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신고 - 2차 개정판
최동환 해설 / 지혜의나무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의 고유한 정신이 과연 무엇일까? 전통이란 것이 일제식민지, 산업화 과정 속에서 퇴색되고 변질되었다. 변화무쌍한 지금, 굳건한 '뿌리'가 되어줄 그 무엇인가가 필요할 것이다. 민족의 경전이라는 처음 들어본 『삼일신고』는 무엇을 이야기할지 궁금하였다. 내 정신의 허기와 생소함이 이 책 <삼일신고>를 쥐게 하였다. 종교적인 것의 색채를 떠나, 태고 이래로 이 땅에 뿌리 박고 있는 그 정신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다소나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종교적 갈증도 함께. tv드라마 속 특히, 태왕사신기와 선덕여왕에 그려지는 '신'과 '신녀(?)'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른 새벽 장독대 위의 정화수 한 그릇의 의미도 함께. 그리고 앞서 퇴색되고 변질된 전통이란 것의 의미가 무당과 같은 샤머니즘에 국한되었던 것이 크나큰 나의 오류였음을 또한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한 겨레의 3대 경전 '삼일신고, 천부경, 366사'는 모두가 낯설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도 없다. 어쩌면 천주교, 기독교, 불교가 아닌 기타의 종교적 접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삼일신고>는 우리 한민족, 한겨레의 고유한 정신의 근원을 파헤치고 왜곡된 정신을 일깨우는데 유용한 책이었다. 올바른 신념, 확신이 어떤 행동을 취함에 있어, 커다란 추진력임을 알기에, 더 바르고 참인간다운 삶을 위한 올바른 가치와 신념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 해묵은 나의 갈증을 말끔히 달랠 수 있었다.

 

"삼일신고는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특히 인간으로 태어나 사는 삶을 가장 큰 축복이며 너무도 아름답다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11)



 

솔직히, 나 역시 '하나님'과 '하느님'을 구별하여 사용하려 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인이 사용하는 신과 내 안의 신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는데(오늘날 대다수의 인식과 같다), 헷갈리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외래정신, 문화가 유입될 때, 그 땅의 정신, 전통을 완전히 말살하고, 순수 100% 그래로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천여년 전 불교가 그랬듯이, 100년 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기독교'를 전하고 그들의 유일신(여호와, Jehovah)을 설명하는 데 있어, 우리식의 해석, 우리 정신의 차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 그 과정이 이 책에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삼일신고(三一神誥)-셋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一神'은 '하나님, 하느님, 한울님, 한얼님'과 같은 의미, The One(유일신, 유신론과 구별)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내 머릿속의 난해함을 일 순간 명쾌하게 해주었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해도 거리낌이 없어질 것 같다.

 

유신론, 범신론, 번신론, 공사상과 한신론을 비교하고, 한신론 속, 우리의 고유한 정신을 알아보았다.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이 책의 내용들이 놀랍고 신기한 것은 다소 부끄러운 일이다. '밝알, 온, 두레, 고비'의 우리말의 정신과 인간이 겪는 생명의 과정으로 한신론을 풀이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100의 의미인 '온'에서 '백성(百姓)'의 숨은 뜻은 아주 명쾌하였다.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불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딜레마' 즉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하고 부도덕한 인간의 만행을 곱씹어 보면서, 서로 조화로운 삶, 덜 싸우는 세상을 꿈꿔본다.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 싸우는 잠깐만은 자신과 싸우는 고통스러움에서 도피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보다 훨씬 쉽고 편한 남과의 싸움을 선호한다. 누구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고 무섭기 때문이다."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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