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의 불 탄 영토 : 권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세계


언어의 세계를 아이가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마치 불에 탄 영토처럼 아무것도 뜯어먹을 게 없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나지 못하는 핍진한 사막과 같은 영토를 상징계라고 부르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냐하면 그렇게 핍진한 상태만 전부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핍진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쾌락을 오히려 더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성적인 충동의 세계가 핍진한 상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의 무의식이 그걸 인식하죠, 의식은 잘 모를 수 있어요. 의식은 행복해 할 수 있어요. "나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어. 나는 굉장히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어. 우리는 멋진 커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만족스러운 어떤 의식적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순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성충동의 만족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럴 경우에 이들의 무의식은, 이 주체의 무의식은 다른 방식의 보상을 요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 보상의 요구에 부응해서 등장하는 것을 라캉이 증상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즉 성충동의 만족의 불가능성에 부응해서 우리에게 그렇다면 이걸 한번 탐닉해 봐라고 제시되는 것, 그게 바로 제3의 요소로서의 증상이라는 것이죠. 가장 그중에서 제3의 요소에서 합법적인 요소가 바로 팔루스라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무의식은 팔루스 말고 더 많은 증상에 경도되거나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사로잡힘이 바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그 내담자를 상담실로 찾아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거기에 자꾸 빠져드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그 고통스러운 이미지 속에서 허우적대는지 모르겠어요. 난 그걸 원하지 않는 거 같은데. 나의 삶은 이리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저 증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거 같아요.라고 호소할 때 우리는 이렇게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정신분석이라면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의식적으로는 이 증상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이 내담자의 무의식은 사실상 이걸 탐닉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원인은 이 내담자의 세계는, 다른 많은 인간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쾌락이 없는 사막과 같은 핍진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핍진한 사막에서 오아시스처럼 만난 증상을 놓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그 증상이 신체적인 고통이건, 어떤 도박과 같은 증상이건, 아니면 어떤 모순된 사랑이건, 모순된 사랑이 증오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건, 어떤 종류의 고착이든 간에, 결국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 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사태가 바로 증상이라는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적인 차원에서 아무리 '자 우리 그 증상을 포기하는 연습을 같이 한번 해봅시다.'라고 아무리 심리치료사가 내담자에게 의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대등한 관계에서 제안을 해도 내담자는 당연히  아 그러겠습니다. 연습해 보겠습니다. 그것을 술을, 담배를, 모순된 연애관계를 포기하는 삶을 연습해 보겠습니다라고 의식적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담자의 무의식은 결코 그 증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거라는 거예요. (중략) 이것이 정신분석이 증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태도라는 거예요.

<라캉 정신분석 입문 특강_ 상징계란 무엇인가? 증상의 해석학  1:00:26~1:04:36 / 백상현/ 라까니언 프렉시스 유튜브 강의 중>


나는 나에게 발생한 일에 의미를 부여=예쁘게 포장=꿈보다는 해몽=운명론적으로 해석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일기를 쓰는 행위가 바로 그런한 의미 부여, 예쁜 포장의 의식이다. 납득이 된다면 설령 그것이 지옥이라고 해도 나는 그걸 견딜 수 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겪어야 했던 지옥이다. 영문을 모르는 채로 당하는 고통.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는 것. 나에게는 인생 그 자체가 그렇다. 도대체 왜 내가 태어나서 이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요즘 나에게는 일기로 쓰고 싶은데 막상 쓰고 나면 도무지 논리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 되고 나는 주제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명품, 그중에서도 디올. 디올이 아니면 그 무엇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증상. 그래서 내가 디올에서 흥청망청 물건을 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욕계의 바틀비가 되었달까. 디올이 아니라면 나는 구매하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디올을 몸에 걸치고자 하는 이유가 허영이나 허세는 아니다(아닌 것 같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도 관심 없다. 타인에게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도 않다. 

=> 상상계 속에서 사는 나. 내가 보는 나 자신만 중요해. 거울단계. 특히 나는 외모에 관해서 그렇다. 내가 나에게 예뻐 보이는 게 진짜 중요함! 남이 어떻게 보든 말든 타인의 시각 즐거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디올은 내 무의식이 탐닉하고 있는 나의 증상인가? 그래 뭐 무의식이라도 행복하니 됐다 싶기도 하고.


둘째는 안락한데 너무 지겹다는 것. 좋은 집, 좋은 차, 나쁘지 않은 직업,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부모는 건강하고(넉넉한 노후를 갖춘 이 시대의 승자), 이촌들도 알아서 잘 사는 듯 보인다. 2016년 여름은 매우 더웠다. 그 여름을 에어컨 없이 버텼다. 그 시절의 내 욕망은 이집트의 파라오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그래서 그 무엇에도 돈을 쓰지 않고 나의 궁전(나의 무덤)을 지을 건축비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내 욕망은 평균적인 아파트 구조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내 취향의 집 구조였고, 그걸 설계하고 짓고 그 공간에서 내 영혼과 육체를 쉬며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돈 자체를 크게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아파트(주택) 투자에 별 관심이 없다. (10억도 없는 나이지만) 100억이 있다 한들 100억을 다 쓰지도 못할 텐데, 그렇다면 그냥 내가 백만장자 아니 억만장자라고 생각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타인이 나를 부자로 봐 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야 100억이 필요하겠지만, 난 여전히 6개월생 아기처럼 내 상상계에서 꺄르르 대고 있는 중이라서 타인이 나를 뭘로 보든 말든 상관없다. 

=>욕망의 대상이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고 라캉은 말하는데 정말 그럴까? 내 욕망의 대상이었던 피라미드 겸 베르사유 궁전은 허상이었던 것이기에 내가 이렇게 지겹고 권태로운 걸까? 가지지 못했을 때는 가질 수만 있다면 굉장히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버텼는데, 대상을 가진 지금은 고작 이게 다야? 하는 기분. 하지만 라캉은 욕망이 있어야 인간은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욕망은 절대 결단코 채워져서는 안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셋째, 모순된 연애

얼마 전 전남친은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 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밖에 없고." 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이유는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전남친이 하는 말 대부분이 머리에 입력이 안 돼서 녹음을 한 것을 며칠이 흐른 뒤 천천히 다시 들어 봤다. 이런 말들을 했었구나. 그 당시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이래서 대화가 통할 수가 없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에. 내 머리에 쏙쏙 입력되는 말들은 대체로 그 새끼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말들이다. '저런 달달한 말도 했었구나. 이건 16부작 한국로맨틱 코메디 14부쯤에 있을 법한 대사인데.' 하면서 피식 웃었다. 

나는 전남친의 옷들(슈트들)을 돌려주지 않고 있고, 전남친은 그걸 돌려달라고 하고 있다. 전남친은 옷이 엄청 많기 때문에 그 옷들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무슨 옷이 내 집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굳이 그 옷들을 돌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내 덕에 옷장이 좀 비워졌으니 더 좋을지도. 나는 "니 기억 속에 없는 옷인데 꼭 돌려받아야겠어? 무슨 옷인지도 모르잖아. 어떤 옷인지 맞추면 돌려줄게" 라고 했더니 전남친은 "내 옷인데 왜 안 돌려줘. 장난쳐? 꼭 돌려받고 끝내고 싶다. 더 이상은 너한테 휘둘리기 싫고 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싶다." 라고 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이때의 대화들도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왜 안 돌려주는지 몰랐는데, 위에 언급한 강의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핍진한 사막 같은 상징계를 살아가는 나(혹은 나의 무의식)는의 전남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행위에서 어떤 쾌락을 느끼고 있었던 것. 그래, 무의식 너라도 행복해라. 나는 옷을 돌려주지 않는 또라이 전여친 역할을 수행할 테니.


여기서 더 나아가 전남친의 "하루 종일, 24시간 만날 졸리고 잠도 못자겠고, 이게 니 생각만 난다고. 자꾸 니가 한 말들만 떠오르고, 당신도 마찬가지일거 아닙니까? 너는 나랑 성격이 다르지(아마도 성격이 다르니 생각 안 하겠지의 의미). 그러니까 좀 벗어나고 싶다고 제발. 당신한테서 벗어나고 싶다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 밖에 없고." 라는 말을  내담자의 의식은 거부하고 있지만 무의식은 거기에 얽혀들어가서 그것을 탐닉하고 빨아먹고 있다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니 무의식이 나를 부여잡고 있는 거라고.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넷째. 라캉

25살 전후의 시기에 라캉을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자주 가던 철학 블로그가 있었는데 그 블로거가 라캉에 관한 글을 많이 써서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관심은 전혀 없었다. 25살 시절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대체로 채워졌다. 또한 더 거대한 욕망들은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채워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행복했고 큰 불만이 없었다. 35살에는 25세의 내가 바라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25세의 내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해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루하고, 이게 내가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심지어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나는 단어 그대로 병든 인간이 되었다.


라캉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이해되고 있는 이유.

첫째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 둘째 내 인생의 경험치가 라캉을 술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쌓였기 때문(25세의 나는 결코 라캉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그때 나는 행복했고 욕망은 결국 채워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결여된 존재, 결여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시작이었다. 너무 기분 나쁜 말인데 뭐라 반박불가. 사는 거 너무 귀찮고, 하루하루 뭔가 불쾌한 기분, 사소한 모든 것들이 거슬리는 기분. 기분대로 막 살아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고. 규칙적으로 살아야 하고, 건강한 음식 먹어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이런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미션들에 나는 억압당하고 있는 것. 어떻게든 정신줄 놓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나. 즉 일기쓰는 나 자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일기를 이렇게 정성껏 쓰는 이유가 나만의 픽션, 나만의 상징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작업인 거 같다. 내가 왜 이런지, 지금 내 기분이 왜 이런지, 내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등등을 나에게 설명하는 글을 쓰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나 자신이 받아들여진다. 이게 상징계 아닌가? 아님 말고.


라캉 책은 아직 읽지 않았고, 백상현 라캉 강의를 단 2개(반복 청취) 들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 논리 정연하여 종교로 삼고 싶을 지경. 도대체 내가 왜 이렇지,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는 의문들의 답이 라캉의 욕망이론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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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을 푹 잤다.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몸이 가볍다, 아니 더 정확히는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10시간을 잤기 때문에 몸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말 3일 동안 30시간을 잔 적도 많은데 그런 주말에도 몸이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덜 피곤하다, 적어도 졸리지는 않는다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개운하고 가볍다. 몸이 없는 느낌이다. 2단 뛰기 30개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이런 적이 작년에도 있었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읽으면서 뇌를 혹사시켰던 날의 밤에 나는 장르가 다른 숙면을 했다. 5권 세트를 다 샀는데 아직 1권에서 정차 중이다. 숙면을 위해서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 어제 읽었던 책은 <고독의 매뉴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의미의 간극이 많아 소리를 내면서 읽기까지 했으니 간만에 뇌가 혹사당한 것. 3주째 나는 고독과 고립의 차이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의 절반 정도는 동의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동의하지 못하는 상태.  


내가 <고독의 매뉴얼>을 읽게 된 계기는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자크 라캉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맘에 드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라캉이 기독교 원죄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기에 받은 충격 혹은 모멸감 때문이었다. 대충 내가 이해한 바를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결여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 결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정도이다. 그래서 라캉을 검색해 보다가 백상현(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라캉 전문가인 줄은 몰랐다)의 <고독의 매뉴얼>을 구매하게 됨. <고독의 매뉴얼>과 문예출판사의 <욕망 이론> 2권을 결제했더니 자비로운 알라딘은 결제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서 배송완료해 주었다. 결여(결핍)가 완전하게 충족될 수는 없더라도 24시간 이내 배송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실 나는 심리, 정신분석 별로다. 지금 보니 칼 융의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옆에 꽂혀 있는 걸 발견. 읽다 만 것 같다. 결과론적 이야기에 불과하게 여겨져서다. 인간은 수 십, 수 만 가지 다른 이유로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가짓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같은 이유로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인데. 10명 중 3명이 같은 패턴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머지 7명도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게 내가 생각하는 현대 심리상담학(정신건강의학)이다. 


왜 조물주(신)는 인간을 원죄도 있고 결핍도 많은 어떤 것으로 만들었지? 시발 진짜 악취미.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동댕이쳐버린 건가(하이데거 ㅋㅋㅋㅋ)


권여선 신간 <각각의 계절>은 정말 재미있지만(왜 나는 60살 전후의 사람들에게 공감하는가 ㅠㅠ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무구>) 나에게 숙면을 선물해 주지는 않았다. 오지은 <당신께>도 내 마음을 토닥여주긴 했지만 숙면을 주진 않았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

<각각의 계절> 중 <무구> / 권여선


고립은-고립되고 싶은 충동은-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일이다. 고립은 고치를 만드는 것, 매혹적으로 편한 나머지 벗어나기가 어려워지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고독은 우리를 보호패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한 친구와 같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랑한 은둔자> 중 <혼자 있는 시간> / 캐럴라인 냅



그들은 '무'를 보고 있으므로 고독하다. 고독의 절차는 이러한 응시의 고립을 창조적 사건의 시작으로 전환시키는 욕망에 의지한다. 물론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절차에서 무엇도 주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고독해지는 것이며, 우리를 매혹시킬 사건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고독의 매뉴얼> / 백상현



솔직히 밑 줄 친 저 문장. 소리 내서 서너 번 읽지 않으면 이해 불가다.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적으로는 음...과속방지턱이 너무 많은 도로 같은 문장. 다시 말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불가하다는 것. 하지만 권여선의 단편 <무구>의 고독은 바로 이해가 되며, 캐럴라인 냅의 고립과 고독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익숙한 독서만 하고 지낸 건 아닐까 하는. 최근에는 전투적으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낯선 생각으로 가득한 책,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장이 난무하는 책을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백조와 박쥐>를 읽으면서 '하 지능 낮아지네.' 했었다. 있으나 마나한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밥을 먹었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예뻤다. 휴대폰이 울렸다. 등등. 이런 책은 아무리 읽어도 뇌가 달구어지지 않는다. 


주말 3일간 30시간씩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낮동안 뇌를 혹사시키지 않아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길만 운전하고, 익숙한 업무만 하고, 익숙한 책만 읽고, 익숙한 영화만 보고. 이건 마치 외부자극이 없어서 발달을 제때에 못한 유아 같지 않은가! 


충분히 몸을 사용하지 않아서 선잠을 자는 아기처럼 나 역시 뇌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아서 숙면을 못했던 걸지도. 


ps. 한나 아렌트와 자크 라캉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자극을 나에게 준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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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약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다. 운명을 파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잘 단련된 서퍼가 파도를 타고 넘는 것을 성공적으로 운명에 순응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내 의지로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단 변화된 상황을 '이것은 기회요, 전화위복이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최근에 그런 상황 변화 2개가 있었고 나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으며 결과적으로 더 나은 생활이 되었다. 

변화1.
회사는 구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회사 앞 도로는 모든 지점에서 좌회전 금지다. 사거리에서도 좌회전은 무조건 금지다. 유턴도 없다. 오직 P턴만 가능하다. 즉 귀찮게 둘러 둘러 다녀야 한다는 것. 회사 앞 메인 도로는 최소 7km 이상이 직진만 가능하다. 그 긴 거리의 중앙선에는 중앙선 분리대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장벽처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분리장벽처럼, 휴전선의 철망처럼 빈 틈 없이(유일한 빈 틈은 횡단보다)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약 2~3주 전 그 중앙분리대가 뽑히고, 차로가 변경되었다. 왕복 4차로가 왕복 5차로가 되면서 좌회전 대기 차로가 생겼다. 좌회전 신호등이 생겼다. 생긴 이유는 회사 바로 옆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공사가 이제 완료 단계에 있으며 늦여름부터 입주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좌회전을 위한 1차로 추가는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한 것. 1차로가 추가되면서 인도는 아파트 쪽으로 밀려났는데 아마도 그 인도가 아파트 소유의 땅일지도 모르겠다. 아님 말고. 
새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고 입주민 차량이 많아지면 좌회전 신호 대기가 길어지겠지만 지금은 이 좌회전 신호를 사용하는 차량은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길로 다니기로 했다. 
새 출근 경로는 기존 출근 경로와는 9할이 다른 길이다. 기존 출근길의 장점은 진출입은 막히지만 일단 진입하고 나면 평균 시속 100으로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 전용길이라는 점, 다만 경로가 길다. 새 경로의 장점은 기존 경로보다 4km 단축된 거리와 어느 시각에 출발해도 절대 막히지 않는다는 것!!!! 기존 경로와 새 경로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기존 경로는 어쩔 때는 속수무책으로 정체라서 어쩔 때는 15분 이상 더 걸리기도 하기에, 안정적인 출근 시간을 확보하기에는 새 경로가 훨씬 좋다. 하지만 장점만 있을 거 같은 새 경로의 치명적인 단점은 2가지인데, 2.6km 사이에 과속방지턱이 17개나 있는 있는 도로(?)를 주행해야 한다는 것과 그 길의 끝은 언제나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그 흙탕물이 차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를 눈앞에 두고도 6~8분 정도 더 걸리는 P턴을 하지 않고 좌회전해서 30초 만에 회사 주차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보다 더 큰 쾌감과 만족감을 주었기에 나는 새 경로를 택했다. 시속 100km로 주행하는 것과 과속방지턱 17개 중에서 과속방지턱 17개를 선택한 것의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이 새 경로, 더 정확히는 새로 생긴 좌회전이 나에게는 그저 주어진 선물처럼 여겨졌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을 정도로. 이 길이 선물처럼 주어졌으니 조금만 더 버텨보자, 조금만 더 출근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화2.
시력이 매우 매우 나쁘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이 두려워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하고 모든 부작용을 다 읽어봤다. 이 모든 부작용 알고서도 라식수술이 하고 싶어 진다면 수술을 하자는 생각에서 안티라식 카페에 가입한 것. 
나는 아직도 시력교정수술은 하지 않고 원데이렌즈와 안경을 번갈아 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라식수술의 부작용을 감당하는 것보단 안경의 불편함을 감당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서.

평소 안경과 원데이렌즈 착용 비율은 1:1
그랬던 것이 코로나 상황 하에 마스크 의무 착용이 되면서 안경과 원데이 렌즈 비율은 0:1이 되었다.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기 전까지 나는 외출할 때는 단 한 번도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마스크 틈새로 압축되어 삐져나오는 뜨거운 숨이 안경 렌즈를 뿌옇게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안경이 뿌옇게 되는 것도 타인의 안경이 뿌옇게 되는 걸 목격하는 것 둘 다 힘들었다. 그 광경이 추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늘 원데이 렌즈를 끼고 다녔고, 안경은 집에서만 꼈는데 가까운 글자만 봤기에 시력이 떨어졌음을 인지할 기회가 없었다. 어쩌다 잘 안 보이면 '설마 노안?' 하곤 했다. 최근 건강검진을 했는데, 안경을 끼고 시력을 측정했더니 0.5였다. 이 안경은 전국민 코로나 지원금으로 받은 지역화폐로 맞춘 것이었다. 나라에서 받은 용돈으로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니 신기해하면서. 그때도 시력이 약간 떨어져서 안경 도수를 더 높인 거였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시력도 떨어졌겠다, 마스크 안 껴도 되겠다, 새 안경을 맞추기로 했다.  기분 전환으로 테도 바꾸고 싶어서 젠틀몬스터에서 안경을 샀다. 내가 젠틀몬스터를 끼는 이유는 국내 브랜드라서 그런가 한국인의 얼굴뼈(광대와 콧대 사이의 문제)에 잘 맞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

3년 전에 갔던  안경점에 3년 만에 갔다. 나는 학생들 전문으로 지나치게 저렴하게 운영하는 안경점은 가지 않는데, 그런 곳에 내가 원하는 렌즈가 있을 거 같지 않아서이다. 
시력을 측정했다. 역시나 떨어져 있었다. 노안은 아니었다. 
- 렌즈는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했던 것과 같은 걸로 할까요? 
- 그거 보다 더 좋은 거로 하고 싶어요.
- 더 좋은 거는 수입 제품으로 1개 있어요. 21만 원이고요. 저번과 같은 건 11만 원이고요.
- 그래요? 안경 맞추러 올 때마다 렌즈가 업그레이드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아니네요. 항상 보면 2~3년 전에 제일 비쌌던(좋았던) 렌즈가 두 번째로 좋은 렌즈가 되어 있고 제일 좋은 신상 렌즈가 있던데 그게 아니네요. 가격도 다운되어 있고 하던데. 3년 전에 21만 원이던 렌즈가 주로는 11만 원이 되어 있던데, 이번에는 그대로네요. 그러면 제일 좋은 거 해주세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체험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새 테에는 21만 원짜리 제일 좋은 렌즈를, 헌 테(3년 전 젠틀몬스터와 블랙핑크 제니가 콜라보해서 출시한 제니 안경)에는 11만 원짜리 렌즈+제일 짙은 색상추가(선글라스로 사용하려고, 색추가 비용 2만 원)로 주문했다. 안경 렌즈를 주문한 날에는 '괜히 10만 원 호갱 당한 거 아닐까? 큰 기능 차이도 없는데 무조건 제일 좋은 거만 하려는 부자들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렌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근시교정렌즈는 망막에 맺히는 사물의 각도를 좁게 해서 사물을 작게 보이게 한다. 도수가 높을수록 각도는 좁아지고 사물은 더 작게 보인다. 이게 내가 이해한 근시교정 원리다. 그래서 안경을 끼면 내 세계는 축소된다. 한글 11포인트가 9포인트로 보인달까? 32인치 모니터가 30인치로 보인달까? 시력이 더 나빠졌으니 이제 내 세계는 더 축소되겠구나 ㅠ 내 아이폰14 프로는 이제 아이폰 se 사이즈가 되겠구나 흑흑했는데, 21만 원짜리 렌즈는 사물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았다!!!!!! 같은 도수의 11만 원짜리 렌즈와 바로 비교할 수 있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이다. 두 안경을 번갈아 껴보면서 비교해봤는데 차이는 확실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21만 원짜리 렌즈가 좀 더 무겁다는 것 정도. 하지만 축소왜곡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장점 앞에서 조금 더 무겁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가치가 있다. 나는 축소왜곡이 더 생기는 것이 싫어서 도수를 올리지 않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둘 다 체험해 보고 둘 중에서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하도영이 운전기사에 100만 원이 넘는 와인을 주면서 하는 말처럼
"편의점에서 1만 원짜리 와인 사서 마시고 난 후에 이 와인을 마셔봐요. 그러면 이 와인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 될 테니."
안분지족, 무지가 가져다주는 행복이 정말 행복일까?
분명 세상에는 내가 느끼는 현재의 불편함(축소왜곡 같은)을 해결해주는 것이 있는데, 
그걸 가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안분지족하는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면?
영화 <기생충>의 돈이 구김살을 펴 주는 다리미라던 충숙의 대사가 생각났다.


결론.

새 출근 경로가 생긴 것도, 축소왜곡이 없는 렌즈를 맞추게 된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 단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의 결과였을 뿐이다. 새 출근길은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나에게 아침에 더 늦게 일어나도 되는 상황을 선물해 주었다. 새 안경 렌즈는 비록 가격은 비쌌으나 나에게 축소왜곡이 없는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원데이 렌즈는 다 좋은데 안구건조를 더 강력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서 나는 원데이 렌즈와 안경을 1:1로 착용했던 것이다. 치킨반반 같은 느낌으로.

나는 내 의지와 상황이 일치할 때 행동하는 편이다. 의지가 강해도 상황이 별로면 행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험이나 도박 따위 하지 않는다는 것.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카드 게임에서 내 손에 들어온 패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이 패는 언제 써야 할까? 분명 패의 쓰임이 있을 것이고, 이 패를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라고.

지금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패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것이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를 궁리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패들이 일으키는 변화의 대부분을 전화위복으로 생각해 버리는 편이다. 어떤 (나쁜) 상황이 발생하면 그 상황으로 인해 주로는 내 행동이 변하게 되는데, 대체로 그런 식의 행동 변화가 생활을 더 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ps.
나의 출근길에 좌회전 차로라는 지름길이 생김으로써 나는 아침잠을 확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름길이라는 선물을 얻어 <더글로리>의 문동은처럼 신나 하는 이때, 나로 인해 지름길 사용을 금지당해 같은 층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위층이나 아래층으로 둘러 다녀야 하는 누군가를 떠올린다. "내 눈에 띄지 마. 니가 피해 다녀. 니가 돌아다녀."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동선이 꼬이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꼬인 동선을 하루에도 수 차례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 괴로울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을 이용할 때마다 짜증이 치솟을 것이다. 그 꼬인 동선은 어금니 사이에 낀 콩나물, 눈동자야 착 달라붙은 속눈썹, 손톱 아래 가시 같은 불편함일 것이다. 사소하지만 미치도록 불편한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찾자면 모기에게 발바닥을 물린 것 같은, 가려워서 긁으면 더 가려워 미칠 것 같은 불쾌. 하지만 네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은, 이 패는 또 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건 또 뭔지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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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즐겨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을 보면 침샘에서 침이 솟구치는 것처럼 사람을 보면 사회성이 흘러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내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인데 굳이 부족한 사회성을 끌어모아서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이유가 있나? 


오늘 웃긴 얘기를 들었다.
알베르토(가명)가 나에게 "너 같은 사람은 혼자 지내야 해. 너 사회성이란 게 있어? 사회생활이 돼? 그러니까 니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지. 혼자 책이나 읽고 있지" 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미 혼자 지내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 없는 게 어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처럼 무리생활을 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거고, 나는 그 반대라서 혼자 지내는 건데. 혼자 있는 게 쉬운 줄 알아? 적어도 정신력이 강하니까 혼자 지내는 거야. 나약한 인간은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못 있어. 알기나 해? 사회성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고 했더니 알베르토는 "너 사람이랑 대화가 돼? 너는 소통불가야. 벽이야. 거대한 벽. 사람들한테 물어봐. 다 니가 이상하다고 하지." 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래? 그럼 양자역학 같은 건 다 이상한 거겠네? 다수가 이해하지 못 하니까. 자본론이나 헤겔철학 같은 것도 다 이상한 거겠네? 다수가 이해 못하니까. 대화의 정도가,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인기가요 순위 매기듯이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니가 이해 못 한다고 해서 나에게 소통불가라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도 소통불가인 건 마찬가지 아닐까?" 라고 했더니 알베르토는 나에게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한 대 칠 것 같은 행동을 했다. 그래서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고 kpop를 들었다. 
알베르토는 태양인일지도.

알베르토는 매우 이상하다. 나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면서 찾아와서 엄청난 말을 쏟아내고 가곤 한다. 나는 들어준다. 다만 수용하지 않을 뿐. 그랬더니 오늘은 나더러 사회생활이 가능하냐 등등의 반응을 보였다. 내가 좀 맑은 눈의 광인 같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말하긴 하는데, 이 점이 상대방을 확 돌게 하는 거 같다. 살면서 알베르토처럼 말문이 막히면 쌍욕, 인신공격, 육체적 위협을 하는 인간들을 많이 봐왔다. 알베르토는 "너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냐? 차라리 욕을 해. 그게 낫다." 라고 했다. 

알베르토는 다시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나라면 싫은 사람한테 와서 1시간 넘게 말을 쏟아내고 가진 않을 거 같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알베르토가 처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은데 내가 친하게 지내주지 않으면 꼭 사회성 부족, 친구 없지?, 성격 진짜 이상해, 또라이라고 한다. 나는 사람한테 저런 말하지 않는다. 그냥 무반응, 무시해버린다. 

친화력(사회성)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그저 공중도덕이나 교통법규 잘 지키고, 내 할 일 성실하게 하고, 세금 내고, 가끔 내가 좋아하는 디올이나 사고, 영화나 책 감상하면 그만인데? 사람이랑 대화하는 거 보다 혼자 일기 쓰는 게 더 좋은데. 나는 종종 가족, 지인 등등이 나를 자신들이 소유한 희귀템 정도로 여긴다고 느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사고방식이 안드로메다인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하면서 자신의 인맥의 깊음을 과시하는 거 같다는 느낌.

p.s. 도대체 책 읽는 거랑 혼자 있는 거랑은 또 무슨 상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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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썼다. 지금 필체를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글자를 작게 썼다. 종이가 떨어질까 두려웠다. 일기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내게 밀려든 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종이에 몇 마디 긁적인 것 뿐이다. 침춤 호가 가라앉고 일주일쯤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일기에는 날짜나 순서를 적은 숫자가 없다. 지금 보니 시간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겠다. 며칠, 몇주일이 한 장에 기록되어 있다. 뭘 기대하고 있는지 적혀 있다. 일어난 일과 느낌에 대해, 뭘 낚시했고 뭘 놓쳤는지에 대해, 바다와 기후에 대해,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리처드 파커에 대해, 하나같이 굉장히 현실적인 내용이다.

( 38페이지 중략)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이게 마지막 일기였다. 그후에도 계속 버텼지만 기록하지는 못했다. 일기장의 구석에 지렁이같이 눌린 자국이 보이는지?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4월에는 운동을 한 달 정지시켰다. 그리고 5월부터 다시 갔다. 5월 첫 주는 연휴가 있어서 이래저래 못 가고 지난주 수, 금요일에 가자 싶어서 예약을 해두었다. 수요일에 첫 출석을 했다. 이번 달에는 총 9일 출석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 오후에 필라테스에서 전화가 와서는 오늘 예약자가 나 혼자 뿐이어서 수업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이런 게 계약서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수업료가 지나치게 저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적었기에 내 사업장도 아닌데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타당한 이유는 언제나 대환영이기도 해서 예약 취소를 당해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필라테스 센터에서 문자가 왔는데 이번 달 말부터 운영방법을 바꾼다고 했다. 그 방법은 무인 필라테스였다. 잔여 회원권은 무인필라테스로 전환 또는 환불해 준다고 했다. 선생님이 있는 수업도 간신히 가는 내가 무인 필라테스를 하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환불받아야겠다. 


나는 내가 먼저 지쳐서 수업 횟수를 다 못채우게 될 줄 알았는데, 필라테스 센터가 먼저 경영난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파이이야기>는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지만, 일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부분도 강렬했다. 종이를 아꼈는데 펜잉크가 먼저 닳아버리는 상황이 너무 인생 같아서. 살아오면서 이 에피소드를 종종 떠올린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의외로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짜 문제는 내가 미처 걱정하지 못한 것에서 올 것이다라고. 


그랬기에 오늘 필라테스 센터가 경영난으로 환불을 해준다고 했을 때, '아 종이보다 펜이 먼저 떨어졌구나.' 하면서 <파이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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