 읽히지 않고, 환상에 빗대어진 현실에 대한 강박관념, 무게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할까? 이야기가 의도하고 있는 심층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들로, <유랑극단>이 표방하고 있는 ‘인생에 관한 우아하고 지적인 농담 혹은 판타지’를 거부했던 것이다. 현실을 판타지만으로도 충족되지 않을 만큼 무자비한 것이니,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자!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어떤 사건들이 뉴스화되는 첨단의 시대가 아니더라고 해도, 탈옥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눈에 띄는 유랑극단의 버스를 타고 탈옥이 시도되는 상황-그러고 보니, 요즘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탈옥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특히 패랭이꽃 축제를 벌이는 마을 사람들은 전혀 깜깜 무소식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유랑극단’이 방문해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환영하고, 탈옥한 죄수들을 중심으로 더욱 축제가 무르익어가는 상황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만큼 환상을, 판타지가 주는 삶의 희열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실적 상황에만 굳건한 믿음의 성을 쌓고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었을까? 축제를 벌이며 삶의 향연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르고 있었던 것일까? 자꾸만 이야기에 반발심만이 커지는 듯했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작가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당신은 진정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낯설지 않은 작가지만, 내겐 너무도 어려운 작가였다. 작가 ‘지크프리트 렌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침묵의 시간>이란 책을 통해 만난 적이 있어, 더 반가운 마음으로 <유랑극단>을 펼쳤지만, 여전히 쉽게 공감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작가임이 더 분명해졌다고 생각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이야기 속의 탈옥수들이 억울한 누명으로 어느 정도 탈옥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희대의 사기꾼, 뇌물 수수 등등의 명백한 죄목이 있음에도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하고, 그리고 다시 체포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축제라는 판타지와 얼버무려 놓았으나, 축제의 마지막에 이들은 다시 체포되었다. 내 머리로는, 내 감성으로는 도저히 쉽게 용납할 수 없어,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해야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를 즈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환해졌다. 바로 끊임없이 죄수들이 탈옥을 감행하는 ‘감옥’이 시사하는 바가 읽혀졌다. 그것을 바로 우리 스스로의 마음의 감옥, 숱한 번뇌와 고통이 바로 ‘감옥’이었다. 번번이 도망치려고 하지만 결국을 제자리로 돌아오고, 또다시 도망치고 회피하려고 한다. 견디는 힘을 기르기보다는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고 잔꾀만 부리다보니, 현실을 더욱 냉혹하고 축제와 같은 삶의 희열과는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우리는 간혹 ‘희망 없는 기다림’이라며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은 아닐까? 탈옥의 중심인물이었던 ‘하네스’는 마지막 탈옥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말한다. 감방 동료인 교수 양반, ‘클레멘스’에게

“난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소. 클레멘스” (127)

“예전에 난 무척 초조했었소. 기다릴 줄도 몰랐지. 그런 초조함으로 고통스러워하기도 했고, 근데 이제 그런 상태를 끝났소. 난 우리가 함께하기를 소망했소. 클레멘스." (130)

그리고 “여러 번 생각했소. 견뎌 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해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자신에게 닥치는 것, 사람들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견뎌 내야 해요. 가끔은 타인도 견뎌 내야 하는 법이죠.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함께 지내기가 한결 쉬웠소. 모든 면에서.”(127)

이야기 속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의 두 방랑자처럼 하네스와 클레멘스는 남은 형기를 함께 할 것이다. 서로가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서로가 함께 하면서 슬픔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슬픔을 겪은 사람은 함께해야 하는 법’이고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슬픔을 포용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길 소망해본다.

 

“나는 똑같은 상태로 지속되는, 영영 떨쳐 버릴 수 없는 절망 그 자체가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103) 나 역시 때론 영영 떨쳐 버릴 수 없는 절망, 번뇌 속에서 몸부림칠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스스로 쌓아놓은 마음 속 감옥에서 끊임없어 도망치려고만 했다. 때론 그 도망이 최선이라 여기면서.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가둬두고 있는 ‘삶의 감옥’이 무엇인지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내가 쉽게 벗어나지 못하면서 늘 도망치기에 바쁜 마음의 감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견뎌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구별하고, 그 견디는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때론 그 절망, 슬픔이 내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특별한 무엇이란 사실이 나를 설레게 하였다. 알 수 없는 인생이기에 그 자체로 기대되는 삶, 기다려지는 삶이라는 사실로 마음 깊은 곳이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지는 듯하다.

고작 100쪽이 조금 넘는 적은 분량의 이야기인 <유랑극단>, 하지만 내게 분명 난제였다. 하지만 2012년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울림으로, 적절한 방향타가 되어주는 듯하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내 내면의 소리, 그 속의 두려움과 마주해야 할 듯하다. 지금껏 알던 팍팍한 현실이, 그 세상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활짝 열리는 마법이 곧 시작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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