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내 컴퓨터가 48기가짜리 동영상 파일을 재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홀리 마운틴>을 굳이 8K로 봐야 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자. 내 모니터가 8K를 지원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스페이스 (논)픽션 / 정지돈>


2021년 봄. 행위예술가 이불의 전시를 했고, 이 당시는 코로나 때였으므로(지금도 코로나이긴 하지만) 전시를 보려 해도 볼 게 없었다. 그래서일까 김영민(교수)도 정지돈(소설가)도 각자의 에세이에 이불 전시 관람을 언급한다. 나도 이불의 전시를 봤지만(무려 서울까지 가서) 에세이를 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냥 일기에 써 본다. 


<홀리 마운틴> 저 다섯 글자를 읽는데, 내가 이 영화를 본 때가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국도극장.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영화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는 영화관 내의 로비 풍경. 영화라면 닥치는 대로 모조리 다 보고 다녔던 시절. 믿지 않겠지만 2008년 아이언맨 1까지는 히어로물도 영화관에서 개봉 첫 주에 보는 성실함을 보였다. 별거 아닌 시시한 아저씨가 슈트만 입으면 무적이 되는 게 너무 같잖아서 <아이언맨>을 끝으로 히어로물을 보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기점으로 히어로물 전성시대가 열릴 줄이야! 


나는 <다음 소희> <벌새> <박화영> 등의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정확히는 회피하는 중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단순한 감상에서 끝나기보단 뭔가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 행동을 할 정도로 세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위선자가 정말 싫다. 나쁜 놈은 피하기 쉽다. 하지만 위선자를 피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위선자가 싫다. 위선도 선이라고 하는 멍청한 인간들도 피해야 한다. <더 글로리>의 하도영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위선자라고 할 수 있겠지. 하도영이 박연진을 선택한 이유는 박연진이 몸에 걸친 것이 제일 적었고, 그 걸친 것이 모두 디올이라서였다. 이 점에서 디올을 사랑하는 나는 생각한다. 김은숙 작가는 디올 옷을 알고 쓴 것인가? 디올의 옷들은 육체를 많이 가리는 것들이 90% 이상인데...미우미우랑 착각한 거 아녀?? 라고. 하도영과 전재준을 선을 측정하는 양팔 저울에 올려 두고 무게를 잰다면 수평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하도영은 위선으로 포장되어 있어서 그의 악을 알아보기는 어렵다. 하도영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위해 사람을 공구리 쳐 버리는 무시무시한 놈이다!!!!!!!!!!!!!!! ㄷ ㄷ 영화 신세계를 보면 드럼통에 산 사람을 넣고 시멘트를 부어 버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무시무시하지.(영화 신세계 진짜 싫어한다. 이 영화가 유일한 여자 등장인물을 사용하고 처리하는 방식이 진짜 아주 그냥 ㅅㅂ스럽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렇게 정액냄새 진동하는 영화는 구역질 없이 보기 힘들다.이 영화를 본 건 비교적 최근인데 2~3년 전 쯤? 남동생놈이 이 영화 대사 패러디를 너무 많이해서 봤는데, 역시나 별로였다. 단도적입적으로 한국 남자 감독의 조폭영화 안 봄) 이런 장면은 직관적으로 무섭다. 하지만 전재준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공구리 당하는 장면은 직관적으로 무섭진 않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산 사람을 공구리친 것이다. 


작년에 본 영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문득문득 생각나면서 곱씹는 것은 <미래의 범죄들>(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 2022 BIFF 오픈시네마로 상영함)이다. 아마 작년 일기에도 이 영화에 대해서 언급했을 텐데, 이 영화의 주제는 육체적 고통의 중요성이다. 인간은 육체의 고통이 없으면 안 된다 정도가 이 영화의 주제인 듯. 육체가 고통의 원인이라서 육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정말 충격적인 영화였다. ps. 나는 이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를 아주 좋아한다. 꽃미남 배우가 지긋지긋했던 로버트 패틴슨은 이 영화에서 배우가 되기 위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데 그게 너무 좋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로버트 패틴슨의 팬이 되었다. 2022년 디올 옴므의 모델로 나타나서 다시 한번 나를 설레게 해 줌. 이때 나는 남자가 되어서 디올 옴므의 수트를 입고 싶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작년 가을 황정은의 책읽아웃에 정지돈이 출연하기 전까지 나는 정지돈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남자 작가 책을 언제부터인가 읽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읽는 게 박상영. 오은의 책읽아웃을 듣지 않아서, 정지돈을 늦게 알게 됨. 그때는 좀 흥미롭네 정도였는데, 이번에 알라디너TV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을 보고(듣고?) 반해버렸다. 제목 길이부터 맘에 든다!!!!! 사실 <스페이스 (논)픽션>은 작년에 사놓고 이번에 읽음. 



ps. <땅거미 질 때(이하생략)>도 진짜 좋다. 완전 내 스타일! 내가 진짜 싫어하는 소설은 김애란의 <칼자국> 같은 소설들. 그런 걸 왜 읽나? 그냥 아침마당 보면 되지. <칼자국>과 <침이 고인다>를 읽고는 주제의 촌티를 참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주제적 촌티는 2023 아카데미 작품상 받은 작품에도 있으니...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모름. 그러니까 아마도 <홀리 마우틴>을 개봉했을 무렵 이후부터 김애란은 읽지 않았다. 영화 <신세계> 촌스럽다. 김애란 <칼자국> 촌스럽다. 영화 <아이언맨> 촌스럽다. 나는 이런 걸 견딜 수가 없다. 낯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졸업식 송사 답사 같은 것들의 진부함, 촌스러움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진짜 싫다. 하지만 세상은 촌스러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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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5-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지돈은 <영화와 시> 읽고 좀 웃었습니다. 반할정도는 아님! 다른 책들은 읽다가 말았어요…!
저도 알탕영화는 안보고요, 조폭에서 대세가 바뀐 거 같죠? 마동석 나오는 거 지겨워 ㅋㅋㅋㅋ이제 거의 혐 ㅋㅋㅋ 한국남자들 마동석 왤케 좋아하죠? 근육도 없으면서…
전 아이언맨 시리즈는 좋아하지 않지만 마블은 즐기고 스파이더맨과 가오갤을 좋아해요!!! 촌스럽죠? ㅋㅋㅋ
하도영 싫어요! 전재준이 더 좋습니다!ㅋ 선택지가 오로지 둘이라면 저는 닥후 입니다. 꼬였다면 꼬인 것이 보이는 사람이 좋습니다.

먼데이 2023-05-07 14:52   좋아요 1 | URL
정지돈은 현재까지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신선하여...
싫은 건 뻔한 거요. 견딜 수가 없어요 ㅠ
고생한 우리 엄마. 뭐 어쩌라고? 자식 낳아 키우면 당연히 고생이지. 그걸 어쩌라고...

저도 마동석 싫어합니다. 마동석 나오는 영화는 <부산행>말고는 없는 거 같기도 해요.

공쟝쟝 2023-05-07 15:22   좋아요 1 | URL
먼데이님을 위해 페이퍼를 하나 써야겠어요 ㅋㅋㅋ (수정) 트랙백-관련된 글에 서로 링크 거는 것- 걸었다가 삭제했어요, 먼데이님 안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무튼 정지돈을 지켜볼게요!
 

아디다스 아노락 바람막이(연보라 톤)와 블랙 삼선 조거 팬츠를 입고 아디다스 조깅화를 신고 동네 산책을 하던 중 어느 미용실 앞에 서서 가격표 메뉴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우리 동네 미용실 시세는 얼마인가, 내가 가는 다른 동네 미용실과 비슷한가를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지가나던 아주머니가 내 옆에서 가격표를 보더니 가격표 사진을 찍어 갔다.


내가 물건을 고르고 있으면 70% 이상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 옆에 서서 그 물건을 고른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늘 있는 일이다. 한번은 백화점 지하 매대에서 엄마 모자를 보고 있었는데, 행색이 고운 할머니가 오시더니 점원에게 "저 아가씨가 한 모자 있어요?"라고 물었다. 점원은 "우리 매장(닥스)꺼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에게 직접 물었다. 내 대답은 "이건 프라다예요."였다. 내가 그 매장에 서서 물건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호객효과가 있는 품목은 의외로 이불이다. 어떤 손님은 내가 고른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나도 저거 주세요."라고 하고 똑같은 걸 사가기도 한다. 


나는 손님을 끌어당기는 후광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은 더 고급진 물건으로 보이게 하는 후광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별 관심이 없는데, 고작 아이다스를 입고 동네 산책을 하는 중에도 호객을 할 정도라면 종교인 또는 정치인이 되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농담삼아 해 보았다. 아닌가, 수입차나 중고차 판매원이 되었어야 했나? 혹은 성형외과나 피부과 상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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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5 13: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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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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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6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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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에게는 용산구나 성동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겠다는 더욱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한영은 잠까지 줄여가며 임장을 다녔다. 함께 쓰는 유튜브 계정으로 부동산과 셀프 인테리어 관련 채널들을 구독해놓았다. 지금의 집을 떠나 새집을 사고, 그곳을 꾸며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그 실낱같은 빛줄기가 그를 숨쉬게 하는 것 같았다.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이번 주말에는 넷플릭스에서 영화 2편을 봤다. <스탠바이미>와 <어디갔어, 버나뎃>. 그리고 박상영 연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를 읽었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사서 연작 중 앞의 2편만 읽다 말았다. 오늘 갑자기 요즘 한국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읽었다. 작년에는 술술 읽히지 않았는데 오늘은 너무 잘 읽혀서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코로나를 배경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 또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이런 것이었나 싶었다. 다시 말해서 잘 쓴 소설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마스크 끼기 싫다는 타령을 하면서 기계적으로(마치 소설 속의 한영처럼)일을 하는 동안 박상영은 이런 소설을 썼구나. 사실 한국 소설을 읽어도 그 소설 속의 인물들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은 별로 없다. 예를 들면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는 주식 부동산 코인 등의 재테크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 속 한영과 황은채의 직장 생활은... 흑흑. 특히 나도 한영처럼 내가 원하는 새집을 가지게 되면 불멸의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덜 불행하거나 대체로 만족한 기분을 느끼면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고작 이게 다 인가?'하는 의심을 자주 한다. 


이런 소설집을 쓴 사람이라면 엄청 행복하고 좋을 거 같은데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에 나오는 박상영을 보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부러워하는 것만큼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나라면 내가 쓴 소설책 몇 권 있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은데... 오지은도 그렇고 박상영도 그렇고 수면제의 도움으로 잠을 잔다고 했다. 하긴 세상 어느 인간이 인생의 고를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객관적으로는 너무나 잘 지내고 있다. 말 그대로 바른생활, 근면 성실. 집안일을 미루는 법도 없고, 청소 빨래 설거지를 제 때에 한다. 쓸데없는 물건을 막 사지도 않는다. 식습관도 좋다.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집의 모습뿐만 아니라 생활의 리듬 자체가 미니멀라이프 다큐에 나가도 될 정도로 정갈하다. 재정상태도 좋다. 빚은 없고, 당장 실직을 해도 몇 년은 무리 없이 지낼 수 있는 현금도 있다. 현대 사회의 모든 불행의 근원인 sns도 하지 않는다. 불면증도 없다. 변비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현대의 현자들이 말하는 불안과 불행의 요소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은 집중력도 좋아서 영화 1, 2편 정도는 쉬지 않고 볼 수 있고, 심지어 오늘은 오후 내내 소설책 1권을 몰입해서 읽어내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상상했던 제 앞가림을 잘하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딱히 즐겁지가 않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주로 혼자 있어서 그런 걸까 하는 의심도 하지만 사람과 어울리는 건 더 피곤하다. 그나마 혼자 있으니까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살아 내고 있는 것이다. 혼자 영화 보고 책 읽고 내가 본 것들에 대해서 곱씹고 일기 쓰고 하는 게 그나마 좋다. 영화<어디갔어, 버나뎃>의 주인공 버나뎃도 인간관계에서 극심한 불안증을 느끼는 사람인데, 그녀는 뭐 천재 예술가라서 그런 거고... 난 도대체 뭘까...


영화<스탠바이미>의 소년들처럼 나에게도 모험이 필요한 걸까? 소년들은 일상의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서 무모한 모험의 길을 떠난다. 아니면 버나뎃처럼 창작을 해야 하는 걸까. 버나뎃에게 창작은 또한 모험이다. 창작을 위해서 남극점에 가는 모험을 하게 되니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나만을 위해 글을 쓰는 습관은 글쓰기의 좋은 훈련이 된다는 신념이 나에게는 있다는 사실이다. 글쓰기는 근육을 이완시켜준다.

<울프 일기 / 버지니아 울프>



ps. 이번 주말 금토일이 올해 들어서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주말이었다. 좋은 영화 2편, 좋은 소설 1편, 그리고 솔직한 일기 1편. 드립 커피와 쿠키, 간단한 식사. 그리고 오직 나만 있었다. 카톡 0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도 찾지 않았다. 만약 내가 금요일 밤에 갑자기 죽는다면 월요일에 출근 시각이 지나서야 내 죽음 사실을 외부인이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휴직을 하게 된다면... 뭐 어차피 죽은 거 언제 발견되는 게 뭔 상관인가.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이 몫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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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9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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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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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1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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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기 싫었지만 짐을 꾸리고 비행기 연결편을 타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지연되었고, 난 그걸 신호로 받아들였다. 출발 게시판 앞에 서 있다 보니 더 지연된다는 안내가 떴다. 충동적으로 표를 다시 예약하고 나서 히스로 익스프레스를 타고 패딩턴 역까지 갔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코벤트가든으로 가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호텔에서 범죄 수사 드라마를 보기로 했다.
<M트레인 / 패티 스미스>

문장으로 읽으면 근사하다. 그래서 내가 따라해보면 내 취향은 아닌.

호텔방의 TV는 넷플릭스 공용 아이디가 없어서 로그인을 하려면 개인 계정이 필요했다. 이런 곳에 내 아이디 비번을 입력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엠넷을 봤다. 알 수 없는 경연대회를 하고 있었다. 이미 가수인데 신인그룹들이 대회를 하고 있었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서 팟캐스트를 들었다. 뷰 따위 필요 없어하면서 암막커튼으로 거대한 창문을 가렸다. 전등도 다 끄고 협탁 옆의 조명만 작고 조용하게 켰다. 

12시간 넘게 잠만 잤다. 챙겨간 책 <M트레인>은 가방에서 꺼내지조차 않았고, 가져간 맥북은 꺼냈으나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서 일본 여행 간 거 보고 덮었다. 조식을 먹으러 갈 에너지조차 없었다. 생수와 함께 내가 가져온 하루견과를 씹었다. 조식을 먹으러 가려면 일단 눈곱이라도 좀 떼야할 텐데, 그 과정이 파티용 메이크업(해본 적 없지만)과정보다 더 길고 험난하게 여겨졌다. 내 욕조보다 2배는 큰 원형 욕조에 몸을 담그지도 않았고, 샤워부스에서는 발만 대충 씻고 잠만 12시간을 자고, 체크아웃하고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내 차에 몸을 구겨 넣고 고속도로를 달려달려 집에 왔다. 

안도감. 중문을 열고 거실에 발을 내려놓을 때 느껴졌던 안도감. 필요한 물건들이, 잘 아는 물건들이 익숙한 곳에 놓여져 있는 풍경에서 뭐라 말하기 힘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안도감 느꼈다. 

사람들이 경험, 경험, 경험이 최고라고 하는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경험하고 싶지 않다.
오직 충분히 정말 충분하게 잠을 자고 싶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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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아침에 비타민> 1곡 반복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운전을 하면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행복하다 행복하다 나는 가장 행복하다 세상에서 젤 행복하다 오늘도 난 행복하다.' 이 부분에서는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대학병원 교수는 "CT결과는 지난 검사와 같고, 폐도 정상이고, 다른 검사도 다 정상인데, 계속 이 수치가 나빠진다면 pet 검사라도 해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원인이 없을 수도 있고, 그냥 이대로 계속 나쁜 채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수도 있어요. 가끔 그런 사람도 있어요. 수치는 몇 백인데 그냥 살아가는 사람." 

나는 "일을 쉬면 좋아지지 않을까요? 제가 최대 4년 정도는 휴직을 할 수 있거든요." 라고 물었더니 의사는 "쉰 다고 해서 딱히 좋아진다라고 장담할 수 없고, 일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을 겁니다."라고 했다. 

미세먼지는 최악이지만 봄볕은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매일 이런 햇볕이라면 행복하다고 작은 절규를 하는 노래 없이도 피부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당장이라도 장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더라도 아픈 몸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에. 봄옷을 구입할 수도(어차피 출근하거나 외출할 일도 없을 건데?), 머리를 다시 하기도(허리까지 오는 웨이브 스타일을 유지할지, 관리가 편한 쇄골기장의 스트레이트 스타일을 해야 할지), 나에게 주어진 예산을 쓰기도(휴직하게 되면 다음 사람이 그 사람 스타일로 쓰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주기적으로 하는 네일아트도 못하고(예전에 응급수술 때문에 입원실에서 젤네일제거했던 기억이 나서...), 마스카라가 많이 닳은 것 같았는데 새것을 개봉하지도 못했다. 1년 회원권인 필라테스는 환불이나 받을 수 있을까? 그 회원권을 결제할 때는 내 몸이 1년 내에 망하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음 검사일까지의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차라리 몸 상태를 모른 채로 즐겁게 살다가 어떤 통증 때문에 병원에 갔더니 말기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는 게 더 나을지도 하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면 찬실이가 백발의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하며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들은 잘 잊는 거 같아요. 인생을 고통스럽게 한 일들을 잊지 않고서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즐겁게 웃을 수는 없으니까요."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 사람은 어쨌든 내 행복과 건강에 불리한 일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싹둑 잘라내기 편집해 버리고 즐겁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오늘은 행복하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살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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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4-12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응? 친구님! 🥹 친구님의 건강과 안녕과 안심과 안녕을 기도할게요! 저 신 안믿는데 저 자신한테 기도 할거예요!

먼데이 2023-04-14 12:41   좋아요 0 | URL
신보다 공쟝쟝님 자신이 더 믿음직스럽워요. 고마워요!
모쪼록 건강하세요. 정말 건강이 제일 중요해요.
하지만 그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냔 말이지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숨 쉬는 것조차 매우 유해함 ㅠㅠ

건강..은 너무 막연합니다 흑.


공쟝쟝 2023-04-14 12:48   좋아요 1 | URL
육체 무용론자께 일만보 걷기 처방합니다. 걸을때는 생각을 하지 않고 발바닥을 느끼면서! (제가 작년에 일만보 걷기로 살아남아서요…) 비싼 차에서 내려서 운동화 검은 거 신고 걸어요!!!

먼데이 2023-04-14 13:07   좋아요 1 | URL
8000걸음 걷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느림보예요. 출근 안 하는 날만이라도 만 보 걷기 약 2시간 투자해 볼게요!

공쟝쟝 2023-04-14 13:27   좋아요 0 | URL
잊지마요, 발바닥 느끼기! 그리고 가능하면 목뒷덜미에 햇살느끼기랑 손가락 사이로 공기 느끼기! ㅋㅋㅋㅋ (육체무용론자의 육체 느끼기 후기를 기다리며…💕)

2023-04-13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14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